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세단을 타고 거대한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이원은 잠시 뒤 시야에 들어난 거대한 저택을 보고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저택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이원은 언젠가 카이사르의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돌아오셨습니까, 로모노소프 씨."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조직원으로 보이는 그는 어딘지 발음이 묘했다. 이원은 곧 그가 순수 루스키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조직원들 중 순수 루스키는 얼마 되지 않는듯 보였다. 그 증거로 그들은 미하일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이원에 대해 호기심에 찬 시선을 던졌으나 경멸하거나 증오하는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모습에, 이원은 오래 전에 들었던 세르게예프와 로모노소프의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을 기억해냈다.
순수 루스키와 수리스키의 전쟁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세력다툼은 조직원들의 구성에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순수 루스키만의 집단인 카이사르의 조직과는 달리 미하일의 조직은 출신에 관계없이 원하는 누구나 조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가장 불법적인 마피아에서 가장 평등한 기회를 주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이원은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목격하자 더 이상 그것을 의심하지 않게 됐다.
미하일을 따라 말없이 걸어간 이원은 이윽고 한 쪽의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오래 된 저택 특유의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대저택은 규모에서는 카르사르의 저택에 뒤지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가구도 인테리어도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화려함의 극치였던 카이사르의 저택과는 달리 미하일의 저택은 소박하고 검소했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이원은 하긴 집의 규모부터가 검소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고 덧붙였다.
손님을 위해 의자를 빼어준 집사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더니 잠시 뒤 홍차와 비스킷을 가져왔다.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미하일과 이원의 앞에 각각 홍차를 내려놓았다.
문득 이원은 저택 곳곳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갓 끓여온 홍차의 향기는 집안의 은은한 향기와 맞물려 묘한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묵묵히 홍차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이원에게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홍차는 좋아하지 않느냐?"
미하일의 다정한 음성에 이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무뚝뚝하게 답하자 미하일은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 차가 취향이 아닌가 보구나. 내 다른 차를 가져오라고 하마."
"됐습니다."
미하일이 고용인을 부르기 전에 이원은 선뜻 사양하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홍차는 훌륭했다. 열대과일처럼 달콤한 향기와는 달리 맛은 적당히 씁쓸한 맛이 나면서 담백했다.
이원은 정선스럽게 잎을 우려낸 값비싼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내려놓았다. 미하일이 다시 말했다.
"네 엄마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면 바로 과자를 먹었었는데."
향수를 느끼는 건지, 아니면 이원과의 공통된 대화를 찾아낸 건지 알 수 없는 미하일의 말에 이원은 여전히 무심히 대답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화가 다시 끊기고, 미하일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이원을 바라보았다. 이원은 그러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차라리 박학다식한 노신사로 알고 있을 때가 나았다. 아버지라고 나타나서는 마피아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원은 얼떨결에 끌려나오다시피 그를 따라나왔다. 미하일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미하일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침묵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할 말이 없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말없이 홍차만 마시고 있는 이원에게, 미하일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실망을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저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네 엄마를 떠난 것은..."
미하일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원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를 배려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망설이며 억지로 얘기를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싫었던 것뿐이었다. 이원의 냉담한 음성에 미하일은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늙은 사자. 언젠가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젊은 날 포효하던 무리의 제왕은 지금 늙고 병들어 기력을 잃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식어버리는 것은 이 남자가 했던 일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어머니와 자신을 속였던 일.
어차피 이원은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걸음마를 채 떼기도 전에 사라진 아버지는 그의 인생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평생 이 남자를 그리워하고 애태워하고, 어째서 자신을 떠난 건지 끝내 알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뜻을 이루기 위해 이원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마주 하자 이원은 모든 것이 시시해졌다. 이제와서 과거의 일을 물어봤자 무엇하겠는가.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이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의무뿐이다.
어머니가 전하라고 했던 말들. 이원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찾은 것은."
이원은 일부러 '아버지'가 아닌 '당신' 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하일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원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전하셨으면 하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전하고 나면 곧바로 일어나 돌아갈 것이다. 이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이 집에 머물 이유도, 이 남자와 마주 앉아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이어갈 이유도 전혀 없으니까. 이원은 여전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미하일이 움칠했다. 이원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단지 궁금할 뿐이다. 어째서 날 버렸는지. 하지만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했다면."
이원이 말했다.
"그걸로 충분하다."
미하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이원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원이 말을 맺었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순간 미하일의 푸른 눈이 뒤흔들리며 가득히 수분이 어렸다. 남자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그의 오열을, 이원은 그저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원은 생각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도, 사명도, 모두 끝난 것이다. 마지막까지 외로웠던 어머니의 한도.
"...미안하구나."
미하일은 한참만에 중얼거렸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사과는 어머니에게 해야 한다. 적어도 이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당신을 믿고 당신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쳤던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늦었다.
