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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3화 (3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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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 헌터랑 이렇게 안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 같네요.”

    “……그랬더라면 우린 못 만났을 거예요.”

    “채 헌터, 내가 좋아요?”

    “네.”

    “그러면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좋아하지 마세요.”

    왜냐면 넌 처음 만난 파트너란 사실 하나로 나를 향한 감정을 착각하는 걸 수도 있거든. 첫 파트너와 치정 싸움이 발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파트너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채원우를 밀치고 일어나는데 욱한 덩치 큰 어린애가 말꼬리를 잡았다. 진짜로 완전 깨벗고 있어서 0.1초 당황하느라 대답을 안 했더니 더 반박한다.

    “처음부터 좋았던 것도 아니고요. 그냥 파트너 오래 하고 싶으면 잘해주라고 했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나는 잠깐 우뚝 서서 가슴을 눌렀다. 저 말이 약간 충격이었다. 그러나 곧 그럴 수 있지 하고는 가운을 찾으러 욕실로 떠났다. 잠깐 말을 멈췄던 채원우는 가운을 여미는 날 향해 항변했다.

    “근데 점점 좋아진 거면, 그냥 형이 좋은 거 아니에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요?”

    “그것도 또 그러네.”

    아이를 낳을 일도 없고 낳을 생각도 없고 경험도 없지만, 이래서 부모님들이 서른 살은 차이 나는 어린 애기들을 대하면서 당혹감을 느끼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도 이 순간 나를 구해줄 존재가 있었다. 채원우의 핸드폰이 울린 거다.

    “배달 왔나 봅니다. 첫인상과 달리 요즘 부쩍 귀엽게 느껴지는 채원우 헌터. 다녀오세요.”

    “아씨!”

    채원우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가 떨릴 만큼 씩씩댔다. 소올직히 이 순간, 비치된 물병이 터질까 봐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괜한 기우였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죠! 할 말 없게 만들라고!”

    귀가 빨개진 채원우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올라가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 원래 웃는 상인 사람은 조금만 웃어도 남의 눈엔 활짝 만개한 미소나 마찬가지다.

    나는 옆으로 비키며 팔로 나갈 길을 까딱였다. 채원우가 식식대며 나갔고 나는 뒤늦게 폭소하다가 외쳤다.

    “아, 미친! 쟤 가운밖에 안 입었는데!”

    “혼났어요.”

    돌아온 채원우가 털어놨다.

    “다시 돌아가라고 방으로 갖다준다고 하던데요. 형, 알았죠.”

    “까먹었었슴다. 죄송.”

    “형, 그럴 때마다 진짜 재수 없고 귀여운 거 알아요?”

    “귀엽다고요…….”

    한 20년 만에 듣는 말이었다. 잘생겼단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요건 또 신선하네.

    곧이어 벨이 울렸다. 채원우가 내쫓기는 바람에 고생하게 생기신 직원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나오며 외쳤다.

    “귀여운 제가 받아 오겠습니다!”

    현관 쪽에 있는 거울을 통해 채원우의 표정이 보였다. 뭐, 내가 당황할 줄 알았나 보다. 나는 문을 열고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금 세탁 서비스로 옷을 맡겨서 꼴이 이러네요.”

    “괜찮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그래도 많진 않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맥모닝을 받았다. 직원이 둘 다 알몸인 남자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지금 배가 고프고 빨리 먹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형은 저한테만 다르게 구는 거 같아요.”

    “뭐가요?”

    나는 들어가며 감자튀김을 꺼내 먹었다. 진짜 맛있었다. 자리에 펼치는 동안 채원우는 아직도 섭섭한 게 있는지 구시렁댔다.

    “저한테만 그렇게 안 웃어주잖아요. 보면 다른 사람들한텐 다 그렇게 웃어주면서.”

    살짝 식긴 했어도 시럽을 뿌리면 맛있을 게 분명한 핫케이크와 머핀이 줄줄이 나왔다. 이걸 먹고도 또 뭘 먹으러 가야 할 거다. 체력 소모가 어지간했어야 말이지.

    나는 채원우 쪽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뒀다. 채원우도 자연스럽게 테이프를 제거하고 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제법 합이 잘 맞았다.

    “남들하고 똑같이 대하는 거보다 채원우 헌터한테만 다르게 구는 게 낫지 않아요?”

    채원우에게 머핀을 내밀며 말했다. 채원우는 내 궤변에 곰곰이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잠시 후 고갤 끄덕였다.

    “형한테는 한마디도 못 이기겠어요.”

    “말로 못 이기니까 대신 내가 깔려줬잖아요. 그래도 억울합니까?”

    “……형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울 것 같아요.”

    “그래요. 우세요.”

    배고파서 사실 채원우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반으로 자른 핫케이크를 입에 쏙 넣으며 재촉했다.

    “얼른 먹어요. 옷 오면 밥도 먹으러 갈 거니까.”

    “맞아요. 솔직히 누구 코에 붙이나 했어요.”

