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4)
  • 쉬스킨은 커튼 뒤에 숨어 빠르게 걸어가는 이원과 뒤따라 걸음을 옮기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하지.

    저절로 온몸이 떨리고 등뒤로 식은땀이 흘렸다. 손은 계속 신경질적으로 카디건의 단추를 만져대고 있었다.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달아났는데 기어이 날 찾아내다니.

    머릿속은 이원이 남기고 간 온갖 말들이 떠돌았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역시 베르다예프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누가, 왜 죽인 걸까. 로모노소프의 비호를 받고 있던 베르다예프가 비리에 연루되어 은밀히 수사를 받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여기까지 달아난 게 아닌가. 그런데 그가 죽었다니.

    시장이 죽었으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을 굴리던 쉬스킨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일이 귀찮아지게 되면 조직에서는 바로 손을 쓸 게 분명했다. 어쩌면 베르다예프도 로모노소프 쪽에서 죽인 건지도 모른다. 비리에 대한 수사로 조직을 위태롭게 만들걸 염려해서.

    더 이상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쉬스킨은 누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순간 방금 전 자신을 위협했던 남자가 떠올랐다.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뒤이어 생각난 것은 변호사라고 했던 또 다른 남자였다. 쉬스킨은 급히 생각을 굴렸다. 아직 기회는 있는 것이다. 모두 얘기해 버리면 그 남자가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을까?

    마음을 굳힌 쉬스킨은 이원이 테이블에 놓고 간 명함을 가지러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때.

    이마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놀란 쉬스킨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떴다. 작은 전등이 켜져있는 것이 전부인 침침한 거실에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또 한 명 있었다.

    쉬스킨은 사색이 되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들어오는 소리는커녕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설마, 하고 쉬스킨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 당신, 누, 누구."

    어스름 속에서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기괴하게도 남자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심장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쉬스킨."

    남자는 총구를 쉬스킨의 이마에 꾹 눌렀다. 쉬스킨은 입을 크게 벌렸으나 공포에 질린 그의 입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들이 보낸 스나이퍼인가?!

    "서, 설마, 로, 로..."

    간신히 더듬거린 말에 남자가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잘 가게."

    차가운 총구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공기가 빠지는 듯한 허무한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정적이 찾아왔다.

    간신히 여관으로 돌아온 이원은 기다리고 있던 부인에게서 직접 방을 안내받았다. 어서 따뜻한 침대에서 몸을 녹이고 싶었다. 우선 샤워부터 해야지. 그는 생각하며 아직 한기가 남아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들어오세요. 작지만 좋은 방이에요."

    부인은 직접 그들을 방으로 안내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좋다는 말은 빼고.

    이원은 곰팡내가 나는 방 앞에 서서 말없이 안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균열이 간 벽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고, 구석에는 까맣게 곰팡이가 앉았으며, 벽 곳곳에는 낙서가 되어있는 데다 바닥에는 먼지까지 뽀얗게 앉아있었다.

    다른 건 다 넘어간다 해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침대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침대를 바라보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여관이라고 해도 이층침대는 심하지 않은가.

    "저, 부인."

    호호 웃으며 돌아서는 그녀를 불러세운 이원이 말했다.

    "정말 이 방뿐입니까? 다른 방은 없는 겁니까?"

    이원의 필사적인 물음에 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남은 방은 이것뿐이에요. 사실 별로 사용하는 방은 아닌데 지금 워낙 손님이 많다보니..."

    이원은 절망스러운 기분 속에서도 단 하나 긍정적인 면을 간신히 찾아냈다. 얼어 죽진 않겠구나.

    "숙박료는 할인을 해드릴게요."

    친절하게 덧붙인 그녀가 돌아서서 가버리고, 그는 허탈한 시선을 다시 방으로 돌렸다.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던 이원은 문득 카이사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우뚝 선 채 방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런 방은 처음 봤겠지,하고 생각하며 이원은 입을 열었다.

