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끝난 뒤 간부들은 패를 나눠 각기 자주 가는 술집으로 향했다. 월례행사나 다름없는 술판에서 그들은 으레 차르에 대한 불만이나 조직에 대한 아쉬움을 술과 말로써 털어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다른 때는 여자들을 어김없이 불러들이던 그들이었지만 오늘 테이블에는 술병만 가득히 쌓여있을 뿐 그들 외에 외부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시대가 변했다니, 그럼 이대로 당하고 그냥 참아야 한단 말이오?"
간부 중 한 명이 내뱉은 분통에 다른 간부들이 동조했다.
"세르게예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이 거리에 파다하오. 이게 다 차르 때문이오."
"차르가 움직이질 않으니 우리도 행동을 할 수가 없지 않소."
"결단력도 없는 겁쟁이요. 로모노소프가 조직의 후계자를 노렸는데 침묵하다니, 모두가 세르게예프를 비웃을 게 아니요."
"이대로는 안 되겠소. 차르를 탄핵합시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눈치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지켜보던 간부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오. 아직 사샤가 은퇴한 건 아니지 않소."
곧바로 그에게 날카로운 비판이 날아들었다.
"은퇴한 것과 뭐가 다르오? 회의는 모두 차르가 주관하고 모든 명령은 차르에게서 나오는데, 이 중에서 최근 사샤를 본 사람이 있소? 난 사샤를 본 지가 몇 해나 된 듯 하오!"
다시금 간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튜체프가 입을 열었다.
"자, 자. 모두 알겠습니다. 일단 그쯤 하십시다."
모두가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튜체프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가 차르에게 불만이 있는 건 사실인 듯 하고, 남은 건 어찌 행동하는가 하는 거요. 사샤에게 이것을 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말해보시오. 사샤라고 해서 믿을 수 있소?"
"사샤를 못 믿는다는 거요?"
누군가가 불만스럽게 내뱉은 말에 튜체프는 여유롭게 웃었다.
"물론 사샤는 세르게예프를 최고의 조직으로 만든 지도자였소. 하지만 차르를 만들어낸 게 그요. 믿을 수 있겠소?"
모두가 주저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튜체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냉혹한 지도자였지만 또한 아이의 아버지. 자신의 아이를 잘라낼 수 있는 아버지가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오? 당장 보시오. 사샤는 차르에게 조직을 맡긴 후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지 않소. 아예 조직에서 손을 뗀 거요."
튜체프의 결론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튜체프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대로 조직을 차르에게 맡긴 채 구경만하다 조직이 와해되느냐, 아니면 직접 나서서 손을 쓰느냐 하는 걸 거요. 내말 알아듣겠소?"
간부 중 한 명이 불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럼, 차르를 어떻게 하자는 거요?"
튜체프는 술잔 너머로 간부들을 천천히 하나씩 훑어보았다.
"황좌에서 내려온 황제의 최후는 뻔하지 않소."
튜체프가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죽는 거지."
간부들은 숨을 죽인 채 서로를 마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느때의 절반 정도 되지 않는 관람객의 수에 이원은 내심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한가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이원은 오디오가이드를 빌려 귀에 꽂고 넓은 회장을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이런 자유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겨우 사건을 끝낸 뒤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작은 염원은 난데없는 카이사르의 납치로 좌절될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포기할 이원이 아니었다. 이원이 사라진 것을 알면 분명 그가 사는 집부터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허탕치고 당황하겠지.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테니까 작게 고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설마 이 안까지 들이닥치진 않겠지.
불현듯 스친 생각에 이원은 곧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떨쳐버린 그는 그림의 번호에 따라 오디오의 번호를 누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깊은 역사를 지닌 화가들의 진품이 하나하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중 유독 눈을 끄는 한 점의 그림에, 이원은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서서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슬그머니 옆에 와 서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도 루벤스를 좋아하나?"
점잖은 목소리에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보고 있던 그림이 루벤스의 작품이라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네, 뭐."
