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에서 뽀득거리며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며 살며시 혀를 내밀었다. 눈송이가 혀에 부딪쳐 금세 물이 되어 사라졌다.
맨발에 닿는 눈은 끔찍할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이원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코 끝에 번지는 차가운 공기가 폐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담배를 피운지 오래 됐군... 아예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춥잖아."
조용한 음성으로 말한 카이ㅅ르가 이원의 어깨에 코트를 얹어주었다. 카이사르의 모피는 이원에게는 조금 컸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원이 걸음을 멈추자 카이사르가 물었다.
"뭐하는 거야? 눈속에서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다니."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마침 바람이 불어오고, 날리는 눈발에 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가 먼 곳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어 그의 턱을 잡았다.
"보지 마."
어쩔 수 없이 그를 올려다보자 카이사르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먼 데 보지 말라고."
카이사르의 음성에는 일말의 불안이 남겨져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마주 보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안 가."
지금은.
이원은 내심 덧붙였다.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뼈대가 긴 손가락이 살며시 뺨을 스치고, 따스한 온기가 머물렀다 이내 사라졌다.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입술이 겹쳐졌지만 이원은 피하지 않았다. 거절당할 것을 생각했던 듯 머뭇거렸던 카이사르가 눈을 감았다. 차갑게 식은 몸에서 오로지 입술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혀가 섞이고 입술이 맞닿았다. 이원은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지도, 뺨을 쓰다듬어주지도 않았다. 이원이 한 일은 그저 그를 내버려둔 것뿐이었다. 지금껏 일방적인 섹스를 강요당할 때 그래왔던 것처럼.
혀를 섞고 문지르며 타액을 교환하던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원의 얼굴을 본 카이사르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가만히 이원의 뺨을 쓰다듬었던 카이사르가 갑자기 이원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곧바로 몸이 엉키고, 함께 쓰러졌다.
이원을 안고 넘어진 카이사르가 자신의 위에 엎드린 이원을 마주 보았다. 가만히 손가락으로 이원의 뺨을 쓰다듬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
그제야 이원은 그가 슈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이사르는 눈 위에 누운 채로 이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간부 회의가 있어. 곧 끝날 거야."
이원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냉정한 거절에, 카이사르의 은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물들었다. 심한 짓을 한 것은 자신이면서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을 하다니 이원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어 머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안타까움과 탄식을 담아 입안을 핥고 문지르는 키스에, 이원은 반응하지 않았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목을 거쳐 아래로 내려갔다.
얇은 셔츠 위로 이원의 몸을 어루만지던 손이 그의 셔츠를 올리고 아래에 있는 엉덩이를 붙잡았다. 순간 이원의 전신이 굳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카이사르와 이원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돌아올게. 기다려 줘."
카이사르는 말했다. 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물기를 머금은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이원은 끝까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외곽에 있는 클럽은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헤쳐 드미트리의 클럽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입구에서 엄밀히 주변을 감시하는 남자를 지나쳐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의 정기휴일인 이 날은 평소의 요란한 실내와 아주 달랐다. 음악소리는커녕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카이사르는 안내를 받아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물러난 직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실내에는 대부분의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술을 나누며 떠들던 간부들은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입을 꽉 다물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삽시간에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고, 모두가 서먹하고 묘한 시선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아아, 어서 와 차르."
카이사르의 등뒤에서 불쑥 나타난 드미트리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쳤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드미트리는 여유롭게 웃으며 최상석을 가리켰다.
"왕의 자리야."
드미트리의 말에 카이사르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고요한 침묵 사이로 카이사르의 발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제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실까요?"
드미트리가 환하게 웃으며 보란 듯이 카이사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드미트리의 맞은편인 것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반대쪽 옆자리에 앉은 튜체프는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좋지."
간부들의 앞에 놓인 술잔에 가득히 술이 따라지고, 모두가 건배를 한 후 잔을 한번에 비웠다. 카이사르 또한 그에게 주어진 잔을 완전히 비운 뒤 내려놓았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드미트리가 다시 그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요즘 계속 컨디션이 안 좋은것 같더니, 이제 괜찮은 모양이지?"
"별로."
