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능력을 발휘한 뒤 오르는 열에 취해 몸을 더듬고 하는 이들이 있는지라 놀라진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런 무의식중에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손 떼죠.”
“잠깐만요.”
안쪽까지 더듬어 올라갔던 손이 찾던 걸 잡아 뽑았다. 칼이었다.
채원우는 내게 더욱 비벼 엉기면서 손목을 가볍게 스냅했다. 마치 카드 던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던진 건 칼이고 맞은 건 벽이 아니라 몬스터였다. 네 발로 내게 기어 오고 있던 거다.
“이래서 그렇게 다들 파트너를 찾았나 봐요.”
채원우가 아주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요, 이런 건 처음이에요.”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곧 웨이브가 온다는 알람이 귀에서 울렸다. 요란한 기계음은 분명히 채원우에게도 들릴 텐데, 채원우는 미동이 없이 내 배에 고갤 묻고 있었다.
곧 바닥이 꿀렁였다. 에너지 탑에서 나오는 불빛이 노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채원우를 밀어냈다. 다소 야멸차다고 할 수도 있는 손길이었다.
“일하게 일어나요.”
채원우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봤다.
“2차 지나면 또 해줄 테니까. 얼른.”
그 말에 채원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다루기는 쉬웠다.
배탈 난 것처럼 구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손 위치를 바꿔서 채원우의 목덜미를 덮었다. 맥박이 느껴졌다. 던전 존에 들어온 헌터들의 신체 활동은 일반인보다 왕성해지니 맥박의 정상 범위 역시 달랐다. 손목을 들어서 시간을 재며 맥박을 셌다.
“어때요? 난 지금 컨디션 최고인데.”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일어나요.”
꿀렁거리는 지반이 지척까지 왔다. 채원우는 일어나서는 이리저리 기지개를 켰다. 나는 고글의 밑을 잡아 뒤집어 깠다. 안에 고인 물이 흘러내렸다.
“살살합시다, 살살.”
“살살하면 안 죽잖아요.”
“쟤네보다 내가 먼저 죽게 생겨서 그렇습니다.”
“돌아가면 폐활량 테스트 다시 하죠.”
그렇게 말하며 채원우가 나를 뒤로 당겼다. 나는 당연히 채원우 뒤에 숨었다. 얘네는 몸 좀 뚫린다고 죽지 않지만, 나는 죽는다. 정의감이나 영웅심 같은 건 내가 부릴 게 아니었다.
“존에 들어오면 우리도 같이 신체 능력이 향상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투덜거린 소리는 안타깝게도 묻혔다. 채원우가 앞으로 발을 쾅 내딛자마자 아래에서 물기둥이 튀어 올라 조금 전까지 우리가 올라타고 기어올랐던 차 탑을 일제히 날렸다.
“이러면 잘 싸우는 거예요?”
날아간 차체가 막 기어오르던 몬스터들을 찍어 눌렀다.
“몸 상태는 어때요.”
“물기둥 정도야 어려운 게 아닌데요.”
“적은 노력에 큰 결과.”
이번엔 각기 작은 세 개의 물기둥이 아치형으로 튀어나와 차 세 대를 각각 날렸다. 가루가 되어 효과가 줄어들 때까진 반복할 모양이었다. 나는 고갤 끄덕였다.
“이렇게 싸워야죠.”
여기가 길거리였거나 이제는 인기가 부쩍 식은 히어로 영화 속이었다면 죄 없는 행인들과 갑자기 산산조각 나는 재산을 보며 망연자실할 운전자들을 걱정했겠지만, 여기는 던전 존이고 한국헌터청은 돈이 아주아주 많다.
내가 걱정할 건 세 번째 웨이브가 오기 1분, 아니, 10초라도 전에 저 기둥이 파란색으로 변하길 바라는 거다. 또 피와 살점이 섞인 물폭탄을 맞긴 진짜 싫거든.
* * *
던전 공략이 끝났다. 에스퍼들은 다행히도 세 번째 웨이브를 1분 남기고 공략을 끝냈다. 녹초가 된 그들이 각자 가이드들의 등에 업혀 나오고 채원우와 나는 제 발로 걸어서 나왔다.
각기 한 몸처럼 부둥켜안은 채 가이딩을 하고 있는 와중에 채원우는 멀쩡히 서서는…… 코피를 흘렸다.
“채원우 헌터……. 코피 나요.”
“아, 알아요.”
대수롭지 않게 더러운 장갑을 낀 손으로 훔쳐 닦는다. 나는 예쁜 얼굴에 남은 핏자국이 코피인지 아니면 채원우가 터뜨려 죽인 몬스터들의 피인지 헷갈려서 인상을 찌푸렸다.
“물 있습니까?”
그러나 그게 누구 피든, 채원우는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서 답답한 내가 나섰다.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박스 안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 반다나를 흠뻑 적셨다.
두 통을 사용해서야 얼추 깨끗해졌다. 반다나를 세 번 짜니 좀 깨끗한 물이 나왔다. 탈탈 털어선 채원우에게 다가가서 내밀었다. 녀석은 이게 무어냐는 시선이다.
“얼굴이요. 닦아요.”
“안 닦아줘요?”
“전 가이드지 보모는 아닌데요.”
“저 어지러워요.”
“피 흘려서 그럽니다.”
“코피로 어지러우면 헌터 그만둬야죠. 아, 심장도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은데.”
“그건 달려서 그렇고요.”
“고거 달렸다고 이렇게 심장이 뛰면 헌터 그만둬야 하는데요?”
