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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20화 (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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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는 투덜거림을 입에 단 채로 부엌을 뒤적였다. 이것저것 사둔 게 많았다. 찬장이 과자로 그득그득했다. 정작 이것들을 카트에 담은 사람이 부엌에 도통 들어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 과자들을 과일 담는 나무보울에 담았다. 채원우의 방문 앞에 갖다놓고 담배와 라이터를 챙겼다. 주머니에 쑤셔 넣는데 동그란 게 만져졌다. 귤이었다.

오늘 채원우는 저녁을 먹었을까? 고민하다가 과자들 위에 덩그러니 올려놨다. 그리고 숙소를 나섰다.

* * *

흡연 부스에는 나밖에 없었다. 가로등이 켜져 그럴싸한 분위기를 냈다. 날이 쌀쌀해서 이제는 야상 점퍼 하나로는 부족했다. 가스가 거의 다 떨어졌는지 라이터는 몇 번이고 휠만 돌았다. 손끝이 얼얼할 쯤이 되어서야 겨우 불을 붙였다.

애연가가 아니라서 한 개비를 오래도록 공들여 피는 타입이었다. 멍하니 허공에 한숨 같은 연기만 흘리는데 닫혀 있던 부스 문이 벌컥 열렸다.

“…….”

“…….”

타이밍도 더럽게 안 좋지. 하필 들어온 사람은 전에 복도에서 마주쳐 소소한 시비가 오갔던 헌터였다. 근접전 훈련을 했는지 입가가 터져 있었다.

나는 싱긋 웃고 고갤 까딱였다. 무시할 줄 알았던 건지 아니면 싫은 티를 낼 줄 알았는지 상대 헌터는 흠칫하더니 엉겁결에 마주 인사를 했다.

‘빨리 피우고 나가야지.’

볼이 옴폭 들어가도록 담배를 빨았다. 순식간에 제법 많은 양이 탔다. 옆에서 남자가 은빛의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게 보였다. 솔직히 안 보여도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기요.”

소리 좋네, 하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음. 네.”

1년 후에 내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남자였다. 나는 일단 서글서글하게 나가기로 했다.

“채원우가 그쪽한테 집착하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그런 걸 물으신다고요.”

“담배 다 태우자마자 나갈 기세인데 그럼 본론부터 얘기하지, 냄비 물 다 끓을 때까지 죽치고 기다립니까?”

헌터들은 은근히 성격이 급한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 이유로 오늘내일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제법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말꼬리를 잡거나 맞장구를 치거나, 둘 다 좋은 대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일단 묵묵히 듣기로 했다.

“채원우와 매칭하기로 한 가이드, 그쪽이 처음 아닙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다 안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파트너가 없었을 테고요.”

나는 남자와 내 사이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털고 웃었다.

“그럼 설마 그것도 몰랐으려고요. 채원우 헌터와 각별한 사이는 아니어도 이 정도는 아는 사이입니다.”

“……가이드가 오랫동안 없던 헌터의 기분은 압니까?”

“보시다시피 전 가이드라 헌터의 기분을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어림짐작밖에는 되지 못하겠군요.”

애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100퍼센트의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남자는 조금 욱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채원우는 또라입니다. 헌터청에 소속된 헌터 중에서, 아니다. 대한민국 헌터 중에서 걔보다 더 오래 약을 먹은 놈은 없을 거예요. 그러는 와중에 만난 게 그쪽이니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고요.”

“저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상냥하시네요.”

담배는 어느새 반이 탔다. 그런데도 평소와 달리 충분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줄담배를 태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걱정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걱정한단 게 아니라.”

남자는 목을 긁는 소리로 으르렁댔다. 이제 보니 저게 남자의 목소리를 독특하게 만들었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바깥쪽의 가로등 불빛을 통해 목에 10센티가량 남은 흉터가 보였다. 아마도 성대를 다치게 했을 만큼 깊은 상처일 거다.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면 하고 안 된다면 1년 채우고 도망가는 게 좋을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슬슬 짜증이 났다. 나는 필터까지 탄 담배를 지져 끄고 한 대 더 물었다. 남자는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그러더니 사람 긁는 소리를 냅다 했다.

“그 새끼가 헌터 죽였단 얘기도 들었습니까, 그럼?”

“…….”

“다섯이었던가, 여섯이었던가.”

“저기요.”

나는 대외적 미소를 짓고 남자를 바라봤다.

“담배 피우러 온 거 아닙니까? 아깝게. 다 탔는데요.”

“…….”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가시죠.”

에이 씨발, 입맛 다 버렸다. 나는 새로 문 것도 몇 번 뻐끔거리다가 말았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혀를 내밀어 그 위에 꽁초를 지져 끈 뒤 엄지와 검지로 재떨이를 향해 툭 던졌다.

“아주 좋은 밤 되세요.”

나는 별로 좋은 밤이 되지 못할 것 같지만.

부스를 나가려고 문까지 열었었다. 평소라면 정말 그냥 나갔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지. 보름달이라 사람이 회까닥 하나. 나는 평소답지 않게 몸을 돌리고 사납게 뱉었다.

“근데 씨발, 왜 자꾸 걔만 괴물 취급합니까? 내가 여기서 같은 헌터 고의로든 미필적 고의로든 실수로든 죽인 케이스를 한두 개 아는 줄 알아? 댁은 그렇게 결백해? 너나 나나 걔나 어차피 저 바깥 사람들 눈엔 다 괴물이야.”