무심히 말한 카이사르가 다시 잔을 비웠다. 드미트리는 재빨리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들 얘기했었어. 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변호사를 치워버린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이야. 게다가 로모노소프의 숨겨진 아들이었다면서?"
드미트리의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역시 어쩔 수 없군, 로모노소프란."
"잡종들의 모임 아니오. 순혈의 의미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
"루시스키들을 모아놓고 조직이라니, 우리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지 뭐겠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불현듯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
단 한 마디에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당혹해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간부들의 모습에,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그냥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래. 그리고 사실이잖아."
드미트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 변호사가 쓰레기 잡종이라는 것도."
순간 카이사르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며 드미트리를 노려보았다. 삽시간에 실내에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서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다시 그런 말을 한다면 혀를 뽑아버리겠어."
"어째서? 그냥 농담일 뿐인데."
동조를 구하듯 다른 간부들을 돌아보는 드미트리의 모습에, 튜체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어차피 우리와는 급이 다른 잡종들 아니오. 뭐라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예리하게 내뱉었다.
"듣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만 두시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불현듯 흘러온 불온한 분위기에 모두는 술잔을 들지도 못한 채 눈치만 살폈다. 그 가운데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전에는 안 그랬잖아? 우리가 루시스키에 대한 농담을 하건 욕을 하건 그냥 내버려뒀으면서, 왜 갑자기 그렇게 태도가 돌변했어?"
카이사르는 무심히 대답했다.
"남을 놀리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드미트리."
"그래, 배운 적 없어."
드미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하지만 혼혈이나 루시스키들이 쓰레기라는 말은 배웠지."
"맞아, 맞소."
"루시스키에 대해 좀 떠들면 어떻소? 어차피 벌레만도 못한 것들인데."
"밟아버려도 시원치 않은 것들이지. 그런 놈들 때문에 우리 러시아가 발전을 못하는 거요."
입을 모아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는 간부들에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쪽은 그쪽대로의 룰이, 우린 우리대로의 룰이 있는 겁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튜체프가 나섰다.
"우리의 룰이 뭐요? 당하고도 참는 거? 아니면 루시스키들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는 거?"
도발적인 물음에 카이사르가 눈썹을 찌푸리고, 다른 간부가 서둘러 나섰다.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차르는 그저 신중하자는 얘기잖소."
"신중? 그 신중함 때문에 우리 조직 전부가 위기에 처했소. 길을 가면 아이들이 겁쟁이라고 우릴 놀릴 지경이오. 이건 어떻게 책임 질 거요?"
튜체프가 격앙된 목소리로 고발했다. 여기저기서 당황한 수근거림이 이어졌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루시스키라고 해서 무조건 죽이고 탄압하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까?"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피가 다르지 않소!"
튜체프는 버럭 내질렀다.
"차르도 더 신중하시오. 이런 식으로 세르게예프 파의 취지와 맞지 않는 짓을 계속한다면 사샤에게 연락을 하는 수밖에 없소!"
간부들은 입을 다문 채 침묵하며 카이사르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무조건 죽이고 사건을 일으키는 게 세르게예프의 취지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내가 당했던 일이고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 일은 그냥 묻어두십시오."
간부들은 고요 속에서 묵묵히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술잔을 한 번에 비운 카이사르가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그래서 넌 안 된다는 거야, 차르."
낮은 속삭임과 함께 드미트리가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뜻밖의 상황에 카이사르는 즉각 반응을 하지 못했다.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잘 가."
뱃속에 화끈한 통증이 퍼졌다. 카이사르는 무심코 눈을 깜박였다. 금세 셔츠가 흥건히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무리의 얼굴에 살기와 공포가 가득했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은 이렇게 모든 것을 끝낼 날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예감했었다고.
자신의 배에 서슴없이 칼을 꽂아넣은 남자의 얼굴을 카이사르는 맥없이 바라보았다. 솟구치는 출혈로 발아래가 흠뻑 젖어들었다. 꺾이는 무릎을 어쩌지 못한 채 카이사르는 손을 뻗었다.
붉게 젖은 손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새하얀 슈트가 금세 벌겋게 물들었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속삭였다.
