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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0화 (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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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 해요?”

갑자기 불쑥 채원우가 고갤 내밀었다. 헬기에 발을 반만 걸친 때였다. 나는 재빠르게 이어폰을 끄고 고갤 저었다. 그러곤 아주 능청을 떨며 귀를 가리켰다. 입 모양으로 크게 크게 ‘안 들려요’ 하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채원우는 속은 기색이다. 안 속았어도 뭐 어쩌겠어.

헬기의 뒤편에는 부상자와 가이딩이 불안정해 링거를 꽂은 헌터가 있어서 앞자리에 앉았다.

군용 헬기의 좌석은 쿠션이 아주 딱딱해서 불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에서 가장 잠이 잘 오는 좌석이기도 했다. 여기에 다시 탈 때는 더럽게 피곤할 때거든.

채원우가 무어라 말을 걸 기세라 팔짱을 끼고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단숨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너무 어린애예요.”

나는 보호구를 하나씩 벗으며 투덜거렸다. 피, 살점, 물 등등으로 흠뻑 젖은 옷은 더럽게 무거웠다. 옆에 열린 투입구로 넣으면 샘플 채취 후 소각되거나, 재사용 가능 시에는 방수포나 낙하산으로 재활용된다고 한다.

거리낌 없이 알몸이 된 후에 에어 샤워를 한다. 그다음 물 샤워가 가능하다.

―어리잖아.

“나이만이 아니라요. 나이로 치면 저나 걔나 앞자리 2인 건 마찬가지라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 역시 쥐뿔도 모르……진 않구나. 전 그때도 알아서 잘 살았습니다. 걔가 이상한 거 맞네요.”

―그렇게 힘들어?

엄밀히 말하자면 힘든 건 아니었다. 아니, 힘든 건가? 뭐라고 하나로 결론 내리기가 어렵다. 채원우 자체가 예측불허로 마구 튀는 탓이기도 했다. 어떨 땐 엄청 쉬운데 어떨 땐 엄청 어렵다. 말 그대로 어린애다.

“그냥 처음 만나는 스타일이라 어려운 거죠. 힘든 거랑 어려운 건 달라요. 알죠?”

―알지. 물론.

에어 샤워기가 틀어졌다. 순식간에 몸의 먼지가 씻겨 내려간다. 물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청결해진다고는 하지만, 난 그래도 역시 물로 씻어야만 제대로 씻었단 느낌이 들어서 에어 샤워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60초의 샤워가 끝나고 샤워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어디 다른 별에서 똑 떨어진 것 같다고요. 걔가 헌터가 아니고 이 세상이 이 꼴이 아니었다면 그냥 집에서만 어화둥둥 길러진 금지옥엽 철부지인 줄 알았을 겁니다.”

―…….

“나 지금 힌트 좀 얻으려고 구슬린 거 맞는데.”

―채 원 우 헌터 정보에 관한 접근권이 없습니다.

“안 통하네.”

혀를 끌끌 차고는 스피커에 있는 버튼을 꾹 눌렀다. 딱 한 번 가이드로 활동했던 승규가 말하길, 비데 리모콘 같다고 했던 스피커다.

“대화 내역 삭제.”

―명령 수행합니다.

내게 대답하던 능청맞은 아저씨 목소리에서 딱딱한 기계음으로 바뀌고 곧 내가 말했던 모든 이야기가 삭제됐다.

이곳은 샤워실. 에어 샤워실에서만은 쌓인 스트레스도 앙금도 뒷담화도 다 풀고 가라고 제작된 AI 스피커가 달려 있다. 낯부끄럽다고 안 쓰는 뻣뻣한 녀석들도 있는 건 알지만, 난 아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데?

물 샤워실로 들어가서 물을 틀었다. 거친 스크럽 스펀지에 소독제가 섞인 보디워시로 오래 씻었다.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가기 전후로 방사능 지수를 포함한 유해도를 검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범위의 오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청결이 우선이었다.

손끝이 쪼글쪼글해지도록 오래 씻은 뒤 승규가 선물해 줬던 크림을 골고루 발랐다. 짠돌이 자식이 사준 것 중 손에 꼽게 비싼 것이었다. 다 쓰고 또 사달라고 할 참이다. 내 근속년수와 성실성과 꾸준히 전속계약을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헌터청에서 제안하는 계약 건수를 생각하면 열 통은 더 받아도 좋다. 내 돈으로 살 생각은 없고.

머리까지 꼼꼼히 말린 뒤에야, 막막함이 몰려왔다.

“오늘도 걔랑 같이 자야 하는 거지?”

다른 방에서 자는 거니까 따로 긴장할 필요도 없고, 한때는 방 하나에서 열댓 명과도 숙식한 적이 있으니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음이 영 기껍지가 않다.

그렇다고 복도에서 잘 수는 없잖아? 고민은 짧고 생활은 긴 법. 나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통행증에 든 인식표와 똑같은 칩이 담긴 팔찌를 차고 아주 살짝 덜 마른 머리를 푸슬푸슬 털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오는 채원우를 발견했다.

채원우는 머리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드라이기도 있는데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개를 까딱이고 보고를 위해 헌터 관리부서로 가려는데 채원우가 성큼 다가와선 옆에 바짝 붙었다.

“가이드도 같은 샴푸 쓰네요?”

“……지금 내 냄새 맡은 겁니까?”

“근데 로션은 다른 거 바르나 봐요.”

