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희미하게 봄바람이 불어온다. 유독 겨울이 길고 봄이 짧은 북구의 도시에서 찰나에 가까운 봄을 즐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옷을 벗고 햇볕을 쬐는 가운데, 이원은 큰 보폭으로 바쁘게 거리를 달려갔다.
늦었어.
그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바쁘게 거리를 내달렸다. 쓸모없는 전차 같으니. 꼭 이렇게 바쁠 때만 고장을 낸다. 그것도 꼭 한 구간을 남겨두고서.
다음 전차를 기다리느니 뛰는 것을 택한 이원은 달리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O.K. 1초에 10미터씩 가면 돼, 빌어먹을ㅡ!
헛된 수학에 절망하며 이원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그의 주변으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빠르게 스쳐가는 건물의 풍경 속에서, 문득 그는 승용차에서 내리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했다.
아차.
순간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이원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마구 앞으로 내달리며 고꾸라졌다. 끝이다! 도로에 곧바로 얼굴을 박아버리는 자신을 상상했을 때, 갑자기 몸이 훌쩍 솟아오르며 누군가 허리르 감싸 안았다.
"아차."
놀리듯이 감탄사를 뱉은 남자가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원이 시선을 올리자 예상했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봄의 햇살에 빛나는 플라티나 블론드가 유독 눈을 부시게 만든다. 아직 충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원이 그를 올려다보자 카이사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넌 항상 내게 온몸을 던져오는군."
이원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가 항상 내 앞길을 가로막으니까."
카이사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움칠 놀랐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바래다주고 싶은데."
"아, 그럼."
이원은 잘 됐다는 듯이 서류철을 카이사르의 손 위에 덥석 올려놓았다. 카이사르가 의아해하며 그를 내려다보자 이원은 시간을 확인하며 빠르게 말했다.
"길 위쪽의 34번지에 가져다 줘. 내 의뢰인인데, 내일 오후 3시에 갈 테니까 그 때까지 서류를 모두 읽어두라고 해. 그럼!"
"잠깐, 기다려!"
카이사르가 급히 그를 불렀으나 이미 이원은 저 멀리까지 달아난 후였다.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멍하니 생각하며 카이사르는 과거를 곱씹었다. 왠지 모를 데자부가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카이사르는 씁쓸하게 현실을 외면했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는데,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들렸다. 번호를 확인한 카이사르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무슨 일이지?"
부드럽게 묻는 음성에 아직 숨결이 가라앉은 이원이 건너편에서 말했다.
"오늘 저녁 7시, 한 시간 정도 시간 있어."
카이사르가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아아, 기대가 되는군."
끊기는 전화에 카이사르는 짧게 입맞춤을 했다. 되돌아온 것은 매정하게 끊기는 전화음소리 뿐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오르는 사이 또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름이 떠있었다.
"드밑리. ...아니, 괜찮아."
어느새 사라진 이원의 자취를 쫓아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는 짧게 웃었다.
"지금 걸어다니는 포르노그라프가 내 품에 뛰어 들어왔어."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정말로 사랑스럽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욕설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려오고, 카이사르의 웃음소리가 그 위로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끝.
외전
늦었다.
이원은 다급하게 집안을 뒤지며 머플러를 찾았다. 어째서 약속시간에 늦을때면 항상 찾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난장판인 집안이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실내에, 이원은 언제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꼭 이런 날은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간신히 책장 아래에서 머플러를 찾아낸 이원은 서둘러 그것을 목에 두르려다 멈칫했다.
먼지투성이인 머플러는 몇 번 털어내는 정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머플러를 세탁바구니에 던져놓고 다른 준비를 했다.
때마침 휴대전화가 울려왔다. 꼭 이럴 때 이런 식이다. 급히 확인해보니 문자메시지였다.
기다리고 있단다.
아버지로부터 문자에, 이원은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이원의 아버지인 미하일이 로모노소프 조직을 탈회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으로 한때 조직계는 물론 정경계 조차도 술렁였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퇴임사에서 당당히 밝혔다.
남은 인생은 아들의 삶과 함께 하고 싶다고.
