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찌르고 벨 때의 촉감은 피부가 아니라 속근육과 신경다발과 뼈에 새겨진다. 자다가 움찔하고 깰 때가 있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는 그 더럽게 기분 나쁜 따뜻함을 느끼면서.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워서 마시는 것 같다. 그냥, 내가 던전에서 했던 일들과 그걸로 먹고 사는 게 싫고 그런 내가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고 숨기는 이유는 나약해 보이기 싫어서다. 동정을 받는 것도 싫고 상담실을 찾아가 보라는 말은 더더욱 끔찍하다. 나는 내 유서처럼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남기지 않은 채로 살고 싶다.
“이해 안 되죠?”
채원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볼이 발긋했다. 어느새 채원우의 볼이 발긋해 있었다. 설마 취했니, 너?
“채원우 씨.”
“형. 이거 진짜 맛있네요.”
물어놓고 내 말 하나도 안 들었구나. 개자식.
하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어쨌든 일부 털어놔서 속이 시원한데 상대는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샤워실의 AI와 비슷해서. 나는 한결 후한 마음이 되어서 채원우의 손에서 달랑대는 잔을 빼앗아 탁자 위에 올려놨다.
“졸려 보이는데.”
“졸려요.”
채원우가 눈을 가물가물 감았다 뜨며 웅얼거렸다. 나는 손으로 채원우의 어깰 톡 밀었다. 그대로 눕는다.
“기가 막히네.”
정말이지 기가 막힌 주량이다. 나는 볼을 긁적거리다가 해롱대는 채원우를 두고 그릇과 냄비를 치웠다. 냄새나는 건 딱 질색인지라 채원우가 해야 하는 몫의 설거지까지 그냥 해치워버렸다. 나이도 어린 애한테 치사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자리를 치우고 나 혼자 술을 더 마실까 해서 방으로 맥주 캔들을 옮겨놨다. 돌아왔을 때 채원우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골 때리는 말도 안 하고 사고도 안 치고 새근대는 채원우는, 보기에는 아주 좋았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냐.”
안타깝지, 안타까워.
이불이라도 가져다 덮어주면 좋겠지만, 헌터가 감기에 걸릴 리도 없고 채원우의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가져올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오늘 제법 가까워지긴 했지. 하지만 이 모든 교류는 원만한 계약 기간을 위한 반석이지 사적인 친분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거실의 불을 모두 끄고 채원우 머리맡에 있는 작은 스탠드만 켜기로 했다.
“형.”
스탠드를 반짝 켰을 때였다. 잠든 줄 알았던 채원우가 나를 불렀다. 솔직히 진짜 놀랐다.
“네.”
“저 어린 왕자 읽었어요.”
“필독 도서라니까요.”
“저는 어린 왕자가 싫었어요.”
“…….”
“결국엔 다 버리고 도망갔잖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나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한다.
네, 네. 그래요.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순간 채원우가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친해지면 떠나고, 길들여지면 떠나고. 얼마나 거지 같았을까.”
“여우요?”
길들인다는 말에 나는 대번에 여우를 떠올렸다. 네가 3시에 온다면 2시 반부터 행복할 거라던 여우를.
그러나 채원우는 대답이 없었다. 어린 왕자와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벌하게 씹던 애는 다시 평온한 얼굴이 되어 새근새근 잠든 거다.
“……되게 감명 깊게 읽었나 본데.”
나는 감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 뒤로 두 시간 정도 더 깨어 있다가 양치하고 잠든 것 같다. 어쨌든 날짜가 바뀐 걸 봤으니까.
그리고 내내 푹 잤다. 꿈을 꾸긴 했다. 여우랑 장미가 편 먹고 어린 왕자의 뒷담화를 까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쩐지 그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으로 둘의 살벌한 대화를 듣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제때 맞장구를 치지 않으면 장미가 내 옆구리를 찌르고 여우는 내 팔을 물었다. 꿈인데도 얼마나 생생했는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내용만 아니었다면 남의 태몽을 대신 꿔준 건가 착각할 정도였다. 이런 태몽이 있을 리가 없지만.
깨어났을 때는 어쩐지 습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눈도 다 뜨기 전에, 정신이 다 들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방문부터 열었다.
“아……. 미치겠다.”
탄식이 먼저 터졌다.
거실 꼴은 엉망이었다. 물컵 속에 들었을 물이며 어디서 뽑아냈을지 모를 물, 조금 남았던 모양인 술까지 한데 모여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채원우가 있었다.
악몽을 꾸는 모양인지 채원우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하게 질려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덜덜 떨고 있었다.
“채, 채원우 헌터.”
나는 조금 떨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불렀다. 헌터의 능력은 섬세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그저 무식한 방식으로 표출되다가 끝내 형성되지 못하고 무너지는 법이라, 맨 처음 발현기가 아니면 무의식중에 나오는 능력은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그래야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 채원우는…….
