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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1화 (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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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거다. 이전의 파트너들에게는 이런 건 묻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어쨌든 대화는 통하니까 지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었거든. 그런데 채원우는, 잘 모르겠다. 대화가 일단 안 통하는 것 같은데.

“백겸 씨.”

양 가이드에서 갑자기 백겸 씨라고 부르는 건 오프 더 레코드라는 뜻이겠지?

“지금 채 헌터하고 연애해?”

아 진짜, 여기 사람들 다 말이 안 통해!

결국 소득도 없이 나왔다. 얻은 거라곤 성질머리밖에 없다. 여기까지 쫄래쫄래 쫓아오길래 볼일이 있는 줄 알았던 채원우는 복도에 멀뚱히 앉아서 발끝만 까딱이고 있었다.

“뭐 해요?”

“기다렸는데요.”

“볼일 보는 걸요?”

“아뇨. 파트너를요.”

계단에서까지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거늘, 전혀 이해를 못 한 모습이다.

“자꾸 쫓아다닐 필요 없어요. 안 그랬으면 좋겠기도 하고.”

안 그래도 피곤한 터라 날 선 반응이 나왔다. 몸을 돌려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내 뒤를 채원우가 또 쫓아온다. 금붕어 똥.

“누가 채가면 어떡해요.”

“뭐요?”

“누가 내 파트너 채가면 어떡하냐고요.”

반올림해서 183센티미터인 남자를 채간단 말이지……. 누가? 어떻게? 그거 나도 한번 보고 싶네.

“대체 누가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합니까? 어차피 계약상으로 내가 채원우 씨 파트너인 건 다 알 테고, 파트너가 있는 가이드의 강탈 행위는 불법이에요. 군법으로 처벌받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

“모르는데요. 그래요? 법 최고다.”

“…….”

“근데 형은 아는 것도 많네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다. 나 중졸인데……. 근데 채원우 앞에선 지식과 상식으로 질 것 같지가 않아. 무한한 자신감이 솟았다.

아, 그런데 결론이 이게 아니잖아.

“아무튼 누가 저 데려갈 일 없어요.”

“근데 제 거는 많이들 가져가던데요.”

“그래요? 신고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 뭐 도둑맞았나? 그게 아니라면 각성자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지간해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갓 각성한 이들의 능력은 매우 변칙적이고 또 그 폭이 크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나는 우뚝 섰다가 돌아보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도둑맞은 것들.”

“그냥 잊었어요.”

“멋지네.”

“그래서 이젠 뭘 빼앗겼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형, 이제 숙소로 가는 거죠?”

“안 간다고 하고 싶은데 뒤지게 피곤해서 가긴 해야겠어요.”

“오예.”

“가다가 졸려서 쓰러지면 업지 말고 그냥 사람 불러주십쇼.”

“업을게요.”

그래요. 내 말이 귓등으로라도 들리시겠나요. 대화 주파수가 안 맞는갑다, 하는 수밖에.

* * *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침대는 엄청나게 푹신하고 이불은 바스락거리는 게 촉감이 끝내줬다. 이불에 몸을 마구 꿈틀대며 깨끗하게 정리된 침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좀 좋아졌다.

가방을 뒤적여서 안경을 꺼내고 텔레비전을 틀며 책을 펼쳤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건 때론 아주 피곤한 일이기도 해서 나갔다 들어오면 오히려 주변을 산만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천천히 정신이 팔렸다가 졸음에 빠지는 게 좋았다.

책은 일부러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을 골랐다.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자니 빤한 뉴스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렸다. 그러나 또 그 소리를 듣다 보면 지겨워지고, 당장에라도 음소거해 버리고 싶어서 다시 책에 집중하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눈꺼풀은 반 이상 닫히게 마련이었다.

나는 나를 잡아끄는 수면욕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기꺼이 깊은 잠에 몸을 풍덩 던졌다. 구겨진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안경은 낀 채로.

잠깐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고 한참 지났을지도 모른다. 손에서 책이 빠져나가서 툭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조금 깼다. 의식만 살짝 깬 채로 몸을 뒤척였다.

책을 읽을 때만 쓰는 안경테가 눌리는 게 느껴지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움직이는 순간 깰 단잠이 아쉬웠다.

‘누가 벗겨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급히 덧붙였다.

‘옷 말고 안경.’

에스퍼랑 지내는 것도 아닌데 습관대로 해버렸네.

아무튼 다시 잠들려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안경이 벗겨졌다. 나는 아직 채원우의 존재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라 그게 유례없이 같은 방을 쓰게 된 파트너, 채원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편했고, 좋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으며 중얼거린 거다.

“견우, 땡큐…….”

“견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질끈 감았다. 방이 캄캄했으니까 못 봤겠지……?

“왜 자는 척해요?”

못 봤을 리가 없지.

“견우가 누구예요?”