이원으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반가우면서도 부담스러운 이 기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하지만 이원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누구보다 진지했기 때문에, 이원은 다른 이들처럼 그를 위해 박수를 쳐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조각조각 시간을 나누어 사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삶을 할애해야 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원에게는 그런 사람이 둘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챙겨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문제의 사람이 서있었다.
"안녕."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에, 이원은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안녕, 웬일이야?"
벌써 오후가 다 된 시간이었다. 연락도 없이 오다니 뭔가 급한 일인가? 염려가 되면서도 바쁜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지난 달에 만나고 그동안 연락도 제대로..."
카이사르는 계속 말을 하려 했지만 이원에게는 그럴 틈이 없었다.
"미안, 지금은 좀 바빠. 다음에 얘기해!"
황급히 옆을 지나쳐 나가려는데, 갑자기 카이사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둘러 달려가려던 이원은 그만 본의 아니게 브레이크에 걸려 그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급히 입을 열었다.
"오늘 시간 있어?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대답을 기다리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이원은 눈을 깜박이다 빠르게 대답했다.
"미안, 아버지와 약속 있어."
동시에 카이사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원으로서는 그런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은퇴 후 그는 대부분의 자투리시간을 카이사르가 아닌 아버지와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하일을 왜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거지?"
역시나, 카이사르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데이트고 뭐고 수시로 펑크에다 이젠 문 앞에서 바람까지 맞았으니 화를 낼 만 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하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하?!"
뜻밖의 질문에 이원은 턱을 쑥 빠뜨렸다. 이 무슨 유아원 수준의 질문이란 말인가. 당황한 이원이 눈을 깜박였지만 카이사르는 진지했다.
"넌 항상 일, 일, 일뿐이잖아. 게다가 겨우 틈이 나면 미하일을 만나고 난 도대체 언제쯤 너와 만날 수 있는 거야? 번호표를 뽑고 대기해야 하나?!"
마지막 말은 분통이 터지는 듯 날카롭게 질러 나왔다. 이원은 그런 그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어, 나중에 얘기하고 오늘은 일단..."
"안돼. 오늘 해야 돼."
뿌리치고 가려는 이원을 다시 붙잡은 카이사르가 무섭도록 진지하게 덧붙였다.
"오늘, 꼭."
온몸에서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를 보자 더 이상은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줄곧 아버지와의 약속과 일에 치여 카이사르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이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카이사르는 이원을 잡고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급히 달려가던 이원이 뒤를 돌아보자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녁시간을 기대하는 것이 분명한 그의 모습에, 이원은 죄책감과 함께 피로감을 느꼈다.
미하일은 시내의 꽤 고풍스러운 맨션에 혼자 살고 있었다. 가진 돈은 많았지만 친구라고는 그다지 없는 그는, 평생에 걸쳐 그리워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에 모처럼 살 맛이 나는 요즘이었다.
아들과 만나는 장소로 지정된 까페에 그는 기대에 차 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잠시 실망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것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바라던 얼굴을 발견했다.
"어서 와라, 이원아."
그는 언제나 이원을 볼 때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다른 이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남자지만 이원에게만은 언제나 불같이 뜨거운 정열을 발산했다.
이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마주 두드려준 뒤 물러났다. 반가운 얼굴로 마주 앉은 미하일이 이원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지냈니? 별 일은 없었느냐?"
바로 사흘 전에 만났는데 미하일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원은 성의껏 대답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질문을 되돌리며 이원은 말을 끌었다. 아직 아버지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원의 잠시의 망설임을 눈치 챘지만 미하일은 모른 척 대답했다.
"어제는 블라디미르가 왔었단다."
그의 이름은 이원도 알고 있었다. 미하일 다음으로 로모노소프 조직을 이어받은 보스다. 상당히 젊은 실력자로, 핏속에도 얼음이 흐를 거라고 일컬어지는 냉혈한이었다. 이원은 무심코 그에 대해 떠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미하일은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아니, 인사차 왔다고 하더구나. 케이크를 사왔는데 혹시 오늘에 시간이 되니? 와서 함께 먹자꾸나."
미하일은 여상하게 그를 집으로 초대하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 그에게서 받았던 선물이 문득 떠올랐다. '아들'이라고 쓰여있는 빨간 스웨터.
