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4)

잠깐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은 가득히 눈을 머금고 끝도 없이 하얀 덩어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깨진 창문에 작게 남겨둔 공간을 통해 이원은 밖을 확인했다.

눈을 뿌리면서도 아직도 꾸물거리며 뭉쳐있는 구름을 물끄러미 보았던 이원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꺼져가는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자 잠시 머뭇거리던 불길은 이내 활활 타올랐다.

금세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지만 이원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나무는 금방 타지만 금방 꺼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아있는 장작은 얼마 없었다. 게다가 또 눈이 오고 있으니 눈이 그치고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원은 냉정하게 집안의 물품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창고의 통조림과 저장식품들을 적당히 잘 나누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겠다. 혹시 장작이 떨어지면 집안의 가구를 부숴서 넣으면 된다.

문득 시니컬한 웃음이 번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철저히 이성적이다. 이렇게 속이 엉망인 상황에서도.

이원은 물끄러미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하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카이사르와 자신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고 그걸로 끝이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론은 명쾌했지만 기분은 씁쓸했다.

문득 귓가에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고개를 돌리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확인했다. 다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원은 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곧 멈췄다. 이원은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렸다. 안쪽에서 난 소리였는데 주방과 욕실은 비어있었다.

주의 깊게 방의 문을 열자 카이사르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실내인데도 하얗게 입김이 새어나오는 침실에서 그는 상의를 벗고 있었다.

의아해하며 바라본 이원은 카이사르의 옆에 놓여있는 구급상자를 보고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구급상자에서 약을 찾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 다른 이의 도움 따위는 받아본 적도 없는 것처럼.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그의 몸에는 여기저기 오래 된 상처와 새로운 상처가 뒤섞여 있었다. 이원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상처의 개수만큼 저 남자는 감정을 죽여 온 걸까.

카이사르의 강한 등줄기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이원은 말이 없었다.

오직 혼자 버티면서.

묵묵히 카이사르를 바라보던 이원이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내어 발을 옮기자, 카이사르가 멈칫했다. 이원은 아무 말 없이 구급상자를 열어 솜을 꺼냈다.

"혼자서도 충분해."

카이사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원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나도 이쯤은 할 수 있어."

이원이 솜에 소독약을 덜어내며 덧붙였다.

"영화에서 봤으니까."

카이사르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지금 그는 이원이 아침식사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원은 굳이 그의 표정을 확인하는 대신 견갑골에 난 상처를 솜으로 닦았다. 길게 패인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뜨끔하게 저려올 텐데도 카이사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원은 묵묵히 상처를 소독하다 입을 열었다.

"나도 꽤 거칠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너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겠어."

조용한 음성에 카이사르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날 돕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죽이고 싶었던 거 아닌가?"

"난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죽이지 않아."

이원은 간단히 말을 넘긴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묘한 침묵에 한동안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예정에 없었어."

멈칫했던 이원이 아무 말 없이 다 쓴 솜을 휴지통에 버렸다. 거즈를 집으려 손을 뻗은데, 불쑥 카이사르가 그 손을 붙잡았다. 이원이 손을 멈추자 카이사르가 이원의 팔에 입술을 댔다.

두터운 스웨터 너머로 지그시 입술을 눌러오는 여린 압박이 느껴지자,이원은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혹시나 자신의 동요가 들킬까 두려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이사르를 내버려두었다. 이를 세워 스웨터의 소매를 느슨하게 끌어올린 카이사르가 손목의 맥박 위로 입술을 댔다.

펄떡이며 뛰어가는 맥박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이원이 억지로 숨을 억누르는데, 카이사르가 이원의 손목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널 위험하게 만들었군."

왠지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뒤통수에, 이원이 입을 열었다.

"다친 건 너잖아."

이원의 무심한 음성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평소처럼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말이 맞아."

조용한 음성에 카이사르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이 말을 계속했다.