이원은 어깨를 떨며 오열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계속해서 흐느끼던 미하일이 겨우 눈물을 거둔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눈을 겨우 들어올린 미하일이 이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우냐?"
미하일이 쉰목소리로 물었다.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원이 무심히 말했다.
"아무 감정도 없습니다."
미하일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못 본 체 하고 이원은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간다고?!"
미하일이 놀라 소리쳤다. 이원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전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았던 이유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의무는 다 했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자, 잠깐!"
미하일은 황급히 일어나 이원의 팔을 붙잡았다.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미하일은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왜 가는 거냐? 넌 내 유일한 아들이야. 혈육이란 말이다.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아니었느냐? 가긴 어딜 간다는 게야...!"
다급하게 이원을 붙잡는 미하일에게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가겠습니다."
"넌 내 아들이야!"
미하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네가 젖먹이 때 널 떠난 건 사정이 있었다. 나 역시 원했던 바가 아냐. 이제 그걸 보상해주려 하는 게 아니냐."
"보상을 바란 적 없습니다."
차가운 이원의 말에 미하일은 서둘러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그래도... 날 아버지로서 받아들여줄 순 없는거니? 우린 꽤 잘 맞지 않았느냐. 그렇지. 그림에 대한 얘기도 하고, 차도 마시고"
미하일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원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전 그때 당신이 아버지라는 걸 몰랐습니다."
이원은 조용히 덧붙였다.
"아버지가 마피아라는 사실은 더더욱."
미하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이원을 붙잡으려 애쓰던 남자는 더 이상 할말을 잊은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원은 무심히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인사를 했다.
"그럼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생판 남에게 하듯 차분히 인사를 한 이원이 돌아서자, 아버지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라."
이번엔 뭐냐는 듯이 이원이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그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네가 그토록 싫다면 강요하지 않으마. 하지만, 하나만... 하나만 들어줄 순 없겠느냐?"
간곡한 음성에 이원은 차마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물끄러미 미하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미하일은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말했다.
"곧 내 생일이란다. 집에서 생일파티를 할 텐데. 거기에 참석해주면 그 뒤엔 돌아가도 된다. 더 이상 붙잡지 않으마."
미하일은 이원이 얼굴을 찡그리기 전에 먼저 덧붙였다.
"단 한 번이라도 네 축하를 받고 싶구나."
이원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마도 뿌리치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은 흔들렸다. 마피아는 경멸하지만 이 남자는 아버지였다. 혈육이란 이상한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이 삶의 일부가 된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쓴웃음을 지었던 이원은 그에게서 마피아의 수장 이전에 늙고 지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 나의 아버지.
그를 바라보는 이원의 심정은 복잡했다. 애틋한 감정을 느껴야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삶의 일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원은 부담감을 느끼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초조하게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그의 단 하나뿐인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원이 사라졌다.
카이사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초조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벌써 며칠 째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 날 공동주택 앞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끌고 오는 거였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은 시끄러운 일들뿐인데 이 상황에서 이원이 사라지다니, 도대체 누구의 짓일까. 조직 내의 불온한 세력과 적으로 두고 있는 자들을 떠올려 봤지만 상대는 너무 많았다.
아니, 유괴나 납치는 아직 이른 판단이다. 무엇보다 무슨 목적으로 이원을 끌고 간단 말인가. 하지만 스스로 사라졌다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할수 있는 한 손을 써서 찾고 있지만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카이사르는 걱정으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성급하게 시가의 연기를 빨아들이던 그는 불쑥 들려온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설마.
덜컥 문이 열리고, 곧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카이사르, 잘 지냈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드미트리의 얼굴에 카이사르는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뜻 걸음을 옮겨 보란 듯이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즘 컨디션이 별로라면서? 류드밀라가 무서워서 떨고 있다고, 유리히는 네 비위를 어떻게 맞추면 좋은지 점술사를 찾아가 물어보기까지 했대."
카이사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 카이사르가 알 바 아니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묵묵히 사무실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연거푸 시가의 연기를 들이마시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야하게 생긴 변호사가 속이라도 썩히는 건가?"
카이사르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향하자 드미트리는 히죽 웃었다.
"정답인 모양이네."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심각한 얼굴로 시가를 피우며 천천히 사무실의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이상해졌어, 너. 클럽에도 오지 않고, 그 변호사 일이라면 이성을 잃고 지금은 왜 또 그러는 거야? 그 녀석에게 차이기라도 했나?"
"시끄러워."
처음으로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음성은 오히려 드미트리의 추측을 확신으로 굳어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드미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녀석이랑 아직 안 했지?"
카이사르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모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너와 했다면 그 녀석이 그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리가 없지. 분명히 죽거나 병신이 됐을 텐데, 그 녀석 꼴을 보면 처녀인 게 티가 난다고"
드미트리가 느긋하게 슈트 안에서 담배를 꺼내며 덧붙였다.
"또 모르지, 그 얼굴 보면 뒷구멍으로 꽤 여럿 먹어치웠을지."