어느 날 아버지를 만나러 나왔을 때 그는 '아버지'라고 쓰여있는 같은 디자인의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지난 생각에 잠겨 미하일의 이런저런 일상을 듣고 있는데, 때마침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보낸 사람은 카이사르였다.
ㅡ 오늘.
이원은 문자를 확인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그만 돌아가야겠습니다."
이원이 빈 그릇을 놓고 일어서자 미하일은 마침 찾아온 레프와 체스를 두던 얘기를 하다 깜짝 놀랐다.
"아니, 벌써 간다고? 아직 차도 다 마시지 않았잖느냐."
아버지는 당황스러움과 실망을 동시에 드러내며 그를 붙잡으려 했다. 이원은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약속이라서."
"다음에 만나면 안 되는 거냐? 이왕 이렇게 왔는데,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러느냐."
시간을 쪼개 만나는 것은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원은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금방 또 뵙겠습니다."
"그래..."
미하일은 극히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는 실망만큼이나 회복도 빨랐다.
"일 때문이라니 할 수 없지. 알았다, 근간 꼭 보자꾸나."
금세 기운을 차린 아버지가 이원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주었다. 이원은 미안한 얼굴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은 뒤 맨션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는 전차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야.
간신히 떠나려는 전차를 잡아탄 이원은 벽에 기대어 서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문앞에 공작새 한 마리가 서있었다.
"이원."
말 끝에 하트라도 붙일 것 같은 기세의 카이사르를 이원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카이사르는 검은 연미복에 샴페인, 빨간 장미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꽃과 샴페인을 들고 대충 집안 아무 곳에나 던져놓은 이원은 길게 얘기할 것 없이 그를 스쳐 걸어갔다.
공동주택의 앞에는 역시나 화려한 리무진이 서있었다. 이원은 별 말 없이 차에 몸을 실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급하다면서."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가 미소를지었다.
"식사를 하면서 얘기하지, 좋은 얘기야."
과연 그럴까? 이원은 내심 생각하며 피곤한 얼굴로 차창에 기댔다.
카이사르가 예약한 식당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쉐프가 메뉴를 정하고 직접 레시피를 만들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장소였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는 저녁 시간의 인기 레스토랑에, 카이사르는 당당히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다.
"역시 샴페인은 돔페리지."
카이사르는 만족스럽게 말하며 무수히 솟아오르는 기포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아무 생각없이 주문한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과연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기다렸다.
식사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원은 카이사르에게서 '중요한 용건'이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었다.
"휴가라니?"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제안한 카이사르의 계획에 이원은 열심히 먹던 스테이크를 내려놓고 눈을 깜박였다. 일부러 프라이빗룸을 예약해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카이사르는 기대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얼마 전에 별장을 샀어. 침실에서 고스란히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지."
그는 와인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프라이빗 비치라서 외부인들을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완벽하게 우리만 즐길 수 있지."
"그렇군."
뭐하러 해안까지 사들일까. 이원은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번 달은 힘든데."
카이사르는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다음 달도 괜찮아."
"다음 달은 어려워."
"그 다음 달은..."
"한국에 다녀올 건데."
카이사르는 와인글라스를 내려놓았다. 글라스의 목에 희미하게 금이 가 있는 것을 본 이원이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그럼 언제 되는 거지?"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은 안 돼?"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걸 당시의 이원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하게도 이원은 날이 밝자마자 일에 매달렸다. 새롭게 들어온 의뢰는 딸이 신흥종교에 미쳐 집을 나갔다고 교주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원은 빼곡히 적힌 교주의 사기행각을 연구하며 열심히 생각을 굴렸다. 일단은 사기에 손해배상을 밀어보고.
중요한 것은 딸의 행방이었다. 엊그제도 딸을 보고 싶다며 울던 아주머니를 떠올리자 이원은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선례를 찾아보자.
비슷한 케이스의 사건파일을 찾으며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든 이원은 마구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의아해져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길함의 서장에 불과했다. 발소리는 바로 그의 집앞에서 멈췄다.
"으악ㅡ!"
