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4)
  • 하아, 하아.

    이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멈춰 섰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보자 창백한 얼굴의 카이사르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눈이 굳어 얼음으로 만들어진 바위와 제멋대로 자란 침엽수가 근근이 서있을 뿐인 빈약한 산은 몸을 숨길 곳이 그다지 없었다.

    카이사르는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분명 그는 뒤를 쫓아올 것이다. 방금전의 사격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게 틀림없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표적을 궁지에 몰아 느긋하게 사냥을 하려는 거겠지. 

    위험한 녀석이군.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이건 상당한 수준의 저격수다.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거겠지. 노리는 건 나인가, 아니면...

    순간 감각보다 먼저 본능이 움직였다. 카이사르는 이원을 끌어안으며 동시에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희미하게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카이사르는 급하게 뛰어가는 맥박을 조용히 가라앉히며 글록을 고쳐 쥐었다.

    이원은 숨을 죽인 채 급히 생각을 떠올렸다. 총을 쏜 건 래오니드 씨일까? 역시 그렇겠지. 노리는 게 뭐야? 쉬스킨 씨만이 아니었나? 아니면 그저 위협일 뿐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원은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카이사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두려움도, 떨림도, 초조함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의 무기가 되어버린 것처럼 무심한 그의 얼굴에 이원은 왠지 거리감을 느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카이사르는 너무나 담담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이. 한동안 그대로 멈춰있던 카이사르가 총을 내렸다. 놀라 눈을 깜박였던 이원은 문득 멀리서 슥 지나가는 고양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제야 그는 소리의 정체가 고양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그대로 멈춰있던 카이사르가 갑자기 이원을 밀어냈다. 이원은 카이사르가 코트를 벗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날은 금세 어두워져 바람까지 심해지는데, 카이사르는 얇은 슈트를 드러낸 채 코트를 벗어 내밀었다.

    무슨 짓이야?

    이원은 입모양으로 소리쳤다. 카이사르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던 이원은 그러나 또다시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슈트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다쳤어?"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이원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나중에 얘기해.

    입모양으로 대신 말한 카이사르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원은 더이상 묻지 못한 채 그저 놀란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카이사르가 곧 손을 떼었지만 이원은 입을 다문 채였다.

    여기 있어.

    소리없이 말한 카이사르는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바위와 나무를 방패로 삼아 자리를 이동했다. 카이사르가 코트를 벗은 이유를 이원은 곧 알 수 있었다. 두텁게 몸을 감싸던 코트를 벗자 그의 몸은 너무나 가볍게 자리를 옮겨 다녔다.

    이원은 카이사르가 시키는 대로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저대로라면 스나이퍼보다 저체온증이 먼저 올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이원은 알 수 없었다.

    벌써 그의 입술은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신경은 카이사르가 입은 부상으로 집중되었다. 달아나기 전에 다친 건가? 그런 거겠지, 아마. 얼마나 다친 거지? 피가 저렇게 많이 났다면 상당한 부상일 텐데. 출혀은 어깨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증거로 카이사르는 자신이 사용하는 손이 아닌 다른 쪽 손에 글록을 쥐고 있었다. 만약에 혹시 동맥을 다쳤다면...

    불길한 상상에 급히 생각을 멈췄을 때였다. 카이사르의 시선이 고정되고, 그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사르가 글록의 총구를 한 쪽으로 고정시켰다. 

    이원은 순간 놀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향했다. 음습한 숲 저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똑바로 총구를 겨눈 채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 조각처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잿빛 하늘에 몰려든 구름이 심상찮은 소리를 내더니 허연 가루를 하나씩 떨어뜨렸다. 

    꽃잎처럼 흩날려온 눈송이가 카이사르의 뺨에 닿았을 때, 곧바로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공기를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급히 몸을 숙였던 이원은 곧이어 터지는 연속 된 총성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총을 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쏘고 있는 건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건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숲 전체에 진동하는 요란한 총성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이원이 고개를 들자 바로 코앞까지 온 카이사르가 갑자기 그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갔다. 서둘러 일어나며 이원은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이사르가 벗어둔 코트를 움켜쥐었다. 

