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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4화 (3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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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헌터청에 순순하던 채원우와 은근히 말 안 듣던 내가 바뀐 것만 같았다.

“짜증 그만 내고 어제 본 영화 후기나 말해 봐요. 듣질 못했네요. 나 그거 좋아하는 영화였는데 채 헌터가 처음 보는 영화라고 해서 신경 쓰느라 콧구멍으로 본 기분이거든.”

“처음 보는 영화 맞아요.”

“전 시리즈도 안 본 것 같던데.”

“그 영화가 처음 본 영화니까요.”

우리는 통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복도에 서 있었다. 나는 채원우의 말에 당황해 돌아봤다. 채원우의 길고 예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에 햇빛이 걸렸다.

“형을 만나고 난 뒤로 처음 하는 게 많아졌어요.”

채원우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바보같이 멍 때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깊어진 눈빛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라고 삶의 경험이 다양한 건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건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은 해봤을 만한, 아주 평범한 것들밖엔 되지 않았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기를 했나 크루즈를 타기를 했나. 주말에 영화를 한 편 봤을 뿐이다.

“영화도 처음 보고 그 맥모닝? 그것도 처음 먹어봤어요.”

“…….”

“그래서 말하기 싫었어요. 몬스터를 백이고 천이고 죽이는 건 일상이고 테스트받는 것도 일상이고 부작용도 뭐, 이미 적응이 됐는데 그런 건 말하기 싫어요. 이걸 나누기, 아니다, 공유하기 싫다고 하죠? 내가 지금 그래요.”

나는 비범하게 예쁘게 잘생긴 남자가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반응이 고작 이랬다. 나는 바보같이 굴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매일이 이랬으면 좋겠어요. 나,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아니, 처음부터 형을 좋아한 걸까요?”

“……나야 모르죠. 처음부터 반할 수도 있는 거고.”

겨우겨우 농담을 덧붙일 수 있었다.

“내가 워낙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겨우 덧붙인 농담은 질도 낮고 재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채원우는 활짝 웃었다.

“그럴 수도 있죠. 몰랐는데 형은 내 취향인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그저 외모만을 뜻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채원우는 지금 나로 인해 자신을 구축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채원우 안에 문을 만들기 시작한 건 나고, 채원우는 그 문을 여는 대신 그저 내가 가르쳐 준 방식을 좋아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숨이 막혔다. 맹목적이라 부담스러워 숨이 막히고 또, 남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이 공존했다.

“씨발.”

갑작스러운 욕설에 채원우의 눈빛에 당황함이 서리는 게 보였다.

“나는 변태인가 봅니다, 채 헌터.”

다른 사람도 나를 이렇게 좋아하면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까? 아닐 것 같다. 나는 네가 나한테 그래서 좋았다. 네가 아마도 가장 강할 헌터라서? 예쁘고 잘생겨서? 속궁합이 맞아서? 아, 모르겠고. 일단 좋아.

채원우는 고갤 갸웃하더니 곧 끄덕였다.

“알아요. 형, 저한테 야한 말 듣는 게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뭐야. 다 기억하네요.”

“다 기억할 건데요. 까먹은 건 떠올릴 거고.”

“그래요.”

파트너가 바뀌더라도 기억해 달란 말은 삼켰다. 무책임하고 내 기분도 씁쓸하니까.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시간이 제발 빨리 지나가길,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내가 목표했던 미래에 있기를 바라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채원우의 말이 조금은 공감이 되었다.

매일이 오늘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말.

2

……무슨 상황이지?

“……형. 형!”

물속에서 갑자기 끌어 올려진 것 같았다. 귀에 가득 찼던 물이 천천히 빠지듯이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려고 했다. 뜬 걸지도 모르겠다. 힘을 주고 있지만 바늘 구멍이 난 풍선처럼 자꾸만 힘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여튼 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외부 자극은 귀로만 들어왔다. 눈은 애초에 내게 없는 것처럼.

불안감이 치솟았다. 저 멀리서 삐, 삐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 소리들이 훅 다가왔다. 귀로 들어오는 자극조차 반응이 늦었다.

망가진 건가? 나는 여기서 끝나는 건가?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옆구리는 불로 지진 듯이 아팠다. 그런데 그것조차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내 몸에서 일어난 게 아닌 듯이. 아픈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 그런 것 같다.

저 거슬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겨우 떠올렸다. 경보음이었다. 바이털이 떨어질 때 나는 소리였다. 아마도 이번 건 내 바이털 문제겠지. 그러면 채원우가 근처에 있는 거다.

나는 입을 열었다. 채원우를 부르려는 순간 속에서 피로 추측되는 게 울컥 쏟아져 나왔다.

“움직이지 마요.”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채원우의 목소리였다. 얘의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차라리 우는 소리라면 나았을 거다. 울지도 못하고 황망하게, 그런 와중에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듯한 떨리는 소리였다. 이런 소리도 낼 수 있는 애였구나.