다짜고짜 들어온 남자들은 곧바로 이원을 들쳐메고 우르르 건물을 빠져나갔다. 일을 하다 말고 귀 뒤에 볼펜을 꽂은 채 이원은 난데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뭐하는 짓이야, 내려놓지 못해?! 이 자식들, 누구 사주 받고 온 거야? 너희들 다 고소하겠어...!"
앞집도 뒷집도 모두 나와 어쩔 줄 몰라하며 이원이 납치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아한 세단 뒤에 던져지다시피 실려 간 곳은 공항이었다. 뜻밖의 장소에 이원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단으로 밀어넣어질 때와 같은 모습으로 끌려나온 이원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비행기로 곧바로 실려갔다.
"도대체 누가..."
화를 내며 소리쳤던 이원은 아, 하고 곧 납득하고 말았다. 기내에는 짙은 청색의 슈트를 입은 카이사르가 멋진 모습으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이원을 짐짝처럼 들고왔던 조직원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비행기 안에는 이원과 카이사르만이 남았다.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심각하게 깔린 그의 음성에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늘은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1박은 짧지만 어쩔 수 없지."
동시에 이원의 이마 한 쪽에 핏줄이 솟았다.
"넌 농담도 몰라? 그냥 한 소리일 게 뻔하잖아! 이렇게 다짜고짜 끌고오면 내 스케줄은 어떻게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낸 이원은 곧바로 돌아서서 비행기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의 문은 소리없이 닫히고, 기장은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요!"
당황해 소리친 이원에게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이륙 준비 중입니다.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잠깐, 난 안 가니까 내려주십시오. 잘못 탔다고요!"
"네?"
이원이 비행기의 문을 사납게 두드리는 모습에 스튜어디스는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니까 앉아."
카이사르의 냉정한 음성에 이원은 화가 치밀어 돌아섰다. 이게 누구때문인데?! 독한 말로 쏘아주려던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의뢰인 딸의 행방은 찾았나? 듣자하니 그루지야에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원은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가볍게 샴페인 글라스를 들어보였다. 이원을 말리던 스튜어디스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곧 이륙합니다. 자리에 앉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연거푸 사정하는 그녀의 말에, 이원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고 말았다.
얼떨결에 끌려오긴 했지만 카이사르가 자랑한 대로 해변은 아름다웠다. 게다가 무엇보다 추위를 타지 않았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는 것도 좋았다. 사실 휴식이 필요한 것은 이원ㅇ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끌려오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지난 일들을 어렴풋이 되돌리며 바다 밑에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태양을 무심코 바라보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던 이원은 카이사르의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프라이빗 해변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거기엔 카이사르와 이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평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고, 모피코트가 아닌 단추를 푼 편안한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만 빼고는.
카이사르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이원은 화를 낼 기분이 사라졌다. 별장에 오기까지는 꼬박 6시간이 걸렸다. 고작 하루뿐인 휴식.
그 귀한 시간을 싸우면서 보낼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서서 이원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눈을 깜박였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이원이 아무렇게나 쓸어올렸다.일출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든 그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않아?"
어째서 벌써 일어났는지 나무라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는 건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모처럼 새로운 곳에 왔는데 즐겨야지."
가볍게 말을 받았던 이원이 몸을 돌렸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흘긋 뒤를 돌아본 이원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겠어? 그냥 산책이지만."
카이사르는 말없이 그를 마주보다가 조용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이사르가 이원의 옆에 섰을 때, 이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코를 아프게 쥐어주었다.
"한번 더 이런 식으로 하면 그땐 용서 안해."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픈 코를 쥐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갔다. 조용히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소리가 둘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가볍게 맞잡은 손이 신경 쓰였지만 거슬리지는 않았다. 이원은 그저 손가락이 맞닿은 정도가 전부인 교감이 좋아 그 상태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국에서도 섬에서 살았어."
이원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파도소리가 들렸지. 처음 도시로 나왔을 때는 잠을 자지 못했어. 그래서 어머니가 파도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줬었지."
이원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서렸다.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이원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카이사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원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은 그곳에 없다. 자신이 러시아에 온 단 하나의 이유를 떠올렸던 이원은 곧 화제를 돌려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넌 어때? 어떤 어머니였어?"
