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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9화 (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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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훈련으로 엄청나게 집중력을 쓴 뒤라 그런가 어쩐지 뇌가 말랑말랑해진 기분이 된 나는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갤 저었다.

“에이. 그럼 안 되죠.”

새삼 귀해진 물을 홀짝이며 검지와 중지를 폈다.

“나 말고 채원우 씨 물도 뽑아야죠. 생각하니 채원우 씨 능력 진짜 좋네요. 이래서 원소계가 귀한 대접 받나 봐요.”

헌터는 사람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고 약간 사물 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가이드도 별다르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채원우는 아주 귀한 물건일 거다. 보통 사람들 눈에도 그럴 테고 헌터청 눈에도 그렇지 않을까?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채원우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럼 이 세상에 형이랑 저랑 둘만 살아남을 수도 있는데.”

물을 쓰는 사람은 채원우 말고도 있다. 채원우처럼 물을 뽑아낼 수는 없어도 더러운 물을 정화할 수는 있겠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을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구구절절 대봐야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재미도 없고 해서 나는 어깰 으쓱하고 말았다.

“뭐 어때요. 난 든든해서 좋고 채원우 씨는 쇼크 걱정 없어 좋겠네요.”

채원우가 활짝 웃었다. 우리 둘만 남으면 최후의 인류가 될 게 뻔한 데도 채원우는 동화 속 해피 엔딩을 들은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나는 채원우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쫀드기를 쑥 넣었다.

“그럴 일이 안 오게 비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음, 네.”

어쩐지 오늘따라, 아니, 조금 전부터 채원우는 순했다.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할 수도 있었고 피곤해 보인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여튼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보였다.

나는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피곤한 참이었다. 어제부터 별일이 다 있었으니까 일찍 쉬는 것도 좋겠지.

“다 먹었으니까 이제 일어날래요?”

채원우가 하품을 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것 봐. 졸린 거 맞다니까.

* * *

씻고 나왔을 때 채원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털면서 채원우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흔들어서 깨우거나 놀라게 해서 깨우는 방법은 오늘 아침처럼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쓰지 않는 게 좋다. 방어기제가 발동하면 내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채원우 헌터, 들어가서 자요.”

“…….”

“채원우 헌터.”

눈가를 움찔하는 게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닌 모양인데. 조금이라도 각성한 상태라면 흔들어서 깨워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마음가짐과 다르게 손은 몇 번이고 뻗었다가 머쓱하게 돌아오길 반복했다.

“채원우.”

고갤 기울여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불렀다. 다음으로는 한 글자 한 글자 늘려 불렀다. 곧 눈꺼풀이 움찔하더니 들리는 게 보였다. 이제 됐겠거니 싶어 손을 뻗었다. 막 볼에 닿은 순간이었다.

“……형.”

채원우가 내 손목을 잡아 비틀더니 눈을 끔벅였다.

“아……. 미안. 미안해요. 아팠죠.”

채원우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잠에서 덜 깼는지 비척댔다. 솔직히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오늘 아침 채원우의 사색이던 얼굴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나만 떠올리는 건 아닐 거다. 채원우는 아침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선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요.”

“고작 손목 잡은 거 가지고 그렇게 유난 떨면 내가 민망한데.”

부러지진 않아도 염좌까진 갈 수도 있었다. 방어기제가 발동한 헌터들의 신체 능력이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지는 아직 연구 영역이었다. 내가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내가 몸이 약했다면 정말 부러졌을 거다.

“들어가서 자요. 목 꺾고 자다가 담 오면 오래가요.”

채원우는 손을 뒤로 숨긴 채 기가 잔뜩 죽어선 고갤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자신이 쥐고 틀었던 손목을 잡고 들여다보며 울상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채원우는 내게 손도 대지 못한 채 고개도 들지 못했다. 좀…… 안쓰러웠다. 헌터를 한두 명 만난 게 아닌데, 실수했다고 이 정도로 주눅이 드는 애는 처음 봤다.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을 가져와선 채원우에게 건네줬다.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이었다.

“파트너가 처음이잖습니까.”

나는 덤덤히 말했다. 그렇게 말하려고 애썼다.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렸다.

“원래 이런저런 실수를 하면서 맞춰가는 거예요. 괜히 매칭 훈련을 주기적으로 받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채원우 헌터,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자면 됩니다.”

그 말에 채원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툭 떨어진 고개로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내 손까지 잡은 채 들이켰다.

“형. 잘 자요.”

고작 잘 자라는 말 한마디였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아주 흔하디흔한 말인데 주문처럼 강력했다. 내가 잘 자지 않으면 얘가 울 것만 같았다.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방으로 돌아가는 채원우의 뒤에 대고 중얼거렸다.

