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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6화 (3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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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채원우에게 물었다.

“채 헌터, 여기 이 부분 남겨둘 수 있어요?”

우리 주변에 둘러쳐진 물로 만든 담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은.”

“그러면 최대한 저 발로 다가간 다음에 일제히 덤비죠.”

“그게 계획입니까?”

“채 헌터가 아니면 애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저기까지 다가간 다음 채 헌터가 발디딤판을 만들어주면 우리가 올라가서 찌르는 거예요.”

“정확한 공략 포인트도 모르잖아요!”

“그럼 어쩌겠어요. 이 점액은 몬스터의 일부고 에스퍼의 능력은 직접 접촉 없이는 발현되지 않는데. 아무것도 안 해보고 질 순 없잖아요.”

“미치겠네.”

“저돕니다. 일단 가죠.”

오래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우리는 빠르게 걸었고 채원우는 점점 물로 만든 동그라미의 너비를 줄여나갔다. 나는 말도 없이, 옆에 선 가이드의 수통을 빼앗아 아래로 쏟았다. 고작 반 남은 양이었다. 이어 내 것도 쏟았다. 쪽팔리게 한 방울 겨우 나왔다.

“형 피를 닦느라고.”

채원우가 태연히 대답했다. 태연할 때냐 지금.

다행히도 에스퍼가 눈치껏 쏟아준 양이 꽤 되었다. 채원우는 남은 물을 합쳐서 넓게 펼쳤다.

“이 결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50초가 겨우예요.”

채원우가 내게 속삭였다. 아, 진짜 시간마저 안 돕는다. 공략팀에게까지 말하면 안 될 듯싶어 입을 다물고 끄덕였다.

그리고 드디어 발치에 다가갔다. 채원우가 순식간에 펼쳤던 물을 세 개로 쪼개 계단처럼 만들었다. 나는 가이드를 먼저 올려주고 뒤이어 계단에 올랐다. 세 개로 이루어진 발 디딤판이 번갈아 가며 앞길을 만들었다.

“붙어요!”

나는 외쳤고 앞서가던 가이드가 양손에 든 칼을 몬스터의 피부에 찍었다. 나도 그런 식으로 달라붙었다. 우짖는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지른 바오밥이 지상에 펼친 점액질의 포자를 엄청난 속도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바오밥의 다리를 타고 거꾸로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거칠거칠한 바오밥의 피부를 이용해서 옆으로 이동했다. 에스퍼의 가이드가 내 위에서, 나는 아래에서 한 손으로 칼에 매달린 채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장전이 되어 있고, 따로 안전쇠를 뺄 필요가 없는 조명탄이었다.

“하나! 둘!”

그리고 가이드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셋!”

우리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열기와 빛이 터졌다.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났다.

“윽……!”

옆구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일어났다. 당연히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잠깐 눈앞이 까맣게 죽을 정도의 격통이었으니 당연했다.

칼에서 멀어지는 손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추락사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로 추락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팔이 허리에 턱 감겼다.

“형, 죽게 안 둬요.”

이를 악문 중얼거림.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채원우였다.

채원우가 얇고 좁은 발판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이 아주 날카롭고 단면이 거친 물로 만든 칼을 쥐고 치켜 올렸다. 그 모습조차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내가 벌려둔 살점 사이로 채원우가 그것을 꽂았다.

“―――!”

묘사하기 어려운 비명 소리가 땅을 울렸다. 채원우는 몬스터의 피부에 박힌, 물로 제련한 칼을 잡아 몬스터의 피부에 발을 디뎠다가 발을 구르며 떠올랐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칼끝을 찍어 누르며 뒤로 굴렀다.

“아악! 악!”

나는 정말 절로 비명이 나와서 소릴 질렀다.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내 꼴사나운 비명은 다행히도 몬스터의 악다구니에 묻혔다. 채원우가 발로 찍어 누른 칼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박혔다.

서커스처럼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르며 몬스터에게서 떨어진 덕에 우리는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채원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 다시 온 근육에 힘을 줬다. 아직 공략이 되었다는 빛이 나오지 않았다.

채원우가 나를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벌어진 살점 사이로, 칼 모양이던 물방울이 아주 얇은 비늘이 되어 몬스터의 몸 안에서 산산이 터지는 게 보였다.

“뛰어요!”

나는 가이드에게 외쳤고, 가이드 역시 발로 몬스터의 피부를 박차며 뒤로 날아올랐다.

채원우는 펑펑 터져 나오는 몬스터의 피를 이용해 가이드와 우리의 발에 우산을 만들었다. 그것이 추락의 속도를 줄여주었다.

땅에 다다르자마자 가이드와 함께 에스퍼 쪽으로 다가갔다. 에스퍼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을 웅크리는 우리의 위로, 피로 돔이 만들어졌다. 뒤이어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바깥의 모습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안 보고 싶었기에 다행이었다.

