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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5화 (3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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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급 던전이란 정보에 얼마나 많은 방심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에스퍼의 능력은 나이의 영향을 덜 받는 쪽이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 전투에 돌입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제 생각에는 핵심이 A급 몹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전례가 없잖아요?”

“C급 던전에서 저런 게 나온 전례도 없었죠.”

나는 엄지로 옆을 가리켰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거대한 언덕 같은 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진흙으로 빚은 산처럼 보였다.

저러다가 손을 뻗어 앞을 후려친다고 했다. 그 증거로 서쪽 부근은 집과 축사가 무너져 있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대피한 상태고 동물들 역시 이곳이 던전 발발 위험 지역으로 지정된 이후 옮겼다고 했다. 약 기운 덕에 천천히 머리가 돌아간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에스퍼가 손을 가슴께까지 들어선 말했다.

“저게 정말 핵심이라면 공략 포인트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제가 말이죠.”

“네.”

후방으로 밀려났어도 노련한 에스퍼였는지 바로 말이 통했다. 그는 고갤 끄덕였다.

“어느 정도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선 안 보이고요. 접촉까진 필요 없지만 최소 5미터의 거리까지 좁혀야 해요. 그리고 탐색을 펼치는 동안에는 저는 그대로 노출될 겁니다. 몬스터들은 약점이 간파되는 걸 인지하니까요.”

“그건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그쪽 가이드분은 전투가 가능하시겠어요?”

에스퍼가 턱을 까딱여 나를 가리켰다. 머리는 붕대로 칭칭 감아두고 상의는 옆이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데다 지진 상처가 흉측하게 노출된 모습. 게다가 거하게 피까지 토해서 얼굴도 좀비 꼴이 따로 없겠지. 나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갔다.

“무임 승차할 생각은 없습니다.”

“좋네요. 살아서 나갑시다.”

군더더기 없어서 좋았다. 통성명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살아서 나갈 거니까.

에스퍼를 가운데에 세우고 채원우와 에스퍼의 가이드가 전방에, 내가 후방에 섰다. 에스퍼의 가이드는 던전이 터지기 전에 특수 부대원이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한 명 몫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이드와 전투에는 큰 역할을 할 수 없는 에스퍼. 에스퍼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최대한 시간을 줄여보겠습니다.”

‘어린 왕자’에는 바오밥 나무가 나온다. 사막의 그 커다란 나무를 만약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 심으면 세 그루만 심어도 그의 별은 꽉 찰 거라고 한다.

나는 사막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바오밥 나무 같은 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별에 있는 나무가 딱 저 정도만 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 나무가 이렇게까지 두껍고 클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막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마주친 채원우의 표정은 덤덤했다. 착 가라앉은 마분지처럼.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니었다. 이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매번 두려웠다.

아무리 노련한 헌터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채원우만 제외하고. 저 애의 눈에는 두려움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탐색을 펼치겠습니다.”

에스퍼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만 고통 때문에 이렇게 땀을 흘리나 했는데 이제 보니 다들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곳은 덥고 습했다. 마치 한여름처럼. 그런데 대한민국은 현재 가을이다. 마치 우리만 열대 우림으로 던져진 것 같았다. 던전만의 생태계라고? 말도 안 된다.

나는 억측하지 않으려 애쓰며 칼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무뎌져서 자꾸만 떨어트릴 것 같았다. 에스퍼는 바닥에 땅을 짚고 눈을 감았다. 땀이 더 솟구치는 게 보였다.

아래로 보랏빛의 아주 엷은 안개가 펼쳐졌다. 그러곤 아마도 몬스터의 발이나 다리, 어쨌든 하체인 부분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그걸 시선으로 쫓다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저거 나만 보이는 환상 같은 거 아니죠?”

믿을 수 없는 풍경,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공포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어쩐지 잡몹이 없다 싶었어…….”

덜덜 떠는 목소리로 특수 부대원 출신 가이드가 중얼거렸다.

저 위에 있는 몬스터는 식사 중이었다. 말 그대로였다.

커다란 진흙덩어리 위에 나무껍질을 붙인 것처럼 생긴 몬스터의 중간에 구멍이 열려 있었다. 그건 입이라고 해도 됐다. 혀도 있었고 온갖 짐승에게 뽑아 온 듯한 각양각색의 이빨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으로 몬스터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자진해서 들어갔다 하더라도 역겹고, 저게 삼키는 거라 하더라도 역겹긴 마찬가지였다.

한참 빨아들이던 바오밥 몬스터―바오밥 나무처럼 생겨서 일단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백색 소음처럼 내내 소음이 있었던 거다. 웅웅 대며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바오밥 몬스터가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어적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그 때 옆에 있던 가이드가 구토를 했다. 나도 속이 메슥거렸다. 입을 틀어막으려는데 순식간에 씹어 삼킨 바오밥 몬스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색 소음이 재개되었다.