"각자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걸로 끝이야. 나도 너에게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이원은 카이사르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말했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우린 다시 만날 일 없는 사이니까."

극히 냉담하게 관계를 정의한 이원이 구급상자로 손을 뻗었다. 소독을 끝낸 상처에 덮을 거즈를 향해 뻗은 손을, 갑자기 카이사르가 붙잡았다. 뜻밖의 상황에 이원이 놀라 내려다보자, 카이사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들었잖아..."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난폭하게 이원을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서있다 그대로 끌려가버린 이원은 그대로 침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뭐하는 거야."

"너."

카이사르가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그런 얘기하면 용서 안 해."

이원은 기가 막혀 하, 하고 짧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사람을 실컷 이용해놓고 무슨 헛소리야?"

짜증스럽게 일갈하며 카이사르를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손을 잡혀버렸다. 카이사르는 그대로 이원의 팔을 침대로 떨어뜨려 고정시키고 위로 올라왔다.

"넌 자존심이 강하군."

"자존심?"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듯 이원은 카이사르의 말을 반복했다. 카이사르가 소리 없이 웃는가 싶더니 곧 표정이 진지해졌다. 손목을 잡아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대신 그가 이원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손가락 끝에서 이원의 검은 머리칼을 장난처럼 가볍게 굴렸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점에 끌렸지만."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이사르의 입술이 이원과 맞물렸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은 이내 거칠게 뒤엉켰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던 이원은 그러나 카이사르를 밀어내지 않았다.

떨리는 속눈썹이 늘어지더니, 그가 눈을 감았다. 뜻밖의 반응에 멈칫했던 카이사르는 이내 무자비하게 입안을 점령했다.

흠뻑 입안을 적신 혀가 물러나고, 아프지 않게 물었던 입술을 카이사르가 다시 빨아들였다. 부드러운 혀가 다시 벌어진 입술로 들어와 자신의 혀를 두드리고, 혀의 돌기를 문지르며 안을 간질였다.

한참만에 카이사르가 입술을 뗐다. 깊은 탄식과 함께 열망을 담고 그를 내려다보았을 때도, 이원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문득 카이사르가 한숨처럼 안타까운 숨결을 뱉어냈다.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그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심연과 가튼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노려보던 그의 눈 속에 자신이 비쳐든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기울이고, 젖은 숨결이 맞닿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혀가 맞닿은 순간 낮은 탄식과 함께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신조차 나를 질투할 거라고.

숨결이 맞닿고, 누군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자신이었는지 카이사르였는지 이원은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이 키스를 열망하고 있었는지.

이원은 굳이 자신의 헐떡이는 숨결을 누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내버려둔 채 카이사르의 벗은 몸을 더듬었다. 가쁜 숨소리가 서로의 입안으로 흩어졌다. 

이원은 온몸으로 카이사르의 무게를 느끼며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촘촘한 근육이 손바닥 아래에서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아, 하고 목 깊은 곳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원이 고개를 젖히자 곧바로 카이사르가 그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지나친 흥분으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입술을 빼앗아 빨아들이며 그대로 몸을 굴려 그의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이원의 스웨터를 잡아 끌어올리고, 잠시 입술이 떨어진 채 드러난 그의 유두에 입술을 문질렀다.

"하아..."

이원의 목 안쪽에서 깊은 신음이 질러 나왔다. 이원이 다시 몸을 숙이고 둘의 맨살이 닿았다. 유두가 미끄러져 서로에게 미끄러지자 카이사르가 끓어오르는 신음을 뱉어냈다.

총상을 입은 상처에 소독약을 부을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남자가 이원의 아래에서 거친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원은 몸을 숙여 그의 유두에 입술을 묻었다.

이를 세워 지근거리자 카이사르는 이를 악물더니 다시 그를 안고 침대를 굴렀다. 순간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둘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서로를 안은 팔은 풀어지지 않았고, 입술은 서로를 격렬하게 탐하고 있었다. 다시 위를 차지한 이원이 카이사르에게 하반신을 문질렀다. 