    빨리 먹는 게 습관이 된 나는 우물거리며 채원우를 물끄러미 봤다.

    “연애한 적 정말로 없어요?”

    “네.”

    “너무 아깝네.”

    채원우는 케첩을 뿌리며 코웃음 쳤다.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솔직히 내가 코웃음 치는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애 앞에서는 말도 조심하라는 게 맞는 모양이다.

    “저 기억 조금 날 것 같아요. 형보고 내가 처음이냐고 물었었잖아요.”

    “아, 그 빵점짜리 질문?”

    나는 종이 포장을 구겨 던지며 웃었다. 정확하게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이러려고 훈련받은 건 아닌데 은근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단 말이지.

    “네. 근데 저 형 과거에 신경 안 쓰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솔직히 알면서도 말한 게 맞았다. 역시나 채원우는 내가 덧붙인 말에 뾰족 눈을 하고 노려봤다.

    “하지만 앞으론 신경 쓸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마요.”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건 채원우 헌터가 처음이에요. 같이 영화도 봤잖아요.”

    “거짓말.”

    그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 묘한 긴장감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채원우의 눈은 정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게 있어요.’

    나는 아이스커피에 꽂힌 빨대를 휘휘 저었다. 나야말로 진부한 질문을 하기 직전이었다. 우리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있었냐고.

    하지만 그 순간 적절한 타이밍으로 벨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옷이 돌아온 거다.

    채원우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손에 있던 커피를 빼앗아 마셨다. 마시는 동안에도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떼더니 차가운 물이 묻은 손으로 내 무릎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곤 선전 포고를 하듯이 읊조렸다.

    “기다려요. 곧 돌아올 테니까.”

    그 순간 잠깐이지만 채원우의 목소리가 쉬었었다. 허스키해진 목소리와 저 말 내용이, 아무런 문제 없이 평범한 저 말에 나는 왠지 기시감을 느꼈다.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있는 사이 채원우는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 손에 옷을 몰아 걸어둔 채원우가 나를 부를 때까지, 나는 그 기시감의 의미를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나는 조금 멍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 없기야 했지.

    “그냥 멍 좀 때렸어요.”

    그런데 이 찝찝함은 뭐지?

    * * *

    헌터청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랩실이었다. 채원우의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사후 처리까지 덤덤히 고했다.

    나쁘지 않았다 못해 생각 외로 좋았던 경험은 보고 차원에서 정리해 내뱉는 순간 즐거운 경험에서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됐다. 양백겸과 채원우의 관계가, 가이드와 헌터의 의무적인 가이딩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던 연구원은 심상한 말투로 소감을 말했다.

    “원우 첫 경험 했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다리를 떨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증과 익숙해져야 하는데 익숙해지지 않는 불쾌감에 어쩔 수 없었다. 채원우야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네’ 하겠지.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원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뚱한 목소리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TPO에 안 맞는 말을 꺼낼 땐 있어도, 말하고 싶지 않단 대답을 한 적은 없던 터라 연구원도 나도 조금 당황했다.

    “다 잘 끝났어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어어. 안정화 수치도 나쁘지 않아.”

    드물게 연구원은 어색한 어투로 말했다. 널뛰기하듯 제멋대로였던 지난 그래프와 비교하면 확실히 달랐다. 완벽하진 않지만 완만해진 곡선을 보다가 채원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가봐도 돼요?”

    연구원이 나를 향해 SOS의 눈빛을 보냈다. 파트너가 된 이후부터는 서로 사이와 유대감이 돈독해진다고들 하지만―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나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신 나는 나한테 유리하게 굴었다. 채원우를 달래는 척 슬쩍 빠져나오기.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어차피 근처 살잖아요.”

    생글생글 웃고 있자니 채원우가 흘끗 쳐다봤다. 못마땅한 눈빛이다. 나는 입 모양으로 특별대우, 라고 읊조리며 채원우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좋아하기 싫은데 좋은지 입꼬리가 씰룩댔다. 웃기구 귀여운 놈.

    “왜 안 하던 시비를 겁니까?”

    뒤에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후 채원우에게 따져 물었다. 너야 헌터청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허니베어젤리슈가코튼캔디베이비겠지만 난 아니란 뜻이었다. 채원우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제 첫 경험을 어디 가서 웃음소리로 떠들고 싶지 않아요.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

    “음.”

    난 조금 웃겼는데. 채원우의 ‘형, 내가 처음이에요?’ 질문은 아마 환갑 때까지도 실소 정도는 머금게 해줄 거다.

    “형은 저런 거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요. 프라이버시라고 따져요? 내가 한 말 기억 안 납니까? 아, 안 난다고 했지. 헌터와 가이드 사이에는 강간이란 게 없듯이 프라이버시도 없어요. 우린 국가의 재산 아닙니까. 재산 중에서도 동산 말고 부동산.”

    움직이긴 하는데 부동산처럼 취급된단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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