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형. 이제 저 열 안 나죠?”
채원우의 볼에 손등을 갖다 댔다. 열은 분명 내려갔다. 하지만 흥분 때문인지 눈가가 발긋했다. 진짜로 야했다. 그러고 보면 채원우는 빨강이 잘 어울렸다. 그게 혈색이든 피든, 싸구려 아이스크림 색소든 혓바닥이든.
“그래요. 갑시다.”
나는 희미하게 웃고는 채원우의 손을 잡고 기숙사 문을 나섰다. 채원우의 손은 내 손보다 조금 뜨거웠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평범한 기숙사 건물이 던전 안처럼 느껴졌다. 아주 가끔 혼자 물었던 것처럼, 혹시 우리는 환상계 던전 안에서 사는 게 아닐까? 이미 세상은 모두 던전의 몫이 되었고 우리는 사실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무슨 생각 해요?”
“캐러멜 팝콘 먹을지 고소한 팝콘 먹을지 생각 중이에요. 뭐 먹을래요?”
“둘 다 먹어요. 저 돈 많아요.”
“아싸.”
작게 환호성을 뱉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각자 신원 인증을 거치니 비로소 움직였다. 채원우가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 손을 말아 쥐고 어깨에 고갤 기댔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요.”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채원우가 눈을 감는 게 엘리베이터 문에 보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채원우를 떨쳐 내지도 않았다.
* * *
우리는 결국 달콤한 맛과 고소한 맛 팝콘 둘 다 샀다. 따로 의식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채원우의 손은 커서 통과 콜라를 넉넉하게 들었다. 나는 채원우가 내 팝콘과 콜라까지 들고 있는 걸 보면서 통화를 이었다.
“오전 중 불안정 상태를 보이긴 했지만 간단한 가이딩으로도 바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손목을 확인하다가 오늘은 외출이라 시계를 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외출 중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상황 발생 시 매뉴얼대로 대처할게요.”
반복되는 내용에 지겨움을 느꼈다. 다른 문장으로 물어봤자 결국 채원우가 불안정한 게 아니냐는 내용에 불과했다. 나는 서둘러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하고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사건이 커지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끊겠습니다.”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끊고 나니 귀가 간지러울 정도였다. 까맣게 죽은 액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후, 지겨워.”
1, 2분 사이에 끝난 통화도 아닌데 채원우는 ‘기다려’ 명령을 들은 개처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군인에 가까우니 군견쯤 되겠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이에도 채원우를 흘끔흘끔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하긴, 쟤가 조금 얼빠지긴 해도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지.
“채원우 씨.”
헌터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나는 사회에 나온 뒤로 채원우 씨, 라고 불렀다. 채원우는 그게 어색하면서도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볼멘소리로 원우라고 불러주면 안 되냐고 했으니까. 나는 물론 코웃음 쳤다.
“통화 끝났어요?”
나는 대답 대신 끄덕이며 내 몫의 간식거리를 챙겼다. 손이 생기자마자 채원우는 팝콘을 야금야금 먹었다. 은근히 양도 많고 잘 먹는다. 성장기는 성장기인 모양이다.
“저 위쪽에선 채원우 씨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대하네요.”
달콤한 팝콘을 씹으며 말했다.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이라 그런지 채원우도 무심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글쎄요. 저를 물가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싶은데요.”
“네?”
“티켓 보여주세요!”
내 물음은 우렁찬 목소리에 묻혔다. 채원우는 활짝 웃더니 미리 뽑은 티켓을 꺼냈다. 그러곤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저 이런 거 처음 해봐요.”
내가 연속으로 당황하기도 전에 채원우는 이미 앞으로 훌쩍 나간 뒤였다. 채원우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감사합니당’ 하고는 안쪽에서 날 향해 고갤 까딱였다.
“형. 얼른 와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티켓을 내밀었다.
* * *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채원우를 신경 썼다. 티켓을 내미는 게 처음이겠지 설마 영화를 처음 본 거겠냐 싶은데도 그랬다. 채원우는 연신 웃고 소리 없는 감탄을 하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중간중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치대는 건 잊지 않은 채로.
“재밌었다! 그런데 왜 맨 마지막에 무덤으로 가요?”
채원우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엔딩 크레딧까지 모조리 올라간 걸 알았다. 분명 눈으로 보긴 했는데 머릿속엔 그다지 남지 않았다.
“그건 전 편을 봐야 알아요…….”
“어디 안 좋아요? 표정이 구려요.”
“팝콘이 구려서요.”
나는 죄 없는 팝콘에 책임을 전가했다. 미안하다, 팝콘아. 하지만 정말로 거의 손을 안 대서 채원우는 얼핏 믿는 모양이었다.
“저 손 좀 씻고 올게요.”
야무지게 제 몫의 주전부리를 다 비운 채원우가 화장실로 향했다.
느긋하게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추억을 좀 섞은 후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다수가 재미있었다거나 저 영화가 개봉했을 때를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들린 단어가 내 귀에 걸렸다.
