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4)

이어폰을 꽂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앉아있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느긋한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까페의 창가에 앉은 그는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앞에 두고 한가로이 신문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유행가의 가사를 흥얼거렸다.

읽던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에스프레소 잔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아.

드미트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빙고."

걸려있는 수액병에 자그만 기포가 올라왔다. 가득 담겨있던 수액은 어느새 1/3까지 수면이 내려와 있었다. 이원은 아무 말 없이 창백한 미하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패닉이 되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은 멍한 얼굴로 누워있는 마자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용한 병실을 혼자 지키고 있는데, 불현듯 성급한 노크소리가 곧이어 눈에 익은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로모노소프 씨!"

사색이 된 남자는 미하일의 심복인 레프였다.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이원 쪽은 보이지도 않는 듯 다짜고짜 달려왔다. 이리저리 미하일의 상태를 살펴본 레프가 이번에는 이원에게 화살을 돌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원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함께 미술관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남자가 덤벼들어서..."

"감히 어떤 녀석이...!"

자신을 감싸느라 다쳤다는 걸 알게 되면 레프는 이원을 먼저 손보려 들 것 같았다. 이원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향한 시선 끝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원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미하일의 부상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병원에는 수많은 로모노소프의 조직원들이 쫙 깔렸다. 병실 안이고 밖이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혹시나 또다시 있을 습격을 대비해 조직원들은 밤을 새며 마히일의 병실을 지켰다.

미하일이 눈을 뜬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이원은 그가 눈을 뜨자 곧바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미하일은 피곤한 얼굴로 멍하니 누운 채 눈을 깜박였다. 이원은 서둘러 말했다.

"병원입니다. 총에 맞으시고 곧바로 실려왔습니다."

설명을 하던 이원은 문득 당혹스러워졌다. 미하일이 다친 것은 자신때문이다. 혹시 이 사람은 이걸 핑계로 날 붙잡으려 하는 건 아니겠지.

무심코 생각했던 것이 얼굴로 나왔던 모양이다. 미하일이 이원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원이 어색하게 마주 웃자, 곧 그는 화제를 돌렸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던데."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원은 사실대로 말했다.

"조직원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말을 하는 도중에 미하일은 혀를 찼다. 이원이 말을 멈추자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요즘 사람들은 너무 간이 작아, 안 그런가?"

이원에게 같이 흉을 봐달라는 듯이 덧붙인 말에, 이원은 대답 대신 그들을 위한 변명을 했다.

"모두 주변을 지키느라 필사적입니다. 의료진들이 다녀갈 때도 출입을 엄격히..."

말을 하던 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왜 이런 걸 떠들어대야 하지? 다시 침묵하는 이원을 물끄러미 보았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건지도 모르겠구나."

갑작스러운 말에 이원은 멈칫했다. 미하일은 물끄러미 이원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피를 물려받은 이상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어."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난 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난 힘이 있다고 생각했지. 너를 내 옆에 두고도 아무 일 없을 거라 자신이 있었는데."

미하일이 사이를 두었다가 자조적으로 덧붙였다.

"자만이었군."

이원은 아무 말 없이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왔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이원이 막 입을 여는데, 때마침 성급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서둘러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좁은 틈으로 확인한 얼굴은 레프였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혹시 깨어나셨습니까?"

불안이 가득한 음성에 이원은 대답했다.

"깨셨습니다. 들어오셔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프는 다급하게 문을 열어 제쳤다. 하마터면 문에 부딪칠 뻔했던 이원은 간발의 차이로 물러나 부상을 모면했다. 

레프는 주변을 보지도 않고 다급하게 침대로 달려가 미하일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로모노소프 씨, 의식이 돌아오셨군요! 다행입니다, 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신이여, 감사합니다."

간절한 기도문을 덧붙이는 레프를 미하일은 냉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만 해라, 레프. 고작 총상 따위로 시끄럽구나."

매서운 음성은 이원을 대할 때의 나약한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원은 처음으로 사자라 불리던 아버지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묵묵히 지켜보는 이원의 옆에서, 미하일은 너무나 쉽게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문득 이원은 생각했다. 어머니도 저 얼굴을 알고 있을까.

"현재 상황은 어떻게 됐지? 지휘는 누가 맡고 있는 거냐, 블라디미르가?"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레프가 말을 흐리며 흘긋 이원을 훔쳐보았다.

