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내내 가이딩이 진행된 모양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채원우도 밤새 능력이 미미하게 계속 샜을 거라는 뜻이었다.
자기는 잤는데 잘못 잔 낮잠처럼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 채원우의 팔을 툭 쳐내고 상체만 벌떡 일으켰다. 일어나긴 했는데 멍하게 눈을 껌뻑거리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으으응.”
채원우가 잠투정을 하더니 팔을 다시 올려서 내 허리에 턱 감았다. 아주 웃기는 애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보아하니 제정신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채원우의 어깨를 짝, 짝 두드렸다.
“이만 일어나시죠.”
“우음.”
“일어나라니까요.”
어깰 두드리던 손이 슬슬 올라가선 슬쩍 드러난 목선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거길 뺨따귀처럼 후릴 순 없으니 손끝으로 찔렀다. 바짝 깎인 손톱에 긁힌다고 아플 일도 없고 상처 생길 일도 없다. 게다가 헌터한테 고작 손톱으로 상처라니. 웃긴 일이다. 그러면 헌터 자격 박탈해야 돼.
손이 이젠 볼까지 갔다. 볼을 꾹 찌르고 채원우를 깨웠다.
“채원우 헌터. 좀 일어납시다.”
채원우가 그제야 눈을 떴다. 반도 채 뜨지 못한 눈으로 날 멍하니 보다가 인어 왕자처럼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선 박 터지는 소릴 해댔다.
“우리 잤어요?”
“그럼 침대 위에서 베개 싸움이라도 했겠습니까? 일어나요. 난 찌뿌둥해서 조깅이라도 하려고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이 몇 시야. 몸을 구르다시피 해서 침대에서 나오니까 이불을 들추는 채원우가 보였다.
“형이 제 옷 입혀줬어요?”
“채원우 헌터 미취학 아동이에요?”
“아니요. 성인인데요.”
“그럼 채 헌터가 입었겠죠. 내가 입혀줬겠어요, 설마.”
채원우의 책상 위에 시계가 있긴 한데 맛이 갔다. 충전하지 않은 전자시계는 꺼져 있었다. 5분이면 충전할 수 있지만 충전기를 찾아가는 길에 시계를 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나는 잠을 설쳐서 신경이 곤두섰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쥐어 당기며 쯧, 쯧 혀를 찼다.
“그럼 형 왜 여기서 잤어요……?”
“방이 울길래.”
채원우의 시계를 퍽퍽 두드리면서 대답했다. 채원우는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채 헌터가 악몽 꾸니까 방이 울더라구요. 알았어요? 문고리며 창문이며 눈물을 아주 그냥 뚝뚝.”
나는 엄지와 검지를 뒤집어 내려서 눈 밑에 갖다 대고 흑흑 우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계를 퍽 쳤다. 마지막 한 대가 제대로 먹혀들어 갔는지 움직이지 않던 초침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거꾸로 간다.
“이거 고장 났네요. 새로 보급받아요.”
“……형, 이제 제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허어. 이것 봐라?
“나도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채원우 헌터가 능력을 질질 흘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그러니까 약을…….”
“그놈의 약 이야기 또 한 번 꺼내기만 해요.”
목이 놀랄 정도로 홱 채원우를 돌아봤다. 채원우는 움찔하더니 고갤 끄덕였다.
“애초에 악몽을 꾸고 이렇게 능력이 새는 것도 약 남용 후유증이라고요. 이전에 있던 일도 한참 먹던 약을 끊어서 생긴 일이 분명합니다. 그럼 또 먹게요? 계속 먹게?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땐 듣지도 않는 가이딩 질질 끌고 가고? 난 그렇게는 못 둬요. 내가 가이딩을 맡은 이상 채 헌터, 내가 알아서 내 뜻대로 할 거라고.”
헌터들이 더 세고 눈에 띄니까 가이드보다 더 높은 줄 알지? 더 갑인 줄 알지? 사실 아니다. 우리는 일반인의 눈에는 구급 키트로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는 제세동기, 산소호흡기, 브레이크, 에어백 그리고 안전벨트다. 어디 이것들 없이 살아남는지 보라고.
“그러니까 한동안 채 헌터 방은 프라이버시존이 아니에요. 내가 멋대로 침범할 거고 내가 멋대로 채 헌터 몸도 굴릴 겁니다. 마음에 안 들면 이제라도 나 자르든가.”
“형……. 제가 그 말에 약한 거 알고 그러는 거죠.”
“무슨 말이요?”
어. 아는데?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계약 파기하자는 말이요……. 그거요……. 협박이에요. 신뢰로 유지해야 하는 파트너 사이에서 협박 같은 거 하면 안 된다구요.”
“어이구. 이번엔 좀 제대로 된 영상을 봤나 보네요. 근데 어떡하나. 신뢰 먼저 깬 건 채 헌터인데.”
“…….”
“할 말 없죠? 내 말 맞죠? 내가 이겼죠?”
슬슬 신나 버렸다. 한참 깝죽댄 뒤에야 내가 아주 유치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쪽팔린다. 헛기침을 하고 시계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근데 제 방에 왜 냄비 세트가 있어요?”
“……라면 먹자고 채 헌터 부르러 들어왔다가 발견한 겁니다. 오케이?”
오케이는 무슨 오케이냐. 그래도 어떻게 말해. 네가 쏜 물방울에 맞아 이마에 예쁘게 빵꾸 생길까 봐 들고 온 게 ‘인덕션, 하이라이트, 가스 화구 모두 사용 가능합니다. 튼튼하고 녹이 잘 슬지 않아요’ 냄비 세트라는 걸…….
