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4)

살며시 밀었을 뿐인데 현관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확 물러났다. 이원은 카이사르를 안으로 들여보낸 뒤 황급히 문을 닫았다. 밀려드는 바람과 씨름하며 간신히 문을 닫고 나자 급격히 피로가 밀려왔다.

이원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있었다. 풍성한 모피를 입고 있지만 저 상태로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중상을 입었으니 체온도 현저히 떨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이원은 우선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다행히 전기는 바로 들어왔다. 불빛 아래에서 보자 카이사르의 하얀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 보였다. 이원은 서둘러 쉴곳을 마련하려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거실 한 복판에 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집주인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혹독한 추위에 부패조차 쉽지 않은 듯, 그는 차갑게 식은 채 그대로였다.

딱딱하게 얼어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자 이원은 추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밖에서 얼어 죽느니 시체와 밤을 새는 쪽이 나았다. 이원은 결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튼과 카펫 중 잠시 고민했던 이원은 곧 어째서 실내인데도 이렇게 춥고 바람이 부는지를 깨달았다.

창문이 모두 깨져 있었던 것이다. 매운 북풍이 그대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거실에는 딱딱한 고드름까지 얼어 있었다.

망할 래오니드,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이원은 뒤늦게 이를 갈며 일단 카펫을 들었다. 카펫의 피는 이미 메말라 굳어져 있었지만 역시 꺼림칙했다. 이원은 곧바로 쉬스킨의 시체를 덮고 의자 채로 질질 끌어 그를 최대한 거실에서 먼 곳에 놓았다.

다음은 창문이었다. 집안을 뒤져 쓸 만한 연장세트를 찾은 이원은 곧바로 뚝딱뚝딱 못질을 하며 창을 막았다. 작은 공사를 마치고 난 뒤 이원은 안심했다. 바람이 안 들어오자 그제야 살것 같았다. 간신히 대강의 정리를 끝낸 이원은 곧바로 카이사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일어설 수 있겠어?"

손을 내밀자 카이사르는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왠지 사나운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원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카이사르의 반응을 기다렸다.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던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고, 이원의 손을 잡았다. 그순간 어째서인지 이원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비틀거리는 카이사르를 부축해 난로 근처에 앉힌 이원은 서둘러 장작을 쌓았다. 종이와 라이터를 찾아와 수북이 쌓인 땔감에 불을 붙였지만 염원과는 달리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이원은 종이란 종이는 죄다 모아와 태우는 것으로 모자라 코트를 벗어 마구 바람을 내며 억지로 불길을 일으켰다. 간신히 솟아나는 불길을 보자,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말았다.

문득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카이사르가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던 이원은 손바닥에 묻어나는 검댕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사르가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사막에 떨어져도 살 것 같아."

이원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카이사르는 흘긋 쉬스킨의 시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설마 여기로 오자고 할 줄은 몰랐어. 일반인들은 시체라고 하면 다들 벌벌 떠는 줄 알았는데."

물론 이원도 소름이 돋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누구든 해야 한다. 이원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시체가 무섭다고 밖에서 얼어죽을 순 없잖아."

"그렇지."

선뜻 수긍한 카이사르가 가볍게 말했다.

"넌 가끔 나보다 더 마피아 같아."

이원은 즉각 부정했다.

"합리적인 거야."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고 싶었다. 자신의 앞에서 서슴없이 총을 쏴대던 카이사르에 대한 기억과 함께 문득 되살아난 낮의 일에 이원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잊고 있었다. 여기에 온 목적을. 이원은 무심코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쉬스킨 씨를 누가 죽였을까...?"

무슨 목적으로.

비리와 연루된 누군가가 분명했다. 하지만 스나이퍼까지 고용하다니. 도대체 누가...?

카이사르 역시 이원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확실히 좁혀지는 용의자가 있었다.

로모노소프인가, 아니면 다른 쪽인가.