"현재로서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용서하시길."

"알고 있네."

미하일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범인은 알아냈나? 배후는?"

"아, 네."

레프는 그제야 생각난 듯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이, 세르게예프 쪽에서 꾸민 일이었습니다."

미하일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동시에 이원의 얼굴은 굳어졌다.

"로모노소프가 총상을 입었다고?"

카이사르의 날카로운 음성에 보고를 한 유리히는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로변에서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만..."

카이사르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로모노소프와의 대립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꼼짝없이 세르게예프 쪽이 범인으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다. 

미하일은 결코 유야무야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니 반드시 뒤를 캐내려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르게예프가 아니라고 생각할 확신도 그에게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명령이 아니라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간부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로모노소프를 자극하지 못해 안달인 무리들인 것이다.

...그 중 누가.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짐작가는 얼굴들을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훑으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로모노소프의 아들은 어떻게 됐지?"

유리히는 서둘러 대답했다.

"줄곧 옆을 지키며 간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

카이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히는 눈치를 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시가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실 뿐 말을 하지 않았다.

ㅡ 널 버리고 떠날 거야.

카이사르의 머릿속에 드미트리의 말이 되살아났다. 뱀처럼 또아리를 튼 불안의 씨앗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뿌연 연기 너머로 카이사르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이렇게 끝나는 건 말이 안 된다. 처음부터 전부 거짓이었다는 건 믿을 수 없다. 그 키스도, 그 애무도, 그 손길도 전부가 다 거짓이었다고?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까지?

"나가 봐."

한참만에 나온 카이사르의 음성에 유리히는 흠칫 놀라 서둘러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카이사르는 한손에 시가를 든 채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았지만 미간의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그는 생각했다. 

돌아 와, 난 아직 믿고 있어.

어둠 속에서 이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미하일의 말을 귀담아 듣던 충복 레프도 자리를 떠나고, 그는 미하일과 단 둘이 병실에 남았다.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이원에게, 선잠이 들었다 깬 마히일이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는 거냐?"

조용한 물음에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이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원이 대답하자 미하일은 레프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자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피곤할 테니 그만 돌아가거라, 병원은 아픈 사람이 있는 곳이지 멀쩡한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돼."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마피아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어머니도 역시 전혀 알지 못했겠지. ㅇ무 말 없이 지켜보는 이원의 시선에, 미하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냐?"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원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역시 전 못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사실대로 얘기했다면.

"못하다니."

다시금 되물은 미하일에게 이원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때는 어머니가 떠나지 않았을까.

"이런 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미하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원은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잠깐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안되겠습니다. 전 평범하게 자랐고, 이런 환경은 너무 과격합니다."

"내가."

성급하게 입을 열었던 미하일이 말을 멈췄다. 경련하듯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그가 말을 이은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가 있지 않느냐... 해달라른 건 뭐든지 다 해줄 테니 내 옆에 있어다오. 난 네가 필요하단 말이다."

미하일이 다급하게 이원의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드러나는 마른 손마디를 내려다본 이원이 다시 미하일을 보았다. 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은 없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죄송합니다."

당신을 따를 수도, 카이사르를 배신할 수도 없어.

이원은 속삭이듯 말했다.

"러시아에서 제가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만 떠나겠습니다."

아들이 내린 최종적인 결론에 미하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크게 뜬 눈으로 허망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원이 시선을 내렸다.

미하일은 아직 이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원은 그 손을 고쳐쥐며 말했다.

"...만나서 기뻤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건넨 악수에,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름진 눈가에 가득히 회한과 고통이 깃들었다. 미하일은 이원의 손을 끌어당겨 가만히 그를 품에 안았다.

처음으로 아들을 가득히 품어본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거라."

미하일은 슬픔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널 놓아주마. 하지만 아들아, 명심해라.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하일이 이원을 안았던 팔을 풀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원에게 좀처럼 보이지 않던 사자의 얼굴이었다.

"다시 널 찾아내는 날에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이원은 보았다. 잠자코 그를 마주보던 이원이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은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바로 서서 허리를 숙인 그의 마지막 인사를, 미하일은 잠자코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원은 등을 돌렸다. 장성한 아들은 똑바로 몸을 펴고 걸어갔다.