"말했잖아, 난 돈이면 뭐든 한다고."
아아, 그랬었지.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실수했군, 널 믿다니.
카이사르의 눈이 흐려지며 그의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더니, 이름이 주인과 같은 상황이 되다니 아이러니하군.
"드미트리, 너 마저도."
웃음이 섞인 속삭임과 같은 탄식을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이원은 잠에서 깼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이원은 맥없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내리던 비는 이제 함박눈이 되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원은 멍하니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문득 다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하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모두가 지친다. 놓아버릴 수도 잡을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원은 이제 짜증이 났다. 이번에 또 달아난다면 넌 내 심장에 총을 쏘겠지. 이원은 막연히 생각했다. 왠지 너무나 현실성 있는 상상에 문득 소름이 돋았을 때였다.
창밖으로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사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원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꼴로 침대에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았다.
달아날 수도 잇었지만 자신은 가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고 나자 자신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가 절뚝거리며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미처 자신의 옷을 찾을 수 없었던 이원은 카이사르의 옷을 찾아 걸쳤다. 헐렁한 바지는 벨트를 꽉 매 고정시켰지만 맨발에는 슬리퍼 외엔 신을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발을 끌며 벽에 기대어 걸어갔던 이원은 문득 현관문 밖에서 들리는 생소한 음성을 듣고 멈칫했다.
들리는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방언이 섞인 듯한 묘한 러시아어에, 이원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갑자기 우지끈, 하고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야아, 여기 있었네 변호사 양반."
순간 놀라 고개를 들자 부서진 현관문 너머로 드미트리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이원은 놀란 눈으로 갑작스러운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드미트리가 벙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실망한 표정인데."
드미트리가 흘긋 이원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치수에 맞지 않는 옷을 물끄러미 보았던 그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다시 이원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이원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드미트리는 소리없이 웃었다. 이원은 냉정을 찾고 내뱉었다.
"무슨 일입니까? 카이사르는 지금 없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하고 따로 만나시죠."
"나중, 이라고?"
드미트리가 이원의 말을 되풀이했다. 뭔가 좋지 못한 예감을 느꼈을 때, 그가 갑자기 손짓을 했다. 그것을 신호로 남자들은 구둣발로 현관문을 넘어들어와 거침없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원은 어떤 대처를 해야 좋을지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뢰한들 사이에서 선뜻 앞으로 나선 낯익은 남자의 얼굴에, 이원은 눈을 크게 떴다.
곧바로 손을 뻗은 드미트리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벽에 밀어붙였다. 순간 신음이 드미트리의 손안으로 삼켜지고, 이원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무슨 짓이야, 그는 무서운 눈으로 드미트리를 노려보았다. 드미트리는 그의 입을 틀어막은 채 냉소를 지었다.
"연인의 피냄새는 어떻지?"
뒤늦게 이원은 섬뜩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붉게 물든 드미트리의 손이 이원의 입을 막고 있었다. 설마, 하고 눈을 깜박이는 이원에게 드미트리가 히죽 웃었다.
"차르는 안 와."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영원히."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거칠게 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소리지...?
믿을 수 없는 말에 그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는 이원의 반응에, 드미트리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얼마나 황홀한 표정인가."
드미트리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낮은 소리로 웃었다.
"네 머리를 이대로 잘라서 꽃병에 꽂아두고 싶군."
섬뜩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그와 함께 드미트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이원은 눈치 챘다. 이 남자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무심히 입술을 내주자 드미트리는 피식 웃었다.
똑바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술을 맞물린 그의 얼굴에서 이원은 명백히 혐오감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원 역시 눈을 감지 않았다.
똑같은 감정을 담아 그를 노려봤을 뿐. 일부러 입술을 열어 그를 방심시킨 이원은 혀가 얽히는 순간 곧바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부츠를 신고 있는 남자의 정강이를 맨발로 걷어차는 것은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놀란 드미트리가 순간 방심해 물러났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이원은 곧바로 방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드미트리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어서 달아나라고. 곧 갈가리 찢어주러 갈 테니."
등뒤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황급히 등뒤로 문을 닫아 잠근 이원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지만 속셈은 하나였다.
