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34)

"자."

건물에서 나온 카이사르는 골목길에 선 채 부하로부터 넘겨받은 봉투를 그대로 이원에게 내밀었다. 이원은 숨조차 죽이고 봉투를 받아들었다. 황급히 안을 살펴보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나?"

그 순간 이원은 눈을 질끈 감고 봉투를 꼭 끌어안았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명조차 삼킬 정도로 감격한 이원의 모습에, 키이사르는 엷은 미소와 함께 지켜보았다.

"고마워!"

한순간의 격정이 지나간 뒤 이원은 소리쳤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이원이 갑자기 두 팔을 벌려 카이사르를 덥석 끌어안았다. 뜻밖의 상황에 카이사르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깨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이원의 반응에 카이사르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얼굴을 잡고 뺨에 키스까지 했다.

카이사르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모두가 얼음처럼 굳어진 가운데 간신히 안았던 팔을 풀고 카이사르를 마주 본 이원이 환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카이사르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카이사르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어렸다.

"기뻐하니 잘 됐군. 오늘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아, 미안. 오늘은 안 돼."

이원은 너무나 산뜻하게 거절했다. 순간 굳어진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열심히 그의 손을 흔들어대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야지. 나중에 전화할게. 안녕!"

잡은 손을 열심히 흔들어대던 이원은 금세 그것조차 놓고 돌아섰다. 당황한 카이사르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이원은 간단히 그것을 뿌리치고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갔다.

눈을 깜박인 사이에 벌써 저만큼 가버린 이원이 뒤를 휙 돌아보고 다시 안녕! 소리쳤다. 급하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카이사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손을 여전히 앞으로 내민 채로. 그의 앞에 스산한 바람이 한 줄기 휘몰고 지나갔다. 한참만에 그는 생각했다.

나, 차인 건가.

운전을 하던 조직원은 룸미러로 흘긋 차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차에 오른 뒤, 아니, 그 전부터 차르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찌푸린 얼굴로 시가만 뻑뻑 피워대는 그의 모습에, 조직원은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소리 없이 달려가는 차안에는 그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저택에 돌아오니 상황은 더 나빴다. 카이사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난처한 얼굴로 그를 맞이하는 집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카이사르, 기다렸어."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하는 드미트리의 얼굴에, 카이사르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아무 말 없이 옆을 스쳐가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드미트리는 멈칫했으나 이내 그의 뒤를 쫓아갔다.

"요즘 클럽에도 통 안 오고 말이야, 다들 널 기다리고 있다고. 네가 보고 싶다고 난리야. 어때, 오늘 오랜만에 가지 않을래? 귀한 위스키도 구해놨는데."

카이사르는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빌어먹을. 이 집은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처음으로 집의 크기에 짜증을 내며 걷고 있는 카이사르의 기분은 전혀 나 몰라라 한 채로, 드미트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 네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어. 일부러 너 때문에 내놓지도 않고 있다고. 카이사르, 듣고 있어? 카이사르."

드미트리는 카이사르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가자고, 진탕 놀게 해줄 테니까. 오늘은 스무 명이고 서른 명이고 네가 원하는 대로..."

멋대로 떠들어대던 드미트리는 순간 멈칫했다. 카이사르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드미트리는 무심코 그를 잡은 손을 놓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드미트리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드미트리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곧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한데."

돌아섰던 그는 몇 발자국 안 가 다시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이런 건 곤란하다고, 카이사르.

드미트리는 찌푸린 얼굴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드디어 혼자가 된 카이사르는 난폭하게 넥타이를 잡아채 침대에 내던져 버렸다. 난폭한 움직임에 아직 낫지 않은 몸의 상처가 움칠거리며 균열을 일으켰다. 그것을 깨닫자 카이사르는 한층 더 짜증이 났다.

이렇게 기분이 상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인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공장 따위 알 바 아니었는데.

기껏 손에 넣은 유명 레스토랑의 프라이빗룸이 허사가 됐다. 3개월은 기다려야 한다는 지배인을 협박해 얻은 자리였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카이사르는 난폭한 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 시간, 이원은 술병을 마이크삼아 공동주택의 사람들과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진탕 취해있었다.

무음시계의 초침이 부드럽게 회전을 하며 흘러갔다. 아침 10시를 가리키는 시계에서 흘긋 시선을 뗀 집사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빈잔에 따뜻한 홍차를 새로 채워 넣었다. 

