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채 헌터.”
“또 모진 말 하려고 그러죠, 형.”
“네. 모진 말 하기 전에 선 넘지 마세요.”
“그 선이 대체 어딘데요?”
채원우는 정말 조금도 모르겠단 투로 물었다.
“손도 잡고 이마끼리 맞대기도 하는데 선을 어떻게 그어요.”
씨발, 그건 또 맞는 말인데.
“던전 안에서만 가능한 거면, 빨리 던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젠 말도 안 되는 떼를 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말아 채원우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채원우가 놀란 표정을 하곤 화들짝 손을 떼어냈다. 나는 픽 웃곤 눈을 나른하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진짜 선 넘으면 맥도 못 추릴 거면서.”
한마디도 지질 않고 말꼬리를 잡던 채원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연애는 어떻게 하냐던 채원우다. 숙맥일 게 분명했다.
나도 연애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선이란 건 안다. 정확히는 선을 오락가락 넘는 방법을. 파트너 사이는 고무줄놀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채 헌터, 그래서 다시 대답해 줄래요? 매운 거 잘 먹는지 못 먹는지 말입니다.”
나는 카트를 밀었다. 채원우는 내가 다음 코너를 가서야 쫓아왔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저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어쩐지 채원우는 무지개색 막대사탕과 마시멜로우가 떠오르는 인상이니까. 솔직히…… 귀엽잖아?
* * *
채원우는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매워요.”
코가 빨개지도록 훌쩍거리며 하는 말이 이거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라고 했잖습니까. 더 넣을지 말지.”
“얼마나 넣으면 매워지는지 몰라서 그랬죠.”
나는 혀를 쯧쯧 차면서 쿨피스를 따라줬다. 채원우는 한 컵을 다 비우고도 부족한지 헥헥댔다. 입술도 빨갛고 코도 빨갛고 눈도 빨갰다. 그게 진짜 잘 어울렸다. 저게 잘 어울리는 사내자식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감탄하며 청양고추를 으적으적 씹었다.
오래 둘수록 더 매워지니 고추는 모두 건져 내 접시로 옮겼다.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씹어대는 나를 보며 채원우는 기겁을 했다가, 감탄을 했다가, 하여간에 바빴다.
“잘 때 속 아플 거 뻔하니까 그만 먹고 저기서 과자나 까먹어요.”
“네.”
채원우가 바로 대답하며 과자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품에서 우르르 떨어진 것들은 포장을 뜯지도 않았는데 혀뿌리가 얼얼하도록 단 냄새를 내는 것만 같았다.
가이드고 헌터고 자연히 열량 소모가 남들보다 많아서 먹는 양도 많았다. 많이 먹어봐야 몸이 아니라 능력 쪽으로 간다. 내 앞에 있는 채원우도 트리플 엑스 라지는 될 것처럼 커다란 옷을 입고도,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니라 예쁜 근육을 갖고 있었다. 넓은 뼈대로만 옷을 받치고 있는 듯싶었다. 체지방 몇 퍼센트일까. 나는 지극히 변태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남은 면을 후루룩 먹어치웠다.
“형도 먹어요.”
채원우가 곱게 깐 과자들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비싸고 양 적고 맛있는 과자를 가장 먼저 먹으면서 냄비를 옆으로 치웠다. 설거지는 채원우가 하기로 했다. 얘가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깥은 무척 조용했다. 출동을 나간 팀도 있을 테고 매칭 훈련을 하는 분발해야 하는 신규팀도 있을 테며 각자 방에 틀어 박혀 안 나오는 놈들도 있을 거다.
다만 우리처럼 같은 숙소 거실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는 팀은 손을 꼽을 거라고 장담한다. 친분도 낮은 사이가 스스럼없이 뒤엉키는 일은 능력에 취할 때로 충분하니까.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들고 왔다. 채원우가 과자를 들고 왔을 때처럼 바리바리 들고 와선 탁자에 늘어놓았다.
한국 사람에게는 소파를 두고 굳이 바닥에 앉는 DNA가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곳에 팔을 걸친 채 한 캔씩 나눠 가졌다.
“술 마셔도 되죠?”
“아뇨. 전 시늉만 할게요.”
“왜요? 미성년자도 아니면서. 마셔본 적 없어요?”
“없는 건 아닌데.”
그으래.
나는 떨떠름하게 고갤 끄덕였다. 채원우는 내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과자만 냠냠 먹었다.
사실 나는 주량이 꽤 된다. 채원우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만큼 맥주만 가져왔지만, 내 취향은 소주와 맥주를 3대 7로 섞은 소맥이란 거다. 나는 채원우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복도로 나왔다.
“으, 추워.”
날씨는 아주 변덕스러웠다. 호들갑을 떨며 식당 층을 눌렀다. 심야, 저녁, 아침, 점심을 모두 가리지 않고 담당 누나와 형들과 친한 덕에 나는 몰래 소주를 받아올 수 있었다.
“적당히 무라.”
“네엡.”
