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4)

따스한 햇살이 흘러들어오는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지만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해서 울리던 전화벨소리가 결국 끊어졌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는 무심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20년 만에 만나러 와서는 고작 한다는 얘기가 그건가?"

조용한 음성에 그녀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주름진 얼굴에 가득 수심이 어렸다.

"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어요. 미하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덧붙였다.

"아니, 로모노소프 씨."

미하일은 아무 말 없이 맞은편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때 반짝이던 미모의 그녀는 이제 무시못할 세월의 흐름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 언제 알았나, 나타샤."

낮은 음성에 그녀는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대답했다.

"잊으셨던가요? 전 기자예요, 알아보려면 어려운 것도 아니죠."

미하일이 소리 없이 웃었다. 나타샤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당신이 수연이 곁을 떠난 것은 잘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원망했었지만."

나타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 결단을 이번에도 발휘할 수는 없나요?"

미하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나에게, 아들을 버리란 말인가...?"

"왜 안 되죠? 이미 하신 일 아닌가요?"

나타샤는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 올렸다.

"그 애는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어요. 이제 와서 당신이 끼어들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 셈인가요? 로모노소프 씨가 어째서 수연이와 아이를 떠났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요."

나타샤가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마피아의 수며진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잖아요."

미하일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가 묵묵히 찻잔을 들어 홍차를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나타샤는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달각, 하고 받침에 부딪친 찻잔이 작은 소리를 냈다. 미하일이 나타샤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은 알겠네."

나타샤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그러나 다음에 나온 미하일의 말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게 혈육 아니겠나."

"뭐라고요?"

나타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미하일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하지만 우리 부자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지."

'우리 부자'라니. 나타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그는 결심한 것이다.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창백하게 굳어진 나타샤에게 미하일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쁜 일이 있어서 배웅은 못 나가니 이해하게. 그럼, 잘 가게."

붙잡을 겨를도 없이 그는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직원들이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다.

나타샤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홍차를 마시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민에 빠져 입술을 깨물었다.

수연아, 어떡하면 좋으니.

화창하게 맑은 하늘이 드물게 반짝였다. 끝없는 폭설에 갇혀있었던 이원은 그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맑게 느껴지는 도시의 겨울에 감사했다. 전날 할머니에게 돈을 꾸어 마련한 스쿠터는 지난번의 것과 성능은 비슷했지만 디자인이 달랐다.

이원은 적당히 속도를 조절해 스쿠터가 중간에 멈추지 않도록 주의하며 카이사르의 집으로 출근을했다.

"어서 오십시오."

인사를 하는 집사의 얼굴이 새롭게 보였다. 이원은 마주 인사를 하며 그의 안내에 따라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그가 떠나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문득 이원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들여다보던 서류에 다시 익숙해지려면 얼마간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는 집사를 불러 세웠다.

"카이, 차르는 집에 있습니까?"

집사는 돌아서서 이원을 마주 본 뒤 대답했다.

"아뇨. 출근하셨습니다."

막연한 실망감을 느끼는 이원에게 집사가 뒤늦게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정시에 퇴근할 테니 기다리시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덧붙인 집사가 그럼, 하고 돌아섰다. 이원은 갑자기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서재로 들어갔다.

잘됐군, 즈다노프 의원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겠어.

섬에서 말했던 새로운 증인에 대한 말을 떠올리며 이원은 자리에 앉았다. 일에 집중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시로 시간을 확인했던 이원은 그것이 전부 새로운 증인을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신히 서류에 집중해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문득 차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서류에 골몰하고 있던 이원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 너머로 희미하게 헤드라이트의 빛이 비친 듯 했다.

이워능ㄴ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을 향했지만 방금 전까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활자는 그러나 그저 까맣게 일렁이기만 할 뿐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고 다른 서류를 들었을 때였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원은 뻣뻣하게 자세를 긴장시키고 열심히 서류를 읽는 척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덜컥.

곧바로 문이 열리고,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묵묵히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선뜻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퇴근 할 시간 아니었어?"

무례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원은 멈칫했다. 무심코 찌푸렸던 미간을 어렵게 펴고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그것은 다시 찡그려졌다. 

드미트리는 한쪽 어깨에 두터운 모피를 걸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자주색의 슈트는 처음 보는 것으로, 그런 색의 슈트가 생상이 되는지조차 몰랐던 이원에게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다른 사람이 입으면 흡사 광대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슈트가 뜻밖에도 드미트리에게는 잘 어울렸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이원은 찌푸린 얼굴을 펴고 대답했다

"카이사르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원은 굳이 고쳐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드미트리는 빙긋 웃더니 선뜻 몸을 숙여 이원의 앞에 쭈그려앉았다.

