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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6화 (1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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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가방 속에. 던전은 재난과 불행이 공평하게 섞인 것과 같다. 헌터청 소속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은은한 불안증을 앓을 거다. 나야 말할 것도 없어서 호신용이자 마음의 부적 같은 의미로 단검을 들고 다녔다. 채원우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채원우를 밀어내려다가 그의 팔이 아직도 떨리는 걸 느끼고, 밀어내려던 손으로 천천히 두드려줬다. 무의식중에 사람을 죽일 뻔했다. 아직 스물이고 어렸다. 놀랄 만했다.

옛날에 설문을 한 적이 있다지. 헌터를 대상으로 한 설문이었다.

Q. 자신을 괴물이라고 여긴 적이 있습니까?

A. 있다(82%). 없다(7%). 모르겠다(11%).

채원우가 그 설문을 할 당시에 여기에 있었을지 없었을지도 모르고 설문에 응답했을지 안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채원우는 ‘없다’라고는 답하지 않았을 것 같다.

* * *

의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소리 들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싸웠냐?!”

사람 안 가리고 반말하기로 유명한 의무관이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채원우는 드레싱을 받으면서도 흘끗흘끗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내게는 그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가 먼저 시작했어.”

혀를 끌끌 차며 물어온 말에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채원우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아니라고 항변하려는 기세길래 바로 말했다.

“쟤 코골이가 심해서 전화기를 던졌습니다.”

“좀 참아주지!”

“그걸 어떻게 참습니까? 의무관님은 바로 옆에서 소음이 들리는데 주무실 수 있으십니까?”

“뭐야. 바로 옆에서? 둘이 한 침대 쓰냐?”

그제야 차트를 확인한 의무관은 수상한 탄식을 흘렸다. 아하, 하는 그 감탄사가 아주 묘하고 기분 나빴다.

“무슨 생각 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마도 가이딩을 빙자한 성관계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없어도 몸을 섞는 애들이 수두룩한 곳이니까.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속궁합이 맞으면 서로 붙어 있길 권장하는 연구소 안에서는 종종 가이딩을 빙자한 스킨십을 하곤 했다. 그래놓고 바로 돌아서서 모르는 척하지만…….

어쨌든 쟤랑 나는 손잡기 이상은 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했다.

“생각하신 그런 일이 아니라요.”

“그래. 이해한다. 굳이 설명 안 해도 돼.”

자꾸 설명하려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억울하기도 했다. 차라리 진짜 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렇다고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 쟤랑 잔단 말은 아니지만……!

“그게 아니면 뭔데. 설마 쟤가 잠꼬대를 하다가 능력으로 널 죽이려 해서 네가 유리잔이라도 던졌게?”

의무관이 자신이 한 말이 웃긴지 웃음을 터뜨렸다. 채원우는 대놓고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썩은 표정이 되었다. 웃다가 뚝 그친 의무관이 징그럽게 고갤 갸웃대며 물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의무관님께서 하신 말이 워낙 말도 안 되어서요.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발꿈치로 채원우의 다리를 찼다. 채원우도 자판기처럼 웃음을 뱉었다. 다행히도 의무관은 남에게 관심이 없는지 금세 관심을 껐다. 당연히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일만 하고 열정이란 없는 직업인 정신에 감사했다.

의무관은 누가 봐도 하품을 삼키는 표정으로 채원우의 이마를 드레싱했다. 젖은 솜으로 피를 닦아내자 거의 아문 상처가 보였다. 다른 헌터들보다도 훨씬 빠른 회복력이었다. 이마와 머리는 조금만 상처가 나도 피가 많이, 오래 나서 지혈이 성가신 곳이었는데 이미 피도 멎고 있었다.

“빨간약 발라줘?”

“아뇨. 괜찮습니다.”

채원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조금 남은 피조차 손으로 닦으려는 무심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손이 이마로 올라와 닿기 전, 내가 잡아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기묘한 침묵이 발생했다.

“감염될 수도 있거든요…….”

어색한 분위기가 발생할 이유가 없는 타이밍에 발생한 침묵인지라 어색하게 덧붙였다. 채원우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갤 돌리더니 내 손목 안쪽에 입술을 갖다 대더니, 쪽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촉촉함과 약간은 거친 촉감에 등골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으아아악!”

“뭐, 뭐야!”

의무관이 내 비명에 덩달아 소릴 질렀다. 자기 때문에 난리가 난 꼴을 보면서 채원우는 실실 웃었다.

“형이 하는 건 괜찮고 내가 하는 건 이상해요?”

“제가 할 때는 가이딩할 때만, 상호 합의하에 하지 않습니까……!”

“저 지금 가이딩 필요한데.”

히잉……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입술이 닿았던 손목을 감싸고 얼이 빠졌다.

“제, 제가 먼저 그런 의도로 만져야 하거든요.”

“그럼 지금 그런 의도로 만질까요?”