물러나면서 그는 불안한 얼굴로 주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런 집사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카이사르는 무서운 얼굴로 홍차에서 올라오는 김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출근을 했을 시간이지만 오늘의 카이사르는 달랐다. 나가는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연신 시계를 보면서도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는 주인의 모습에 집사는 물론 조직원들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이사르는 말없이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벌써 몇 잔이나 비운 홍차가 또다시 그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변호사는?"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집사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직... 전화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그리고 다시 30분이 흘렀다. 마지막 한 모급을 비운 카이사르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집사가 바싹 긴장해 허리를 펴고, 조직원들이 머리를 숙였다. 카이사르는 곧바로 집사의 손에서 슈트의 상의를 낚아채 걸어가며 말했다.

"오지 않으면 데리러 갈 수밖에."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가관이었다. 카이사르는 난장판이 된 집안의 모습에 우뚝 멈춰 서서 할 말을 잃었다. 반쯤 열려있는 문을 열고 그대로 들어선 순간 바로 그를 덮친 것은 무시무시한 술냄새였다.

도대체 뭘 얼마나 퍼마신건지 방안은 온통 싸구려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카이사르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손수건으로 코를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원이 일을 하는 동안 서재는 줄곧 난장판이었지만 지금의 광경보다는 덜했다. 발을 디딜 징검다리조차 없는 방안을, 카이사르는 발끝으로 서류를 밀어내며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목표물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가 막혀 아예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원은 침대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엇다. 평소 9시면 칼같이 카이사르의 앞에 나타나던 그는 현재 12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있고 바지는 벗다 말았는지 반쯤 내려갔으며 어째서인지 손엔 빈 술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한것은 바로 술냄새였다. 이원의 온몸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죽도록 퍼마셨군.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이원에게 닥칠 일도 뻔했다.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카이사르는 코를 쥐고 있던 손수건을 대충 슈트에 찔러 넣고 한 팔을 내밀었다.

부상을 입지 않은 팔로 이원의 허리를 말아 든 카이사르는 곧바로 그를 어깨에 걸쳐 맸다. 그리고 그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술냄새가 진동하는 지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대로 포대자루처럼 업혀가면서도 이원은 작게 코를 골 뿐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언젠가 느껴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침대는 확실히 아니군. 이원은 눈을 감은 채로 뺨을 비비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면서 머리 한 쪽이 지끈거리는 통증도 함께 시작되었다.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부드러운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좀 더 자고 싶었다.

하지만 통증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원은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시야에 처음 보는 방안이 들어왔다.

단색의 두터운 커튼도, 미니멀한 가구도, 깔끔한 침대의 디자인까지 모두생소했다. 여긴 어디지, 하고 이원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원은 발견했다.

팔짱을 낀 채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이원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로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 또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슬그머니 반대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이원의 위에서, 카이사르가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일으키며 그를 보고 있었다. 결국 압박감에 견디지 못한 이원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항의했다.

"알았어, 내일부터 열심히 일 할테니까 오늘은 좀 봐줘.머리가 깨질것 같단 말이야!"

이내 신음하며 머리를 움켜쥐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는 짧게 혀를 찼다.

"싸구려 술을 마시니까 그렇지.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이원이 끙끙 앓으며 대답했다.

"비싼 술이나 싼 술이나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샌드위치와 같은 원리인 거냐.

카이사르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사정없이 뻗친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이원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는 집사를 불렀다. 잠시 뒤 집사는 아스피린과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약 먹어."

카이사르의 말에 이원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한 입에 약을 털어 넣었다. 와득, 약을 씹어먹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혀를 찼다.

"물을 마셔야지."

그제야 이원은 생각이 난 듯 한 입에 물 한 컵을 전부 쏟아 부었다. 손들으로 대충 입가를 훔친 이원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둥글게 몸을 말고 고치처럼 잠을 청하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또 잘 건가?"

"오늘은 죽인대도 일 못 해."

전날 뭘 했는지 그는 목소리마저 꽉 잠겨 있었다. 도저히 일을 할 상태는 아니었다. 물끄러미 이원을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침대가에 앉았다. 

돌돌 말고 있는 이불 밖으로 이원의 검은 머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 카이사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강아지털처럼 가볍게 손가락 사이에 얽혀들었다. 온몸을 이불로 돌돌 말아 유일하게 밖으로 나와 있는 머리칼을, 카이사르는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문득 이불안에서 편안한 한숨이 들려왔다. 곧이어 쌕쌕 숨소리도 들렸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이원의 고치 위에 툭, 머리를 기댔다.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던 카이사르가 속삭였다.

"안 일어나면 덮친다."

작은 음성에 이원은 그저 조용한 숨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끄러미 이원을 내려다보던 카이사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원의 머리를 노크하듯 콩, 때렸다.