    어느새 짙어진 눈발이 안개처럼 숲을 에워쌌다.

    바닥에는 덜 마른 핏방울이 눈과 섞여 떨어져 있었다. 래오니드는 물끄러미 그것을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듣던 대로군, 차르.

    내심 그는 감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행까지 끌고 몸을 숨기다니, 듣던대로 아버지인 사샤는 상당히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래오니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수당 외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몸이 근질근질했다. 저 남자의 심장을 명중시키면 얼마나 흥분될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래오니드는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큰일났다.

    이원은 창백한 얼굴로 생각했다. 카이사르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까까지도 멀쩡하게 유지하던 숨결이 이제 더 이상은 한계라는 듯 가쁘게 부딪쳐왔다. 

    스나이퍼는 그들을 쫓고 있다. 훈련이나 예감이 없이도 이원은 알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출혈은 생각보다 더 심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기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총을 쥐고 있는 피에 젖은 손은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카이사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는데, 카이사르가 이원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괜찮아. 나뭇잎 소리야."

    작은 속삭임대로 잠시 뒤 같은 소리가 들리고, 이원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딪쳐 소리를 내는 메마른 나뭇잎을 확인했다. 카이사르는 눈을 감은 채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서 시선을 내리자 글록을 든 손이 보였다. 평소 사용하는 손이 아닌 다른 손에 총을 쥐고도 그는 전혀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이원은 뒤늦게 자신이 가져온 카이사르의 코트를 그의 몸에 얹어주었다. 불현듯 느껴진 온기에 눈을 떴던 카이사르는 곧 농담을 했다.

    "잘도 챙겨왔군."

    "네가 절대로 총을 잊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

    약속을 어긴 데 대해 톡 쏘아붙이자 카이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카이사르의 몸은 싸늘하게 식은 채였다. 이원은 이제 스나이퍼와 저체온증에 더해 카이사르의 출혈까지 걱정이 되었다.

    문득 카이사르가 짧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카이사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어."

    카이사르는 힘겹게 손을 들어 이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까 안심해."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처럼 타인의 말을 믿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원은 그의 언어, 행동, 그의 모든 것에서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을까. 이원은 생각했다. 수시로 목숨을 위협당하고 유괴에 대비해 서바이벌 훈련을 받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지금, 그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이원은 알 수 없었다.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것도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던 이원은 문득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급히 카이사르의 어깨를 흔들어본 이원은 그러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카이사르!"

    무심코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원은 사색이 되어 그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미안, 죽어줘야 겠어.

    정말 죄스런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너 같은 아이를 죽이려니 내 마음도 편하진 않지만 할수 없지.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눈 여자를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이라든가 안타까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또인가,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이런 일들은 지겹도록 겪었다. 산에 내버려지고, 칼에 찔리고, 먹을 것도 없이 방치되기도 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써보라고 했던 학교의 선생님이 생각났다. 언젠가 죽게 될 겁니다. 라고 썼을 때, 그녀는 난감해하며 부모님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녀가 정말로 미안했는지 어쨌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그녀는 카이사르의 머리에 총을 겨눴고, 그는 익히 알고 있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뒷짐을 쥔 손을 허리에 넣어 나이프를 꺼냈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고 카이사르는 동시에 칼을 던졌다. 여자의 심장에 정확히 칼이 박히고, 카이사르 또한 팔을 관통 당했다.

    하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였다. 그는 금새 피를 흥건히 적시며 쓰러져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가정교사였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자신을 연거푸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간신히 의식을 되돌렸다. 이런, 기절을 하다니. 카이사르는 스스로에게 혀를 차고 싶어졌다. 고작 이 정도로 정신을 잃다니 수치스러울 정도다.

    카이사르가 눈을 뜨자 사색이 되어있던 이원의 얼굴이 그나마 좀 나아졌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이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록의 탄창을 확인했다. 남은 탄알은 단 하나였다. 상황이 위기인 것은 확실했다. 짧게 숨을 내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총을 쏘면 바로 뛰어."

    낮은 소리로 명령한 카이사르가 속삭였다.