낡은 진즈를 사이에 두고 둘의 성기가 맞닿았다. 끓어오르는 신음소리가 카이사르의 입안에서 질러 나왔다. 카이사르가 곧바로 이원의 허리로 손을 가져가고 성급한 손이 버클을 풀었다.

이원 또한 카이사르의 바지를 열어 끌어내렸다. 이원의 손이 드러난 성기에 닿는 순간 카이사르는 비명처럼 거칠게 숨을 삼켰다. 이원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싸늘한 공기 속으로 둘의 뜨거운 숨결이 마구 뒤섞였다. 열에 들뜬 얼굴이 서소를 마주 보고 있었다. 잠시 이원이 머뭇거렸다. 두 눈에 확연히 떠오른 망설임에, 곧바로 카이사르가 이원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강요하듯 입술을 문지르고 혀를 빨아들이자 머뭇거리던 이원 역시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카이사르의 안은 생각보다 더 흥분됐다. 금세 혀가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원은 치아를 핥고 혀로 혀를 들어 올려 두터운 근육의 아래쪽을 애무했다. 

카이사르의 거친 숨결이 일순 멈춰버리고, 동시에 이원은 아슬아슬하게 물릴 뻔한 혀를 간발의 차이로 빼냈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이원의 바지를 벗겨낸 카이사르가 그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탄탄한 엉덩이를 움켜쥐자 동시에 카이사르의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가 이원의 발기한 그것과 맞닿았다. 이원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카이사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는 망설였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독이 됐다.

콰앙!

난데없이 들린 요란한 소리에 흐느끼듯 이어지던 숨소리가 일순 멎어버렸다. 둘은 붉게 상기 된 얼굴로 거친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난폭한 발소리가 울려퍼지며 낯선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사르, 어디야?!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이원은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욕설을 들었다. 이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어서자 카이사르 역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원이 서둘러 바지의 버클을 잠그고 카이사르가 침대에 앉아 브리프와 함께 바지를 끌어올리는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카이사르으!"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난입한 남자의 모습을 이원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터운 패딩을 입고 서있는 그는 흡사 설인을 보는 듯 했다.

머리는 물론이고 어깨에 부츠까지 온통 눈이 수북이 쌓여있는 데다가 그의 뒤에서는 무시무시한 북구의 칼바람이 눈과 함께 휘몰아치고 있었다.

카이사르와 맞먹을 정도의 장신의 눈사람을 본 이원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패딩에 연결된 모자를 벗자마자 곧바로 카이사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상에, 무사했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카이사르, 네 맥박이 몇까지 떨어졌는 줄 알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다 죽여 버리려고 왔어!"

수선을 피우며 카이사르를 와락 끌어안으려고 덤비는 남자를 카이사르는 침대에 앉은 채 발을 들어 제지했다. 정확히 배를 맞은 남자가 바닥을 구르고, 카이사르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카이사르가 또다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욕설일 거라고 이원은 생각했다. 가차없이 배를 얻어맞은 남자는 그러나 이내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더니 지치지도 않고 떠들었다.

"어서 가자, 의사도 끌고 왔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들 난리가 났었다고. 출혈이 심했던 것 같던데, 쇼크는 없었어?"

빠르게 말을 잇는 그의 모습은 마치 카이사르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카이사르는 먼저 방에서 나가며 이원에게 말했다.

"천천히 나와."

이원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 카이사르의 배려에, 드미트리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곧바로 카이사르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눈을 덮고 그대로 끌고 갔다. 이어서 방의 문이 닫히고, 이원은 간신히 혼자가 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쌩한 바람이 불어왔다. 카이사르는 형편없이 부서진 현관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차르, 몸을 따뜻이 하셔야 하는데 이런 추위에... 어서 헬기에 타십시오. 치료는 안에서 하겠습니다."