주저하지도, 멈추지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문이 닫히고 난 뒤, 미하일은 허망함 속에서 아들의 사라진 자취를 쫓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을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그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잿빛 하늘이 음산하게 몰려다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직내의 분쟁과 외부의 압력등 그에겐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왜 전화하지 않지...?

그저 침묵하기만 하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이사르는 심각한 얼굴로 그것을 응시했다.

덜컥.

난데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의 얼굴을, 카이사르는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찾아온 드미트리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이 카이사르가 흘긋 시선을 던졌다. 드미트리는 느긋하게 코트를 벗으며 대답했다.

"이길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야, 역시 현물이 아니면 시시한 걸. 이럴 줄 알았으면 백만 루블 정도 걸 걸 그랬나?"

"요점만 말해."

카이사르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드미트리가 아니라도 지금 그는 충분히 심경이 복잡했다.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며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 러시아를 떠난다지?"

미간을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카이사르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드미트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변호사, 결국은 너에게 돌아오지 않을 건가보지?"

카이사르가 굳어진 얼굴로 응시하는 시선에 그가 말을 이었다.

"공항까지 기차를 타려는 모양이던데. 로모노소프의 아들 치고는 소박하군."

드미트리는 느긋하게 말하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내가 말했지? 그 녀석은 널 배신하고 떠날 거라고."

카이사르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버렸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에, 드미트리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간 그가 입을 열었다. 가늘게 기울인 드미트리의 눈가에 시니컬한 웃음이 서렸다.

"넌 버려진 거야, 카이사르."

낮은 속삭임 뒤로 드미트리의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순간 카이사르는 난폭하게 그를 밀어버리고 낚아채듯 코트를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이사르가 급히 떠나고 난 뒤 드미트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흘긋 시선을 돌려 카이사르가 앉아있던 자리를 본 그는 선뜻 몸을 일으켜 책상을 돌아갔다.

편안한 가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의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뒤 기다리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드미트리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르는 떠났습니다. 아아, 그렇죠. 물론입니다. 변호사에 대해 말했더니 바로 달려가더군요. 로모노소프와 차르가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드미트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의 시간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우린 기회를 충분히 주었으니까요."

그의 두 눈이 예리한 빛을 내며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루스키의 긍지를 몰는 우두머리는 필요 없어."

기차의 플랫폼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플랫폼을 정리하는 직원의 모습이 사라지자 남은 건 이원뿐이게 되었다. 이원은 적은 짐을 든 가방을 든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는 도망치듯 여기까지 왔다. 이웃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이원은 기다리던 기차의 형체를 발견했다. 물끄러미 지켜보는 가운데 멀리 있던 기차가 성큼성큼 달려왔다.

이원은 멍하니 다가오는 기차를 응시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자신은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이 북구의 나라로부터, 회색의 눈보라로부터, 소중했던 사람들로부터, ...그에게서부터.

미련은 없었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그저 씁쓸한 한기가 가슴 한 쪽을 조금씩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너를 보게 될 일은 없겠지. 이원의 심장 한 자락을 쥐고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문득 들려온 발소리에 이원은 고개를 돌렸다. 한적한 기차역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원과 그 남자 외에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카이사르의 얼굴을,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마지막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 듯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무수한 감정이 일시에 밀려들어와 이원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모든 결단과 판단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무용하게 느껴졌다. 단지 카이사르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이원의 시선에 그가 움직이는 것이 들어왔다. 남자가 총을 꺼낸다. 그에게 총구를 향한다. 방아쇠를 당긴다 그 모든 것을 이원은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보고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요란한 총성과 함께 따끔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아, 하고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놀라지 않았다. 이원은 어쩌면 자신이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내리자 어깨에 내려앉은 작은 물방울 같던 붉은색 점차 진하게 물들며 퍼져나갔다.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 총성이 울려퍼졌다. 그대로 이원의 몸이 날아갔다.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고 만 이원의 시야에 자신의 다리가 들어왔다. 금세 피로 흠뻑 젖은 자신의 허벅지가 두 눈에 맺혀들었을 때, 성큼성큼 걸어온 카이사르가 다시 그에게 총을 겨눴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낮은 속삭임이 숨결처럼 번져오고, 이원은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치 눈이 내리는 잿빛 하늘처럼 어둡게 물든 습기 찬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이원이 숨을 멈추고,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천둥처럼 내려앉은 총성을 마지막으로, 이원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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