“소름 끼치니까 하지 마세요. 머리는 왜 안 말린 거예요?”

“말렸었는데 다시 젖은 거예요.”

“그렇게 쫄딱?”

“안에서 시비가 걸려서.”

설마. 아니시겠죠.

“그래서 능력 쓰고 싸웠다고요? 아마추어처럼?”

사실 아마추어보다 프로들이 더 유치하게 싸우는 건 안다. 그래도 던전 공략 후에 다 지친 상태로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한껏 끓어올랐던 몸이 다시 적응하느라 뼈도 녹진녹진 아플 때고 근육통도 오고 심하면 편두통에 쇼크도 올 수 있는데 대체 무슨 개지랄이란 말이냐.

“능력 쪼오끔 썼는데요.”

“장난하세요?”

“장난 아니었죠. 누가 장난으로 능력을 써요.”

확신하는데, 얘는 장난으로 능력 쓸 놈이다.

“열은 안 나고요?”

빨리 가지 않으면 헌터 관리부서의 직원이 근무 시간을 넘긴다고 대놓고 까칠해진다. 나는 금붕어 똥을 달고 계단을 올랐다.

“저 열 나요.”

뻥치시네.

“머리도 아프구요.”

“그 정도 리바운드면 계단도 못 오를 텐데요.”

“그래요?”

그러더니 채원우는 계단 중턱에 우뚝 섰다. 마트에서 장난감 조르는 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넌 여기 살아라, 원우야. 나는 가서 보고하고 너 없는 방에서 잘란다.

“손 안 잡아줄 거예요?”

“네. 안 잡아줄 거예요.”

“왜요?”

“채원우 헌터.”

나는 딱 반 층 정도 채원우보다 올라섰다. 계단 손잡이를 사이에 두고 채원우와 마주 보는 자세로 섰다.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

“저 보모 아닙니다. 그거로 계약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파트너가 한 번도 없었던 건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파트너에 대한 판타지는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손잡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나는 연애를, 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본 풋내기를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파트너를 정말 무슨 사랑의 파트너 그런 거로 오해한 모양이지.

“채원우 헌터, 나랑 뭐, 연애 같은 거 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요.”

당연히 아니어야 하고 아닐 거라고 믿었고 아니길 바라긴 했는데 대답 참 빠르다. 다만 조금 찝찝한 건 채원우의 얼굴이 약간 어리둥절해 보였다는 거다.

내 갑작스러운 질문 때문에 어리둥절한 거면 이해가 되는데 다른 포인트에서 당황한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개념을 들이밀었는데 그 개념 자체를 처음 들어본…… 그런 사람의 표정이다.

“이건 연애도 아니고 소울 메이트도 아니고 그냥 비즈니스예요. 비즈니스 파트너.”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가끔 키스도 하고 관계도 갖는 비즈니스요?”

“듣고 보니 영 좋진 않네.”

“…….”

“근데 틀린 말은 아니네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 필요할 때만 손 잡고, 포옹합시다.”

“…….”

“키스랑 잠자리는 어지간하면 하지 말자고요.”

이쯤 했으니 대화가 통했으리라고 믿는다.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올랐다.

솔직히, 뒤에 남겨진 채원우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참았다. 버릇을 고쳐야 한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나는 채원우의 폭주와 쇼크를 막기 위한 응급처치약이고, 채원우는 내 통장에 숫자를 꽂아주는 돈줄인 걸.

서로의 마음과 감정은 알아서 추스릅시다. 각자도생의 세상이라잖아요.

* * *

“좋네. 좋아!”

내 표정이 안 좋은 것도 그 좋은 것에 포함되는 건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보고된 그래프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손뼉을 치는 수석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무 좋다. 이런 결과 처음이야.”

“제가 뽑은 결과 중엔 제일 낮은데요.”

“에이, 그건 양 가이드가 채 헌터를 몰라서 그렇지.”

한 번 뛰었다고 단번에 백겸 씨에서 양 가이드로 승급했다. 수석은 옛날에 유행했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래프를 확대했다가 축소하기를 반복했다.

“우리 양 가이드가 아예 전속 계약해 주면 좋겠다……. 정규직 좋잖아. 응? 좋은데…… 우리 양 가이드는 이번에도 거절하겠지?”

“그럼요.”

전속이 되면 대우는 좋아지지만, 퇴직이 한없이 먼 미래가 되고 만다.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르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직종에서 최대한 빨리 발을 빼고 싶다. 안전지대 속에 있는 아담한 집을 구해서 느긋하게 살 거다. 아, 검정고시도 볼 거고. 그러니까 계약직이 최고다. 비록 수당은 거북이처럼 올라도 언제고 그만둘 수 있는 계약직!

내 대답이 워낙에 단호하기도 하고 몇 년째 같은 대답을 고수하기도 해서인지 수석은 더 말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렇게 잘 나왔어요?”

나는 무심한 척 툭 물어봤다.

“그럼. 잘 나왔지.”

“전 잘 모르겠네요. 말씀대로 채 헌터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은데, 좀 알 방법 없어요?”

그러자 커피를 홀짝이던 수석이 눈웃음을 치며 흐흐흐, 하고 기분 나쁜 소릴 냈다. 검지를 양옆으로 내저으며 ‘안 속지, 안 넘어가’ 하는 꼴이 얄밉다.

“도저히 모르겠다고요. 다른 차원에 사는 애 같아요.”

“음.”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타입의 싸움을 하고 어떤 특기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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