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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29화 (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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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격을 아는 수석은 빙긋 웃고 말았다. 채원우에게 약을 준 게 이 사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약은 왜 주셨습니까? 제가 있는데요.”

“원우가 너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 말에 어떻게 싫다고 하겠니?”

“그것 때문에 저는 개고생을 했는데요.”

“개고생은 누구나 해. 양 가이드가 지금까지 요령이 좋아서 덜 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양 가이드 좋아하잖아.”

하여튼 강 책임 밑에 있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은 다 비슷하다. 우릴 그냥 데이터 수치로 보고 있는 거다.

던전이 터진 지 몇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이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남들과 다른 헌터와 가이드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 걸 싫어하는 과학자들. 우리를 통해 데이터를 쌓고 밝혀내고 싶겠지.

“오랜 시간 강한 약물을 복용한 부작용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난 설명했어. 그 과정에서 다시 약을 복용할 시 부작용은 더 빨리 일어날 거라고 설명도 했고.”

“그걸 저에겐 말씀 안 해주셨죠.”

“에이. 화났어, 양 가이드?”

“화낼 수 있는 게 다행이네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참 솔직해. 그래서 내가 양 가이드 좋아해. 알지?”

나는 코웃음을 치거나 욕을 하는 대신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요, 알지요. 저도 수석님 존경하잖아요. 딸랑딸랑. 화내면 나만 손해다.

“그래서 말인데…….”

원래 한국어에서 중요한 건 접속사다. 그래서, 그런데, 하지만…….

“채 헌터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해. 약 복용 기간이 길기도 하고 규칙적이지도 못했고 휴약 기간이야 뭐, 말할 것도 없지.”

“아 예.”

“최근 일로 안정성 수치가 더 떨어졌어.”

“저 잘리는 건가요?”

“뭐? 아니야!”

수석은 손사래를 치며 우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솔직한 진심으로는 안도했다. 채원우가 까다로운 상대이고 맞추기 힘든 데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캐릭터라 리스크가 더 크단 걸 아는 뇌와, 채며든 심장이 따로 반응한…… 뭐 그런 거다.

“가이딩은 어느 수위까지 했어?”

수석이 깍지 위로 턱을 올렸다. 은근한 물음이다. 나는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채원우는 또 새로운 규칙으로 큐브를 맞춰놨을까. 내가 허락 없이 망가뜨린 자신의 큐브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키스는 했지? 아니야? 설마 포옹 수준으로?”

점차 노골적으로 변하는 질문에 나는 이명을 느꼈다. 귀가 아니라 뒷골에서부터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와도 같은 이명.

파트너 관계는 그 이름처럼 복잡한 관계다. 때론 비즈니스, 때론 동료, 때론 러닝 메이트, 때론…… 이런 거지 같은 부부 컨설턴트에 참가하는 위기의 커플 같은.

“가능하다면 그 이상을 해줘. 키스는 자주, 포옹하고 손 잡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자주 접촉해 줘야 채 헌터가 금방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것 같아. 채 헌터, 우리한테는 정말 중요한 자산이야. 오래 써야만 해. 양 가이드 협조가 있으면 가능하겠지? 늘 우리가 양 가이드한테 신세 많이 진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뒀던 손끝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갤 들었다.

“네.”

인권, 개인의 자아 존중, 프라이버시. 그런 건 모두 거대한 던전 입구 앞에선 아무런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내가 안전성이 80퍼센트는 보증된 그린존으로 떠나고, 이후 변할 확률 속에서 꾸준히 그린존으로 이사를 다닐 수 있는 날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떠나고 난 뒤 헌터청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채원우는 어떻게 될까.

10년 후에도 쟤는 저기 남아서 큐브를 맞추고 있을까.

“음, 고마워. 자주 하고. 아, 콘돔은 하지 말고. 알지?”

가끔은 바깥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 중 아무 붙잡고 묻고 싶은 거다. 당신의 하루가 안녕했냐고. 당신의 안녕을 위해 나는……. 쟤는…….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의자를 밀고 미닫이 유리문을 열었다. 채원우가 고갤 들었다. 조금 전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내가 맞춰둔 큐브를 손 안에 굴리고 있었다. 채원우가 날 향해 큐브를 들어 올렸다.

“남은 면 제가 맞출까요?”

“……뭘 그런 걸 허락받고 그럽니까. 채 헌터 건데.”

“제 거 아니에요. 여기 거예요.”

“그래요?”

나는 다가가서 채원우의 손에서 큐브를 앗았다. 그러곤 순식간에 남은 면을 맞추고는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덜렁거리는 뚜껑을 보다가 채원우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버려요.”

말똥말똥. 나만 보고 있는 눈이 참 크고 말갛기도 하다. 바보 같은 괴물. 내가 봐온 수많은 괴물 중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괴물, 채원우.

* * *

이제 영화 재개봉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거의 당연한 일이 되었다. 때론 야심 찬 신작보다 재개봉한 옛날 영화가 더 흥행할 때도 있었다.