동시에 이원이 인상을 쓰며 크릉, 이를 갈았다. 그것을 본 카이사르는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숙인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이원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새근거리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정말 비싼 술은 머리가 안 아픈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겨우 눈을 떳던 이원은 꾸물거리며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번쩍거리는 플라티나 블론드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그는 한동안 멍하니 기억을 되새겼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이사르는 여전히 이원의 옆에 누운 채 잠들어있었다.

뒤늦게 이원은 다시 잠들기 전에 잇었던 잠깐의 일들을 기억해냈다. 그럼 여긴 카이사르의 집인가? 이원은 무심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의 풍경은 다른 방과는 무척 달랐다. 앤티크 가구들이 곳곳에 들어찬 집안에 이런 현대적인 심플한 방이 있다니. 이원은 생소한 기분과 함께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커다란 집은 방마다 인테리어를 다르게 해서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방에서 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들을 때는 콧웃음을 쳤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단조롭고 심플한 방의 인테리어는 이원의 두통을 그나마 가라앉혀주는 것 같았다.

이원은 누운 채 숨을 고르며 남은 두통을 진정시켰다. 이렇게 숙취가 심할 걸 미리 예상했어야 했는데. 아니, 알고 잇었다. 하지만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제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던 것이다. 니콜라이와 그의 아내가 감격의 눈물을 끝없이 흘리는 것을 보며 공동주택의 모두가 연달아 건배를 했다. 

그들의 눈물만큼 많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아, 왜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닌 거지. 술을 마실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이원은 생각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이사르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이원은 누운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섬에서의 일이 되살아났다. 그 때처럼 잠에서 깰까? 깨기 전에는 미간을 찌푸릴까? 키스를 하려고 다가가면 갑자기 눈을 뜰까?

답은 3번이었다. 갑자기 번쩍 떠진 은회색의 눈동자에, 이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잠시 둘은 그 자세로 멈춰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원은 미친 듯이 생각을 굴려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것은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이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끄러미 마주 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이원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음, 저기, 갑자기 결근해서 미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더군."

이원의 뒤를 따라 카이사르도 몸을 일으켰다. 이원은 그를 외면한 채 앉아서 사방으로 뻗친 머리칼을 긁적거렸다.

"내일은 바로 일 할 테니까..."

"괜찮아. 그보다 두통은 좀 나았나?"

카이사르의 물음에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일어선 카이사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뭘 좀 먹을까?"

그렇게 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이원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실컷 자고 난 뒤의 만찬은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이원은 만족해하며 평소 먹기 힘든 음식들로 가득히 배를 채웠다. 두툼한 프랑스 산 안심스테이크를 세 점이나 먹어치운 뒤에야 비로소 만족해하는 그를, 카이사르는 감탄한 건지 경악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아싿.

집사가 와인을 가져왔지만 이원은 사양했다. 대신 탄산수를 주문하자 카이사르는 가볍게 그를 놀렸다.

"평생 마실 술을 하루에 다 마신 모양이군."

이원은 가볍게 부정했다.

"평생은 아냐. 일주일 정도는 되겠지."

기회만 닿으면 얼마든지 먹어주겠다는 듯 씨익 웃는 이원의 얼굴에, 카이사르는 놀란 듯 하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변호사가 그렇게 술꾼인 줄은 몰랐는데, 언제 한번 함께 마시지."

카이사르의 미소가 미묘하게 돌변했다.

"취할 때까지."

이원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좋아, 얼마든지."

흔쾌히 승낙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두는 게 낫겠어. 나하고 하면 넌 죽을 거야."

이원은 발끈해 당당하게 선언했다.

"날 우습게 보는 거야? 네가 얼마나 셀 지는 몰라도 나도 꽤 해. 아마 나가떨어지는 건 네 쪽일 걸."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그럴까."

"물론."

자신있게 말하며 보란 듯이 탄산수를 들이켜는 이원의 모습을 카이사르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크게 울린 목울대에 이를 세워 박아넣고 싶은 자신을 그는 지그시 억눌렀다. 

카이사르의 극심한 동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채 이원이 말했다.

"벌써 해가 지네."

닫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열망을 담은 것처럼 타오르는 햇살에 카이사르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리고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침묵이 그들 주변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이원은 크게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일 자고 난 뒤 다음날이 되자 두통은 간신히 가라앉았다. 하늘을 보자 날씨가 꽤 좋았다.

이원은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는 드넓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전날은 숙취에 시달려 미처 생각을 못했다. 자는 사람을 납치하다니 역시 마피아는 어쩔 수 없다니까.

찌푸린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원은 마침 정원을 빠져나가는 낯익은 세단을 발견했다. 카이사르의 차였다. 불현듯 전날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 피곤할 테니 푹 쉬고 내일은 집에만 있어.

쉴 거라면 굳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지.

그렇게 생각했던 이원은 즉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결단을 내린 뒤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던 이원은 곧바로 코트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집사가 그를 보고 정중히 말을 걸었다.