아리송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훤칠한 초로의 신사가 서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슈트에 중절모를 쓴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선이 날렵한 옆얼굴은 상당히 중후해서, 그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감히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완벽한 신사의 모습인 그가 고개를 돌리고, 이원과 눈이 마주쳤다.
일순 당황한 이원에게 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그의 인상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원은 무심코 마주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도 루벤스를 좋아하네."
사실 이원은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화가의 힘찬 터치와 과감한 구도에 감탄할 뿐이었다. 다시 그림을 올려다보는 이원에게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에서 특히 웅장하지. 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일부러 이 미술관에 찾아올 때가 종종 있네. 근엄하면서도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나?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대부나 다름없지. 이 화려한 터치를 보게, 카라바치오의 미술에서 음산함을 빼면 루벤스가 남을 거야."
이 데자부는 뭐지.
이원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두 손을 가볍게 벌리고 시처럼 읊는 노신사의 옆얼굴 위로 와인을 향해 거침없는 찬사를 날리던 카이사르가 겹쳐졌다.
그 순간 보고 있던 이원은 문득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자 이원은 무안해하며 손을 저었다.
"아뇨, 죄송합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사과를 하면서도 이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심코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노신사의 모습에, 이원은 저절로 다정한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생각했다. 그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이원의 미소짓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혹시 바쁘지 않다면 함께 차라도 마시지 않겠나?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원은 흔쾌히 그의 청을 수락했다.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평소보다 빠른 시간이었지만 해의 길이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넓은 정원에 들어서는 차안에서 카이사르는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간부회의는 역시 너무나 쓸모없는 절차라는 것. 아버지인 사샤가 만든 제도에 특별히 반발하는 것은 없었지만 유독 이것만은 없애고 싶었다.
자신에게 완전히 자리가 넘어오면 제일 먼저 간부회의부터 없애겠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회의가 없어지는 것보다 먼저 간부들이 사라지겠지만.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는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간부들의 각각의 반응도. 대충 알겠군.
차가 속도를 늦추고, 집사가 서둘러 현관으로 나왔다.
"돌아오셨습니까, 차르."
정중히 머리를 숙인 집사에게 코트를 벗어 건네준 카이사르가 곧장 서재로 향하는데, 집사가 입을 열었다.
"변소사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만..."
순간 카이사르가 걸음을 멈췄다.
"...없다고?"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차 잘 마셨습니다. 페트로 씨."
이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승용차의 뒷좌석에 탄 노신사는 다정하게 마주 웃었다.
"나야말로 모처럼 아주 즐거웠네.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만."
이원은 잠깐 망설였다가 곧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열린 차창을 통해 노신사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또 뵙지요."
"그래, 고맙네."
명함을 받은 노신사가 웃음을 지었다. 이원은 그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짧게 목례를 한 후 돌아섰다. 노신사는 물끄러미 멀어지는 이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손안에는 그가 남겨두고 간 명함이 있었다. 이원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명함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우면서도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참 닮았군, 그 사람과.
"로모노소프 씨.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조직원의 물음에, 미하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중후한 세단이 소리없이 출발하고 미하일은 다시 고개를 들어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원이 사라진 방향에는 이미 그의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밤 늦은 거리를 이원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뛰듯이 걸어갔다. 밤이 되자 바람은 냉기를 품고 칼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요령있게 걷는 동안, 문득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자주 엉덩방아를 찧었었지....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겠다며 불평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공동주택 건물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이원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열쇠를 잃어버린 건물의 주민인가, 하고 무심히 생각했을 때, 이원은 시야에 비친 장신의 그림자가 왠지 무척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이사르.
뒤늦게 눈치 챈 이원이 서둘러 옮기던 발걸음을 느슨하게 했다. 카이사르는 공동주택의 현관에 켜져 있는 어스름한 전등 아래에 서서 말없이 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등은 희미한데도 이원은 알 수 있었다. 카이사르가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전신에서 분노를 뿜어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왠지 무안해졌다.
