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24화 (25/121)

024

“씻고 4층에서 만나죠.”

씻기 위해 유틸리티 벨트부터 벗어 손에 쥐는 동안 채원우는 우뚝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면 진짜로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화 많이 났어요……?”

“화났냐고 물어보는 거 보니까 자기가 무슨 짓 했는지는 아는 모양이네.”

“형.”

“이유 말할래요?”

“……싫어요.”

“그럼 말아요.”

더 할 말 없다. 나는 군용 조끼의 버클을 풀었다.

“형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말 안 할래요.”

여기는 개인 욕실로 들어가기 전의 공용 공간이었다. 막 지나가던 나체의 헌터가 이쪽을 흘끗 봤다. 반쯤 벗은 가이드도 이쪽을 신경 쓰는 티가 났다. 나는 을지로에서의 오해가 떠올랐다. 지금 딱 그 꼴인데.

“씻기나 해요.”

더 대꾸해 봤자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원우의 화법이 오해만 가중시킬 게 뻔했다. 나는 무시하고 손바닥으로 열림 버튼을 내리쳤다. 이러다가 다치지 않은 손도 붕대를 감게 생겼다.

에어 샤워실로 들어가서 몸을 돌리는데, 닫히기 직전 틈 사이로 채원우의 눈과 마주쳤다.

잘못한 건 자기면서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 * *

보송보송한 상태로 채원우와 처음 악수를 했던 곳 입구에 섰다. 채원우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 존재하지만 불리지 않는 장소라는 직감이 들었다.

채원우는 무엇인가 독특하다. 온실 속 화초 같기도 하고 오히려 일찍 내어놔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사고뭉치 같기도 하다.

나는 손을 쫙 펴 손등과 손바닥을 요모조모 살폈다. 부러지지 않은 곳 말고도 치료할 부분들을 따지기도 하고 거스러미를 손톱으로 잘라내기도 했다. 의무실도 가야 하는데. 둔하고 아릿하게 지속적으로 거슬리는 팔 통증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시간을 죽이며 내 몸의 죽은 세포들도 좀 떼어내고 있다 보니 머릿속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누가 건드린다고 해도 당장 분노나 수습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올 일은 없게 되었단 뜻이다.

“형.”

채원우가 오늘 안에만 아주 닳도록 부르고 있는 내 호칭을 입에 담았다. 사실 닳을 게 그것 말고도 또 있지. 나는 내 후끈한 입술과 마약성 진통제를 부어 먹먹하니 아픈 팔을 떠올렸다.

“채원우 헌터.”

고갤 들어 벽에 기댔다. 건달 같은 자세로 채원우를 응시했다. 채원우는 내가 마치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직된 자세였다.

“담당하는 연구원이 누구예요?”

“선지연 수석 연구원님이요.”

“나는 외주 인력이라 따로 고정 담당은 없습니다.”

“네.”

“그러니까 그 선지연 수석 연구원님 뵈러 가죠.”

“왜요?”

“뻔히 가이드가 있는 헌터가 가이딩을 촉진하는 대체 약품을 복용했습니다. 둘 중 하나겠죠. 헌터가 나를 못 미더워하거나 내가 부족하거나.”

“…….”

“그러니까 가자고요. 보고하러.”

비아냥대려는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말투는 평이했다. 그렇지만 내가 얼핏 듣기에도 내가 마음잡고 채원우의 양심을 자극하려는 건 느껴졌다. 양심이 있긴 하냐? 채원우는 미지의 생명체였다.

“가죠. 둘 중 어떤 경우든 내 책임이니까.”

피곤했다. 빨리 갔다가 의무실에 가서 치료받고 누워 잠이나 내리 자고 싶었다. 손을 들어 미간 사이 콧대를 꾹꾹 눌렀다. 채원우는 대답이 없었다. 왜 이렇게 대답이 없지? 나는 고갤 들었다.

“……채 헌터?”

채원우는 대답을 못 할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꾹 물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눈이 크면 눈물샘도 큰가? 커다란 눈물이 뚝뚝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소리도 없이 우는 게 애를 훨씬 서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지금 서러울 게, 자존심이 상해야 할 게 누구인지 따져 보면 말 그대로 적반하장의 꼴이었다. 나는 한마디 하고 싶었다. 아니, 열 마디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채원우가 너무 서럽게 울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뚝뚝 눈물을 흘리는 녀석의 얼굴은, 심지어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예쁘장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당연했다.

“저기요. 채원우 헌터…….”

“제가 먼저 이유 말하면 안 될까요?”

“그, 그래요. 말해 봐요.”

채원우가 고갤 들었을 때 눈물에 뒤엉긴 속눈썹이 보였다. 눈이 잘 안 떠지는지 채원우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사실은…….”

그 때 채원우의 뒤쪽으로 연구원들이 보였다. 서로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쪽이 아니라 차트를 하나 나눠 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이 상황을 들키면 안 될 듯싶어서 채원우를 끌고 바로 옆의 비상구 계단으로 빠져나왔다. 문이 다 닫히기 직전에 그들의 발소리가 지척까지 가까워졌다가 곧 사라졌다.

“…….”

“…….”

채원우는 여전히 고갤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고 나는 고장 난 것처럼 우는 채원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머리도 덜 말리고 왔는지 채원우의 머리카락 끝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이 능력이라고…….”