    "강하게 살아남아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낮은 소리로 읊조린 카이사르가 갑자기 안고 있던 이원을 밀쳐 내리누르며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이원은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데다 눈과 안개로 뒤덮인 숲은 상대의 형체를 간신히 보여주는 게 전부였다. 카이사르는 똑바로 목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ㅡ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요란한 총성이 울리고, 곧이어 나무와 등성에 수북이 쌓여있던 눈이 남자와 카이사르 사이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이원은 곧바로 몸을 날려 카이사르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침 로비를 청소 하고 있던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장신의 커다란 그림자가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그가 자신의 여관에 묵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새하얀 눈을 뒤집어쓴 은빛의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원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늦었다. 카이사르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본 부인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원은 황급히 카이사르를 떠받쳤지만 그만 주춤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에요!?"

    뒤늦게 사색이 된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원은 헐떡이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산책을 하다가 좀... 다쳐서, 혹시, 의사를 불러주시겠습니까?"

    "어머나, 네. 그래야죠! 여보, 보리스 선생님한테 당장 연락을 해요!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이리 와요, 얼른! 어서 지혈부터..."

    부인과 주인이 서둘러 그들을 부축했다. 이원은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는 카이사르를 초조해하며 바라보았다.

    의사는 그리 오래지 않아 여관을 방문했다. 왕진가방을 들고 눈길을 뚫고 온 그는 문을 열자마자 다급하게 환자를 찾았다.

    "산책을 하다 다쳤대요. 피 좀 봐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사색이 되어 급히 떠들어대는 부인의 말에, 의사는 서둘러 상처를 확인했다. 그가 움칠 놀라는 것을 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 상처가 심각한가요?"

    다시금 부인이 바쁘게 물었다. 잠시 상처를 내려다보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일행만 남으시고 다른 분들은 잠깐 나가 계시겠습니까? 치료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군요."

    의사의 엄격한 말에 부인은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주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의사는 말이 없어졌다. 이원은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핏물이 괸 상처에 소독약을 문지른 의사는 주의깊게 상처의 깊이를 확인했다. 출혈이 계속되는 위치를 깨끗한 솜으로 꾹 누르며 의사가 입을 열었다.

    "산책을 다녀오셨다고요."

    왠지 신문하는 듯한 말투에 이원은 내심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조금..."

    의사는 솜을 갈아 다시 상처를 누르며 말했다.

    "산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마을 뒤편에 있는 등성이에는 저도 자주 올라가는 편입니다."

    조용한 음성에 이원은 멈칫했다. 의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오늘은 꽤 여러 가지 소리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사람들이 적잖이 불안해 했습니다. 게다가 마을에서도 총성이 들렸었고..."

    이원은 심장이 멎을 듯이 놀랐다.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원에게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이원은 의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들의 짓이건 그렇지 않건 전 상관없습니다. 다만 외지인들이 마을을 어지럽히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다시 솜을 떼어낸 의사가 출혈 상태를 확인한 후 새 솜으로 상처를 눌렀다.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이원은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둘러준 의사가 짐을 정리하며 말했다.

    "총탄은 깨끗이 관통한 걸로 보입니다. 응급조치는 끝났으니 이분이 깨시는 대로 빨리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

    의사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긴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분란에 휩쓸리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군요."

    경고와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의사는 방에서 나갔다. 이원은 곤란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깨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에 불길이 이는 것 같다. 얼마만이지, 이런 감각. 카이사르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래, 총에 맞았었지. 오랜만이군. 묘한 향수마저 느끼며 그는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뭔가가 비쳐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던 카이사르가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초점이 맞춰지며 눈앞에 있는 동물의 형체가 드러났다.

    커다란 눈이 끔벅 감겼다 떠졌다. 이마 위에 얹힌 고수머리와 작은 입술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시야에 비쳐들었다. 말똥말똥 카이사르를 바라보는 동그란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자, 카이사르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순간 아이가 카이사르의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눈 떴어, 눈 떴어! 아저씨, 엄마아~"

    요란하게 달려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카이사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 정신이 멍했다. 이것 또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발열이었다.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는데, 급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카이사르는 곧 문을 열고 나타난 낯익은 얼굴을 보고 곧 안도했다. 이원은 창백한 얼굴로 서둘러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들었어? 좀 어때?"