마침 그들도 마른안주에 소주를 까고 있었다. 든든한 한 병을 품에 안고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한 층에 방이 고작 세 개였다. 방음은 무척 잘되었고 문은 지나칠 만큼 튼튼했다. 나는 이 먼지 한 톨 없는 복도를 볼 때마다 왠지 취하고 싶어졌다. 짜증 났고 두드러기가 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곳에서 되도록 오래 머물고 싶었다.
있으면 떠나고 싶고 떠나 있으면 돌아오고 싶은 게 헌터청 기숙사의 괴상한 매력이었다.
“새벽도 아닌데 벌써부터 감성적이고 난리야.”
나는 투덜대며 지문과 홍채 인식을 했다. 비밀번호까지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채원우가 맥주를 허공에 퐁퐁퐁 띄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가 찼다.
“자꾸 능력으로 장난치지 마십쇼.”
채원우는 무안한지 방울로 하트를 그렸다가 다시 캔 안으로 한 방울씩 넣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능력에 쓰였다고 꺼려하는 다분히 민간인스러운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액체면 다 쓸 수 있는 거예요?”
“다인지는 모르겠어요. 테스트를 덜 해봐서.”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덜 해봤단다. 나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무엇이든 광범위하면 좋은 거다. 활용도가 높고 응용력이 높아야 아무리 데이터화해도 계속 새로 등장하는 몬스터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
파트너가 살아야 내가 산다. 던전 안에서는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긋지긋한 새끼이든 죽이고 싶은 놈이든, 감정이 무색해지는 게 던전이었다.
“컵 가져올게요.”
찬장에서 플라스틱 컵을 가져왔다. 익숙하게 소주와 맥주를 말아서는 수저로 쳤다. 채원우는 고개를 컵에 한껏 들이민 채 피어오르는 포말을 보며 감탄했다. 나도 감탄했다. 이제 보니 이거 던전 안에서 봤던 채원우가 만든 파도와 비슷했다.
“그건 안 먹어봤는데, 마셔봐도 돼요?”
“시늉만 한다면서요?”
“조금만요.”
“사고 안 치죠?”
나는 조금 불안하여 물었다. 혹시 술에 취해서 능력을 마구잡이로 쓰거나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일 때부터 헌터청의 관리를 받는 경우 알코올에 대한 반응 테스트를 익히 했을 테니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그런 건 없어요. 저 술 마시면 엄청 얌전하다고 했어요.”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제가 형 손에요?”
“아뇨. 제가 죽는다고요. 상관들한테.”
뻥 아니고 진짜로.
나는 부르르 떨었다. 혹시라도 여기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 채원우의 능력이 폭주한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심지어 나는 얘의 능력 한계도 정확하게 모른다. 미지의 파트너를 상대한다는 건 시한폭탄을 다루는 것과 같은 기분을 주었다. 좋은 기분은 당연히 아니다.
채원우는 거듭 확언을 하고 난 뒤에야 내게서 잔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번 홀짝이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 컵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맛있어요?”
한 잔을 더 말며 물었다. 채원우는 고갤 끄덕였다.
“마않이 드십쇼.”
어쩐지 좀 귀엽다. 이래서 아저씨들이 옆에서 기웃대는 애들한테 한 모금씩 주는 모양이다.
마침 열린 창문 틈으로 어느 방에서 틀어놓은 건지 모를 음악 소리가 아주 옅게 들려 왔다. 여기서 이만큼 들릴 정도면 어지간히 크게 튼 모양이다. 바로 옆에서 듣고 있을 사람 고막은 몰라도 내 귀에는 제법 감미로웠다. 채원우와 함께 보내기에는 지나치게 분위기 좋은 밤이었다.
“형은 술 자주 마셔요?”
채원우가 여전히 홀짝대며 물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갤 끄덕였다.
“많이는 아니고 자주는 마시는 것 같습니다.”
“왜요?”
아무래도 얘 눈에는 술을 마시는 일련의 행동이 습관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또 습관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곤란했다. 나는 취하지 않을 정도의 술을 자주 마시곤 했으니까. 주종을 가리지도 않고.
“내가 중졸이긴 해도 책은 많이 읽었거든요.”
채원우는 갑자기 무슨 책이냐는 얼굴이었다.
“십대 권장 도서에 <어린 왕자>가 있어요. 알죠?”
채원우는 고갤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거기를 보면 어린 왕자가 술주정뱅이의 별에 가서 주정뱅이를 만나는데 묻거든요. 왜 술을 마시냐고. 그럼 주정뱅이가 부끄러운 걸 잊으려고 마신다고 해요. 부끄러운 게 뭐냐고 물으면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럽다고 해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은 이상하다면서 떠나고요.”
이렇게 길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왠지 조금 민망해져서 훌떡 술을 마셔버렸다. 안타깝게도 이 정도 양에는 취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거예요. 나는 중독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던전 다녀온 날에는 마시고 싶더라고요.”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괴물에서 또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몬스터라는 외국 말로 지칭해도, 살아 있는 것들이다. 때로는 내가 아는 생명체들을 심할 정도로 닮은 녀석들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면 기분이 더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