억지에 엄살 부리는 거 다 안다. 두 번째 웨이브가 끝났을 때도 내가 분명히 가이딩해 줬거든. 두 번째에는 과연 몸이 뜨겁기는 해서 깍지까지 꼈다. 채원우가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방어구에 속하는 특수 장갑이 아니었다면 손가락뼈가 아작 났을지도 모른다.
말꼬리 잡기 게임은 딱 질색이다. 답답한 사람이 움직이듯 속 터지는 사람이 이 대화를 끝내야 한다.
채원우의 얼굴에 대고 젖은 반다나를 북북 문질러줬다. 채원우가 마구잡이로 물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먼지가 풀풀 날리던 곳이었던 터라 먼지도 마구 닦였다.
닦을 때마다 창백하리만큼 흰 얼굴이 드러났다. 그걸 보니 내 얼굴 꼴도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고개 젖히지 말고요.”
“형 덕분에 코피로 죽진 않겠네요.”
확실히 채원우의 목을 잡고 닦아주니 내 기운이 솔솔 빠지는 게 느껴졌다. 온 힘을 다한 가이딩을 할 때와는 다르지만 피곤하긴 피곤했다. 피가 멎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반다나를 뒤집어 내 얼굴을 닦아냈다.
곧 군용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바람과 소음이 바닥의 잔재를 훑어냈다. 던전이 닫힐 땐 수축한다. 수축하며 닫힌 탓에 반 토막 난 차와 망연자실하여 머리채를 뜯고 있는 행인들이 보였다.
“씨발, 얌전히 좀 싸우면 안 되나.”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할부가 몇 개월이니 어쩌고 하는 그 소리는 우리 들으라고 하는 게 분명했다. 고맙다는 소리는 못할망정 이런 소릴 듣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손가락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후처리 담당팀이 피해 대상 사람들을 모았다. 알아서 다 보상될 거다. 말했잖냐. 석유 대신 던전이 터지는 나라라고.
그래도 스무 살이라고, 채원우가 조금 신경 쓰였다. 반다나를 바닥에 버리면서 흘끗 보았다. 채원우는 허리에 달린 벨트에서 초콜릿바를 꺼내 뜯고 있었다.
귀가 안 들릴 리가 없는데 어째 나보다 더 신경을 안 쓰는 기색이다. 그래도 헌터 강령에서 법정 성인 이상만 전투에 투입 가능한데, 그러면 몇 번 나와보지도 않았을 텐데. 깡다구가 여간한 게 아닌 모양인데?
채원우는 자기를 빤히 보는 나를 바라보더니 대뜸 한 입 깨문 초코바를 내밀었다. 깨문 자국을 보아하니 치열이 아주 고르구나……. 여러모로 외면으로는 흠잡을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외면으로는
“먹을래요?”
“아니요.”
아주 단번에 대답했다. 채원우는 고갤 끄덕였다. 섭섭하지 않냐거나 저런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본부로 이동합니다! 위급 환자부터 수송하겠습니다! 가이딩 수치 28퍼센트 이하 및 중증 외상자부터 탑승합니다!”
“가이딩 수치 몇이에요?”
채원우는 초코바를 입에 쏙 넣고 우물거렸다. 손끝에 피를 내서 확인하니 51퍼센트였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역시 손깍지 정도로는 힘들다 이거지.
그러나 나의 심각한 표정과 달리 채원우는 활짝 웃었다.
“와. 저 약 안 먹고 이 정도인 거 처음이에요.”
“지금까지 약으로 버텼어요?”
“주사도 쓰고 약도 쓰고.”
“그거 중독성 있잖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몇 명 안 만나봐서 그랬겠죠. 지금까지 몇 명이나 매칭해 봤겠어요.”
그러자 채원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하고 운을 떼며 고갤 갸웃거린다. 뭔가 찝찝하다.
그 와중에 헬기 조종사가 채원우를 불렀다. 콕 집어서 부르는 걸 보니 우선순위에 당연히 채원우가 포함되었다는 기색이다.
“먼저 가자는데 가죠?”
“다음 헬기 타고 싶은데…….”
“보아하니 위급 환자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가면 또 저 무시할 거잖아요.”
“그건 아닌데요.”
그냥 너랑 할 말이 없는 거지. 뭐, 우리가 오순도순 할리갈리 할 사이는 아니잖아.
채원우는 뚱하게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나는 가서 빨리 온수로 박박 씻고 싶었다. 채원우의 어깰 툭 밀쳤다.
“저 빨리 씻고 싶어요. 가죠.”
“같이 씻어요, 우리?”
“당연히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이 자식아. 미쳤니?
“아쉽지만 형이 가고 싶다니까 갈게요.”
“남고 싶으면 남으세요……. 저라도 먼저 갈라니까.”
“파트너라면 어디든 같이 가야죠. 그게 파트너…….”
“그거 파트너 아니에요. 가서 교육 다시 받으시는 게 좋겠네…….”
채원우의 헛소리가 참으로 다채롭다. 나는 벌써부터 뻣뻣해지는 머리카락을 풀며 코웃음 쳤다. 그러곤 철벅거리는 워커로 어기적어기적 헬기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 두 번의 가이딩 기록을 보냈다. 불안정 수치가 몇 퍼센트였고 가이딩 이후 몇 퍼센트로 안정되었다는 내용이다. 우수한 건 아닌지라 수치를 보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보아하니 채원우는 전방과 후방을 아우르는 올라운더 공격 포지션인지라 위험수당이 배로 꽂힐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놓치기는 아까운 돈줄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헌터와 세 번에서 네 번만 파트너를 하면 그린존에서 쾌적한 투룸 집을 구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