    "이런 방에서 지내는 건 처음이지?"

    아마 보는 것도 처음이러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지만 예상은 깨끗이 빗나갔다.

    "아니."

    무심하고도 짧은 대답에 이원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에도 지낸 적이 있다고? 언제?"

    잠시 기억을 더듬던 카이사르가 대답했다.

    "네 살 때랑 일곱 살 때, 그리고 열두 살 때."

    묘한 시간차였다. 이원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았어?"

    지나치게 사적인 얘기를 물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별다른반응 없이 아니, 하고 말했다.

    "유괴 당했었거든."

    뜻밖의 말에 이원은 놀라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세 번이나?"

    당황해 다시 묻자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선뜻 대답했다.

    "두 번은 유괴, 한 번은 서바이벌."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만약의 경우 잡혀가서 감금을 당하거나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하니까 배웠어. 덕분에 열두 살 때는 쉽게 빠져나왔지."

    이원은 믿을 수 없는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카이사르의 존재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전혀 다른 세계의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감나게 느껴보는 것은 처음인 듯 했다.

    "유괴라니, 돈 때문에?"

    이원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묻고 말았지만, 카이사르는 전혀 숨기거나 꺼림칙해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아니, 로모노소프는 수시로 나를 죽이고 싶어 했었어. 그 때는 실패했지만."

    카이사르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덧붙였다.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르지."

    이원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저 물끄러미 카이사르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마침 방안의 전화기가 울렸다. 이원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방안으로 들어갔다.

    "식사 하실 건가요?"

    부인의 경쾌한 음성에 이원은 적당히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본 그는 곧 체념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이원의 입에서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위, 아래?"

    이원이 돌아보며 물은 말에 카이사르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난 깔리는 취미는 없는데."

    "침대를 물은거야."

    이원이 으르렁거리며 내뱉자 카이사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난 누구에게도 위를 내준 적이 없어."

    당장 뛰어올라가 위를 점령해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이원은 아래쪽 침대에 털썩 앉았다. 벌써부터 밤을 보낼 일이 암담해졌다. 창밖에서는 요란한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자리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이원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바뀐 잠자리에 대한 낯섦과 침대의 불편함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소리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창문소리만큼이나 그는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낡은 침대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카이사르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듯 그는 가끔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들리는 삐걱 소리에, 이원은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상대방의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쓰이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스산한 방안에서 이원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다. 슬쩍 위치를 바꿨다가 어김없이 들려온 삐걱소리에, 그는 급히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카이사르가몸을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도 이원은 그의 움직임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침대에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원은 실제로 그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위와 아래로 공간이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솜털 하나까지 카이사르의 존재를 실감하며 바싹 곤두서 있었다.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창문이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이원은 이따금 씩 들리는 침대의 삐걱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그는 또다시 들린 나무의 비명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누워있는데,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누워있는 이원의 위에서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와는 다른 소리였다. 그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원은 소리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삐걱이는 소리가 달라졌다. 카이사르가 침대의 사다리를 내려오는 것이다.

    이원은 황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카이사르가 바닥에 발을 딛고, 삐걱이던 소리가 멈췄다. 

    그가 이원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안간힘을 써 숨을 죽였다. 긴장한 호흡을 자는 척 가라앉히는 것은 꽤 힘이 들었다. 이원은 이불 속에서 주먹을 꼭 쥔 채 작게 숨을 새근거렸다.

    한동안 그렇게 움직이지 않던 카이사르가 몸을 돌렸다. 그가 한 걸음씩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가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원에게 클로짓을 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가만히 실눈을 떴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뿌연 빛으로 이원은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등을 돌리고 코트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깜박였다. 

    잠시 뒤 돌아선 카이사르의 손에는 그가 사용하는 글록이 들려 있었다.

    결국엔 총도 가져왔잖아.

    이원은 그가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벌떡 일어나 따질 수도 없었다. 그냥 아까 낀 척 할걸.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누르는데, 카이사르가 걸음을 옮겼다. 이원은 황급히 눈을 감고 다시 자는 척을 했다.

