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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0화 (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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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은 협동 전투 전략을 짜는 재능은 분명 탁월한데 설명에는 젬병인 모양이었다. 하긴. 전략 설명을 할 때조차 그림이 없으면 우리는 그의 전략을 70퍼센트나 겨우 이해했을 거다.

교관이 곧 멀어지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서 교관의 난해한 설명을 이해할 틈이 없었다. 고개를 뿌득뿌득 꺾으며 찌뿌둥함을 날리는데 시야에 채원우가 걸쳤다.

“……질투하네.”

뭐 굳이 눈치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이 제법 귀여웠다.

조금 전에 자신이 먼저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돌아와서 무어라고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법적으로 형은 제 거고 어쩌고 하는 말이 없으니 조금 허전하긴 했다.

“저렇게 삐진 상태로 오래 있으면 번거로운데.”

아무래도 풀어주는 게 좋겠지……?

* * *

“영화 좋아합니까?”

막 샤워실에서 나온 채원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잠깐, 내려다봐? 나는 당황해서 채원우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뒤에 몸을 붙여 섰다.

“뭐 하는 거예요?”

“잠깐만.”

대충 뒤통수의 가장 동그란 부분이 맞닿지 않는 것만으로도 미세하지만 채원우가 더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가 컸는데요?”

“그래요?”

본인 일인데 정작 본인이 관심이 없는 티가 났다. 나는 채원우가 아직도 성장기라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믿기지 않아서 헛웃음만 뱉었다. 그런 나에게 수건을 꽈배기처럼 꼬던 채원우가 답했다.

“좋아해요.”

“어?”

“영화. 좋아하냐면서요.”

“맞다. 내가 그거 물어봤죠…….”

키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터라 채원우의 말이 갑작스러운 고백처럼 들렸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착각이었다. 머쓱해진 나는 손을 넓게 펴 볼을 문질렀다. 아, 하필 이런 착각을 해서 말하기가 영 민망해졌다.

“할 말 없으면 가볼게요.”

“아. 왜 이래요. 삐졌어요?”

“형이 교관님하고 붙어 있어서 삐졌냐고요? 아닌데요?”

“…….”

그런 말까진 한 적 없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얘는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냐. 내가 타입인가? 아니면 같이 지낼수록 정이 붙었나? 같이 지낼수록 좋아하게 된 거라고 보기엔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을뿐더러, 얘는 날 처음 봤을 때부터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내달렸었다.

“일단…… 그 영화 말인데요.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좋아한다면 이번에 외출 때 같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려 했어요.”

“……교관이랑도 가는 거예요?”

“미쳤어요?!”

교관과 채원우 사이에 앉아서 영화를 본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충분히 끔찍했다. 나는 강조했다.

“우리 둘만 가는 겁니다. 둘만요!”

솔직히 채원우의 입꼬리만 봐도 이 수작이 먹혀들었단 건 알 수 있었다. 웃는 상이라서 무표정일 때도 미세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방금 전까진 내려가 일자로 있었는데, 드디어 다시 미세하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한 입술을 엄지로 훔쳐 줬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 그럼 같이 외출합시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겉으로는 덤덤한 척 약속을 잡았다. 채원우는 고갤 끄덕였다. 나는 어색한 걸음으로 채원우를 비켜 지나갔다.

“그럼 먼저 갑니다.”

채원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말간 눈빛을 보다가 깨달았다. 맞다. 우리 같이 살지. 미리 화를 풀어주길 진짜로 잘했다. 나는 채원우에게 고갤 까딱였다.

“가요. 주스로만 배를 채웠더니 배고파요. 우리 가서 뭐라도 먹죠.”

“이번엔 제가 해볼게요. 요리 배웠어요.”

“진짜요? 뭐 할 줄 아는데요?”

“김치볶음밥. 해보겠습니다.”

과하게 비장한 게 불안하다.

“할 줄 안다는 게 아니라 해본다는 게 조금 걸리기는 한데……. 일단 좋아요.”

방에 들어가기 전에 화해 아닌 화해를 한 채원우는 다시 평소처럼 조잘조잘 떠들었다.

나는 채원우가 협동 전투 훈련에 처음 참가하는 거란 말을 듣고 기겁했다가 곧 침착해졌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채원우는 지금껏 파트너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뒤이어 얘랑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 충격을 받았던 그 전투 방식도 뒤늦게 이해가 됐다. 몰랐으니까, 배운 적이 없고 해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했던 거다.

문득 미안해졌다. 채원우는 생각보다 많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공백으로 오해를 샀을 뿐이란 것에. 채원우가 맞추던 큐브와 달리, 채원우라는 퍼즐은 색을 짐작도 못 하게 그저 비어 있는 칸으로만 이루어진 큐브였던 거다.

어쩌면, 채원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 * *

내 우려와 달리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는 무참히 뭉개졌다. 안타깝게도 채원우의 요리 실력은 참담했다. 하마터면 외출 날을 배탈로 통째로 날릴 뻔했다.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얼마나 맵고 짜게 했는지 속이 다 쓰렸다.