무심코 한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던 그는 다시 손을 내리고 대신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들켰네,라고 말하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되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전신으로 자신이 화가 났음을 알리는 듯한 그의 격한 아우라에 이원은 웃음을 거두고 민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혹시 이 시간에 길거리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한 번도 그 정도로 이성을 잃은 카이사르를 본 적은 없지만 꼭 그렇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심 그러면 어떻게 하지. 하고 서둘러 대책을 떠올릴 때였다.
후.
잡아먹을 듯이 이원을 노려보던 카이사르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카이사르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무사하니 됐어."
이원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당황했다.
차라리 자신을 노려볼 때가 나았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그의 창백한 얼굴에, 이원은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무슨 일 있었어?"
망설이다 말을 건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섬세한 얼굴선을 따라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이원은 또 한번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망설이다 입을 여는데, 카이사르가 먼저 대답했다.
"네가 없어졌잖아."
이원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쓴웃음을 짓는 카이사르의 얼굴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기껏 진지하게 물었는데 결국 농담인가. 이원은 내심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의뢰받은 일은 끝나."
이원이 무심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을 볼 일도 없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깨달았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갑자기 뜻밖의 무게감이 이원의 위로 내려왔다. 사실이었다.
베르다예프의 일이 해결되면 모든 건 끝나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집에 머물 이유도, 이 남자와 마주칠 구실도 영영 없겠지.
"그래."
그때까지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난 더이상 너와 거래를 할 게 없으니까."
뜻밖의 상황에 이원은 멈칫했다. 카이사르의 얼굴은 어딘지 피곤한 듯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원은 당황했지만 이제 와서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카이사르가 돌아서고, 이원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저 멀어지는 카이사르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새 눈이 내렸던 모양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눈을 치우는 소리에 이원은 잠에서 깼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눈을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전날의 일이 떠올랐다. 상쾌했던 기분은 이내 가라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하니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본다고 해서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원은 해결점이 없는 고민을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딱 그꼴이었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문을 열고 나가자 니콜라이가 서있었다. 뜻밖의 방문에 그를 방안으로 안내한 이원에게, 니콜라이가 말했다.
"오늘부터 다시 공장을 열게 됐어. 그 일로 상담을 좀 하고 싶은데..."
니콜라이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장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금세 흙빛이 되던 안색과는 전혀 달랐다. 이원은 보람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무슨 일입니까?"
"일단 이것들부터 좀 봐주게."
니콜라이는 열심히 적어온 꼬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세금이나 노동자들의임금문제, 영업을 하지 않은 기간 동안 받을 수 있는 혜택 등에 대한 소소한 사항들이었다. 간단히 메모를 훑어본 이원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고 얘기 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하네."
니콜라이는 돌아서서 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이원을 돌아보았다.
"자네와 이웃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만면에 미소를 짓는 니콜라이에게, 이원은 마주 웃어보였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이원은 니콜라이가 주고 간 쪽지를 보드에 꽂으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건 오늘 알아보고, 일단 카이사르가 의뢰한 남은 일을 해야겠다.
다시 마음이 어두워지려는 것을 무시하고 이원은 코트를 꺼내 입었다.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계단을 내려간 이원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까페의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고상한 차림새에 엷은 화장을 한 여자의 모습에, 이원은 문득 시선을 향했다. 이런 시간에 까페를 찾는 사람이 다 있군.
이원은 별 생각 없이 떠올리며 그녀를 스쳐 밖으로 나갔다. 문득 그녀가 이원을 돌아보았다.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깜박이며 열심히 이원을 훔쳐보던 그녀가 살그머니 밖으로 나와 그를 불렀다.
"저..."
마침 스쿠터를 타기 위해 헬멧을 쓰고 있던 이원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까페에서 스쳐지나갔던 여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시선을 향한 이원에게,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시베르니크 씨에게서 듣고 찾아왔는데."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순간 이원은 멈칫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이원에게, 그녀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네가 이원이니?"
이원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그제야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수연이 아들이구나."
동시에 이원은 헬멧 안에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쪽입니다."
그녀를 방으로 안내한 이원은 문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좀 치워둘걸,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신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를 성급히 모아들고 자리를 만들었다.
"들어오시죠."