카이사르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망설임이 아닌 기억을 더듬기 위한 침묵이었다는 것을 이원은 나중에 알았다.
"금발이었던 것 외에는 기억이 안 나."
"어릴 때 돌아가셨나 보지."
이원의 말에 카이사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카이사르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만난 건 단 한번 뿐이야. 아주 어릴 때."
놀란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카이사르는 여전히 무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해, 어떤 여자였는지."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얘기를 하는 듯 했다. 이원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당황했다. 카이사르는 한번도 자신의 얘기를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무안해하지도, 꺼림칙해하지도 않았다. 물어보니까 대답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문득 생각했을 때였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이런 얘기까지는 한 적이 없었는데."
조용한 음성에 이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사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넌 항상 나를 방심하게 만드는 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심? 이 남자가? 그랬던가.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너와 있으면 심장이 뛰는 걸 느껴."
카이사르가 발걸음만큼이나 느린 말투로 말을 계속했다.
"지금껏 없었던 기분을 느끼게 돼.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기분..."
카이사르가 걸음을 멈추고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넌 느낀 적 있나?"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질문에 이원은 당황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더없이 진지했다. 똑바로 자신을 응시해오는 은회색의 눈동자를 보자 이원은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이런 고백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남자가 이렇게 과감하게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말은 저렇게 뻔뻔하게 할까, 하고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면서도 이원은 핀잔을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원은 아무 말없이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안에서 이원은 그의 불안과, 초조함과, 당혹스러움과, 알수 없는 떨림과 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너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어."
이원이 중얼거렸다.
"우린 서로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네 눈은 심연이야."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빠져들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속삭임과 같은 음성에 이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아, 하고 문득 한숨이 새어나왔다.
"키스해도 돼?"
이원이 묻자 카이사르는 멈칫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을 뜨는 그에게, 이원은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목을 감쌌다. 가만히 힘을 줘 그를 끌어당기고, 이원이 눈을 감았다.
무심코 달콤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원은 그것이 자신의 숨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굳이 그것을 감추지 않은 채로, 부드럽게 입술을 맞물렸다.
다정하게 빨아들이는 속살과 온화하게 맞닿는 숨결에, 카이사르는 눈을 감은채 그대로 키스를 받아들였다.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지듯 상냥한 키스였다.
문득 그 안을 맛보고 싶어졌다. 카이사르는 위로가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좀 더, 좀 더 가지고 싶었다.
입술을 가르고 입안을 핥으려 했을 때, 불현듯 이원이 몸을 뗐다. 갑작스러운 이탈에 카이사르는 멈칫했다. 이원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곧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마. 해가 뜨고 있어서 키스한 것뿐이야."
이원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함께 일출을 보면 키스를 하거든."
"뭐라고?"
그런 바보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원은 더 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 웃으며 돌아섰다.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연습해 봐."
카이사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원이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밑에서 모래와 뒤섞인 눈이 뽀득거리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카이사르는 그 자리에 선 채 멀어지는 이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 그에겐 온기가 남아있었다. 손끝에, 목덜미에, 입술에.
카이사르는 손을 내밀려다 그만두었다. 허공에 멈추고 만 자신의 손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그것을 거둬들인 카이사르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의 시선 끝에는 멀어지는 이원의 뒷모습이 있었다. 자신이 놓친 그의 뒷모습이. 그를 바라보는 동안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뜨거운 욕망이 솟아올라왔다.
저 남자를 가지고 싶다.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뼈도, 살도, 몸속을 흐르는 피까지 전부.
가지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이원이 뒤를 돌아보고, 다음 순간 허리를 끌어 안겼다.
아, 하는 탄성을 지르기도 전에 먼저 쓰러졌다. 젖은 모래가 얇은 셔츠너머로 까끌거리며 문질러지고, 차가운 습기와 함께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원은 고개를 들어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검은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르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 왜 그랬을까. 카이사르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다음 말은 좀 더 시간을 두고 흘러나왔다.
"좋아서."
이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왠지 부끄러워져, 이원은 짐짓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자 카이사르는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이원은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아 그를 끌어당겼다.
"함께 있자, 앞으로도."
다정한 속삭임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겹쳐지는 입술에 이원은 눈을 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