    뭘 하려는 걸까. 초조함과 두려움에 자꾸만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원이 몸을 웅크린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그의 곁을 스쳐갔다. 다시 가만히 실눈을 뜨자 창틀에 걸터앉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연신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창이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원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카이사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손에 글록을 든 채 창밖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뭘 하는 거야...?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깜박였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자 이쪽에서 조바심이 났다. 슬며시 몸을 움직여보려는데, 갑자기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이원은 화들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안간힘을 써 숨결을 가다듬었다. 혹시나 자신의 숨소리가 바람소리보다 크게 들릴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한참동안 그렇게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이원이 살며시 실눈을 떴다. 카이사르는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심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대체 뭘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멋대로 총을 가져오더니 창가에 앉아 밤을 샐 작정인가? 이원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밤새 그 일은 반복되었다. 줄곧 창밖을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이따금 이원의 침대를 돌아보곤 했다. 그럴 때면 이원은 황급히 자는 척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떠보면 그는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이원은 그가 신경쓰여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이원은 그 상태로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후아암."

    이원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눈가에 찔끔고인 눈물을 눈을 깜박여 거둬낸 그는 느린 동작으로 핫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아침식사를 위해 내려온 식당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빈자리를 발견해 자리에 앉은 뒤에도 줄곧 하품이 멈추지 않았다.

    진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지만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이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깜박였다.

    딱.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 그는 황급히 눈을 떴다. 카이사르가 재밌다는 듯이 그를 보고 있었다.

    "자든지 먹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이게 누구때문인데.

    "둘 다 할 수 있어."

    이원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시럽이 든 병을 들려다가 그만 쓰러뜨리고 말았다. 서둘러 병을 일으켰지만 벌써 시럽은 테이블을 타고 바닥을 향해 떨어진 후였다.

    "엇."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무심코 감탄사를 뱉었다. 두어 방울의 시럽이 흘러 이내 그의 바지자락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서둘러 사과하며 고개를 들었던 그는 낯익은 얼굴에 멈칫했다. 전날 자신과 함께 체크인을 했던 남자였다. 이름이....?

    "어제 같이 체크인했던 분이시군요."

    래오니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이름을 기억해낸 이원이 서둘러 말했다.

    "네, 래오니드 씨. 실례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래오니드는 흔쾌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뭐 이 정도로."

    간단히 상황을 넘긴 래오니드가 물었다.

    "그쪽은 성함이?"

    "이원 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래오니드가 말했다.

    "간밤에는 바람이 하도 불어서 창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이원 씨도 수면부족인 것 같군요."

    "네, 불행히도."

    이원은 내심 카이사르를 원망하며 말을 이었다.

    "래오니드 씨는 저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이시는 군요."

    래오니드가 유쾌하게 웃었다.

    "내려오기 전에 이미 한숨 잤죠. 제 옆자리가 비어있죠? 전 커피를 엎질렀답니다."

    "저런, 전 양호한 편이군요."

    이원이 소리내어 웃자 래오니드도 함께 웃었다. 웃지 않는 것은 이원의 다른 쪽 옆에 앉은 카이사르뿐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원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래오니드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전날 자신을 향해 웃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카이사르가 탐색하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는데, 래오니드가 자신의 시럽을 들어보이며 필요하냐는 듯 이원을 보았다. 이원이 선뜩 손을 내밀고, 그는 병을 건네주려 했다.

    "아!"

    그만 이원의 손에 시럽을 흘리고 만 래오니드가 깜짝 놀라 감탄사를 뱉었다. 이원이 별 생각없이 손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그가 이원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실수했군요."

    순간 카이사르의 표정이 돌변했다. 뚫어져라 이원을 잡고 있는 래오니드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이원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저지른 실수인 걸요."

    "이걸로 동점이 되는 겁니까?"

