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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21화 (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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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어놓고도 아차 싶었다. 선을 제대로 긋자던 사람 주제에 그 어느 때보다 감성적인 말이었다. 머쓱해도 모르는 척 채원우를 바라보았다. 채원우는 가만히 있다가 뒤를 돌아본 채로 대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곤 쏙 들어간다. 막 닫히려는 문틈을 보다 중얼거렸다.

“거짓말.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거든요…….”

갑자기 던전이 터지고 괴물이 쏟아져 나오고 괴물을 잡기 위해 사람들 중에서 괴물이 나온 것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부엌으로 가 찬물을 마셨다. 한 잔을 쉬지 않고 비우고 나니 머리가 띵했다. 그래도 뭔가 답답해서 한 잔을 더 받으려는 참이었다. 저 구석에서 아주 작은 거슬림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확인하니 새끼손톱 길이만 한 알약이었다. 흰색 타일과 싱크대 상판에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 이리저리 보다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벌써부터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컵을 고쳐 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른 취침이었다.

* * *

채 해가 뜨기도 전에 우리를 깨운 건 경보였다. 알림이 집요하게 울렸다. 불쾌감을 일으키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높은 신경질적인 전자음이 몸이 깨기도 전에 머리부터 깨게 만들었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 소리는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소리일 거다. 던전이 터졌다는 알림이었다.

마침 방송이 나와 채원우와 내가 소속된 팀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전역 없는 군대 꼴이구만.”

눈만 겨우 반을 뜬 채로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었다. 건 벨트를 차면서 밖에 나오니 마찬가지로 채원우가 유틸리티 벨트를 어깨부터 허리까지 가로지르도록 차고 있었다. 나를 본 채원우가 허리에 달려 있던 두 개의 고글 중 하나를 빼 던졌다.

“아. 고맙습니다…….”

고작 두 번째 출동인 만큼 고글 챙기는 게 익숙지 않았다. 고글을 목에 걸고 현관에 차키처럼 걸어둔 방수 반다나를 목에 걸었다. 이래 봤자 방수가 무색하게 젖을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인이어를 귀에 끼자마자 어느 구역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채원우와 나는 제2헬기장으로 향했다. 차가 아니라 헬기로 수송하는 걸 보니 이번에도 외곽이거나 아예 서울 바깥일 모양이었다.

“모두 도착했나?”

헬기의 소리에 잘 들리지 않지만, 대충 이런 말이겠거니 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뒷짐을 지고 비장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엔 졸음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대단들 하다. 솔직히 난 졸리다.

“브리핑은 가면서 받도록 하고 갈 길이 머니 일단 모두 탑승!”

갈 길이 멀다고?

복잡한 마음으로 헬기에 올라타는 내 뒤로 채원우가 가볍게 허리를 잡아주는 게 느껴졌다.

“채원우 헌터, 제가 한 떨기 꽃은 아닐 텐데요.”

“알아요.”

안다는 것치고는 여전히 손이 내 허리에 있었다. 가야 할 길도 멀다 하고 시간도 없으니 입씨름하진 않았다. 솔직히 덕분에 편하게 타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X자로 맨 뒤 태블릿을 받았다. 두 명당 하나로 지급되기 때문에 채원우와 나는 바짝 붙어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미션을 확인해야 했다.

미션. 퀘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퀘스트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이 모든 게 게임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바보 같아도 확실히 덜 울적하기야 할 거다.

던전 발생 지역은 경기도와 서울이 맞닿는 곳에 있는 흔하디흔한 야산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란 걸 생각하면 던전이 가장 많이 생겨나는 곳은 아마도 산일 거다.

“저 여기 가봤어요.”

문득 채원우가 내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도 헬기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들렸다.

“산이 험하고 나무가 많아요. 형, 저 나무가 많은 곳에선 힘을 잘 못 써요.”

“왜요?”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거든요.”

젠장할. 갑자기 앞으로 있을 미션이 걱정되었다. 나는 황급히 스크롤을 내려 채원우와 내가 맡은 일을 확인했다.

“개새끼들 아니야?”

<채원우 헌터/양백겸 가이드(지원) : 경로 확보>

말이 지원이지, 맨 앞에서 활로를 뚫어야 하는 일이었다. 황급히 채원우를 돌아보자 어쩐지 담담한 표정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 * *

새벽의 산은 더욱 어둡다. 헬기가 허공에서 마구 흔들렸다. 거세게 부는 바람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하강해야만 했다.

영화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온갖 능력과 일이 난무해서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들이 쫄딱 망했다는 이 세상에서도 일단 기본적인 것들은 아날로그로 이뤄졌다. 허공에서 마구 흔들리는 사다리를 타고 안전하게 내려가기 위해 담력도 길러야 했고 무엇보다 허벅지와 코어 근육이 필요한…….