상반신을 벗고 있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자마자 의사는 사색이 되어 호들갑을 떨었다. 카이사르가 뒤를 돌아보자 드미트리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치료부터 받아. 내가 알아서 데려갈 테니까."

드미트리는 낮은 소리로 덧붙였다.

"혈압이 60까지 내려갔었어. 모두 전쟁 할 각오로 왔다고."

그 말대로 친위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평소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에서 감정이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부하 중 하나가 급히 코트를 가져와 카이사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카이사르는 별다른 말 없이 헬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카이사르를 헬기로 안내하며 드미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스나이퍼가 있었어. 조금 다친 것뿐이야."

"스나이퍼라고?"

금세 드미트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묘하게 사라지는 말 끝에 카이사르는 입을 열었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묘한 살기를 뿜으며 굳어졌다. 순간 드미트리는 그의 얼굴에 넋을 잃었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냉혹한 표정으로 카이사르는 말했다.

"로모노소프의 처형방식이 마음에 든다면 똑같이 해줄 수 밖에."

혼잣말 같은 그의 말을 들으며, 드미트리는 전율했다. 그는 가는 눈을 접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야. 차르."

썩 내키지 않는 뒤처리를 혼자 끝낸 뒤, 이원은 방에서 나왔다. 어느새 거실은 조용하게 비어 있었다.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원은 마침 집안으로 들어오던 설인과 마주쳤다. 이원이 그 자리에 멈춰 서자 설인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변호사 씨,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이원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 날 아는 건가? 무례한 말투에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을 내밀었다. 

"난 드미트리. 카이사르와는 사촌이야."

이원은 카이사르와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남자를 묘한 기분으로 마주 보았다. 가벼운 악수를 나눈 드미트리는 곧 손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카이사르는 지금 치료중이야. 안내하지."

바닥에 팽개쳐져 있는 자신의 코트를 찾아든 이원은 선뜻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눈은 어느 정도 그친 상태였지만 아직 눈송이는 날리고 있었다.

수북이 내린 눈은 무릎까지 쌓여 있었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이원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폭설 때문에 비행기도 배도 모두 발이 묶였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드미트리는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다.

"차르의 몸 안에 좌표가 있지."

뜻밖의 말에 눈을 깜박이자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카이사르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면 바로 알림을 울리는 전자칩이 그의 몸에 있단 말이야. 그래서 맥박이나 체온 같은 생체징후가 흔들리면 바로 비상사태가 되지. 위치는 위성에서 잡아주기 때문에 바다 위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어."

이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의 몸 안에 그런 것을 넣는다는 건 들어만 봤지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저 현실감 없는 전자기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묘한 기분에 말이 없어진 이원에게 드미트리가 말했다.

"자, 들어가."

눈을 들자 거대한 헬기가 눈앞에 있었다. 군용헬기로만 알고 있던 것이 개인용도로 쓰이다니 또다시 이원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말 없이 헬기에 오르는데, 그를 지켜보고 있던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둘이 뭐하고 있었어?"

순간 이원이 멈칫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드미트리는 전혀 변하지 않은 얼굴로 빙글거리며 말했다.

"집안이 온통 꽁꽁 얼었는데 거기만 후끈 달아올랐던데, 뭘하고 있었을까? 카이사르의 등에 멍까지 들어서는. 스나이퍼에게 당한 건 총질 뿐이라고 하던데 말이야ㅡ"

웃으며 말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만."

조용히 말한 후 돌아서자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카이사르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모르겠군."

무심코 걸음을 멈춘 이원에게 선뜻 뒤로 다가선 드미트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방해되면 언제든 웃으면서 죽여줄 수 있어."

이원이 찌푸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드미트리가 빙긋 웃었다.

"알아 둬."

그리고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이원을 스쳐가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수선한 발소리가 이어지는 헬기안애서 이원은 우뚝 서있었다.