* * *
채원우가 나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 귀찮다.
“진짜로 괜찮아요?”
한 번만 더 말하면 정말 열 번은 말한 꼴이 된다. 입이 아프기도 하고 칫솔을 물고 있기도 해서 그냥 깁스째로 팔을 내민 다음 흔들었다. 괜찮단 뜻이다. 게다가 오늘은 급속 치료도 받게 될 거다. 더럽게 아프지만, 그것만 참고 나면 깁스를 풀어도 된다. 전투 부품에 대한 수리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한 덕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프면…….”
화장실 앞에서 알짱거리기까지 한다. 거품을 뱉고 조금 더 분명해진 발음으로 말했다.
“내려가서 치료받고 조깅도 다녀올 겁니다.”
“치료 아파요, 형…….”
“알아요.”
당연히 알지. 내가 몇 번이나 다쳤는데.
한 번은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적이 있다. 심장이 뚫리지 않으면 어떻게든 번번이 살려내는 게 헌터청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이다. 부위 하나씩 30분씩, 두 시간. 난 열네 번 기절했고 그때 악문 이에 금이 가는 바람에 급속 치료로 10분이 더 추가됐다.
그 이후로는 안 다치려고 용을 썼는데. 사실 그 이후로도 자주 다쳤고 내상이 아니라 외상인 이상, 게다가 당장 던전 출동 대기조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종종 치료를 받아야 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약의 발전도 한몫했고.
입까지 헹구고 돌아보니 울상인 채원우의 표정이 보였다.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인데 아랫입술이 삐죽 나와서 울기 직전이었다.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손을 뻗었다. 채원우의 볼을 톡톡 치고 말했다.
“울겠다, 울겠어.”
“울고 싶어요.”
“에궁. 그래도 울진 말아요.”
“지금 저 달래는 거예요, 놀리는 거예요?”
“아마 놀리는 걸 걸요?”
“……형은 다친 것도 형이고 위험한 것도 형인데 왜 이렇게 멀쩡해요?”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냥 넘겨요. 계속 걸어야지 어쩌겠습니까.”
“형은 걷는 게 아니라 달리는 것 같아요.”
“왜요. 쫓아오고 싶어요?”
“네.”
이게 무슨 대화의 흐름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고 채원우를 밀었다. 일단 난 옷을 갈아입고 이 귀찮은 깁스를 풀러 가야겠다.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요.”
나는 또 한 번 채원우를 놀렸다. 손을 교차해 가슴을 가리고 물었다.
“엄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
“……불안하니까 빨리 대답해 줄래요.”
“안 해요. 셔츠로 입는 게 낫죠?”
“아뇨. 저 셔츠 없습니다.”
후드티, 맨투맨, 박스티. 그게 내가 가진 전부다.
불편해도 얼마나 두껍게 석고를 감았는지 팔이 아프진 않았다. 사실 채원우가 도울 것도 없었다. 나는 다쳐서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능숙하게 옷을 벗었다.
“아무거나 주십쇼.”
그러자 채원우는 내가 가진 온갖 어두침침한 색의 옷가지 중에서 그나마 밝은 회색 후드티를 꺼내줬다.
시간이 걸리긴 해도 어떻게 입는데 얼굴을 다 빼기 전에 장골 바로 윗부분이 간지러웠다. 나는 간지러움을 꽤 많이 타는 편이다. 몸을 옆으로 확 빼며 ‘으학!’ 하고 웃음을 삼켰다. 우스꽝스러운 소리였다.
“어우. 뭐예요!”
“옷이 말려 들어가서…….”
덩달아 놀란 채원우가 커다란 눈을 끔벅이면서 대꾸했다. 긴 속눈썹에 두꺼운 쌍꺼풀 때문에 저렇게 놀란 얼굴이어도 약간 얼빠진 표정처럼 보였다. 화낼 기운도 쏙 빠지는 순하고 말랑한 예쁜 얼굴이었다.
내가 얼굴에 약했나? 이렇게 생긴 남자를 처음 봐서 그런지 자꾸만 나답지 않게 약해졌다.
“나 간지러움 많이 타요. 그냥 말해 주면 됩니다.”
채원우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갤 끄덕였다. 어쩐지 ‘다음부터는 말해 줘야지’라는 다짐이 아니라 ‘백겸이 형은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구나’라는 지식의 습득에 더 치중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거라도 기억해 주면 고맙겠다.
출동 다음 날이라 짧은 휴식이 주어졌는데 채원우는 뭘 할지가 궁금해졌다. 신발을 신는 동안 나를 배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현관에 서있는 채원우의 모습을 훑어봤다. 조거 팬츠에 반팔 티셔츠. 당장에라도 운동해도 괜찮을 패션이었다.
“오늘 뭐 해요?”
충동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만난 지 정말로 얼마 안 되었을 때처럼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후회되거나 아차 싶진 않았다. 어쩐지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어요.”
“그럼 나랑 뛸래요?”
“뛴다고요?”
“나 이거 풀고 조깅하려고요. 급속 치료 받아봤죠? 그거 받으면 엄청 간지럽고 왠지 몸이 무겁잖아요. 달리면 금방 사라지거든.”
나는 괜히 필요 없는 말까지 주절거렸다. 솔직하지 못하게도. 그냥 보아하니 너 오늘도 집에서 멍 때리고 있을 거 같은데 그럴 거면 나가자, 하면 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 오지랖 같아서. 채원우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하여튼 생각이 많아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