    "제가 곧 다시 1점을 추가할지도 모르죠."

    이원의 농담에 래오니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동안에도 그는 이원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손이군요."

    이원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래오니드가 한 말에 그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은 이원은 물론 카이사르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불쑥 이원의 손을 가져간 래오니드가 입술을 댔다. 순간 카이사르는 돌처럼 굳어졌다. 이원 역시 놀라 그대로 얼어붙자 그는 살짝 혀를 내밀어 손등의 시럽을 핥았다.

    이원은 온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는 이원에게 래오니드는 미소를 지었다.

    "달콤하군요."

    이원의 등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황급히 손을 빼낸 이원이 흘긋 시선을 향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사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래오니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나쁜 예감이 든 이원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사르와 래오니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침이고 뭐고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래오니드 씨, 전 이만..."

    "이원 씨."

    돌아서려는 이원을 불러세운 래오니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바라보는 이원에게, 그가 뭔가를 내밀었다.

    "두고 간 게 있군요."

    이원이 손을 내밀자 래오니드는 그의 손바닥에 물건을 올려 주먹을 쥐어주었다. 래오니드의 가벼운 미소에 이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을 펴보았다. 

    손바닥에 뭔가 둥근 것이 느껴졌다.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 그는 뜻밖의 물건에 의아해졌다.

    단추...?

    고개를 갸우뚱했던 이원이 래오니드를 찾았지만 그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이원은 자신의 것이 아님이 분명한 단추를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끝이 닳아있는 둥근 단추를 유심히 바라보던 이원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식당을 나왔다.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호텔을 나오기 전부터 카이사르는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쾌함의 아우라를 온몸에서 뿜어내며 뒤를 따라오는 카이사르를, 이원은 무시한 채 걸어갔다.

    전날 어둠이 깔린 길을 걸어갈 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감을 느끼며 얼마 뒤 그들은 쉬스킨의 집 앞에 닿았다. 곧바로 현관으로 걸어가 벨을 누른 그는 발소리가 들리길 기다렸지만 실내는 고요했다.

    "쉬스킨 씨, 계십니까? 어제 찾아왔던 변호사입니다."

    목을 빼 소리쳤던 이원은 다시 반응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원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여전했다. 망설이다 문의 손잡이를 돌려본 이원은 그것이 맥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쉬스킨 씨?"

    망설이며 문을 연 이원이 주인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전날의 따뜻한 온기는 간 데 없이 썰렁한 냉기에, 이원의 불길한 기분은 더욱 커졌다. 문득 코끝에 불쾌한 냄새가 스쳤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을 때, 카이사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뜻밖의 말에 이원은 반사적으로 서버렸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좁은 거실은 전날 보았을 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우뚝 멈춰서있는 카이사르의 발치에 길게 흘러내린 핏자국 외에는.

    순간 놀라 핏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던 그는 의자에 앉아있는 쉬스킨을 발견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쉬스킨 씨...!"

    이원이 달려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카이사르가 그를 가로막았다.

    "늦었어."

    "어떻게 알아, 그걸."

    이원의 항의에 카이사르는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뇌의 반이 날아갔는데 살아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방에는 흩어져있는 살점과 알 수 없는 핏조각으로 엉망이었다. 쉬스킨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의자에 묶여 앉아있었다. 

    마치 처형을 당한 듯 그는 총으로 머리를 맞고 숨져 있었다.

    "누가 이런..."

    넋을 잃고 중얼거린 이원의 말에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죽은 시체를 본 적이 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의자에 묶여있는 시체. 그것은 로모노소프 조직 특유의 처형방식이었다. 카이사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졌다.

    늙은 사자가 설마...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원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기다려."

    곧바로 카이사르는 슈트 안에서 글록을 꺼내들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이원을 등뒤로 감추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금세 그는 마피아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로. 온몸의 솜털이 그 때처럼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다. 카이사르는 별다른 설명 없이 한 손에 글록을 든 채 벽에 몸을 붙이고 집안을 살폈다.