역겹지만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에너지 효율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식사 중이라면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겁니다.”

탐색의 타이밍만 잘 맞아떨어지면 우리는 아무 탈 없이 이 상황을 끝낼 수도 있다…….

“탐색이 됩니까?”

채원우가 물었다. 에스퍼는 고갤 끄덕였다. 그가 눈을 떴다. 검은자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희게 변해 있었다.

“돼요. 됩니다! 몬스터가 핵심이 맞았어요……!”

그 소리에 안도감도 들었지만 무서웠다. 만약 이게 변화의 시작이라면, 앞으로는 핵심이 기둥 형태가 아니라 움직이고, 동시에 죽여야만 클리어 가능한 던전이 또 나타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형!”

채원우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팔을 먼저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내 앞에 비늘처럼 얇은 물로 된 방어막이 펼쳐져 있었다. 딱 얼굴을 가리는 크기였다.

그 방어막에 꽂힌 벌레형 몬스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나가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하마터면 미간에 침이 꽂혀, 죽었다는 인식도 하기 전에 죽을 뻔했다. 나는 칼날을 위로 한 뒤 아래에서 대각선 위로 쳐올렸다. 몬스터는 작게 부스러졌고 그 순간 백색 소음이 멎었다.

“미치겠네…….”

“에스퍼님.”

나는 조용히 에스퍼를 불렀다.

“탐색이 끝나는데 몇 분이 더 필요합니까.”

“1분이요. 1분이면 됩니다……!”

1분 이내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먹다가 멈췄는지 바오밥의 이 사이에 몬스터의 날개가 보였다. 그것이 갑자기 고갤 홱 돌렸다. 애초에 눈이 없는 존재 같았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위치를 파악하지? 소리? 아니야……. 그랬다면 애초에 들켰어야 했어.

그 순간 나는 내가 다치기 직전을 떠올렸다. 에스퍼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뒷걸음질 쳤다.

“바닥!”

에스퍼를 그의 파트너에게 넘기며 뒤로 황급히 뛰어올랐다. 바닥으로 구물구물 점액이 퍼지기 시작했다. 뿌리처럼 꿈틀대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주 얇아서 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채원우가 내 어깰 잡았다.

“이쪽으로 최대한 붙어요!”

공략팀이 우리 쪽으로 바싹 붙었다. 채원우가 이로 수통 뚜껑을 뽑고 바닥으로 뿌렸다. 그러고는 우리의 주변에 동그랗게 담을 쌓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물로 만들어진 담 주변으로 포자가 밀려났다.

우리를 지나간 점액질의 포자는 저 뒤로 더 빠르게 퍼졌다. 그 집요한 탐색에 소름이 끼쳤다.

“탐색이 덜 끝났는데…….”

망연한 목소리로 에스퍼가 중얼거렸다.

“어디쯤이었어요?”

“저기요.”

에스퍼가 지니고 있던 레이저로 앞을 쏘았다. 범위가 꽤 큰 타원형이 그려졌다.

“저 중 한 부분입니다.”

나는 몬스터들을 먹던 입과 땅에 붙은 발 사이에 핵심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공략 포인트는 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지탱부의 뒤편에 있었다. 아킬레스 건…… 하고 중얼거렸다.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공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바람? 불? 에너지 계열?”

“표창이었어요.”

채원우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제 알겠네요. 표창이 아니라 삼킨 몬스터들의 날개였어요.”

“역겨운 몬스터네.”

먹고 뱉는다. 고양이의 헤어볼 같은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그거에 죽었으면 진짜 기분 더러웠겠다.”

나는 낮게 웃었다. 공략팀이 지금 웃음이 나오냐는 눈으로 흘겨봤다. 아니, 그럼 지금 울 수는 없잖아. 그 때 채원우가 함께 웃기 시작했다.

“그러네요. 그거에 죽었으면 형 몬스터 토에 죽은 거네요.”

아씨.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래서 우리가 팀이 되었나 싶었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약 기운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약은 이미 다 썼다. 맥시멈으로 쓴 만큼 돌아오는 역효과도 클 거다. 최대한 빨리 이 거지 같은 던전을 나가고 싶었다.

“에스퍼님 어떠세요?”

“버틸 수 있습니다.”

분명히 호흡도 거칠고 안색도 안 좋지만 에스퍼 역시 채원우와 나, 둘로는 안 될 걸 아는 모습이었다. 에스퍼의 가이드는 조용히 손목시계를 껐다.

“최대한 빨리 공략하고 나가죠. 어때요?”

혹은 최대한 빨리 죽는 길이 되겠지만.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몬스터의 되새김질 부스러기에 죽는 건 사절이었다. 우리는 고갤 끄덕였다.

앞으로 퍼져나가던 포자의 물결이 역행하는 게 보였다. 던전의 끝까지 탐색하고 돌아오는 게 분명했다. 시간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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