    이원이 카이사르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아직 제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몽롱한 의식을 열 때문으로 간주했다.

    "괜찮아."

    생각지 못하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자 이원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원이 입을 열었다.

    "폭설이 온대, 당신 말대로."

    그제야 카이사르는 창밖을 보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온통 하얀 눈에 뒤덮인 깜깜한 밤풍경이 전부였다. 이원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알아봈는데, 비행기는 이미 결항됐어. 당신 일정대로 돌아가는 건 틀린 모양이야."

    이 상태로라면 배도 비행기도 모두 가망이 없다. 카이사르는 됐다고 말하려 했으나 곧이어 들려온 요란한 발소리에 곧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문을 열심히 밀고 들어온 것은 여관 주인의 아이였다.

    아이의 작은 손에는 물을 가득 채운 물컵이 들려 있었다.

    "자, 물."

    아이는 한손으로 컵을 내밀며 헤실 웃었다. 이원은 내심 긴장해 카이사르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런 상태로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카이사르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힘겹게 팔을 짚는 그의 모습에, 이원이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까?"

    카이사르는 대답 대신 혼자 일어나 앉았다. 이원은 손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가 아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좁은 침대 밖에 서있는 아이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내 컵을 든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물끄러미 아이를 보던 카이사르가 손을 뻗었다. 내심 긴장해 바라보는 이원의 앞에서 카이사르는 조용히 물컵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이원은 안도하는 한편 놀라워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꽤 목이 탔던 모양인지 한 컵의 물을 전부 마신 카이사르가 아이에게 빈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기계처럼 흘러나온 한 마디에, 아이는 반색을 하며 환한 얼굴이 되었다. 지켜보던 이원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이원이 말문을 잃고 있는데, 아이가 말했다.

    "아저씨는 천사 같아."

    놀란 것은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반짝반짝해, 머리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너무너무 예뻐. 교회에서 본 천사그림이랑 똑같아."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재촉하듯 컵을 내민 것이 전부였다.카이사르가 들고 있는 컵을 받아들려 아이가 기쁘게 손을 뻗었을 때였다.

    문득 거센 바람소리 너머로 묘한 소리가 섞여들었다. 이원이 멈칫한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져 날아가며 카이사르가 들고 있던 물컵이 산산조각 났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에게 컵을 주려던 카이사르의 손에는 순식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됐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가고, 아이는 놀란 눈으로 멍하니 손을 내밀고 있었다.

    모든 순간이 그야말로 몇 초도 되지 않아서 지나갔다. 하지만 이원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천천히 인지되었다. 날아오르는 유리의 파편과, 놀란 눈을 크게 뜨는 아이와, 카이사르의 손안에서 산산조각이 난 컵이 느린 화면처럼 서서히 이원의 눈앞을 스쳐갔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 알고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원은 넋을 잃고 서서 카이사르의 빈손이 아이의 머리를 끌어당기고 그가 전신으로 아이를 감싸 안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아이의 작은 몸은 카이사르의 팔 안에 감춰지고, 카이사르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이원에게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엎드려, 당장!"

    이원은 뒤늦게 급히 몸을 웅크려 구석으로 피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잇따라 총성이 울려퍼지고, 벽 여기저기에 구멍이 났다. 마치 박자를 맞추듯 규칙적으로 울려퍼진 총소리가 이윽고 멎었다. 

    이원은 엎드린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것은 바람소리뿐이었다.

    끝난 건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원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총격이 끝난 것을 확인하듯 깨진 창너머로 어두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아이는 그의 품안에 꽉 안겨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이원은 보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자신보다 카이사르 쪽일 것이다. 그가 아이를 안아 보호하다니.

    카이사르는 싱숭생숭한 듯 묘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넋이 나간듯 눈만 깜박이던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뒤늦게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큰소리로 우는 아이를, 카이사르는 어색하게 안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원은 다른 이유로 마음이 복잡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고 해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이를 감싸지도, 카이사르를 지키지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었던 게 전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무력할 수 있을까.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데,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주인 내외가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카탸!"