던전이 터지기 전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일은 이제 일상의 한 부분이고, 던전이 터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레트로 문화가 되었다. 재개봉 상영은 극장에서 하는 꽤 쏠쏠한 부업 같은 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개봉한 영화는 개봉할 때마다 큰 인기를 끌던 히어로물이었다. 극장 SNS에 뜬 스포일러성 이미지의 일부만 봐도 영화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협동 전투 훈련 휴식 시간에 그걸 발견한 나는 기대감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어? 나 이거 보고 싶었던 건데.”

던전이 터진 이후에도 살아남은 사각 종이팩의 사과주스 빨대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마음을 눌러놨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비롯한 온갖 털짐승들만 가득한 내 마음 기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 거다.

“형, 하나 더 마실래요?”

나는 채원우의 말에 고갤 돌아봤다. 채원우는 양손을 모아 그의 손 크기에 비하면 아주 앙증맞고 색깔 또한 과하게 알록달록한 사과주스 팩들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났어요?”

“그냥 받았어요.”

“어디 봐봐요.”

내가 다급하게 종이팩을 이리저리 살피고 심지어는 빨대를 하나씩 꽂아서 한 모금씩 빨자 채원우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뭐 하세요?”

어느새 쪼그려 앉은 내 앞에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았다. 나는 마지막 한 팩까지 모두 한 모금씩 마시곤 대꾸했다.

“채원우 씨 평소 대인 관계를 생각하면 호의로 준 게 아닐 거 같아서요.”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확인한 거예요?”

“네. 없네요. 아마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채원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낮아진 목소리가 근사했다. 나는 뒤늦은 깨달음에 멍청한 박 터지는 소리나 냈다.

“아, 그러네.”

“형, 미쳤어요?”

“미쳤다니. 그래도 연장잔데요.”

“아하.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골로 가는 것도 먼저 가게요?”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었다. 채원우의 막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목걸이를 빼내 보였다.

“한 번은 살릴 수 있다면서요.”

“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멈추면요.”

“그럼 됐…….”

“형을 되살리는 동안 3분은 걸릴 테고, 그 시간이면 내가 무슨 일을 벌여도 충분히 벌일 수 있어요.”

“…….”

“1분에 다섯 명은 죽일 수 있으니 3분이면 열다섯 명은 죽이겠네요. 마침 여기 형과 저를 포함해서 열일곱 명이 있으니까, 딱 우리 둘만 살아남겠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살벌한 상황 예시에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설사약 정도겠거니 생각했죠. 독약은 우리 둘 다 오버했어요. 인정하고 넘어가요.”

“싫어요.”

채원우는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슬쩍 채원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내 손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화려하게 예쁜 채원우는 화가 나면 차갑다 못해 빙점까지 내려갈 것만 같았다. 지금 쟤가 능력을 발휘한다면 물이 아니라 얼음이 만들어질 것만 같았다.

“이번엔 형만 잘못한 거예요. 난 잘못 없어요.”

“아니, 채원우 헌터.”

그러나 채원우는 내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고 홱 돌아선 멀어졌다. 타이밍이 어긋나서 졸지에 나는 허공에 아련하게 손을 뻗은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뒤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한 표정으로 교관님이 카메라를 든 채 실실 웃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나온 발라드 앨범 재킷 사진 같아서.”

묘하게 구체적이라 묘하게 더 기분이 나빴다. 나는 짜증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애매하게 남아버린 데다가 배가 불러서 더 마실 생각도 들지 않는 사과주스를 모두 들어 벤치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교관이 멋대로 들고 하나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 속도와 양이 경이로웠다.

순식간에 한 줄을 다 비운 교관이 다시 실실 웃었다.

“나는 네가 채 헌터 낳은 줄 알았다.”

“아닙니다. 무슨.”

“사이는 좋네? 소문은 들었지만.”

“대체 어디서 그렇게 소문이 돌아요? 저도 모르는 대나무숲이라도 있답니까?”

“그건 아닌데 특별한 경우잖냐. 채원우의 첫 번째 파트너. 채원우가 졸졸 쫓아다니는 데다 아주 옆에 끼고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닳을까 한다면서.”

“그거 헛소문입니다. 채원우가 저를 뭐요? 혈압은 잘 높여주긴 하더라고요. 아침에 당이 떨어져도 걱정이 없어요, 제가.”

“모르면 됐고.”

뒤끝이 찝찝했다. 그러나 트림을 꺽 하는 소리에 질려서 나는 교관에 대한 관심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뭐야. 미쳤나 봐.”

구시렁대는 내 뒤로 교관이 팔을 턱 감았다. 나는 교관보다 키가 컸다. 겨우 어깨에 걸친 팔이 아래로 처져서 더 무거웠다.

“네가 하는 행동이 그만큼 웃기다는 거지. 네가 채원우를 왜 지켜? 여기서 쟤 죽이려는 사람 아무도 없어.”

“혹시 모르죠. 제가 본 채원우는 사서 적을 만드는 스타일이던데.”

“적이 있어도 쟤는 못 죽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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