"나도 그런데. 카.이.사.르.랑."

일부러 뚝뚝 끊어서 발음을 했던 드미트리가 말했다.

"단 둘이."

"그렇군요."

이원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다시 서류로 향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어서 재판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장을 닫은 지 여러 날 지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니콜라이 부부와 아이를 생각하며 이원은 정신을 집중하려 했지만 신경은 자꾸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 체력은 좋아?"

뜬금없는 질문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드미트리를 돌아보았다. 드미트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루 동안 몇이나 상대해 봤어? 고작 한두 명으로는 카이사르를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이원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자 드미트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 몇은 잡아먹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변호사라."

때마침 밖에서 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카이사르가 돌아온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이원에게 혼자 멋대로 떠들어놓고 드미트리는 훌쩍 일어섰다.

"과연 솜씨가 있는지 궁금하군."

보란 듯이 돌아서서 나가버리는 드미트리의 뒷모습에, 이원은 어이가 없어 짧은 탄성만 뱉어냈다. 뒤이어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카이사르의 것이었다.

이원은 왠지 맥이 빠져 서류를 내려놓았다. 선뜻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무심코 자신의 옷가지를 더듬거리며 매만졌다.

다른 때는 구겨지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던 차림새가 지금은 왠지 너무나 신경쓰였다. 항상 자고 일어나면 뻗치는 뒷머리까지 더듬어 확인하는데, 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원이 고개를 돌리자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카이사르가 모습을 나타냈다.

두근...

문득 심장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 같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원을 역시 조용히 마주 보던 카이사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한 발 들어왔다.

"안녕."

"...안녕."

그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몸은 어떨까, 내심 걱정했던 이원은 안색도 행동도 그다지 불편해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내심 안심했다. 카이사르는 평소처럼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좀 늦었는데, 혹시 가버렸을까봐 걱정했지."

이원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렸어. 섬에서 말한, 즈다노프 의원에 대한 일 말인데."

혹시나 착각하지 말라는 듯 덧붙이는 말에 카이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  ...응접실로 가지."

카이사르가 먼저 돌아서서 서재로 나갔다. 서류를 건너뛰어 복도로 나가면서, 이원은 참을 수 없는 이 긴장감과 서먹서먹함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뒤늦게 응접실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두 사람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드미트리였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2인용의 소파에 각각 나뉘어 앉아 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똑바로자신을 응시하는 두 남자의 시선에, 이원은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잠시 고민했다.

싫은 상대냐 어색한 상대냐.

카이사르의 옆에 앉는 것은 왠지 불편했다. 어색할 것 같았고, 어째서인지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옆자리 역시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속에서 잠시 망설였던 이원은 곧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을 하는 거지? 아무 데나 앉으면 될걸.

이원은 곧 발을 옮겨 습관처럼 오른쪽으로 향했다. 무심히 드미트리의 옆에 앉자, 물끄러미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슬쩍 시선을 내려 표정을 감췄지만 드미트리는 놓치지 않았다.

이원이 드미트리 쪽으로 걸음을 향하는 순간 카이사르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던 것을. 찻잔을 내려놓을 때는 이미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즈다노프 의원에 대한 얘기인데."

카이사르가 드미트리와 이원을 향해 말했다.

"현재 증인이 죽어버린 상태라서 남은 건 그 의원뿐이야. 조금 실력을 행사할까 하는데."

"뭐든 말해."

램프의 요정처럼 드미트리가 선뜻 말했다.

"사진이 필요해. 시체의"

주저없이 내뱉는 카이사르의 말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작 드미트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찍어놨어, 혹시 쓸데가 있을지 몰라서."

"그럼 됐어."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요는 의원이 스스로 물러나는 거니까 제대로만 하면 문제는 없어."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버텼는데 가능할까?"

"왜,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되물은 것은 드미트리였다. 이원은 흘긋 그를 보았다가 이내 카이사르에게 주의를 돌렸다.

"의원이 승복할 뭐라고 가지고 있어?"

"내게는 없어."

카이사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묘한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에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사르는 무심히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아주 많이 가지고 있지."

알수 없는 말을 한 그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믿을게. 그럼 내일 즈다노프 의원의 사무실로 가면 되는건가?"

"그래."