어디 한 번 뽀뽀나 해볼까, 하는 듯한 능글대는 말투였다. 나는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아뇨. 채원우 헌터 지금 아주 건강합니다. 대단히 건강해요.”

제멋대로 구는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대화야 채원우의 원래 성격이니 새삼 정상이니 아니니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채원우는 아쉬운지 입술끼리 꾹 눌러 입을 앙다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밥이요?”

“네. 아침 먹어야 하잖아요.”

아침부터 온갖 소란을 떨다 보니 끼니때도 잊고 있던 거다. 채원우의 모처럼 평범한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깨닫고 보니 배가 고팠다. 의무관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더니 오늘의 핵심 메뉴를 알려줬다.

“오늘 꼬마 돈까스 나온다.”

“진짜요?”

나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꼬마 돈까스라고? 너무 좋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나물 같은 걸 좋아하고 쓴 것도 잘 먹게 되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이런 게 좋다.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그런 것만 먹을래? 건강 상한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제는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다. 너도 나이 들어보라고, 그럼 이런 게 더 맛있다며 약 올리듯 나물을 먹던 엄마. 보세요. 저 아직도 너겟이나 꼬마 돈까스에 환장한다니까요.

* * *

“왜 이렇게 늦었어. 백겸이 주려고 내가 돈까스 따로 빼놨잖아.”

“어유, 감사합니당.”

나는 싱긋싱긋 웃으며 식판을 내밀었다. 가운데 반찬 칸이 묵직해졌다. 절로 마음이 넉넉해졌다. 수북하게 쌓인 돈까스산에서 한두 알이 옆으로 기울어 어묵볶음 칸으로 섞였다.

“여기는 새 파트너님?”

“네.”

살갑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의아했다. 채원우가 말한 단편적인 정보에 따르면 채원우는 여기에서 꽤 오래 지냈던 거 같은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근속하신 이분께서 왜 모르실까.

그러나 티 내지는 않고 채원우의 식판을 당겨 내밀었다.

“아직도 성장 중이시랍니다. 많이 주세용.”

“그래, 그럼 많이 먹어야지. 수고하셔요.”

채원우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어색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용.”

“…….”

“…….”

배식해 주시는 분도 나도 어색해졌다. 날 따라 한 건 확실한데 어색하다. 좀…… 간신배 말투인데.

“마, 많이 먹고 또 먹고 싶으면 말해요. 잘 먹고 건강해야 나라 지키지……!”

“나라보단 저는 형을 지키고…….”

“잘 먹겠습니다!”

그냥 하시는 말에 또 심각하게 대꾸하려는 채원우를 잡고 끌었다. 채원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끌려오며 ‘저거, 저거 굴러가는데요’ 같은 소리나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구석까지 와서 앉히고 보니 졸지에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계약 전이야 에이전시 식구들이랑 먹지만 이후에는 각자 스케줄이 달라져서 주로 혼자 먹곤 했는데.

전 파트너와 사이가 안 좋았던 만큼 파트너와 함께하는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붙어서. 마주 본 것도 아니고 나란히 앉았다.

이제 와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채원우가 그다지 싫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 보자면…… 같다가 아니라 확실히 싫진 않다.

애가 좀 독특하고 나랑 주파수가 잘 안 맞기는 한데 그래도 악의도 없고 나를 좋아한다. 내게 호감을 가지고 그걸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을 미워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이기도 하고.

“맛있게 먹어요.”

나는 채원우의 식판을 반듯하게 정리해 주며 툭 내뱉었다. 채원우는 나를 그 커다란 눈으로 말똥말똥 보다가 ‘형두요’ 하고 수줍게 속삭였다. 수줍을 것까지 있나 싶다가 내가 픽, 픽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채 헌터님.”

“네?”

돈까스를 우물거리며 채원우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많이 드세요.”

“네.”

하마터면 ‘내가 그렇게 좋아요?’ 하고 물을 뻔했다. 연애도 아니고 어장 관리도 아니고,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고갤 절레절레 젓고 돈까스를 물었다. 냉동식품 특유의 저렴한 맛이 날 금방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행복, 먼 곳이 아니라 배식판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

“형, 오늘 밤에도 제가 잠꼬대하면요.”

“네.”

“그땐 그냥 마취총을 쏘세요.”

“뭐를 뭐 하라고요?”

“마취총이요. 4층 가서 말하면 줄 거예요.”

“미쳤습니까?”

“그게 제일 효과가 좋아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단칼에 거절했다. 얘가 지금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뭐라는 거야. 나는 식탁 가운데에 있던 케첩을 가져와서 채원우의 돈까스 위에 지그재그로 뿌리며 단단히 일렀다.

“채 헌터가 코끼리도 아니고, 짐승처럼 쏠 생각 없으니까 그냥 푹 잘 생각이나 하면 되겠네요. 앞으로는 나도 채 헌터 앞에서 술 안 마실 테니까요. 오늘 일은 해프닝으로 잊고 넘겨요.”

“그건 안 돼요!”

채원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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