너무나 확실한 처형 방식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모으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래오니드 씨에 대해서 아는 건 전혀 없어?"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실력이 좋은 녀석이지만 내가 스나이퍼의 얼굴을 직접 볼 일은 없어."

하긴 카이사르는 명령을 수행하는 쪽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쪽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이원은 다시 물었다.

"하이 클래스라면 그리 많지는 않지?"

카이사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도 안 되지."

그 중 한 명이다. 그런 스나이퍼를 고용해서 일을 벌일 상대란...

결국 생각은 같은 곳에서 빙빙 돌았다. 이원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유일한 증인이 사라져 버렸으니 앞날이 깜깜했다. 분명 증인을 죽인 사람은 웃고 있겠지. 그렇다면 증인이 죽고 나서 이득이 되는 사람일 텐데...

"혹시 즈다노프 의원이?"

함께 일을 꾸몄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그는 현재도 몇 개의 소송에 걸려 있지 않은가. 무심코 입밖으로 중얼거리고 만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럼?"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이로써 재판은 확실히 불확실하게 됐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이원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굳어졌을 때였다. 

"하지만 즈다노프 쪽을 캐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이원은 생각지 못한 말에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이원이 되묻자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베르다예프와 즈다노프가 같은 수법으로 부정을 저질렀다면 즈다노프쪽에서도 명의를 차용했다고 증언 할 증인이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원의 생각은 달랐다. 상당히 쓸만한 아이디어였다. 그래, 베르다예프를 캐냈는데 즈다노프를 못할 건 없지. 게다가 죽어버린 베르다예프보다 살아있는 즈다노프 쪽이 더 쓸모가 많을 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원은 진심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해볼 만 한데."

카이사르가 물끄러미 이원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이원은 그를 향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한동안 둘은 물끄러미 서로를 보고 있었다. 조금씩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어느새 둘 중 누구도 더이상 웃지 않게 됐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문득 이원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시선은 서로의 입술에 고정되고, 움직이지 않았다. 무심코 거리가 가까워진다 눈을 떴을 때 이원은 카이사르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원은 황급히 물러나고 말았다.

"차라도 마시는 게 좋겠어."

그는 곧바로 뛰듯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이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원은 벽을 돌아 주방으로 몸을 숨겼지만 여전히 맥박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카이사르의 눈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몸 안쪽이 뜨거워졌다. 이원은 어느새 거칠어진 숨결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밖은 온통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눈에 반사된 빛에 간신히 잠에서 깬 이원은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문득 시야에 반짝이는 백금발이 들어왔다.

그가 느낀 것은 눈의 빛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이원은 뒤늦게 알았다.

카이사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전날 간신히 불을 일으킨 뒤, 둘은 모피를 이불삼아 덮고 난로 앞에서 잤다. 의식적으로 멀어지려 애썼지만 눈을 떠보니 이런 상황이다.

이원은 카이사르와 마주 보며 누워있었다. 하지만 왠지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이원은 그대로 누운 채 카이사르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빛에 따라 금색이 되기도 하고 은색이 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속눈썹은 햇살을 받아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은빛에 가까운 플라티나 블론드가 아무렇게나 이마 위에 흩어져 있고, 평소 굳게 다물려 있는 입가는 느슨하게 풀린 채였다. 문득 여관의 딸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자는 건 천사같은데.

이원은 망설이다 가만히 손을 들었다. 희미한 숨결이 닿고, 부드러운 입술이 손끝에 느껴졌다. 이원은 천천히 카이사르의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탄력있는 입술을 가만히 눌러보았던 이원이 손을 뗐다. 어느덧 그의 얼굴은 이원의 시선 바로 앞에 닿아있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이원은 무심코 흩어지는 숨결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막 감기려는 눈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원은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뒤늦게 자신이 키스하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황급히 일어났다.