    "이게 웬일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온 주인 내외와 손님들이 혼란에 빠져 아우성을 쳤다. 카이샤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없이 주인 내외에게 아이를 건네주었다. 

    잔뜩 눈물로 얼룩진 아이의 얼굴을 본 부인이 놀라 빼앗다시피 아이를 낚아챘다. 곧바로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난 그녀는 방안을 보더니 아예 숨을 멈춰버렸다.

    온통 난장판이 된 실내의 모습에, 주인 내외는 물론 다른 투숙객들까지 기웃거리며 심상찮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총소리가 났었다며..."

    "누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하필 이런 때..."

    수군거리는 말들은 모두가 이원과 카이사르를 향한 거이었다. 주인 내외를 포함해 모두는 더 이상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은 역력히 반감과 의심을 품고 있었다. 주인이 입을 여는 순간 이원은 그가 할 말을 눈치 챘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시겠습니까? 방이 이지경이라... 숙박료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주인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그들을 쫓아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원은 당혹해하며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자신은 둘째치고 카이사르는 현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다.

    "저, 죄송하지만 눈이 멎을 때까지, 아니 날이 밝을 때까지라도..."

    이원은 말을 하다 곧 그만 두었다. 모두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어낼 듯한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이원은 승복했다. 

    혹시 스나이퍼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소 불안해졌지만 카이사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그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슈트를 찾아 걸쳤다.

    이원이 꺼내준 코트를 팔에 걸친 카이사르가 돌아서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났다. 좌우로 깨끗하게 갈라진 사람들의 모습에 이원은 내심 씁쓸해졌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뚜벅.

    카이사르가 발을 옮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원은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너무나 무덤덤했다. 이런 일은 일상이라는 듯이. 자신을 경외하든, 두려워하든, 혐오하든, 모두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순간 이원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철저한 고독을 보고 말았다. 그는 지독히도 혼자였다, 언제나.

    카이사르가 주인 내외의 앞을 스쳐가자, 갑자기 아이가 카이사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얘가, 왜 이래."

    부인이 급히 말렸지만 아이는 듣지 않았다. 안긴 채로 마구 버둥거리는 바람에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내려놓았다. 땅에 발이 닿자마자 아이는 카이사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고마워, 아저씨."

    아이가 맑은 눈으로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지켜보았다.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었다.

    큰 손이 아이의 고수머리를 무심히 헝클어뜨리더니 곧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원은 눈을 떼고 주인 내외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원이 사과를 하자 주인 내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주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쏟아지는 눈보라 속으로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딛은 카이사르를 쫓아 여관을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자 눈앞은 한 치도 안 보일 정도로 새하얀 눈과 새까만 어둠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카이사르를 붙잡은 이원이 말했다.

    "위험하잖아, 주변을 살펴야지."

    "어차피 이 상태에선 신이 내린 저격수라고 해도 쏠 수 없어."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했다.

    "게다가 정말 쏠 생각이었으면 아까 끝냈을 거야."

    "그럼 왜..."

    당황해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짧게 웃었다.

    "자신은 무사하다고 어필하고 싶었거나, 나름의 보복이었겠지."

    사정이야 어떻든 저격수가 더 이상 노리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어차피 총을 쏘지 않아도 얼어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혹독한 추위에 금세 얼굴이 얼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이원이 말했다.

    "갈 데 있어?"

    카이사르는 묵묵히 이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책도 없이 나오면 어떡해, 그랬으면 억지로라도 버텼어야지."

    "너는?"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는 듯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는 말에 이원은 당당하게 말했다.

    "난 어떤 경우라도 대책 없이 움직이지 않아."

    카이사르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것이 전부였다.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이원은 자신있게 몸을 돌렸다. 쏟아지는 눈은 먼지처럼 흩날려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몇 걸음 앞서가던 이원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말도,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걸었다. 혼자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원은 다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눈앞에 선 이원의 모습을, 카이사르는 의아한 듯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이원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원의 모습에 카이사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원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곧 그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 속에서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어느때보다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이원은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이원은 간신히 집을 찾아냈다. 이원과 함께 집앞에 선 카이사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여긴..."

    "맞아."

    이원이 말했다.

    "쉬스킨 씨의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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