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4)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이 차 견딜 수가 없었다. 이원은 거친 수멸로 가슴을 들썩이며 기침을 토해냈다. 동시에 늙고 마른 손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낫는 거겠지...?"

불안한 미하일의 음성에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네, 저체온증에 감기가 겹쳤을 뿐입니다. 체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는데 아마 그래서 열이 더 오르는 걸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렴으로 전이가 되지 않는다면 곧 나을 겁니다."

상세한 설명에 미하일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원은 누운 채로 사람들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미하일에게 레프가 보고를 했다.

"로모노소프 씨. 아무래도 이 일은 세르게예프 쪽에서 저지른 일이 확실합니다."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후계자가 나타나니 긴장한 겁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꾸미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나도 그러고 싶네만."

미하일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쪽도 이제 후계자가 없지 않은가."

...뭐?

이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하게 말소리만은 또렷이 들려왔다. 미하일은 미처 그의 그런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됐어. 2인자인 튜체프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서 모든 걸 차르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으니... 정작 차르는 죽었으니 진실을 알 방법은 요원하지 않겠나. 아들이 깨어나 말해주기 전까지는."

미하일은 걱정스럽게 덧붙였지만 이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열로 들뜬 이원의 머릿속에는 단 한가지 사실만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차르가 죽었다니.

카이사르가, 죽었다...!

ㅡ 돌아올게, 기다려 줘.

자신을 향한 물기어린 시선이 되살아났다. 순간 눈앞이 까맣게 가라앉고, 이원은 그대로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원은 멍하니 눈을 감은채 지친 눈을 깜박였다. 온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이런 기분, 언젠가도 느꼈었는데. 뒤늦게 이원은 기억해냈다.

그렇지, 카이사르의 집에서 약을 먹었을 때. 무심코 떠올렸던 기억에 곧바로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카이사르.

황급히 일어났지만 곧바로 극심한 현기증이 번지고 이원은 이를 악문채 몸을 숙였다. 그런 그의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쥐었다.

"안돼요.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다니."

다정한 음성이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헤치고 들어왔다. 왠지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던 이원은 믿을 수 없는 얼굴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래오니드 씨?"

반신반의하며 부른 이름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날 기억하고 있었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이 남자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지난 일을 되살린 이원은 곧바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되면 죽도록 패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런 좋은 기회에 컨디션이 최악이라니.

섣불리 주먹을 날리는 대신 이원은 원한을 적립해 두었다. 간신히 이성을 찾은 이원이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여기는, 혹시..."

잔뜩 쉬어 갈라지는 음성에 래오니드는 선뜻 돌아서서 물컵에 물을 따라왔다. 건네받은 물을 망설이다 받아든 이원이 한 번에 그것을 비우자, 래오니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 그러니까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이번 일의 의뢰자죠."

래오니드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깜짝 놀랐습니다. 당신이 로모노소프의 후계자였다니."

"조직의 일은 나와 관계없습니다."

이원은 날카롭게 내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상태에 또다시 신경이 곤두섰을 때, 래오니드가 말했다.

"어쨌든 인연이군요,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싱긋 웃는 그의 얼굴에 이원은 간신히 속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날 어떻게 찾아내고."

"로모노소프 씨가 저에게 의뢰를 했죠."

래오니드는 선선히 대답을 했다.

"당신이 끌려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주변을 뒤져 세르게예프 쪽의 토지가 있나 찾아봤죠. 가장 외진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더군요. 조금만 늦었어도 당신은 동사했을 겁니다."

감사의 인사라도 기대하듯 사이를 두는 그의 말에, 이원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 그럼 저번에도...?"

의심스러운 이원의 질문에 래오니드는 선뜻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때는 세르게예프 쪽의 의뢰였습니다. 후계자가 아닌 반대파의 남자였죠. 그러고 보니 그 쪽도 이번엔 꽤 황당한 일을 저질렀더군요."

마지막 말에 이원은 신경이 곤두섰다. 설마, 그 얘긴 아니겠지. 난 꿈을 꿨던 거야. 그건 현실이 아니었을 거야. 절대, 그런 일은...!