    분명히 눈앞에서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원은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안에서 가장 큰 소리는 바로 자신의 숨소리인 것 같았다.

    시선을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쉬스킨의 시체가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가만히 쉬스킨의 코에 손을 대고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목으로 손을 옮겨 맥박을 짚어봤지만 역시나 뛰지 않았다.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카이사르의 말이 맞다. 머리가 반이나 날아갔는데 자신은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허탈한 기분을 느꼈을 때, 그는 문득 시선을 멈췄다. 단정하게 맞물려있는 카디건의 두 번째 단추가 없었다. 순간 이원은 급히 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있던 단추를 꺼냈다.

    귀퉁이가 닳은 단추는 카디건의 다른 단추들과 똑같았다. 주저하며 시선을 옮긴 이원은 정확히 비어있는 단추의 자리를 확인하고 차갑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집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조용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달리 인기척을 내며 카이사르가 걸어왔다.

    "아무도 없어."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카이사르가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이원은 시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들고 있던 단추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듯이 단추를 들여다보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이 입을 열었다.

    "아침에, 레오니드 씨가 준 거야."

    순간 카이사르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이원이 말을 이었다.

    "두고 간 거라면서."

    ㅋ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단추를 돌려주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정말일까? 그 남자가, 정말로..."

    "넌 변호사면서 사람 보는 눈이 없군. 너무 쉽게 사람을 믿는 거 아닌가?"

    가볍게 비꼰 카이사르가 흘긋 시체를 내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전문 스나이퍼의 솜씨야, 제법이군."

    집안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체가 없었다면 쉬스킨이 달아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있었다.

    시체가 되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을 깨물었던 이원이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혹시, 알고 있었어?"

    카이사르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처음? ...프런트에서 만났을 때?"

    아니, 하고 카이사르가 말했다.

    "문에서 마주쳤을 때."

    그 때부터?! 이원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자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상한 점 뿐이었어."

    불현듯 뭔가가 생각난 듯 카이사르가 갑자기 이원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넌..."

    무슨 말을 하나 기다렸지만 카이사르는 말없이 이원을 노려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갑자기 화제를 바꾼 카이사르가 이원의 팔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이원은 겨우 시체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결과가 생기다니, 곧바로 암담한 기분이 밀려왔다.

    왜 그때 여관으로 돌아갔을까? 어떻게든 설득을 했어야 했는데. 낭패감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앞으로 어쩌면 좋은가. 흘긋 이원을 내려다본 카이사르가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본토로 돌아가는 수밖에."

    현관을 나온 카이사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폭설이 오겠어."

    무심코 이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카이사르가 멈칫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이원은 미처 그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갑자기 소리쳤다.

    "비켜!"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먼저 카잇르가 이원을 감싸 안았다. 동시에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사방에서 벽이 깨지고 유리가 날아갔다. 카이사르에게 안겨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만 이원은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상황을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바닥에 총탄이 튀며 딱딱하게 언땅이 얼음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총소리는 계속해서 빠르게 이어져싿. 여기저기서 박살이 나고 파편이 튀어 올랐다. 카이사르는 이원을 꽉 끌어안은 채 그의 몸을 감싸고 꼼짝없이 엎드려 있었다.

    섬뜩한 총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와 이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뛰어."

    잠시 공격이 멈춘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이원은 다짜고짜 그를 일으켜 달리기 시작하는 카이사르에게 이끌려, 다급하게 뒤를 쫓아갔다.

    표적의 반사신경은 상당히 좋았다. 조준에서 벗어나 빠르게 달아나는 목표물들의 모습에, 몸을 숨긴 채 표적을 겨누고 있던 레오니드는 자동소총을 내려놓았다. 그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사용한 총을 가방에 넣고 이번에는 권총을 꺼냈다.

    이번 사냥은 재미있겠군.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얕은 구릉에서 내려가 표적들이 달려간 얕은 산을 향해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