“…….”

“지금 온몸으로 수분을 뽑아내는 겁니까?”

이번에는 비아냥이 아니었다. 어쩐지 기운이 쏙 빠졌다. 허무한 것 같기도 했다. 채원우는 검지의 두 번째 손마디로 눈물을 마저 훔치고 고갤 들었다.

“제가 형 죽일 것 같아서 그랬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진심임을 가르쳐 줬다. 그게 아니었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채원우를 오래 안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채원우는 거짓말을 못 했다. 솔직하고 본능적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더 말해 주길 기다렸다.

“그 약은 강제로 능력을 눌러서 몸의 밸런스랑 맞추는 건데…… 밤에만 먹었어요. 정말로요. 잠든 사이에 또 형한테 해코지하거나 그럴까 봐…….”

저번에 라면을 나눠 먹었던 밤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어느새 하나의 해프닝으로 잊고 넘어가려는 걸 채원우는 여전히 끌고 있었던 거다. 약까지 먹어가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의도로 한 일이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벽에 기대니 차가운 기운이 등부터 머리까지 쭈뼛 타고 올라왔다. 비스듬히 기대서 시선을 떨구었다.

“그거 먹으면 내 가이딩과 충돌해요. 애초에 그 약 성분 자체가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거니까.”

“몰랐어요……. 지금까지 항상 먹어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숨긴 건, 내가 기분 나빠할 줄은 안 거죠?”

잠시 망설이던 채원우가 고갤 저었다. 봐. 얘 거짓말 못 하잖아.

“그냥…… 형이 나 괴물로 보는 거 싫어서…….”

“누가 누굴 괴물로 본다는 겁니까. 고향 가면 나도 똑같은 괴물이에요. 이쪽 세계를 잘 모르시는 어르신들한텐 특히 더 그렇고.”

픽 웃었다. 채원우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 정도 다가갈 정도로 우리 사이가 괜찮아졌나요?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용인했다.

“바보 같은 짓은 한 번으로 족해요, 괴물로 보지도 않고. 선의로 한 거짓말하고 약 복용이 무슨 결과를 냈는지 보라고요. 채원우 씨 바이털은 안 좋고 보나 마나 안정화 수치는 떨어졌을 겁니다. 그럼 나는 파트너 부적합 판단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그럼 저랑 헤어지는 거예요?”

“채원우 헌터는 말을 이상하게 하네요……. 틀린 말은 아니니 그렇다고 칩시다.”

채원우가 더욱 다가왔다. 기운이 빠져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나와 달리 채원우는 여전히 기운이 남은 모양이다. 나는 손목을 들어 확인했다. 열이 있고 심장 박동도 여전히 빨랐다.

“또 약 먹을 겁니까?”

“아니요.”

대답 한번 빠르다. 나는 시계에서 손을 떼고 채원우의 볼을 감쌌다.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에라 모르겠다. 복수다, 하는 마음으로 채원우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찹, 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채원우의 짧은 뒷머리를 바싹 움켜쥐고 당겼다.

“입술 열어봐요.”

가까이 다가왔을 때 중얼거렸다. 울어서 촉촉해진 채원우의 입술이 열렸다. 내 입술을 스치며 열렸다. 간지러웠다. 나도 모르게 목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났다.

채원우가 손을 뻗더니 내 허리춤을 잡았다. 다릴 앞으로 쭉 뻗고 등만 벽에 기댄 자세라 평소와 다르게 키가 많이 낮아져 있었다. 채원우는 허릴 깊게 숙였다. 나는 채원우의 벌어진 입술에 내 입술도 붙이고 숨을 훅 뱉었다.

“흑…….”

놀란 채원우가 얼굴을 떼려고 하길래 키득대고 머리칼을 더욱 잡았다. 그러곤 고갤 틀며 벌어진 입속으로 혀를 넣었다. 속살에 가까운 혀와 입 안쪽 살들을 부드럽게 쓸었다. 내밀한 점막인 만큼 가이딩 효과는 더 클 거다.

채원우의 어깨 위로 부목을 댄 팔을 걸쳤다.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손목을 돌려 채원우의 고개 너머로 바이털을 확인했다. 열은 떨어지고 있고 그래프도 안정화에 느리게 가까워지고 있는데 심장만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더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채원우가 내 몸을 밀었다.

“나, 나하고 키스하고 있잖아요.”

얼굴을 찌푸린 채 풋내기처럼 헐떡이는 주제에 나를 노려본다. 나는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훔치며 대꾸했다.

“키스 아닌데. 치룐데요.”

“치료여도…… 의사가 다른 곳 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의사 아니잖아요.”

“의사 아니어도 제 거는 맞잖아요.”

“그렇게 됩니까?”

“왜냐면 형은 제, 제 가이드잖아요. 법적으로.”

우리의 관계는 한시적이며 가이드가 아닌 양백겸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정정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더 우스워지는 것이다. 지금 나는 가이드로서 채원우 헌터와 치료 행위를 하고 있는 거니까. 부정하는 순간 나는 양백겸이 되어서 채원우와 키스하는 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채원우의 말도 안 되는 무논리 무맥락 우기기를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만큼은 채원우 것이었다.

“그렇다고 쳐요.”

채원우의 목을 다시 바짝 당겼다.

“지금부터 1분 27초만 더 하고 나 팔 치료하러 갈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