“……개인사 묻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알았어요. 말하지 마요.”

의외로 선선히 대꾸한다 했다. 채원우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것저것 눌렀다. 매너가 없는지 매너 모드가 아니었다. 그리고 곧 큰 소리로 AI가 말했다.

―코드 170009, 접근 허가. 양백겸의 이력을 열람합니다.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전전 파트너네요. 사이좋았나 보다.”

“지금 채원우 씨 선 넘은 거 압니까? 내가 싫은 기색 보였잖아요. 대체 왜 이럽니까? 애처럼!”

“형, 형 파트너는 저잖아요.”

채원우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채원우의 핸드폰에는 내가 만났던 파트너의 이력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좆같던 애들이 반이고 괜찮았던 애들이 반의반이고 좋았던 애가 한 손에 꼽는 이력.

“지금 파트너 말고 다른 파트너 생각하는 거 안 된다는 법은 없어요?”

채원우는 시선을 내린 채 웅얼거리고 있었다. 기가 죽은 그 꼴을 보고도 나는 머리꼭지가 돌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런 건 없어.”

으르렁대듯 얼굴을 갖다 붙이고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개인 정보를 멋대로 열람하는 건 죄지. 꺼져, 내 방에서.”

“보안 등급이 더 높으면 가능하잖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허락 없이 여는 거, 그게 진짜 파트너라고 생각해? 네가 생각하는 파트너가 연애 꼴이랑 비슷하면 그 반이라도 해봐.”

“…….”

“나가라니까?!”

방이 쩌렁 울렸다. 채원우는 나와 핸드폰 액정을 번갈아 보다가 고갤 푹 숙이고 화면을 껐다. 잠시 보인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짜가 바뀌도록 싸운 꼴이 된 거다. 그것마저도 열이 뻗쳤다.

나는 아예 채원우의 등을 밀었다. 채원우는 발을 끌며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분명하게 갈라섰다.

“연애의 반 정도가 어떻게 하는 건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쾅 닫았다.

“나 진짜 몰라서 그러는데. 연애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단 말이에요.”

애새끼라고 말은 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는 문틈에 얼굴을 대고 씹어 뱉듯 말했다.

“검색이라도 해보든가, 부모님한테라도 물어보든가. 이제 닥치고 꺼져.”

침대로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기분이 더러웠다. 키우는 반려동물과 싸운 기분이다.

혹시라도 바깥에서 우는 건 아닌지 약간의 울음기라도 잡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다행히도 그런 끔찍하고 좆같은 일은 없었다. 한참 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빛도 꺼졌다.

“분명 저 새끼가 잘못하고 내가 맞는 말 했는데.”

나는 씨발씨발대며 중얼거렸다.

“왜 기분은 내가 더 좆같지……?”

왜 내가 더 잘못한 것 같냐고.

이불을 발로 뻥뻥 차다가 결국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침이 돌도록 쓴 약을 생으로 삼키고는 잠을 청했다. 제발, 제발 내일 정오까지는 알람이 울리지 않길.

* * *

그럴 리가 있나.

알람은 여덟 시 반에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또 출동했다. 더 황당한 건 잘못 울린 호출이라는 거다.

던전이라는 게 예측하기 힘든 재난이니만큼 알림에 오차 범위가 존재하는 건 알지만, 내가 당하니 기도 빠지고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꽤 운치 있게 멍 때리고 있긴 하다.

을지로. 장인들의 터전. 육십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율무차를 내밀었다.

“마실 텨?”

“예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다. 겨우 양치하고 얼굴에 물만 묻히고 나왔다. 채원우와는 한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파트너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어색한 분위기로, 그러나 규정 때문에 1미터 이상 떨어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남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만 했다.

“학생도 마셔. 나이도 어린데 고생이 많아.”

“감사합니다.”

채원우가 고갤 꾸벅였다. 나는 종이컵의 입술 대는 곳을 질겅질겅 씹다가 채원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채원우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도 피하는 건 왠지 지는 기분인지라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뭐 해, 총각들?”

아예 율무차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나오던 주인아주머니께서 물었다. 너무 오래 홉뜨고 있어서 눈이 건조했다. 비비적대며 ‘아닙니다. 루틴이에요’ 하고 얼버무렸다. 루틴은 무슨…….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온 덕에 안쪽이 보였다. 안쪽에서는 던전 안에서 보이던 것과 거의 흡사한 녹색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을지로. 대장장이과 제련사를 비롯한 온갖 장인들이 머무는 곳.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은 이곳을 통하여 사용 가능해진다.

초록색이 흘러나오는 것은, 회복용 아이템을 만들고 있단 뜻이었다. 단순 기우에 가까운 전화 한 통에 당장 출동한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템 중에서도 회복용은 특히나 제련이 까다롭다.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는데, 그중 두 분이 이분들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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