숨도 쉬지 않고 우다다 뱉고 나니 조금 속이 후련해졌다. 뻥이다. 후련하긴 개뿔. 더 화가 난다. 목도 바짝바짝 탔다. 사람은 화를 내려고 화를 낸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참을 인을 세 번 손바닥에 그리면 효과가 좋다는데 나는 참을 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끝내 삿대질까지 했다.

“그쪽이 오지랖 안 부려도 어련히 1년 잘 채우고 생명 수당 쏠쏠히 받고 계약 끝낼 생각이니까 나한테 채원우 얘기하지 마십쇼. 걔가 하는 얘기나 공식적인 기록 아니면 알 생각 없으니까. 씨발, 스포일러 금지라고.”

얼빠진 얼굴을 한 헌터를 두고 부스 문을 쾅 닫았다. 기분 풀려고 나와서는 오히려 기분만 나빠진 꼴이었다.

머리를 털고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죽여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좀 속이 후련해졌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가서 비누로 손 씻어야지…… 하는 참이었다.

“…….”

채원우가 보였다.

다 들었나?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아, 양백겸. 미쳤지. 왜 문을 열어놓고 지랄을 했을까. 다 들었겠지.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던전 존 바깥에서도 헌터들의 감각은 일반인의 1.5배라니까.

할 말이 없어 서로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을 때였다. 하나의 눈치 게임이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여나. 그리고 채원우가 입을 열었다.

“귤…….”

채원우가 손을 내밀었다. 각 맞춰 잔풀 하나 없이 정리한 조경 속의 은은한 조명에 귤이 반짝반짝 빛났다.

“고마워서요.”

그거 말하러 쫓아왔니. 저 안에 있는 놈은 나한테 다짜고짜 네가 나한테 집착하니 마니 지껄이던데. 네가 헌터 살인마니 뭐니 네 허락도 없이 떠들던데. 너는 고작 귤이니.

나는 한숨을 꾹 삼켰다. 한숨을 쉬면 채원우의 귀에 들릴 게 뻔해서였다. 그러곤 느리게 채원우에게 다가가서 귤을 가져왔다. 말랑말랑한 꽁무니에 손가락을 폭 넣고 반으로 갈랐다. 상큼한 냄새가 터져 나왔다. 나는 반만 채원우에게 돌려주며 피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같이 살면서 인사도 안 하는 룸메이트한테 하나 다 나눠주긴 아깝네요.”

채원우가 배시시 웃었다. 방 너머에서 했던 말대로 여전히 예쁘긴 했다. 특히 주홍빛의 야외 조명 속에서는 채원우의 속눈썹이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얹어주었다. 솜사탕이 떠오르는 헌터 살인마. 나는 채원우를 보다가 고갤 저었다.

“일단 방으로 가죠. 이젠 춥네요.”

“이럴 땐 제 능력이 불이면 좋겠어요.”

“됐습니다. 채원우 씨처럼 거친 테크닉을 지닌 사람이 불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방관분들께 죄송하네요.”

그 말엔 또 동의하는지 채원우가 웃었다. 그 모습에선 도무지 대여섯 명의 동료 헌터를 죽인 사람을 연상할 수 없었다.

이제 인정하자. 나는 채원우가 궁금하다. 적당히 선을 지켜 비즈니스 수준으로 알고 빠질 수 없을 정도로.

* * *

방으로 돌아왔다. 담배 냄새가 남아 있을까 봐 내가 채원우에게 거리를 두려 할 때마다 채원우는 옆에 바짝 붙었다.

‘제가 체온이 높잖아요.’

그 말대로 채원우는 따뜻했다. 춥지도 않은지 반소매 티만 입고 나온 채였다.

애써 만나서 들어온 게 무색하도록 채원우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채원우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채원우 헌터.”

“네.”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냥 옆에서 자꾸만 치대던 채원우가 갑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만나는 것도 기피하는 게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채원우라서는 아닐 거다. 누구든 직장 동료든 반 친구든, 갑자기 거리를 두면 신경 쓰이지 않아?

어쩐지 할 필요가 없는 자기변명을 주절거리며 단호하게 나갔다.

“저희 매칭 훈련해야 해요.”

“…….”

“처음에 그렇게 나간 것부터 애초에 말이 안 되었던 겁니다.”

“그래도 잘됐잖아요.”

“그게 운이나 요행이었다면요?”

“…….”

“채원우 씨 몸에 남은 약 기운이 촉진해 준 안정화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이제 약도 안 먹을 텐데 다시 나갔을 때 내가 20퍼센트의 힘밖에 내지 못하면요?”

채원우가 시선을 피했다.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에 나는 당장 그 손을 잡고 고갤 바짝 붙였다.

“다음 훈련, 3일 후예요. 내가 어떻게든 당겨볼 테니까 다신 피하지 마세요.”

“……제가 피하고 있던 거 알고 있었어요?”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채 헌터는 이상한 곳에서 서투르니까 그냥 채 헌터답게 굴어요.”

채원우가 고갤 끄덕였다. 잔뜩 풀 죽은 상태로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보다가 물었다.

“혹시 내가 싫어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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