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같이 살게 된 이상 이렇게 될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서로의 생활 반경이 겹쳐지기 직전이었다. 생활이 겹쳐진다는 건 곧 허락하는 경계선이 점점 옅어지다 못해 끝내 서로를 침범한단 뜻이란 걸 알아야 했다.
“좋아요.”
채원우가 고갤 끄덕였다. 온갖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채원우는 망설이지도 않고 생각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같이 뛸래요, 형이랑.”
“그럼…… 겉옷 가지고 와요. 밖에 추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원우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습하고 추운 방 말이다.
나는 신발 앞부분을 내려다봤다. ……그 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안 들어가면 어떻게 했겠어. 애초에 들어가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 * *
치료실은 매칭룸, 랩실과 닮았다.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차가운 실내 온도도 그렇고 매끈한 벽이나 치과를 연상시키는 도구들이 그랬다. 게다가 뒤로 젖혀지게 생긴 의자는 진짜로 치과를 닮아서 처음 헌터청에 들어왔을 때 뺐던 사랑니의 통증을 떠올리게 했다.
채원우는 결국 끝까지 날 쫓아왔다. 지금 걔는 복도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가 개 한 마리를 주운 것만 같다. 치료 대상자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걸 알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로 이 옆에서 낑낑대며 아직까지도 ‘형. 아파요? 많이 아파요?’ 이런 말이나 하고 있었을 거다.
차라리 채원우가 부러뜨린 거면 정말 나도 지랄지랄을 할 텐데 정확하게 괴물이 부러뜨린 거니, 좋은 의도로 안절부절못하는 애 보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근데 언제 오는 거야?”
담당자가 누구길래 이렇게 안 오나 하는 참이었다.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에야 문이 벌컥 열렸다.
“어? 강 책임님?”
“앉아라.”
더벅머리에 사흘은 안 깎은 게 분명한 수염. 옷은 구겨지고 단추는 잘못 끼웠다. 아마도 지하철에서 만났다면 슬쩍 피했을 게 분명한 차림의 강윤엽 책임 닥터였다.
닥터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치료 쪽 연구원이란 뜻이기도 하고 정말 의학 박사란 의미기도 하고 매드 사이언티스트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는 그냥 다 닥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강윤엽은 특별했다. 좋은 의미? 그건 절대 아니고.
“표정 좀 풀어.”
의자에 주저앉은 강 책임이 바퀴를 돌돌 굴려 다가왔다.
“어떻게 풉니까? 왜 오셨어요? 여기 계실 짬 아니시잖아요.”
“그지. 근데 내가 금연 내기에서 졌어. 이번에는 당직실 근무를 걸었었거든. 그래. 넌 어디가 다쳐서 왔냐?”
“척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말하는 디자인 여전하네, 우리 양 가이드.”
“차트를 봐도 아실 테고.”
강 책임이 실실 웃었다. 변태 같은 작자. 사실 다 알면서 물어본 게 분명했다. 강 책임은 껍데기는 허술 그 자체인데 속은 완벽주의자 변태였다. 이 급속 치료 방식을 고안한 것도 강 책임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수석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의 승진이었다. 아직도 나이가 마흔 줄 중반밖에 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여든일지도 몰라.
하여튼 미스터리했다. 모든 게. 하나 확실한 건, 변태인데 미쳐 있다는 것 정도?
“또, 또. 머리 굴러가는 거 다 보인다.”
“그럼 머리 안 굴립니까? 돌대가리 되게.”
“어차피 돌대가리잖아, 중졸.”
“그런 발언, 비하 발언에 속하는 거 아세요?”
“당연하지. 난 박사잖아.”
재수 없다. 언젠가 이 바닥을 뜨게 된다면 강 책임의 얼굴을 갈기고 싶다. 하지만 갈기는 순간 나는 다시 이 바닥으로 돌아와야 할 거다. 국가의 최고 재산 중 하나에 피해를 입혔으니 어쩌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강 책임이 조각조각 해체할지도 모르지.
“팔 골절이라. 야, 백겸아. 내가 새로 개발한 방식이 있는데…….”
강 책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고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안 합니다. 원래 방식대로 최대한 안 아프게 해주세요.”
“별로 안 아파, 임마!”
“이 꽉 깨물고 버티다가 또 이 왕창 나가면, 30분 추가해야겠다 이러려고요?”
“10분.”
“안 합니다. 자꾸 그러시면 밖에 있는 애 부를 거예요.”
나는 씨알도 안 먹힐, 그리고 내가 절대 하지 않을 법한 협박을 했다. 유치한 데다가 별로 먹힐 이유도 없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강 책임은 낄낄대고 넘길 가짜 협박에 눈을 더 번쩍였다.
“너네 둘 진짜 친하구나?”
“다들 그거에 관심 되게 많으시네요. 마치 채원우가 어디 상종 못 할 개싸가지인 것처럼요. 그 정도는 아니던데.”
“개싸가지 아니지, 우리 원우. 우리 원우 착해~”
강 책임이 말하니 왠지 찝찝하다. 근데 말꼬리를 잡기도 전에 강 책임이 내가 앉은 의자를 젖혔다. 그러고는 B급 고어 영화 속에서 나올 법한 범인처럼 음산하게 웃더니 다짜고짜 주사기를 꺼냈다.