그런 자신을 들키느니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말겠다. 이원은 생각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겨 달아났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은 카이사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전까지 자신과 마주 보며 누워있던 이원은 이제 거기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다시 눈을 감고 이원이 누워있던 자리로 몸을 웅크렸다. 왠지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다.

카이사르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여전히 비어있는 빈자리에 아쉬움을 느끼는데, 그의 위에서 이원이 말했다.

"그만 일어나."

그 다음 말은 카이사르로 하여금 잠을 번쩍 깨게 만들었다.

"밥 먹어."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자 이원이 트레이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이원이 말을 이었다.

"주방은 추우니까 여기서 먹어, 자."

이원이 내미는 트레이를 받는 대신 카이사르가 물었다.

"식사, 네가 만든 건가?"

이원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네가 아니라면 내가 했겠지?"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뭘 만들었는데?"

이원이 말했다.

"샌드위치."

카이사르의 안색이 변했다. 이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냉장고에 고기가 있기에 그것도 넣었어."

말이 없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이 덧붙였다.

"가득."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 없이 이원을 바라보기만 하는 카이사르의 시선에, 이원은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이대로 1분만 더 있으면 카이사르가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이원은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통조림을 데웠어."

"후우."

접시에 담긴 수프를 본 순간 카이사르는 그만 소리내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원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카이사르는 순간 방심해 너무나 다행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심장이 멎을 뻔했군."

카이사르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농담이었는데."

그러자 카이사르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둬, 내가 싫어하는 걸 보면서 좋아하는 녀석은 하나로 족해."

무슨 말이냐는 듯 이원이 눈을 깜박였다. 카이사르는 별다른 설명 없이 덧붙였다.

"곧 만나게 될 거야."

알쏭달쏭한 말을 한 카이사르가 시선을 돌렸다. 이원이 바닥에 내려놓은 트레이로 그가 손을 뻗으려 하자, 이원은 먼저 스푼을 들어 가볍게 수프를 저었다.

"자, 아."

수프를 떠서 내민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너무나 차가운 시선으로 이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먹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이원은 눈을 깜박이며 뭐가 잘못 됐냐는 듯이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는 증명이라도 하듯 이원의 손에서 스푼을 빼앗아 직접 수프를 떠먹었다. 이원은 뒤늦게 민망해져 말했다.

"다쳤으니까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보란듯이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이원은 아무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빵 가져올게."

불필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원은 주방으로 향했다. 트레이 위에 남은 음식을 올려놓으며, 이원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 

혼자 힘으로 식사를 하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느껴졌던 묘한 기분의 정체를 그는 왠지 알고 싶지 않아졌다.

마주 앉은 둘의 앞에 놓인 것은 수프와 햄과 빵이 전부였다. 그나마 수프는 통조림이었고 빵은 얼려져 있던 것이다. 근근이 장작이 타고 있는 거실의 벽난로 앞에서, 이원과 카이사르는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원은 오랜만에 다리가 저리는 경험을 했다. 흘긋 카이사르 쪽을 보자 그도 역시 곤란한 듯 몇 번이나 자세를 고치고 있었다.

"다음에는 춥더라도 식탁에서 먹을까?"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제로군. 인생은 역시 선택인가."

다른 때라면 고작 식사를 어디서 먹느냐 정도로 인생 운운 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원 또한 공감했다. 

변변찮은 식사를 하면서 종일 몸을 이리저리 굴릴 것이가, 자세는 편한 대신 몸이 꽁꽁 얼어 부들부들 떨며 변변찮은 식사를 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몸을 혹사하는 건 마찬가지군."

카이사르가 씁쓸하게 말하자 이원이 입을 열었다.

"테이블을 옮기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사이를 두었다가 이원이 덧붙였다.

"저걸 여기 놓으면 우린 테이블 위에서 자야 해."

그 말에 카이사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원은 내심 신기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왜 이 남자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는 건지 모르겠다, 라고 웃음이 헤픈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여전히 의아해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곤란한 걸, 떨어져서 부상을 입으면 큰일이야."