"후계자를 죽이고 자신이 조직을 이어받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참 깜찍하지 않습니까? 마피아들이란, 시대가 바뀌어도 생각하는 건 달라지지 않더군요. 아, 실례했습니다."

선뜻 사과를 덧붙인 래오니드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이원은 웃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그의 말은 단 하나 뿐이었다.

"후계자가, 죽었다고요?"

자신의 음성이 몹시 흔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제가 되지 않았다. 간신히 물은 이원에게 래오니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직 내에 분란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사실 로모노소프 쪽에서도 당신을 납치한 게 세르게예프의 후계자가 아니냐고 하면서 한동안 전쟁이라도 일으킬 분위기였는데, 일단 지금은 휴전 중이라고 할까요. 언젠가 한번 다시 붙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죠."

래오니드는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의 말 한 마디에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순간이 되겠군요."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덧붙인 래오니드가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로모노소프 쪽에서는 잘된 일이겠지만요."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넋을 잃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묘한 반응에 래오니드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원은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래오니드는 의아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 반응은 도대체 뭐지?

"그럼 의식이 돌아왔다고 로모노소프 씨에게 말을 전하러..."

자연스럽게 돌아서서 방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이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래오니드는 뜻밖의 일에 놀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까칠한 얼굴에 병자의 기색이 완연한 그의 겉모습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강한 힘으로 이원은 래오니드를 잡고 있었다. 래오니드는 눈을 깜박이다 사뭇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네, 무슨 일입니까? 필요한 거라도?"

천성적으로 다정한 성격을 십분 발휘해 물었지만 이원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놀란 눈을 크게 뜬 채 몇 번이나 파닥거리던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타액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이원이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가, 차르가... 죽었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연거푸 묻는 이원의 말에 래오니드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째 신문에도 나고 세르게예프 쪽에서 시신을 확인했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게다가 어제 장례를 치르기까지 했습니다만."

이원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래오니드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의아해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 끝난 일이니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세르게예프쪽에서도 당분간은 간부들끼리 세력다툼이 있을 것 같더군요. 권력이란 결국 더러운 개싸움이 되는 법이죠."

래오니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이원은 이번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곧이어 침묵이 자리 잡고, 이원은 혼자 남겨졌다.

죽었어.

래오니드의 말과 함게 드미트리의 웃음소리가 되살아났다.

어때, 연인의 피냄새는?

자신을 끌어안고 속삭이던 카이사르의 음성이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한테서 달아나지 마.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가 시야에 가득히 차올랐다.

기다려 줘.

돌아올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이 영원히 끝이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왜.

이원은 생각했다.

왜 나는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을까.

순간 눈물이 가득 차올라와 시야가 온통 흐려졌다. 이원은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오열을 삼켰다.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떨리던 음성도, 자신을 바라보던 물기어린 시선도, 필사적으로 나를 붙잡으려 내뻗던 손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손을 놓으면 그는 죽어버릴 거라는 것도. 하지만 이원은 몰랐다. 영원히 그 손을 잃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숨 가쁜 오열이 치밀어 올라오고, 이원은 침대위로 쓰러졌다. 밭은 숨을 내뱉는 입안으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들어왔다. 조용한 방안에는 그의 흐느낌 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린 뒤 이원은 겨우 회복이 되었다. 폐렴으로 전이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의사의 말에, 미하일의 주름진 눈가에 설핏 눈물이 서렸다.

이원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줄곧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틈틈이 신문을 보고 인터넷을 뒤지며 쉼 없이 일을 했다.

몸이 나아질수록 일을 하는 시간은 많아졌다. 보다 못한 미하일이 나무라듯 그를 말렸지만 이원은 괜찮다고 말했을 뿐 달라지는 게 없었다.

도대체 뭘하는 걸까?

급기가 그가 하루 종일 서재에 진을 치기 시작했을 때, 미하일은 물론 조직원들조차도 궁금해 하며 서재를 얼씬거리기 시작했다.