“채 헌터.”
긴장에 긴장을 더한 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 때 채원우의 주변을 돌던 액체구들이 갑자기 원뿔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뾰족한 부분의 끝은 나를 노리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노린다. 저것들이 나를 찌르는 상상이 아주 구체화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채원우를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채원우!”
그러나 채원우는 깨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깊은 잠에 빠진 건지 모르겠다. 곤란했다. 원뿔 끝이 더 예리해지고 있었다.
나는 초조해져서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무엇이든 잡히는 대로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도통 없었다. 이제는 저 물방울을 빙자한 무기들이 내게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채원우! 일어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굽혔다. 원뿔이 방향을 틀었다. 닥치는 대로 손을 뻗자, 무엇인가 잡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들었다. 온 힘을 다해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든 것을 채원우를 향해 던졌다.
거의 동시에 물방울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나, 싶었다. 유언장을 갱신한 바로 다음 날에.
“아……. 뭐야…….”
그러나 통증은 없었다.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죽었다고 하기에는 주변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바로 지척에 뾰족한 끝이 보였다. 허억, 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형……?”
채원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고 위협적으로 날 노려보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바닥에 흥건해진 액체들이 주저앉은 내 무릎과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채원우가 허겁지겁 다가오며 아직도 뭉쳐 있는 원뿔들을 흐트러뜨렸다. 커피 테이블에 정강이까지 부딪히면서 온 채원우가 내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형, 형. 혀엉.”
커다랗고 거친 손이 내 얼굴이며 몸을 마구 쓸었다. 나는 헐떡이다가 겨우 손을 들어 그 손을 밀어냈다.
“……안 죽었습니다.”
“씨, 씨발, 어떡해. 미안해요. 진짜. 어떡해.”
정말 당황했는지 채원우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지 쓰지 않던 욕까지 한다. 고의는 아니었다. 채원우는 욕을 먹고 미움을 사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못 하는 솔직한 성격인 게 분명했다. 연기도 형편없겠지.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치솟던 화를 가라앉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악몽을 꾸면서, 무의식중에 이렇게 잘 발달한 무기화를 할 줄은 몰랐으니까. 몰랐는데……. 아니, 진짜로 얘는 혼자 방 써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다시 이마에 핏대가 서도록 욱해서 고갤 들었다.
들었다가……
“피가…….”
기세가 확 꺾였다.
채원우의 이마에서 피가 쪼르륵 흐르고 있었다. 채원우는 눈으로 흘러드는 핏물을 손으로 훔치고 말았다. 신경도 안 쓰는 기색이었다.
“어, 미안합니다. 내가 던진…… 거 때문인 거 같은데.”
대체 뭘 던졌는지 기억도 안 난다. 뒤늦게 확인하기 위해 소파 쪽을 보니 부서진 전화기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아마도 옛날에 구색으로 설치하고 말았을 유선 전화기였다. 온 힘을 다해 던졌으니 제대로 맞았다면 부서질 만했고 피도 날 만했다.
“아프겠다. 아, 진짜 미안합니다. 이걸 어떡하냐. 미치겠네.”
“괜찮아요.”
채원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는 형 죽일 뻔했잖아요.”
“저도 까딱하단 그 꼴 낼 뻔했는데요. 아니, 하필 머리에 가서 맞았네. 어떡하냐. 진짜 미안합니다. 치료받으러 가요.”
“머리를 노린 거 아니었어요?”
“…….”
맞긴 했다. 제대로 깨우려면 얼굴, 머리를 노려야 했다. 다만 내 손에 들린 게 유선 전화기였을 줄은 몰랐던 거지…….
“형 명중률 끝내줘요. 야구 했었어요?”
나는 채원우를 일으키며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던전 터지기 전에 했었습니다. 이제 치료나 받으러 가죠.”
마음이 절로 울적해졌다. 채원우가 이거 맞는다고 안 죽는 건 알지만 어쨌든 피를 보게 했다. 가서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출동도 없던 아침 댓바람부터 피를 봤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냐.
지금까지는 파트너와 치고받고 싸우느라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됐다. 또 그게 사실이라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번 건 미묘했다.
싸운 것도 아니고 채원우가 무의식중에 아주 섬세하게 능력을 썼다고 말하는 것도 왜인지 내키지 않았다……. 물론 연구원 쪽에서 이미 알 수도 있지만, 안다면 더더욱 굳이 말할 필요 없지 않나?
조금 전까지는 얘는 독방을 써야 한다고 이를 갈던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육감 같은 게 발휘한 것처럼 말이다.
“형.”
자리에서 일어난 채원우가 심각한 표정이 된 나를 와락 껴안았다.
“진짜 미안해요. 다음에도 또 이런 일 있으면 그땐 그냥 단검을 던져요. 가지고 있는 거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