거기엔 이원 역시 동조했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며 수프를 휘저었던 이원이 말했다.

"그나마 래오니드 씨가 단념하고 떠나서 다행이야, 이 상황에서 쫓기기까지 했다면 정말 살 수 없었을 테니."

이원은 문득 생각했다.

"도대체 왜 래오니드 씨를 고용해서 우릴 죽이려고 한 거지? 짐작 가는 거 없어?"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용의자는 즈다노프지만 카이사르는 주저없이 부정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짐작하는 범인은 누굴까?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처형 방식은 로모노소프 쪽이야."

이원은 들은 적이 있는 거대 마피아조직의 이름을 떠올렸다. 카이사르의 조직과는 적대 관계의 거대 조직. 서로의 반목이 일상인 탓에 목숨의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던.

카이사르 또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근원이 된 것은 아마도... 언젠가 읽었던 신문의 기사를 떠올리던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하지만 늙은 사자가 그렇게 눈에 띄게 먹이를 놔둘 것 같진 않아."

"늙은 사자?"

알 수 없는 말에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했다.

"로모노소프의 현재 주인이야. 얼마 전에 병으로 쓰러졌다고 하던데..."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이 귀환한 시기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 무모하지."

"그럼?"

카이사르는 곧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조직 내의 반역자."

뜻밖의 말에 이원이 놀란 눈을 뜨자 카이사르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베르다예프를 건드리면 조직 내의 반역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지."

혼잣말처럼 이어지는 카이사르의 음성을 이원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베르다예프를 건드리다니, 무슨 말이야? 그게. 나한테는 그냥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지고 싶다고..."

자신이 알던 사실을 되짚자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했다.

"재산 소유의 일이라면 조직의 변호사에게 의뢰했겠지. 조직의 변호사가 아닌 너에게 의뢰한 건 정보가 내부에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이원은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일부러 조직 내 반역자를 솎아내기 위해 이 일을 벌인 거란 말인가? 증거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완전히 뒤흔들어놓고서, 결국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서서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원의 머릿속이 불현듯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처음부터 속았다. 이원은 어렵게 사실을 인식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건 증거를 핑계 삼아 덫을 놓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이원은 가는 눈으로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군, 재판에 유리한 정보 어쩌고 했던 건 다 헛소리고 정말은 덫을 놓아 적의 정체를 알아내려던 거였어. 역시, 네가 날 생각해서 여기까지 올 리가 없지."

그것도 모르고 이원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카이사르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스스로에 대해서 자기혐오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원은 시니컬하게 말했다.

"넌 끝까지 날 이용하는군."

카이사르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용이 아니라 거래였어."

"거래라고?"

어이가 없어 카이사르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만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너 역시 이 일로 얻는 게 있잖아? 넌 증거를 원했고 난 조직 내의 반대세력을 알아내려고 한 것뿐이야. 목적을 전부 말한 건 아니지만 서로 합의한 사실이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듯이 태연하게 근거를 제시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이원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론상으로는 맞았다. 처음부터 이원의 목적은 분명했다. 지금 와서 그것이 바뀔 이유가 없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고 있었지만 감정은 달랐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지?"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랬다면 넌 이 일을 맡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랬다. 이원은 이 남자가 자신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함정을 팠다는 사실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이건 너나 나나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공통의 일이었을 뿐이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건..."

"알았어."

이원이 카이사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내가 나이프로 네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이원은 햄을 썰던 나이프를 보란 듯이 고쳐 쥐었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원은 묵묵히 다시 식사를 계속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저 남자는 진실로 나와 뇌 구조가 다르다. 이원은 생각했다. 저 남자는 또 다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시하고 있는 거겠지.

이원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왜 나는 저런 남자에게 상처를 받는 건가.

멀건 수프를 내려다보며 그는 더 이상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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