이원은 절뚝거리며 가구를 밀어 문을 막았다. 지금 그의 상태로 멀리 달아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원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임시로 문을 막은 뒤 발을 끌며 창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은 곧바로 밖과 연결되어 있었다. 급히 카이사르의 코트를 꺼내 걸친 이원은 창문을 열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2층 높이의 창은 그를 두렵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소복이 쌓인 눈이 완충제 역할을 해주었다. 위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시간을 끌지 않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계속해서 쌓이는 눈은 벌써 무릎높이까지 내리고 있었다. 몸도 좋지 않은데 발까지 푹푹 빠지는 눈에 이원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대한 멀리 가야 한다. 이대로 뒤를 밟히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이원은 숨을 몰아쉬며 온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거친 숨결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내리는 눈을 허공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금세 지친 이원이 발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는데, 갑자기 뒤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뺨에 따끔한 통증이 스치고, 이원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드미트리가 그에게 총구를 겨눙 채 서있었다. 뒤따라 나온 남자들이 일제히 이원을 향해 총을 겨누고, 이원은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또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이번엔 총탄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원은 최대한 몸을 숙이고 어떻게든 달아나려 눈속을 걷고 또 걸었다. 뒤를 쫓아오는 드미트리의 노랫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 했다.
"눈밭의 토끼 ~ 토끼를 잡아서 가죽을 벗겨라 ~"
아하하하, 하고 그가 웃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등뒤로 사박거리며 눈이 밟히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숨이 막히고 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다.
아니, 다리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며 쑤셔왔다.
한계다.
이원은 생각했다. 이대로 여기서 이렇게 애처로운 사냥감이 되어 죽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불현듯 그의 시야에 작게 뚫린 굴이 들어왔다.
사박거리는 눈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이원은 숨을 죽인 채 납작 몸을 엎드렸다. 계속해서 쌓이는 눈이 금세 자신의 자취를 지워갔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투박한 방언이 섞인 러시아어로 남자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남자들은 시끄럽게 말을 주고받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원은 행여나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낮게 뚫린 구멍너머로 남자들의 발이 보였다. 곧이어 큰 보폭으로 걸어온 발이 근처에 멈추고,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휙, 하고 짧은 휘파람을 불었던 그가 흥얼거렸다.
"토끼가 토끼굴에 ~"
이원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대로 숨을 멈춘 채 잔뜩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데, 다른 남자들이 투박한 말투로 수색이 무의미함을 보고했다. 여전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드미트리가 말했다.
"하는 수 없지, 돌아가자."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드미트리의 발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이원의 심장이 입밖으로 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어댔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 이원의 위로 드미트리가 낮게 속삭였다.
"다음엔 가죽을 벗겨야지."
이원이 숨을 멈추고, 드미트리가 돌아섰다. 사박거리며 발밑에서 부서지는 눈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움푹 팬 발자국 위로 드문드문 눈이 쌓이고, 얼마 안가 그들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간신히 안심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즈음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이원은 눈이 굴의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리기 전에 간신히 헤엄치듯 안에서 기어나왔다.
주변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어지자 온몸의 통증이 되살아나며 죽을 것처럼 몸이 아파왔다.
"아!"
순간 무릎이 꺾여 그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땅을 짚은 두 손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하얀 눈 위에 누워 그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안 온다고...?
드미트리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돌아온다고, 기다려 달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자신을 응시하던 물기어린 시선이 이원의 기억에 되살아났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따뜻한 손가락도, 부드럽게 맞물리던 입술도,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하던 낮은 음성도.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인데.
이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드미트리가 한 말이지 않은가.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원을 괴롭히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 반드시 그럴 거야...! 이원은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무릎이 꺾이고, 그는 눈밭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차가워...
이원은 밭은 숨을 내쉬며 쓰러져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던 카이사르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데, 흐린 시야에 누군가가 비쳐들었다. 드미트리가 되돌아온 건가, 했지만 그는 혼자였다.
아.
이원은 납득했다. 카이사르가 돌아온 모양이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거짓말이었구나.
"이원 씨?"
부드러운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뺨을 스치는 다정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문득 눈가가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