“저게 진짜였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던전 문제도 훨씬 나아졌을걸? 헌터들은 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나는 처음에 헌터가 저런 영웅인 줄 알았잖아.”
말투는 밝은데 내용은 악의가 담긴 비아냥이었다. 나는 고갤 조금 숙이고 손끝만 내려다봤다. 저런 말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아마추어나 신입이나 할 에너지 낭비였다.
“헌터들이야 뭐, 부수는 거 말고 하는 게 있나. 며칠 전에는 차 몇 대를 날려먹었다더라? 던전 부식이면 쏙 빼주는 업체가 있다잖아. 근데 헌터들이 다 부숴놓는 바람에 그냥 날려먹었대.”
아는 척 떠들고 있지만 그런 업체는 없다. 던전 부식물이 묻은 경우에는 모두 수거해 간다. 묻지 않아도 모두 폐기한다.
그리고 어지간한 진상이 아니고서는 컴플레인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보상을 해준다.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던전에서 획득하는 자원이 월등히 많고 덕분에 돈을 아주아주 많이 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자원은 헌터들이 목숨 걸고 던전을 공략해 가며 얻어 오는 것들이다.
모를 수 있고 모르는 게 당연했다. 다만 나는 괜찮은데 채원우가 듣진 않았으면 좋겠다.
채원우에게는 온실 속 화초 같은 느낌이 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헌터청이 아닌 바깥사람들과 교류도 거의 없고, 그들 사이에서의 헌터에 대한 인식도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마치 헌터청에서 태어나 헌터청에서만 자란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채원우가 최대한 늦게 나오길 바랐다.
“저 왔어요.”
그럼 그렇지. 어디 제 소원이 이루어진 적이 있나요.
나는 뒤에서 나를 푹 껴안는 채원우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팔짱을 풀고 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여튼 저런 영웅들은 안 나오고 별 뻘짓만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헌터랍시고 다니니 원.”
하필 저 주둥아리만 산 놈은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던 중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 뒤에 매달린 채원우를 흘끗 봤다. 채원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
“점심 뭐 먹을래요? 면? 밥?”
“단백질이요.”
나는 대충 대답하고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채원우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질질 끌려오며 내 볼에 제 볼을 갖다 대고 잉잉댔다.
“디저트도 먹고 싶어요.”
“알았어요. 가자고요.”
그런 뒤로 내내 듣기 싫었던 그 목소리가 우리를 향해 말한 게 분명한 소릴 지껄였다.
“뭐야. 호모야?”
낄낄대는 그놈을 말리는 건지, 지금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일행이 씨알도 안 먹힐 만류를 하는 게 들렸다. 그것보다 나는 채원우의 손목에서 들리는 ‘심호흡하세요’ 하는 소리가 더 신경 쓰였다.
“야, 야.”
둘이 쑥덕댄다. 아마도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말일 거다. 헌터의 이미지가 더 안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가이드와 육체적 접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허언터? 야, 그럼 더 괜찮아. 헌터들 민간인한테 힘 못 쓰잖아.”
아, 씨발. 맞다. 나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채원우는 조용했다. 내 온 신경은 등짝에 매달린 문짝만 한 애한테 쏠려 있었다.
“근데 너 그 얘기 들었어? 인터넷에서 본 건데 헌터청에서 던전 브레이크 초기에 어디서 애들 데려다가 실험했…….”
여기서 로맨틱 꼴값염병하게 귀를 가려주며 저런 소리 듣지 마, 할 수도 없고.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법이니 나는 방향을 틀었다.
“별 염병하는 도시 괴담 떠들고 자빠졌네.”
한적한 구석으로 빠지자마자 사납게 씹어 뱉었다. 그 때였다. 채원우의 무게가 어깨로 무겁게 쏠렸다. 장난으로 기댄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당황해서 고갤 돌아봤다. 눈썹을 찌푸린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채원우의 얼굴이 보였다.
“채, 채원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채원우의 시계에서 ‘심호흡하세요’ 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터졌다.
나는 당장 옆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평일이고 영화가 끝난 텀이 지나 한적했다. 벽에 채원우를 세우고 맨 끝 칸에서 온갖 비품을 꺼내서 문을 막았다. 그리고 바로 미끄러질 것만 같은 채원우의 볼을 감쌌다.
“채 헌터. 정신 들어요? 나 보여요?”
채원우는 고갤 젓다가 끄덕이길 반복했다. 여기서 완전히 블랙아웃되면 둘 중 하나다. 방전된 것처럼 쓰러지거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능력이 터질 거다.
나는 당장에 채원우를 끌어안고 채원우의 손가락을 가져와 물었다. 혀로 감싸며 초조하게 채원우를 바라봤다. 중간중간 손가락을 깨무니 채원우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나지막이 묻는 말에 채원우는 고갤 끄덕였다. 그러나 얼핏 보아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가이딩은 대충 봐도 효과가 미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