카이사르가 말했다.

"시간은 정확해야 해."

"물론이야."

이원은 그쪽이나 잘하라는 듯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진 뒤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퇴근할게."

순간 카이사르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내심 그가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렸지만 뜻밖에도 그는 그 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원은 작게 실망하며 다시 짧은 인사를 남긴 후 응접실을 나갔다.

탁, 하고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 카이사르는 다시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무심히 홍차를 들이켜는데, 그때까지 보고 있던 드미트리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빈 잔이야."

그 말에 카이사르는 멈칫하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미 홍차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드미트리는 놓치지 않았다. 씁쓸하면서도 부드럽게 번지는 그의 미소를.

며칠 째 화창한 날씨에 즈다노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곧 있을 휴가에 대한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지중해에 가서 실컷 살을 태우고 올 예정이다. 돌아올 때 즈음에는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겠지.

성가신 변호사놈.

이원을 떠올리자 웃던 얼굴이 반사적으로 험악해졌다. 그렇게 혼쭐을 냈는데 아직도 들러붙다니. 세르게예프와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조만간 크게 손을 봐줘야겠어. 다시는 감히 덤비지 못하도록 바닥까지 철저히 밟아줘야지...!

결심을 하며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인터폰이 울리고 비서의 음성이 이어졌다.

"의원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변호사라고 합니다."

"변호사?"

뜻밖의 타이밍에 의아해하며 되묻자 그녀는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콜라이 씨의 담당 변호사라고 합니다. 소송에 관한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요."

옳거니.

즈다노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 애송이가 두 손을 든 모양이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커피 두 잔 타오고."

기분 좋게 인터폰을 끊은 즈다노프는 웃는 얼굴로 방문객을 기다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기대하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군가."

한껏 거만한 음성으로 즈다노프는 환영의 말을 했다. 이원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약속도 없이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네. 급한 일이면 하는 수 없지."

즈다노프는 슬쩍 덧붙였다. 

"무례하게 뛰어들어오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넌지시 지난번의 일을 들추는 즈다노프에게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당하게 시간을 내주시면 이쪽도 난입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놈이.

즈다노프는 이마 한 쪽에 혈관이 솟았지만 참았다. 어쨌든 일이 마무리 될 테니 일단은 참자. 공장과 부지가 넘어오면 이놈은 바로 밟아버리겠어.

작은 눈을 힐끔거렸던 즈다노프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뭐, 알았네. 이제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으니 이쯤 하세나. 그래, 서류는 잘 챙겨왔나? 난 사인만 하면 되는 거겠지?"

즈다노프는 슈트의 상의에서 만년필을 꺼내며 물었다. 이원은 네, 하고 가져온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류에 사인을 하려던 즈다노프가 멈칫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서류의 내용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이게 뭔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내지른 음성에 이원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공장과 토지의 부당 취득에 관한 반환서입니다. 사실을 인정하시고 재판을 포기하시면 의원님께도 차후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뭐라고!"

즈다노프는 분노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 애송이 녀석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입을 함부로 놀려! 불이익? 방환서?! 자신이 없으면 깨끗하게 승복을 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나를 상대로 배짱을 부려! 변호사 그만 두게 해줄까, 엉?!"

펄펄 뛰는 즈다노프에게 이원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부당한 이득을 취한 건 의원님입니다. 멀쩡한 공장과 토지를 엉터리 서류로 위조해서 가로채고 사람을 써서 폭력까지 휘두르셨죠. 관련해서 재판에 넘어가면 의원님의 명예에도 좋지 못할 겁니다."

"웃기는 소리! 네가 지금 날 협박하는 게냐? 피라미 녀석이, 넌 이제 끝이야! 지금 당장 네 자격을 박탈해 버리겠어, 알아?! 내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어, 어딜 감히 너 따위가...!"

기대가 어긋난 즈다노프는 마구 언성을 높이며 핏대를 세웠다.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놈이 감히 나에게 두 번이나 기어오르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당장 하수구에 처넣어 버리겠어! 분을 참지 못한 즈다노프는 눈앞의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불현듯 이원의 등뒤로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던 즈다노프는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등뒤로 검은 슈트의 사내들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방문에 즈다노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차, 차르.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렇게 갑자기, 연락도 없이."

즈다노프는 금세 태도를 바꿔 입을 열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쳐내며 비굴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얘기는 모두 들었겠지."

"네?!"