무리의 사람들은 가득 카이사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의사로 보이는 남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이 제각각 처음 보는 기계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는 가운데 드미트리가 당당하게 그들을 뚫고 카이사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뭔가를 속삭이는 드미트리에게 카이사르는 미간을 모은 채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원이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자 서둘러 치료를 마친 의사가 출발해도 좋다는 사인을 했다.

곧이어 헬기 밖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카이사르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부대였다.

적은 장비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의료진과 대책팀, 그를 위해 목숨이라도 걸 것 같은 조직원들까지. 새삼 이원은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키스를 하던 남자는 지금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이원은 복잡한 기분을 느끼며 빈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육중한 헬기가 날아올랐다.

본토로 향하는 헬기 안에서, 이원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폭설을 뚫고 날아온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카이사르는 의료진에게 둘러싸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이원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당장 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방인 게 분명한 창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비쳤지만 창밖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원은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오랜만에 집으로 갈까.

"아니 이게 누구야!"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할머니는 놀라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이원은 반가운 그녀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그럼, 물론이지. 자넨 고생이 심했나 보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

할머니가 혀를 차며 고용주를 욕하는 소리를 대강 흘려들으며, 이원은 말을 이었다.

"잠깐 짬이 나서 들렸습니다. 니콜라이 아저씨는 위에 계십니까?"

할머니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서 올라가 보게. 목이 빠져라 자네만 기다리고 있어. 얘기를 좀 들어주면 속이 그나마 풀리겠지."

재촉을 하는 할머니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이원은 계단을 올라갔다.

가볍게 노크를 하자 잠시 뒤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아니, 자네!"

니콜라이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 그를 안으로 들였다. 집안은 아이가 있는 흔적이 역려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빨래와 아기의 분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거실의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침대로 걸음을 옮겼던 이원은 금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잘 지냈니?"

손가락을 내밀어 인사를 하자 아이는 고사리손을 들어 이원의 손가락을 꼭잡았다. 다정하게 웃는 이원의 뒤에서 니콜라이의 아내가 말을 걸었다.

"어서 와요, 이원 씨. 일 때문에 당분간 못 오신다더니, 그 일은 잘 마무리가 되었어요?"

작은 티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는 그녀의 얼굴은 기대로 가득했다. 드디어 자신들의 재판에 전념을 해줄 거라는 기대였다. 이원은 내심 미안해하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출퇴근을 한 테니까 볼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제 방으로 찾아오세요."

실망했던 그녀가 금세 웃음을 지었다. 이원은 부부가 내주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현재 맡고 있는 일이 즈다노프 의원과 관련이 있어서 잘만 해결하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하자 부부의 얼굴은 태양처럼 환해졌다.

"증인만 찾으면 바로 재판이 끝납니다.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이원의 격려에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으로 가득 부푼 그들의 얼굴에 그러나 이원은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 못했다. 

말은 쉬웠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는가였다. 이번에는 즈다노프의 주변을 파헤쳐야 한다. 어쩌면 다시 원점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원은 숨기고 있었다.

니콜라이의 집에서 나오자 마침 할머니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관절염이 있는 그녀를 위해 훌쩍 뛰어간 이원이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그녀가 웬 쪽지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없는 동안 누가 찾아왔었네. 이제 기억났지 뭔가."

"그렇습니까?"

의뢰인인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곤란한데, 하고 쪽지를 열었던 이원은 간단히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메모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꽤 나이든 여자던데... 꼭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갔어. 잊지 말고 전화해 보게."

"알겠습니다."

이원의 고맙다는 말을 뒤로 하고 할머니는 힘겹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원은 쪽지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름과 번호 모두 생소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으로 들어간 이원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계속해서 울리는 벨소리에도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이원은 묵묵히 참을성 있게 상대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렸지만 결국 신호는 기계의 안내음으로 이어지고, 이원은 전화를 끊고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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