“……내가 찌른 게 포인트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가 찍은 곳은 두 곳이었다. 여러모로 운이 돕지 않았더라면 실패할 일이었다. 주변으로 툭, 툭 살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채원우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형 거 말고 그럼 누구 걸 선택하겠어요.”

듣기 나쁜 소린 아니었다. 사실 짜릿했다.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흥분했다. 아니다. 정정한다. 상황에 어울리게 흥분했다.

아드레날린에 도파민까지 빵빵 터졌다. 고통을 죽이기 위한 호르몬과 살육의 가운데에서 터지는 인간 본성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채원우가 선사한 우월감까지.

나는 웃었다. 그 꼴이 보기 좋진 않았을 거다. 내 꼴은 엉망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채원우의 머릴 잡고 당겼다. 채원우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잡았다. 아플 텐데도 채원우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미흡한 지혈로 머리에서 다시 피가 흘러 입술까지 축축이 적셨다.

우리의 키스에선 끔찍한 맛이 났다. 터지는 흥분으로 채원우의 심장 박동과 내 박동이 금세 비슷해졌다. 쟤가 진정했다기보다 내가 채원우만큼 흥분한 게 아닐까 싶었다.

씨발, 뭐 어떠냐 싶었다. 우리는 몸을 붙였다. 서로를 결박하듯 끌어안은 몸이 뜨거웠다.

“나는 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는 취미는 없어서.”

겨우 이성을 찾고 고갤 떼며 중얼거렸다. 채원우가 고갤 들이밀며 다시 입술을 붙였다. 헐떡이면서 이런다.

“나도 형 모습, 남한테 보여주기 싫어요.”

비즈니스 파트너끼리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끝까지만 안 갔다뿐이지 그에 준하는 키스는 한 상황에서 무슨 선을 더 지키나 싶었다.

그동안 헌터를 몇 명이나 만났는데, 선을 지키기가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규칙이라곤 모르던 채원우 탓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변명하며 뻔뻔하게 굴기 전에, 나는 채원우와 혀부터 섞었다. 끔찍한 맛에 최악의 배경을 깔고 내 생애 가장 흥분한 키스를.

* * *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잠자코 숨죽여 조금 더 기다리는데 내내 침묵하고 있던 인이어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략팀, 공략팀. 응답하라. 던전의 공략이 끝났다.

천천히 새빨간 돔이 걷혔다. 그러며 드러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보였다. 공기 역시 달랐다. 습하고 꿉꿉한 열기가 아니라 서늘한 가을 공기였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무너져 앉았다. 던전존 역시 해제되어 잡몹들의 사체가 부식되는 게 보였다. 주변에 방호복을 입은 요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공략한 핵심 몬스터의 사체가 부식되기 전에 서둘러 보존 케이지에 주워 담았다.

생존자인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안도로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던 나와 달리 가이드와 에스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에스퍼 주변의 결계는 유지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가이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채원우와 공략팀을 번갈아 보았다.

“왜 해제했습니까?”

“나는 괜찮아. 그만…….”

그러나 말리는 에스퍼의 다리는 분명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신발 밑창이 녹아 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발이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했다. 나는 당황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기요!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가이드는 크게 한마디 하려다가 말고는 고갤 돌렸다. 에스퍼를 부축하며 일어나는 뒷모습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잠깐 우뚝 선 에스퍼가 뒤를 돌아봤다.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그게 다였다.

솔직히 살아 나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성명도 하고, 맥주라도 마시며 회포를 풀 사이쯤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황하여 천천히 일어났다. 채원우가 나를 부축했다. 나는 그 손을 밀어내고 물었다.

“결계를 없앴었어요?”

“그게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공격을 해요? 발판 정도론 부족했어요. 그리고 형도 봤잖아요. 조명탄으로는 살점을 벌린 게 고작이었고요.”

“저 헌터, 죽을 뻔했어.”

“던전에서 죽는 헌터는 많아요.”

“…….”

“그리고 나는 저 헌터가 아니라 형 파트너고요.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형의 생존이었어요.”

채원우는 진심이었다. 이 순간마저 거짓말이라곤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조금 오싹했다. 그가 헌터를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아냐는 비아냥 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더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채원우의 판단이 옳았다고 여기는 나였다.

채원우가 아니었다면 던전을 공략하지 못했을 테고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다.

그게 맞아. 맞는데…….

나는 순간 엄청난 어지러움을 느꼈다. 시야가 45도 대각선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는 걸.

“형!”

채원우가 외치는 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몇 겹의 목소리로 들렸다. 웅웅 울려댔다. 형, 형, 형…… 혀엉…….

‘형이라고 하면 돼요?’

앳된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그 목소리가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어디서 들었지, 하는 순간 시야도 정신도 푹 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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