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저 잘 달리는데 괜찮아요~?
돌아가서 저딴 소릴 지껄인 나를 패주고 싶었다. 쪽팔린다. 미친놈. 한 치 앞도 못 보고 까불던 건방진 자식.
나는 저 앞에서 뒤로 달리며 나를 걱정스레 보는 채원우를 향해 겨우 웃어 보였다. 사실 토할 것 같았다. 이런 표현 하고 싶지 않지만 채원우는 괴물이 맞았다.
“힘들어요?”
힘들었다. 약간 토할 것 같기도 했다. 매년 꾸준히 상승세를 그리며 더 멀리, 더 빨리 달리던 내 자존심을 채원우는 아주 간단히, 그리고 무참히 뭉갰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내게 천천히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냥 먼저 가라고 하는 내 손짓을 정확히 반대로 알아먹는 채원우가 속도를 내더니 내 코앞에 섰다.
“역시 좀 쉬는 게 좋았어요. 치료하자마자 바로 달리는 건 무리였어.”
아니. 나한텐 딱 좋은 처치였다. 무리였던 건 널 따라잡는 일이었어, 자식아.
이제야 강 책임의 그 묘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 책임은 그의 비인간적인 성격을 넘을 정도로 날 걱정했던 거다.
채원우는 숨이 가쁘지도 않은 채로 내게 손을 뻗었다. 고갤 푹 숙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어도 그림자만은 똑똑히 보였던 나는 허공에서 뻗어진 손을 낚아챘다. 졸지에 내게 손목이 붙들린 채원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너……. 채 헌터……. 보약 먹죠.”
“너라고 불러도 되는데.”
수줍은 웃음과 되돌아온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네가 무슨 누나야? 한때 전국을 강타했다던 ‘너라고 부를게’라는 노래 가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보약 먹죠? 진짜로. 여기가 던전 안도 아닌데 왜 안 지쳐요.”
“아무래도 나이 탓이 아닐까요?”
“채 헌터, 그런 말 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욕먹습니다.”
“아뇨. 제가 어려서 그런 것 같다구요.”
“…….”
“역시 연하가 좋죠? 개꿀이죠?”
“요즘 대체 뭐 봐요? 미치겠네. 그런 말은 뭡니까, 또?”
나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손을 내젓고는 자리에 앉았다. 개꿀인지 새꿀인지 말하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고, 몇 키로나 뛰었다고 하면 냅다 거짓말이라고 생각될 만큼 보송하고 예쁜 채원우가 싱긋 웃었다. 한숨이 푸욱 나왔다.
“더는 못 달리겠어요. 쉴래요.”
커다란 부지를 홀로 독차지하는 헌터청의 트랙 옆에는 스탠드가 있었다. 겉보기에는 주민 건강 증진을 위한 체육공원을 가장해 평범한 척하는 거다.
나는 평범한 척하지만, 사실 보통 트랙보다 훨씬 넓고 크고 바닥은 더 튼튼한 운동장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놈과 나란히 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켤 때마다 가슴이 빠듯하게 저렸다.
“와. 죽겠다.”
헥헥대며 중얼거리자 채원우가 벌떡 일어났다.
“음료수 사 올게요.”
“그냥 물이면 됩니다.”
평소라면 됐다고 거절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채원우는 그 넓은 보폭으로 계단을 단숨에 올라갔다. 그 위에 대고 외쳤다.
“어디 가서 시비 걸리지 말고! 걸리면 그냥 무시하고!”
차 조심, 길 조심, 사람 조심하라던 우리 엄마 말투하고 똑같았다. 채원우는 알아들었다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저래도 자기 나름의 필터가 있는 채원우는 시비가 걸리면 상대방만 약 올라 죽을 방식으로 무시할 거다. 나는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10분이 되기 전에 채원우는 무사히 돌아왔다. 양손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보리차가 들려 있었다. (놀랍게도) 센스가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얼떨결에 무리한 다리가 풀려서 찾으러 가는 길마저도 구만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냥 물은 다 떨어졌어요. 필요하면 제가 짜내도 되고요.”
“아닙니다. 딱 좋아요.”
나는 받은 차를 단번에 반 넘게 비워냈다. 다시 뚜껑을 닫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나랑 가이딩 테스트 좀 받죠?”
말투가 다분히 시비조였다. 당연했다. 이건 제안도 부탁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강요였다. 안 가기만 해봐라.
채원우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럴 줄 알았다. 예상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안이 아니라 강요를 했던 거지.
“가야 해요.”
나는 남은 찻물을 마저 비우고 말했다. 채원우에게 표적을 꽂듯 검지를 세우며 페트병을 우그러뜨렸다.
“채원우 씨, 상태 안 좋아 보이거든요.”
“척 봐도 알아요? 형이 전문가도 아니잖아요. 연구원은커녕 중졸이면서…….”
“일부러 시비 걸어서 화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나 본데 서툴러요. 맞는 말이라서 화도 안 납니다. 중졸이긴 한데 그래도 시력은 좋거든요. 좌 1.8, 우 1.5. 딱 보기에도 채원우 씨 컨디션이 평소랑 달라요. 그리고 그런 채원우 씨는 어디 뭐 척척박사는 못 되어도 척척석사는 되나 봅니다?”