그 날도 이원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래오니드는 상석에 앉은 미하일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뭘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네. 그나저나 자네야말로 도대체 뭘하는 건가? 의뢰는 진작에 끝났는데 의뢰인의 집에 머물러 있다니."

이 무슨 민폐냐고 미하일은 묻고 있었다. 하지만 래오니드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련님이 낫는 걸 보고 싶어서죠. 인명을 구해냈는데 그 정도 보람은 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이원이는 다 나았네."

"그렇습니까? 의사의 말은 다르던데요."

빙긋 웃는 래오니드의 얼굴에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듯 바라보는 미하일의 시선에 래오니드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십시오, 앞으로 한 달은 붙잡아둬야 한다면서 의사에게 돈을 줬다는 얘기는 절대 이원 씨에게 하지 않을 테니."

래오니드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의사가 연기를 잘하더군요. 앞으로 한달은 더 경과를 봐야한다고 말하는데,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는 미하일에게, 래오니드는 선뜻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겟습니다. 팬케이크가 정말 맛있군요."

마침 지나가던 메이드에게 인사를 한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을 걸어나갔다. 혼자 남은 미하일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팬케이크를 노려보다 이내 접시를 밀어버렸다.

똑똑.

가벼운 노크소리에 이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래오니드는 문을 열었다. 서재의 창은 활짝 열린 채 차가운 바람이 그대로 불어왔다. 이원은 바닥에 앉아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래오니드는 내심 혀를 차며 선뜻 그에게 다가갔다.

"몸이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자학인 겁니까, 자만인 겁니까?"

래오니드는 몸을 내밀어 커다란 창을 닫아 걸어 잠그며 말했다.

"힘겹게 살려놨는데 죽으면 곤란해요."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걱정마십시오, 그냥 환기를 시키려했을 뿐이니까."

건성으로 말하며 서류에 하이라이트를 치는 그의 모습에, 래오니드는 의아해하며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뭘 하는 겁니까? 다들 궁금해 하더군요."

이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간단한 재무조사입니다."

래오니드가 서류를 들여다보자, 이원은 곧바로 그것을 뒤집어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꽤 오래 있는군요. 일이 없습니까?"

비꼬는 말처럼 들렸지만 이원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래오니드는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네, 휴가입니다. 마침 로모노소프 씨가 아들의 은인이라고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군요."

이원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래오니드는 그가 은근히 짜증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까? 말해 봐요,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줄 누가 압니까?"

"아."

이원은 뒤늦게 생각난 듯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군요, 가까이 오십시오."

손가락을 까딱이는 그의 모습에 래오니드는 의아해하며 몸을 숙였다. 다음 순간, 힘껏 쥔 주먹이 래오니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날아가 버린 래오니드에게 이원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지난 번의 빚입니다."

"빚이라니, 이쪽도 이원 씨를 살려줬지 않습니까?"

"그건 보수를 받았겠죠. 제게 진 빚은 안 갚았습니다."

냉정하게 말한 뒤 다시 서류로 향하는 이원의 시선에 래오니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다시 서류에 집중하는 그를 본 래오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럼 빚은 갚았으니 말해보죠, 이건 뭡니까?"

이원은 흘긋 그를 올려다보았다.

"꽤 끈질기군요."

"스나이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일 뿐입니다."

사뭇 겸손하게 말한 래오니드가 기대에 차 이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뭔가를 말해줄 것을 바라는 듯이. 이원이 뜻밖에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멈칫한 래오니드에게 이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문으로 향했다.

"부디."

선뜻 문을 열고 나가라는 표시를 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결국 래오니드는 일단 물러나기로 햇다.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택으로 다가오는 차의 엔진소리가 들렸다.

래오니드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돌아섰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누굴까?"

딴청을 피우며 시간을 끄는 그의 행동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창으로 걸어왔다. 무심히 시선을 내렸던 이원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뜻밖의 반응에 래오니드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지, 하고 목을 빼 창밖을 내려다본 그는 곧 이유를 알았다. 방문객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느 방문객과 달리 이원의 반응은 민감했다. 갑자기 이원이 돌아섰다. 미처 그를 붙잡기도 전에 이원은 서재를 나가버렸다.