"어딜 가십니까?"

"잠깐 산책이요."

간단히 말한 이원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집사는 무심히 지켜보았다. 이원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렀다. 벌써부터 숨이 가빠왔지만 가슴은 후련했다.

자유다!

이원은 두 팔을 높이 들고 아이처럼 눈길을 달려갔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시각, 카이사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언성을 높이는 간부의 연설을 심드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세르게예프 조직의 간부 회의가 있는 날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소리를 지르는 몇 명 사람들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오늘도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단지 그들을 지켜보는 카이사르의 속마음 외에는. 튜체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책상을 내리쳤다.

"조직의 후계자를 공격하다니. 이건 명백한 도발이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소. 우리도 본때를 보여줍시다! 로모노소프에게 전쟁을 선포하잔 말이오!"

그의 격한 외침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또다른 일부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튜체프는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내심 당황했다.

차르가 공격을 당했다는 걸 알면 모두 흥분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죽어줬으면 훨씬 좋았을 걸.

튜체프는 한 군데에 총상을 입은 것이 전부인 카이사르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고작 다친 걸로 끝나다니.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어렵게 시선을 뗀 튜체프는 다시 실내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간부들은 어영부영 유유부단한 태도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호응이 적자 그는 초조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화를 냈다.

"간부인 자들이 이렇게 자존심이 없어서야 조직원들이 누굴 믿고 조직을 의지하겠소. 참 답답하오들!"

"튜체프. 말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르지 않소."

보다 못한 간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총칼로 싸우던 시대가 아니오. 정부도 예전 같지 않고..."

옆에서 또다른 간부가 동조했다.

"조직도 변화할 때가 된 거지요."

또다시 한쪽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견은 알겠으니 튜체프 일단 자리에 앉으시오. 좀 더 침착하게 얘기해봅시다."

웅성거리는 간부들의 모습을 튜체프는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향했다. 일시에 모든 간부의 눈길이 카이사르에게로 향하고 긴 회의용 테이블 최상석에 앉아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는 튜체프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니 조직과는 무관합니다."

"무슨 소릴."

튜체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후계자의 안위는 곧 조직의 안위요! 감히 로모노소프에서 후계자를 노렸는데 우리더러 참으라는 거요?! 도대체 차르, 자존심도 없소? 왜 우리 세르게예프에서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한단 말이요!"

마지막 말은 다른 간부들을 향해 터져 나왔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간부도 있었지만 흔들리는 간부도 있었다. 수근거리며 말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튜체프는 자신만만하게 바라보았다.

자, 어떻게 할거냐. 튜체프가 다시 카이사르에게 고개를 돌리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로모노소프 쪽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카이사르의 결론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기대하고 있던 대답과 다른 말에 간부들이 술렁이는 것을 카이사르는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섣불리 움직여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안위라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할 겁니다."

"자존심이 없는 조직이 조직이요?!"

튜체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게다가 요즘 차르는 이상하오. 루스키의 긍지를 잊은 거요? 도발에 대응조차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 집에 들여 일을 시키다니!"

튜체프의 폭로에 일순 간부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튜체프는 내심 의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강도깊게 카이사르를 비판했다.

"변호사라고 들었소만 조직 내 고문변호사가 있는데 외부에서, 그것도 외국인을 고용한 이유가 뭐요? 내 지금껏 참아왔지만 오늘은 들어야겠소. 차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꼭 알아야겠소이다!"

간부들이 입을 다눔 채 카이사르를 지켜보았다. 튜체프를 위시해 가득한 루스키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듯 했다. 카이사르는 표정 없는 싸늘한 얼굴로 튜체프를 바라보았다.

"튜체프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이만 넘어가죠."

일시에 기다리고 있던 간부들이 아우성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럴 순 없소. 차르, 해명을 들어야겠소."

"아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차르가 집안에 외국인을 들이다니! 누가 나한테 설명을 좀 해보시오. 납득을 시켜달란 말이오!"

"차르, 이럴 수 있습니까? 이건 배신입니다. 로모노소프를 처치하는 것도 안 된다더니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사샤라면 절대 이런 일은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외침에 카이사르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전 아버지가 아닙니다."

멈칫한 간부들이 입을 다물고, 카이사르는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불만이 있다면 듣겠습니다. 하지맘 보복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몰로토프가 말했듯이 시대가 변했습니다. 더 이상 상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카이사르는 튜체프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제 뒤에서 수를 쓸 생각이라면 각오해야 할 겁니다."

회의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술렁거리던 간부들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튜체프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자 눈치를 보던 다른 간부가 발언권을 얻었다.

지방의 이권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튜체프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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