다행히 우리는 내장마저도 평범한 사람들보다 튼튼한 모양인지 저녁에 잠깐 고생하고 이후로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겨질 정도로 시간이 조금 지났다. 나는 외출을 앞두고 옷을 고르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맨투맨 세 벌과 후드티 하나가 있었다. 바지는 검은색 청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옷이랄 게 없었다. 탈탈 털어서 봄과 가을을 보내는 얘네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었다. 헌터청과 일하지 않을 때는 자다가도 경보가 울려 대피해야 하고, 대피하고 돌아오면 집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터라 비싼 걸 사두는 의미가 없었다.

던전이 안 터진다 하더라도 내게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금방금방 이사를 다녀야 했다. 가벼운 게 최고였다.

“그러면 색이라도 다양하게 사지 그랬냐.”

나는 과거의 나에게 중얼거렸다.

회색, 검은색, 검은색에 가까운 네이비색과 회색과 흰색 사이의 알쏭달쏭한 색의 맨투맨과 후드티. 알쏭달쏭한 색은 심지어 빨래를 잘못 돌린 게 분명했다.

나는 결국 흰 반팔 티셔츠를 걸친 몸 위로 네이비색 맨투맨을 뒤집어썼다.

“애초에 이게 뭐라고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웃기지.”

지갑과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서니 시계를 차는 중이던 채원우가 보였다. 포즈를 보아서는 클래식한 시계일 것 같은데 평범한 스마트 시계였다. 임무용은 아닌 듯했다.

“나가서도 그걸 차요? 난 임무용 때문에 스마트는 꼴도 보기 싫던데.”

평범한 흰 셔츠를 입은 채원우가 어깰 으쓱였다. 핏되는 옷 때문에 골격이 더 잘 드러났다. 평소에는 엄청 큰 박스티를 입고 있어서 잘 볼 수 없었는데 정말로 뼈대가 예뻤다. 곧고 넓고, 모난 곳이랄 게 없었다. 검은색 슬랙스는 허리를 더 당겨 올린 것도 아닐 텐데 긴 다리를 강조했다.

나는 지나치게 채원우를 뜯어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좀 우습기도 하고 많이 낯설기도 했다.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너무 대충 하고 나왔나.

그러나 또 다른 자아가 내 뺨을 후려치듯 외쳤다. 아니, 우리가 뭐라도 하러 가는 줄 아나. 고작 외출인데!

“형 귀여워요.”

“어우, 그러지 마요.”

칭찬과 함께 다가오던 채원우가 멈칫했다. 나는 당황해서 주절거렸다.

“그……. 소개받아서 만난 첫 만남에 어색함을 풀기 위해 하는 칭찬처럼 들리잖아요.”

“그래요? 그럼 우리 소개받았다고 할래요?”

“아는 사이끼리 무슨……. 그리고 누가 소개해 줬다고요.”

“있잖아요. 헌터청.”

“…….”

“그럼 대통령이 소개해 줬다고 해야 하나?”

나는 천천히 신발장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의 긴장이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뒤에서 채원우가 조금 느린 특유의 말투로 열심히 조잘댔다.

“근데 전 그거 말고 다른 거 할래요. 누가 소개해 준 거 말고…….”

신발 끈을 다 묶고 일어나 몸을 돌렸다. 채원우의 어깰 잡고 당겨서 입술부터 포갰다. 채원우의 입술 모양과 내 것은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았다. 애초에 계산해서 디자인한 것처럼.

나는 채원우의 입술 사이로 혀끝을 단단히 세워 넣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가 벌어지고, 채원우는 내 허릴 감싸 당겼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길래. 내가 토하기 직전까지 달려놓고도 아무렇지 않던 채원우 헌터가 고작 몇 분 조잘댔다고 그럴 리는 없잖아요.”

“저 열나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그래도 영화는 보러 갈 거죠? 표가 두 장이라.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남았거든요. 취소 못 해요.”

“갈 거예요. 가요. 가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갈래요.”

“와. 그럴 거면 내가 두고 가고.”

그러자 이번엔 채원우가 달려들었다. 나는 채원우가 고갤 살짝 틀 때부터 입술에 힘을 빼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채원우의 혀가 파고들었다.

열이 난다는 말처럼 뜨거웠다. 여전히 서툴고 조급하기만 키스였다. 그런데도 인정해야 했다. 기교를 부리며 온갖 테크닉을 남발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심지어 이전에는 상대가 죽이는 키스를 한다고 소문난 헌터였는데도 나는 상대의 어깨 너머로 손목을 올려 시간만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영화를 놓쳐도 좋을 것 같았다. 그토록 예매가 힘들었는데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채원우를 상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이게 가이드와 헌터 사이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경계선 흐려지기’라면 위험하다. 이게 만약 채원우와 양백겸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상태라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위험하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우리는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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