두 팔 가득 서류를 급히 방 한 쪽으로 옮기는 이원의 모습에, 그녀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나타샤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그토록 찾던 어머니의 친구였다.
낡은 찻잔에 차를 끓여 내온 이원은 긴장과 떨림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
"시베르니크 씨에게 들었어요, 날 찾고 있다고."
노인의 약속은 허튼 것이 아니었다. 이원은 가슴 깊이 그에게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습니다. 어머니와 아시던 사이라고..."
"친했죠, 수연이랑. ...그래요, 그녀가 죽었군요."
그녀는 추억을 더듬듯 아련한 표정이 되어 이원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그 말에 이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알고 있어.
이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사람은 알고 있어, 아버지를. 이원은 내심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머니 말씀으론 제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시던데요."
어색하게 웃자 그녀는 뜻밖에도 정색을 하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절대 안 닮았어요. 그럴 리가 없지."
왠지 묘한 말투에 이원은 의아해졌다. 그녀가 홍차를 마시고 내려놓는 것을 기다렸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제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그녀가 멈칫 굳어졌다. 이원은 위가 조여드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왜, 묻는 거죠?"
그녀는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이원은 그것으로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혹시 주소라든가, 연락처라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뭐든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녀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원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문 그녀에게, 이원이 말했다.
"제가 러시아에 온 건,어머니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드릴 말씀이..."
"찾지 말아요."
애타는 이원의 말을 그녀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가로막았다. 순간 당혹해하는 이원에게 나타샤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만 둬요."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놀라 눈만 깜박이던 이원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든 전 각오했으니 알려주십시오. 그 분께 폐를 끼칠 일도 없고, 그냥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절대 부인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타샤가 불안해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이원을 바라보았다. 이원은 애타는 기분으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몇 번이나 주저하던 나타샤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생각지 못한 말에 이원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생각은 했었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인가?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고...?
아름다운 청년이 반신반의하며 굳어지는 것을 나타샤는 어두운 얼굴로 보고 있었다.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뒤에서 들려온 조용한 음성에 나타샤의 몸이 굳어지고, 이원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열린 문 뒤로 낯익은 남자가 서있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중후한 신사의 모습은 곧바로 이원의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미술관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또 만났군."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경고했을 텐데요."
이원보다 먼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타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똑바로 남자와 마주 섰다. 이원은 순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이원이 동그랗게 뜬 눈을 향하자, 나타샤가 말을 이었다.
"결국 포기하지 않는 건가요? 수연이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쏘듯이 내뱉는 말에 미하일은 대답 대신 이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당황한 얼굴로 나타샤와 미하일을 번갈아보는 이원의 얼굴에서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듯 눈을 가늘게 뜬 미하일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 죄를 갚으려 하는 걸세."
"하!"
나타샤는 기가 찬 듯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단정한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둘의 팽팽한 긴장감을 지켜보던 이원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된 일인지... 페트로 씨, 일단 앉으시고..."
"페트로 씨?"
나타샤가 쏘듯이 물었다. 이원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나타샤가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어디서?"
따지듯이 묻는말에 이원은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미술관에서 뵀습니다. 우연히 얘기를 나누게 돼서..."
"우연히, 라고요?"
나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이원은 긴장감으로 손바닥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미하일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나타샤의 반응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어떻게 된 걸까. 무슨 관계인 걸까. 혹시, 어쩌면 저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바라보는 이원의 귀에 나타샤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부터 이름이 페트로가 됐죠, 미하일 페트로비치 로모노소프 씨?"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은 기분에 이원은 눈을 크게 떴다. 미하일 페트로비치 로모노소프. 로모노소프.
굳이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들었던 이름. 모두들 떨게 만드는 거대 마피아 조직. 사자라고 불리던 로모노소프 조직의 수장.
이원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하일 페트로비치 로모노소프. 미하일.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이원에게,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널 만날 수 있게 됐구나."
처음 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미하일은 두 손을 벌렸다.
"내 아들."
이원은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이원을 바라보는 미하일의 푸른색 눈동자가 흘긋 젖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