“한탕 해서 이 바닥 뜨고 만다!”

나는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서 아무도 못 듣는다.

땅에 착지하고 나니 다리가 떨렸다. 그냥 내려가는 일이 아니다. 온몸에 힘을 주고 그 상태로 그 어느 한 군데도 과하지 않게 다리와 손을 움직여야 하는 거다. 내려오자마자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고글을 끼고 반다나를 끌어 올렸다. 인이어를 하고 고글 너머로 채원우와 시선을 나누었다.

―하달받은 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전방 지원팀이 먼저 들어간다. 게이트는 2분 간격으로 30초씩 여닫힌다. 파악된 몬스터는 은신 능력이 높은 소형 설치류로,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모두 건투를 빈다. 살아서 나오도록.

채원우가 손을 뻗어 내 어깨에 부착한 소형 탐조등을 켰다. 나도 채원우의 것을 켰다. 그러며 속삭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이번에도 잘 지킬게요.”

뭘. 코웃음을 쳤다.

“채원우 헌터가 안 죽어야 나도 사는 거, 기억하고요.”

* * *

높이 190센티미터에 너비 100의 게이트가 열렸다. 채원우와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채원우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평소 얼굴만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넓고, 단단해 보이는 등에 손을 대고 권총을 고쳐 쥐었다.

“형. 미리 사과할게요.”

“네?”

나는 게이트를 넘자마자 나무가 마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와 채원우의 말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바로 양옆에서 엄청난 속도로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오른쪽으로, 채원우는 왼쪽으로 등을 맞대고 섰다. 어두운 와중에 내 권총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며 소리가 울렸고, 채원우가 뭉쳐 올린 끈끈한 진흙탄 소리 또한 들렸다.

발포하며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내게 달려드는 새빨간 눈동자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숨이 절로 가빠졌다.

다행히도 무리를 짓는 습성의 몬스터는 아닌지 내가 두 마리, 채원우가 세 마리를 해치우고 나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1분 14초가량 남아 있었다. 이 남은 시간 동안 어느 정도 앞으로 전진해야만 했다.

말하지 않아도 채원우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앞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채원우의 등에 대고 엄호했다.

“형, 진짜 미안해요.”

“조금 전에도 그렇게 말했죠! 대체 뭡니까?!”

“그냥요. 오늘 좀 무리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채원우가 팔을 앞으로 뻗었다. 손등끼리 맞대게 팔을 돌린 뒤 허공을 움켜쥐었다. 채원우의 손등에 힘줄이 불뚝 솟았다.

나는 몸을 빠르게 돌려가며 채원우의 바이털도 확인했다. 안 그래도 작은 시계에 온갖 정보가 표시되어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채원우의 심장 박동과 체온이 빠르게 오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

잠깐 뒤를 돌아볼 때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물기를 한껏 먹은 진흙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진흙 사이에 골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돌과 나무뿌리를 밀고 있었다. 물로 쓸어내 봐야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는 나무를 치울 순 없다. 그러니 차라리 옆으로 조금 밀어내는 거다.

나는 채원우의 영리함과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 그게 가능한 대단한 능력, 그리고 해내는 무식한 방식에 말을 잃고 말았다.

“가요.”

채원우가 헐떡이며 고갤 까딱였다. 나는 채원우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나 채원우가 고갤 흔들어 빼냈다.

“저 아직 괜찮아요. 초반에 최대한 길 뚫어두는 게 좋아요. 던전 안에 있어서 능력으로 만든 지형 변화에는…….”

“쿨타임이 있죠. 빌어먹게도.”

채원우의 말이 맞았다. 나는 칼을 빼내 장갑 홈에 칼자루를 넣었다. 빠지거나 미끄러지지 않게 단단히 잡고 다른 손으로는 탄창을 갈았다.

“엄호는 내가 할 테니 할 수 있을 만큼 하고 한계 전에 나한테 말해야 합니다. 어차피 내가 확인할 거지만.”

“엄호는 나도 할 수 있…….”

“그렇게 능력 펑펑 쓰다가 그로기 상태가 오거나 넉다운되면 회복에도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때 내가 채 헌터 두고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채원우 헌터 살리려다가 죽는 꼴 보고 싶어요?”

채원우는 거세게 고갤 저었다. 붕붕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겨우 웃으며 채원우에게 재촉했다.

“출발합시다. 핵심 찾으러.”

반다나로 가리고 고글을 쓰고, 심지어 더럽게 어두워 채원우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안색이 예상되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엄청 창백해져 있겠지.

나는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헌터청에서 채원우를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네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너를 얼마나 써먹을 수 있는지,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그 데이터를 쌓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채원우에게서 데이터를 최대한 뽑아낼 수 있도록 백업하는 용도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하지만 사실이라면 뭘?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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