래오니드는 의아해하며 방문객을 확인했다. 검은 세단의 문이 열리고 키가 큰 남자가 안에서 나왔다.

드미트리 세르게예프.

래오니드는 단정하게 허리를 편 남자의 거만한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저택은 일순 술렁였다. 세르게예프 조직의 실력자인 드미트리가 단신으로 로모노소프를 만나러 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시 경계하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조직원들 속에서, 드미트리는 당당하게 미하일의 앞까지 걸어왔다.

"건간하셔서 기쁩니다. 로모노소프 씨."

빙긋 웃는 그의 얼굴에 미하일은 역시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여전하구먼, 드미트리."

드미트리는 부정하는 대신 짧게 웃어보였다. 곧 그는 용무를 꺼내놓았다.

"아시겠지만 현재 세르게예프가 무척 혼란한 상태입니다."

선뜻 말을 꺼낸 드미트리가 미소를 지었다.

"로모노소프 씨께서 힘을 빌려주시면 조직을 안정시키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하!"

여기저기서 어이가 없다는 듯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일부는 머리 옆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미친 게 아니냐는 표시를 하기도 했다. 주변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드미트리는 미하일에게 시선을 향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말이 없었다.

"이런 제안을 할 때는 이쪽에서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는 게 옳지 않은가."

"물론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드미트리는 미하일의 뒤쪽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장신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이 마주치자 이원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드미트리는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않고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한 게 전부였다.

"로모노소프 쪽에서도 절대 손해를 입을 일은 없으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일단 생각해 보시는 쪽이."

"이원아."

미하일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이원에게로 향하고,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이런 제안이 들어왔는데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이원은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 외부인이라 저의 의견은 도움이 안 될 텐데요."

"그래도 듣고 싶구나. 그렇지, 변호사로서 너라면 이런 제안을 받은 의뢰인에게 어떻게 충고를 해주겠니?"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물음에 이원은 콧등에 주름을 새기더니 곧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이득이 될 거라는 얘기만으로 협상을 진행하려는 건 코흘리개 아이나 하는 수법이라고 조언하겠습니다."

미하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치를 보던 조직원들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를 내고, 이내 실내는 웃음바다가 됐다. 웃지 않는 것은 오직 이원과 드미트리 뿐이었다. 한 차례 웃음의 파도가 밀려간 뒤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세르게예프 조직의 2인자인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시선은 미하일에게 향해 있었으나 질문은 이원에게 향한 것이었다. 이원은 도전을 거절하지 않았다.

"1인자에게 독대를 청했으면 1인자가 찾아오는 것이 하나의 예의죠. 나라를 방문할 때도 대통령은 대통령이 맞이합니다."

과연, 하고 미하일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아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예뻐 견딜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물끄러미 이원을 바라보던 드미트리가 미소를 지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할 수 없죠, 저희 쪽의 1인자와 협상을 하십시오."

때마침 복도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절도 있는 구둣발소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고개를 돌렸다. 

이원 또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그의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이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람들은 모두가 말문을 잃고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응접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긴 복도를 지나 들어온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응접실 한 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차르."

누군가가 헛소리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플라티나 블론드의 남자가 온통 검은 슈트를 입은 채 그들 앞에 서있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카이사르가 한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고, 그는 넋을 잃고 굳어져 있는 이원의 모습에 일순 눈동자가 흔들렸다.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왜 네가 여기에.

순간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로 내지르고 말았다.

"잠시 차르와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모두가 일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충동적으로 내뱉고 만 이원은 급히 이성을 찾고 덧붙였다.

"담당 변호사로서 협상 전에 조언을 할 게 있습니다."

"이원아, 나는?!"

미하일이 서운한 듯 물었지만 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곧바로 손을 뻗어 카이사르의 팔을 잡은 채 마구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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