철컥.
머리 위에서 섬뜩한 금속의 소리가 들렸다. 드미트리는 담배를 꺼내던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차가운 총구가 머리에 닿아있었다. 카이사르의 글록이 드미트리의 머리 위에서 서늘한 한기를 뿜어냈다.
"경고는 한 번 뿐이야."
카이사르의 조용한 음성에 드미트리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카이사르는 총을 거뒀지만 살기는 그 뒤로도 꽤 오래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드미트리는 이번에야말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카이사르는 다 피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운 시가를 찾았다. 이미 가득 찬 재떨이를 내려다본 드미트리가 벨을 눌러 류드밀라를 불렀다.
"바꿔주겠어?"
드미트리가 미소를 지으며 묻는 말에 류드밀라는 허겁지겁 새로운 재떨이를 가져왔다. 바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뒤로 꽉 찬 재떨이에서 떨어지는 재가 소복소복 쌓이는 것을 드미트리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꽤 진심인 모양인데."
류드밀라가 나가고 난 뒤 드미트리는 입을 열었다.
"눈 앞에 그런 게 걸어다니는데 참을 수 있다니 대단한 자제심이야, 난 흉내도 못 내겠어."
불을 붙인 담배의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신 드미트리가 말했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카이사르가 다시 글록을 꺼내기 전에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사생활이야 그렇다 치고, 그 녀석 믿을 수 있어? 루스키이고 아니고간에."
"물론."
카이사르는 선뜻 답했다. 드미트리는 글쎄,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그럴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드미트리는 후, 하고 짧게 연기를 뱉어낸 뒤 싱긋 웃었다.
"우리 내기할까?"
"내기?"
카이사르가 의심스럽게 묻는 말에 드미트리가 대답했다.
"간단한 거야. 예스, 또는 노우만 고르면 돼. 경품은..."
드미트리는 싱긋 웃었다.
"그냥 승자의 영광을 차지하는 걸로 하지."
카이사르의 얼굴에서 의구심이 더욱 짙어졌다. 부연 연기 너머로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그 변호사가 조만간 널 배신하고 떠난다에 한 표."
카이사르가 찌푸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빙긋 웃으며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을 뿐이었다.
넌 버려질 거야, 카이사르.
드미트리는 생각했다. 탁한 연기 너머로. 그의 짙은 그린의 눈동자가 부옇게 흐려졌다.
안되면 그렇게 만들겠어.
며칠 전부터 저택 안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거대 마피아 조직의 수장인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게다가 일선에서 물러났던 미하일이 귀환했다는 이유에서 그것은 더욱 큰 의미를 가졌다.
한달여 전부터 공들였다는 생일파티 준비는 당일이 되자 전쟁터를 불사할 정도로 치열해졌다. 조직원들은 수시로 주변을 다니며 수상한 자들을 확인했고, 심지어 산책을 하는 동네 개까지 붙잡아 몸을 더듬어 확인한 뒤 놔주곤 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소란스러운 소음과 부산한 발소리들에 이원은 일찌감치 눈을 떴다. 부스스 일어나 밖을 보자 역시나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출장 요리사들이 손짓발짓을 해가며 메뉴를 다투고, 그 옆을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능숙하게 산더미 같은 트레이를 들고 지나갔다.
커튼으로 위를 가린 카트를 끌고 가는 남자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이원은 그것이 케이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소란스러운 정경 속에서도 한 눈에 보기에도 의심스러운 사내들이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통신을 나누는 모습이 들어왔다.
물론 로모노소프의 조직원들이다. 이원은 씁쓸한 한숨이 나왔다. 과연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지금의 상황을 카이사르가 알게 된다면.
그는 아직도 자신이 동정심에 잘못 된 판단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은 내려졌다. 마침 들려온 노크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메이드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입으실 옷입니다."
상냥한 미소를 지은 주근깨투성이의 아가씨가 장난처럼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한 후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원은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던 디자이너의 로고가 박힌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파티를 위해 마련된 턱시도가 들어있었다. 이원은 잠시 생각하다 옷을 꺼냈다. 굳이 입어보지 않아도 옷은 잘 맞을 것이다. 분명 이원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오더메이드일 테니까.
이원이 저택에 머무는 고작 며칠 사이 미하일은 아낌없이 아들을 위해 돈을 썼다. 그동안 하지 못한 것을 모두 해보려는 듯, 그는 사고 사고 또 사들였다.
물건은 이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으나 미하일의 필사적인 노력은 그나마 이원을 조금이나마 꺾이게 만들었다. 마구 퍼붓는 선물공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미하일의 생일이었다.
이원은 단 하루동안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아들로서 행동해주기로 결심했다. 턱시도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둔 이원은 미하일이 턱시도와 함께 보낸 상자를 열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화려한 시계를 내려다보았던 이원은 턱시도 위에 상자를 두고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분주한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