나는 혀로 핏덩이를 밀어내고 겨우 중얼거렸다. 우물거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쉭쉭대는 소리가 났다. 채원우가 더러울 게 분명한 내 입가에 귀를 갖다 댔는지 용케도 알아들었다.

“눈은 멀쩡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그래요.”

다행이다. 나는 고작 그게 다행이라서 웃었다. 채원우가 보기에 그게 웃는 상이었을지는, 글쎄. 모르겠다. 사실 지금 나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조차.

“지금 머리에서 출혈이 많아요. 그보다 문제는 옆구리입니다. 옆구리를 덩굴 괴물에게 뜯겼어요. 부위가 크지 않지만 깊어서 일단 지져 뒀어요. 지지기 전에 형은 의식을 잃었고요.”

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지는 건 진짜 개같이 아팠을 게 분명했다. 급속 치료 저리 가라겠지.

“기억나요?”

고갤 저었다. 1mm쯤.

“C급 던전이라고 해서 전투팀으로 우리가 투입되었고, 공략팀 하나 들어왔어요. 그런데 돌발 상태로 A급 몹이 나왔고요. 사이즈는 대형, 속도는 느림, 공격력은 높으나 빠르지 못하여 쿨타임이 상당히 긴 것으로 추측. 급소는 아직 파악하지 못함. 돌발 출현하자마자 우리를 공격했고, 가까스로 피했으나 공략팀과 찢어지고, 형은 피하는 도중 기생형 덩굴 몹에게 잡혀 지금과 같은 부상을 입은 상황이에요.”

채원우는 이런 상황에서는 분명히 달랐다. 내 상태를 바로 파악하고 대처한 뒤 브리핑까지 해줬다. 오히려 지금까지 만난 그 어느 헌터보다 숙련되어 있었다. 얼간이 같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농담이라면 정말로 질 나쁜 농담인데도, 차라리 농담이길 바라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형이 죽는 줄 알았어요.”

“살았잖아요. 살아서 나가기만 하면 헌터청이 살릴 겁니다.”

아까운 재산 아니겠어. 심지어 나는 채원우를 가이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현 상태론.

나는 채원우를 위해서라도 살아서 나가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진 90퍼센트의 이유가 내가 살고 싶어서지만, 휴약기도 없이 약을 복용했다는 채원우도 걱정이 됐다. 나는 온 힘을 다 끌어모아 채원우의 손을 잡았다. 채원우가 고갤 기울였다.

“핵심은 찾았어요?”

헐떡이는 내 물음에 채원우가 고갤 저었다. C급 던전은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일단 규모가 작다. 5분에서 10분만 돌아보아도 찾을 수 있는 게 핵심이었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A급 몹을 공략해 봐요.”

지금까지 움직이는 핵심이 존재했었나? 내가 알기론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던전 연구가 시작된 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던전은 아직도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변칙성, 불가해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란 뜻이었다.

다행히도 채원우는 바로 고갤 끄덕였다.

“나 좀 일으켜주고.”

채원우가 내 허릴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채원우에게 내 유틸리티 벨트를 열게 했다.

잠깐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해줄 업 계열 약과 고통을 죽여줄 다운 계열 약을 동시에 쓰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나쁜 건 없었다.

“나 입원하면 비싼 거 사 들고 와야 합니다.”

“매일 갈게요.”

채원우가 초조하게 주사기 뚜껑을 열며 대꾸했다. 난 매일은 됐다고 말하려다가 채원우가 오지 않을 병실 생활이 얼마나 지루할지를 떠올렸다. 매일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참아요.”

“그거 말고 할 게 있어요?”

“형은 이 순간에도 한마디도 안 지네요.”

어. 난 물에 빠져서도 주둥이가 둥둥 떴으면 좋겠어. 던전이 소멸되면 안에 있던 사체도 모두 사라진다. 나는 어떻게든 이 세상에 내 흔적이 남았으면 했다. 남한테 위탁하는 유서의 형태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고 싶었다.

주삿바늘이 허벅지로 꽂혔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눈앞이 찬란했다.

“공략팀. 전투팀입니다.”

절뚝거리면서 공략팀을 불렀다. 핵심과 공명하여 던전을 공략하는 것 외에는 전투 효율이 무척 떨어지는 공략 쪽 역시 우리를 찾고 있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 던전은 이상한 게 분명했다. 통하지 말아야 할 GPS는 운용되었고, 헌터 및 가이드의 신체 능력 버프는 전혀 돌지 않았다. 던전의 유일한 메리트라고 할 수 있는 게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채원우가 평소보다 더 무리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최악의 소식은 언제나 친구를 데려오는 법이다.

“다친 곳 있습니까?”

채원우가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공략 쪽의 에스퍼가 다리를 내밀었다. 세로로 찢긴 상처가 흉측했지만, 보기보다 심한 상처는 아닌 듯싶었다.

“기회가 많진 않을 겁니다.”

에스퍼는 나이가 조금 지긋한 인상이었다. 적어도 서른 후반에서 마흔 초중반은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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