깜짝 놀란 즈다노프가 눈을 깜박이자 카이사르가 흘긋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마구잡이로 찢긴 서류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카이사르의 시선이 다시 의원에게로 향했다.

"재판을 포기할 건가, 공장에 묻히고 싶은가."

"포, 포기라뇨,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사색이 된 즈다노프가 연거푸 소리쳤다. 카이사르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로모노소프 쪽과 손잡고 세르게예프와 로모노소프를 천칭에 달고 있다는 것 알고 있어."

그와 함께 즈다노프가 숨을 멈췄다. 파랗게 질린 얼굴은 청색증이라도 오고 있는 듯 위급해 보였다. 카이사르는 그런 그를 보면서도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입을 열었다.

"베르다예프가 당신과 함께 어떤 일들을 꾸몄는지도 모두 알고 있어. 남의 명의를 사서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 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어, 어떻게 되다뇨?"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말없이 뒤에 서있던 사내가 작은 봉투를 꺼내 즈다노프에게 내밀었다. 창백한 얼굴로 봉투를 받은 즈다노프는 머뭇머뭇 안을 확인했다. 곧이어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숨을 삼키며 그대로 그것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곤두박질 친 봉투 사이로 의자에 묶인 시체의 사진이 반쯤 비어져 나왔다. 사색이 되어 덜덜 떠는 즈다노프에게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로모노소프 쪽에서 관련된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있어. 이 남자는 마지막 명의자였지. 베르다예프가 죽고, 명의자들이 죽고."

카이사르가 흘긋 사진으로 향했던 시선을 즈다노프에게 돌렸다.

"다음은 누구일 것 같나."

순간 즈다노프는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시고, 저 좀, 사, 살려."

다급하게 카이사르의 다리에 매달리려는 즈다노프를 곧바로 뒤에서 나온 조직원이 제지했다. 카이사르의 두구 끝조차 건드려보지 못한 즈다노프가 덜덜 떨며 울먹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원은 전날 카이사르가 했던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즈다노프는 겁이 너무나 많았다. 저렇게 간이 작은데 비리는 어떻게 저질렀을까. 

이원은 내심 혀를 차며 생각했다. 울먹이는 즈다노프를 내려다본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서명해."

즈다노프가 벌겋게 익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당신과 베르다예프가 차지한 부동산 전부, 부당하게 취득했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면 목숨을 보장해주지."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모노소프로부터도 지켜주겠지."

"하, 하겠습니다. 하겠어요, 뭐든지 서명하겠습니다!"

마구 머리를 박으며 소리치는 즈다노프에게 다른 조직원이 앞으로 나서서 새로운 서류를 내놓았다. 급히 펜을 꺼내 사인을 하는동안 서류는 즈다노프의 눈물과 땀으로 금세 얼룩이 졌다.

후들거리는 사인을 마치자마자 낚아채듯 서류는 조직원의 손으로 들어가고, 즈다노프는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직원은 또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이, 이건 뭡니까...?"

흐느끼며 묻는 즈다노프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공장과 토지에 관한 서류야. 방금 당신이 찢어버렸지."

당황해 눈을 크게 뜬 즈다노프를 내려다보며 카이사르는 말을 이었다.

"그 공장과 토지는 오늘부로 타인의 소유야. 그러니까 당신은 손을 떼."

카이사르의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아니면 나와 붙고 싶은 건가?"

"아, 아뇨. 아닙니다. 사, 사인하겠습니다. 네, 합니다."

즈다노프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서류에 사인을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카이사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획을 긋고 나자 조직원은 곧바로 서류를 가져갔다.

조직원이 든 서류를 눈으로 확인한 카이사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하는 즉시 그것을 봉투에 넣고 물러났다. 카이사르는 그때까지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원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럼 갈까, 변호사 씨."

순간 즈다노프는 놀라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놀란 눈에 이원이 일어나 카이사르의 옆에 서는 모습이 들어왔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참,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내 새 변호사야."

즈다노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는 듯 복잡한 그의 얼굴은 곧 화가 나 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그랬군, 날 속이고 있었어! 내가 로모노소프와 손을 잡은 건 이래서였다고. 네가 그 녀석을 싸고 도니까...!"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앞으로 실례가 없도록 잘 기억해둬."

소리도 없이 숨을 삼키는 즈다노프를 뒤로 하고, 카이사르가 등을 돌렸다. 즈다노프는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기만 하는 그에게 이원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카이사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줄을 이어 따라ㅏㄱ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는 즈다노프만이 남겨졌다. 허망한 정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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