아이고 이런. 채원우랑 놀다 보니 같이 유치해지는 게 분명했다. 나는 채원우 말고 누가 들은 것도 아닌데 내가 한 말이 부끄러워서 고갤 팩 돌렸다.
“……졸이요.”
“네?”
“초졸인데요.”
“…….”
내가 비록 중졸이지만 채원우만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예상은 정확했다.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난 적어도 2차 방정식은 배운 사람이었다.
“그래요……. 내가 잘해줄게요.”
안쓰러움에 금세 말투가 누그러지고 말았다. 나이를 생각하면 첫 번째 던전 브레이크 이후로 학력이 끊길 수도 있지, 뭐……. 흔치는 않지만…….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사납게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채원우가 내 팔뚝 안을 잡아서는 불쑥 일으켜 세워줬다. 고맙긴 한데 잘 익은 무를 뽑는 것처럼 조금 투박해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람을 무슨 무 뽑듯이…….”
“형은 무처럼 가벼워요.”
“깃털처럼이 아니라 무처럼 말이죠. 좋습니다.”
채원우의 핀트가 나간 데다 타이밍마저 종잡을 수 없는 언로맨틱한 플러팅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나는 채원우와의 장르를 정의했다. 망한 미연시다. 망한 미청년 연애 시뮬레이션. 망겜에다가 엔딩도 딱히 없거나 있어도 허무 엔딩일 게 빤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편했다. 게임 속에서 1년은 현실에선 넉넉잡아도 한 시간 반 정도의 플레이 시간밖에 안 되지 않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채원우와 되도록 해피엔딩을 보고 싶어졌다.
나는 잡힌 손으로 채원우의 목을 잡았다. 얘는 목 선도 예뻤다. 갸름한 건 아닌데 목빗근이 제법 섹시하게 잘 빠졌단 말이지.
“채원우 헌터. 나 점점 채 헌터의 그 나사 빠진 언행들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떡하죠?”
“개꿀이죠.”
“아니, 진짜로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그 동영상들 올라오는 플랫폼이요.”
“오케이. 오늘 내가 키즈락 꼭 걸고 말 겁니다.”
내가 이 순진무구한 전투 괴물 때문에 걱정이 많다, 걱정이 많아.
* * *
피 검사부터 뇌파 검사까지 받았다. 기본적인 사항이고 처음 가이딩 수치를 측정했을 때와 흡사한 검사를 했다. 약한 멀미를 느끼며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채원우는 내 건너편에 앉아서 손으로 큐브를 맞추고 있었다. 3X3 큐브의 면들을 색으로 통일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규칙성이 있게 퍼즐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새로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해서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원우 먼저 들어올래?”
수석이 채원우를 먼저 불렀다. 채원우는 나를 스쳐 지나가서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가운 벽에 머릴 기댔다. 지나가는 채원우가 낯설 정도로 무미건조해 보였다.
채원우는 감정이랄 게 없는 데다 나도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채원우의 행동은 정말 어린애처럼 변덕스러웠다.
채원우를 기다리는 동안 연구원들 역시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 일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끔 주인공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연출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지금이 그런 기분이었다. 단순히 이 순간만이 아니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이랬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상담에 자리에서 일어나 채원우의 큐브를 들었다. 이건 공략법이 있는 게임이었다. 누가 더 빨리하냐의 문제였다. 나는 채원우의 퍼즐을 풀고 색을 하나씩 맞춰갔다. 이제 면 하나만 남았을 때였다.
“양 가이드 들어오세요.”
진료실로 부르는 간호사의 부름과 같았다. 나는 미완의 퍼즐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나오는 채원우와 마주쳤다.
“…….”
채원우의 표정으로는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 도통 감 잡을 수 없었다. 별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들어봤자 안정성이 떨어졌다거나 올랐다는 말 중 하나겠지.
나는 채원우의 팔이라도 톡톡 쳐볼까 하다가 그냥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때 채원우가 손등으로 내 손을 툭 쳤다. 뾰족하게 솟은 손가락 마디가 간지러웠다.
“응. 문 꼭 닫고 들어와.”
사실 내가 낯선 건 이거였다. 보통 가이드와 헌터는 서로의 검사 결과를 공유하게 되어 있다. 대부분 같이 들어가거나 따로 들어가더라도 문을 꼭 닫을 필요는 없단 뜻이었다.
던전 공략이라는 부드러운 단어로 본질을 흐려도 우리가 하는 건 전쟁이었고, 투입되는 곳은 전투 현장이었다. 상대의 컨디션에 따라 죽고 살고가 결정되니 서로에 대한 것은 중요한 정보인데 채원우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의자를 빼고 앉으니 서당에서 3년 산 개처럼 화면을 보고도 대애충은 해독할 수 있었다.
“안정성이 떨어졌네요?”
의자를 바짝 당기며 말했다. 수석이 으응, 하고 마우스를 눌렀다.
“원우 때문에 곤란했지?”
“네.”
나는 빼지 않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