“아이, 진짜. 겁주지 말아요. 진짜로.”
“어어. 내가 장담하는데 예전보다 안 아파. 나 못 믿어? 나 천재잖아.”
“머리털도 걸고요?”
“어?”
강 책임은 머리털에 은근히 예민했다. 아버지가 탈모였다고 했다. 우연찮게 그걸 들은 나는 이 말을 쏠쏠하게 써먹었다.
“머리털 걸고 약속하냐고요.”
“……작년보단 안 아파.”
“이 개…….”
말이 이어지기 전에 강 책임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두툼한 솜으로 된 재갈이었다. 다른 쪽 손목과 발목도 의자에서 튀어나온 벨트로 고정되었다. 온갖 상스러운 욕을 다 뱉었다. 나는 어려서 부둣가 쪽에서 살았고 부둣가에서 일하는 인부 아저씨들의 비속어는 상상 초월이었다.
“어어~ 나도 사랑해~”
그래도 내 입에서 나온 말보다 강 책임 입에서 나온 말이 더 쓰레기라는 걸 장담할 수 있었다.
깁스한 팔은 그나마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는데, 위로 번쩍 들어 올려져 묶였다. 강 책임은 작은 톱으로 석고를 분해했다. 원래 이 전에 마취 한 번 해주는데, 이 변태 새끼!
“하이고. 잘 부러졌네.”
그리고 곧 강 책임이 마취 주사를 놓았다. 타이밍이 개떡 같았다. 마취약이 채 다 돌기도 전에 회복형 헌터의 혈청과 그 외 수많은 헌터들의 세포 연구로 만들어 냈을 약이 팔 오금을 통해 들어왔다.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고 온몸의 근육에 지나친 탄력이 붙어 심하게 쥐가 나는 것 같았다. 쥐가 났을 때 가장 아픈 상태로 목까지 긴장했다. 그러고 나서야 마취약이 들었다. 아, 진짜. 개같이 아프다. 차라리 머리를 깡 때려서 기절시켜 주는 게 낫지, 이건…….
“짜잔. 다 나았습니다!”
“언젠가 그쪽 턱주가리 때리고 뜬다, 내가 진짜.”
“그러길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번호표 뽑아야 할 거다.”
팔이 엄청 무거웠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아예 다친 적도 없는 것 같았지만, 다른 쪽 팔에 비교하면 확연하게 무거웠다. 게다가 흘깃 보이는 금속 도구들 표면에 비친 얼굴 꼴도 말이 아니었다.
다쳤던 팔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다른 부분도 다 부어서였다. 더럽게 피곤했다. 조깅을 해서 땀을 쏙 빼고 샤워한 다음 죽도록 자고 싶었다.
“이제 뭐 할 거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연하지. 나도 스몰 토크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거짓말. 연구에만 관심 있잖아요.”
“그래서 묻는데, 네가 보기에 이 급속 치료 후유증을 가장 잘 털어내는 방법은 뭐라고 생각하냐?”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왠지 피 비린 맛이 나는 것 같은 입속을 혀로 훑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조깅이요.”
“조깅! 이건 또 재미있네.”
강 책임은 신나서 또 미친 듯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덜렁대긴 오죽 덜렁대는지 저렇게 마구잡이로 적어둔 기록물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다. 기밀이 분명할 내용을 질질 흘려도 경고받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남들이 이해는커녕 읽지도 못할 정도의 악필이기 때문이었다.
“혼자 조깅하냐?”
“따라오실 거면 마세요. 채 헌터랑 갈 겁니다.”
칼칼해진 목을 위해 따뜻한 물을 홀짝였다. 이상하게 강 책임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돌아보니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쩐지 애석해 하는 것 같으면서 유감을 비는 것 같으면서 웃음을 참는 듯한…….
“뭐예요? 그 표정.”
“채 헌터가 같이 뛰자고 하디?”
“아뇨. 제가 뛰자고 했는데요.”
“그래……. 뭐. 즐거운 조깅 해라.”
뭐야. 찝찝하게.
하지만 강 책임하고는 오래 말을 섞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속만 타고 열불만 오른다. 게다가 이상한 꼬투리가 잡혀서 자기 연구에 합류시킬 수도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치료실을 나왔다.
팔짱을 끼고 고갤 숙인 채 앉아 있던 채원우가 고갤 들었다. 내 얼굴에 이어 바로 팔로 시선이 옮겨지는 게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원우. 인사 안 하니?”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채원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당황이나 두려움도 아니고, 아예 아무것도 없었다.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처음 보는 무표정의 채원우는 평소 생각하던 이미지인 예쁘고 말간 얼굴이 아니라, 차갑고 서늘하며…… 제련된 무기 그 자체로 보였다.
얼떨결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을 뒤로 뻗어서 치료실 문을 닫아버렸다. 문이 닫히자 채원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채원우에게 다가가 팔을 툭 쳤다. 다쳤다가 이제는 아주 멀쩡해진 팔로.
“가죠. 저 엄청 달리고 싶거든요.”
“……네.”
“근데 저 잘 달리는데 괜찮아요?”
씩 웃으며 초심자를 걱정해 주기도 하는 여유를 보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