“채원우 헌터도 잘 자고요.”

같은 숙소를 쓴 지 며칠이 지났는데. 처음으로 한 잘 자란 인사라니. 허공에 들었던 손을 머쓱히 내렸다.

* * *

<매칭 테스트 및 트레이닝 과정 – 연기 : 일정 미정>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공지를 보며 커피를 들이켰다. 얼음을 씹으며 이번이 세 번째 연기임을 깨달았다. 일주일에 세 번 있는 트레이닝 과정이 세 번 연기되었다. 흔한 일은 절대 아니다.

이미 커피는 다 마셨다. 나는 머신에 캡슐을 하나 더 넣으며 사유가 무엇인지 궁리해 봤다. 어차피 물어봐야 말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채원우의 파트너가 된 이후로 나는 툭하면 벽에 부딪히는 꼴이 되었다. 이것도 말해 줄 수 없고 저것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이전의 파트너와도 아예 없던 일은 아니지만 이게 유독 거슬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채원우와 있으면 의외의 일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일 거다.

“연기란 말이지…….”

안 될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다. 훈련과에 내선으로 연결이 되길 기다리며 빈 컵에 얼음을 왕창 때려 부었다. 때마침 샷이 모두 내려졌다. 찬물에 샷을 부으며 막 연결된 상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수고하십니다. 양백겸 가이드입니다. 코드는…….”

새로 부여받은 코드를 읊고 나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안내가 나왔다. 새로 완성된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나는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

―훈련과 특수 헌터 담당 이민영 주무관입니다.

“양백겸 가이드입니다. 파트너 헌터는 채원우입니다. 채원우 헌터의 코드는…….”

―아, 양백겸 가이드님. 아닙니다. 코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엇 때문에 연락 주셨죠?

목소리 톤이 확 바뀌었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채원우가 유명할 이유는 아주 많으니까―외모나 성격이나 능력이나 그간 친 사고나 혹은 네 가지 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배정된 훈련 과정이 자꾸만 연기되어서요. 제 가이드 수치에 따르면 일주일에 세 번, 출동 시 두 번의 매칭 훈련을 필수로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잠시만요…….

자음시만요, 라고 들리는 흥얼거리는 말투에 이어 타이핑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난처한 기색이 느껴졌다.

―파트너라고 하셨죠?

“네.”

―양백겸 가이드 님 맞으시고요.

목소리에서 약간의 미심쩍음이 느껴졌다. 계약직이라고 하더라도 근속 수준이라 새삼 의심받을 일도 없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맞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음. 아니요. 저희도 자세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보이기론 파트너분의 일신상의 이유 때문이라고 나와 있네요. 채원우 헌터가 혹시 병가라도 낸 건 아닐까요?

이제야 왜 갑자기 의심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병가를 냈다면 파트너인 내가 모를 수가 없는데 그걸 굳이 훈련과에 묻는 게 수상한 거지. 그렇지만 난 파트너가 맞다. 채원우가 병가도 내지 않았고 일신상의 사유도 없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으니까.

나는 엄지손톱으로 입술 가운데를 꾹꾹 누르다가 고맙단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까맣게 죽은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정말 그랬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야?”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뿐이다. 안 그래도 상식 바깥의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내 삶에서 이해 불가의 상황은 채원우가 아니어도 이미 충분하단 말이다.

* * *

이해가 안 되는 일의 정점은 채원우한테서 일어났다. 다른 훈련 과정을 밟고 고단한 몸을 끌고 숙소로 돌아온다. 채원우의 신발이 보인다. 그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문이 닫힌 채 열리지 않게 되어 얼굴을 못 본 지도 사흘이 지났다. 나는 채원우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서너 번.

“채원우 헌터.”

결국 문을 두드리지는 않고 조금 다가가서 조용히 불렀다.

인기척이 들린다.

“잘 지내는 겁니까?”

“…….”

“혹시 몬스터 침 같은 거 맞아서 다쳤어요? 아니면 변신했거나?”

“……아니에요.”

“채원우 헌터가 모습이 괴물로 변해도 제 파트너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래. 계약 기간인 1년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괜히 나한테 변명하듯 중얼거리며 채원우를 살살 달랬다.

“뭔가 문제가 있다면 말하세요. 도와주게.”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여전히 예뻐요.”

내가 걱정을 했던 건가? 듣고 보니 그간 내가 채원우의 방문을 지날 때마다 잠깐 멈춰 서고, 부엌에서 수저 두 세트를 들고 고민했던 모든 게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러면 걱정을 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뭐가 여전히 예뻐, 예쁘긴.

……그래. 채원우가 예쁘고 귀엽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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