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4)
  • 하아.

    지난 일을 되돌렸던 이원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동행하게 된 이원의 조건은 단 세가지였다.

    첫째, 총은 절대 소지하지 말 것.

    둘째, 부하들은 절대 동행하지 말 것.

    셋째, 절대 마피아처럼 보이지 말 것.

    출발 직전까지 불안했지만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조건을 클리어했다. 염려했던 공항검색대도 보란 듯이 통과하고, 부하들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절대 마피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원은 짙은 선글라스를 쓴 카이사르의 옆얼굴을 흘긋 훔쳐보았다. 사실 무엇보다 쉬운 조건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부하들을 구름처럼 끌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이 남자는 절대 마피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남자의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절대 없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성공한 사업가, 혹은 모델이나 배우, 또는 어떤 소국의 고귀한 혈통으로 보였다.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전형적인 마피아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이원조차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줄곧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생각했다. 이 남자의 얼굴은 죄악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총을 쏘는 주제에 이토록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원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원은 어느새 넋을 잃고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아직 오후인데도 해는 벌써 저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본토보다 빠른 일몰시간에 이원은 움직임을 서둘렀다.

    어떻게든 사인을 해달라며 매달리는 택시기사를 간신히 설득해 금액을 지불한 뒤, 이원은 겨우 마을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는 곧 택시기사의 말을 이해했다.

    거기엔 기껏해야 스무 채도 되지 않을 오래 된 집들이 드문드문 이른 전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집과 집 사이가 넓은 데다 어찌나 마을이 휑한지 옆집에서 비명을 질러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어두운 바다가 완만한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고 마을 뒤쪽에는 얼어붙은 작은 산이 있었다.

    때마침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마을 주민 몇 명이 두 손에 물고기가 든 양동이를 들고 걸어왔다. 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원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로 이원과 카이사르를 훔쳐보며 말없이 그들을 스쳐갔다. 

    마을 대부분의 사람이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섬에서, 외지에서 들어오는 이들은 대게 낚시꾼들뿐이다. 어딜봐도 낚시를 하러 온 것은 아닌 그들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원은 멀어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숙소는 어느 쪽이지?"

    카이사르는 흘긋 한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마을 저쪽에 아담한 간판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숙소로 보이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작은 여관에서 시선을 뗀 이원은 이번엔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화려한 모피코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채 서있는 그의 모습은 이 조그만 시골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원은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돌아섰다. 촬영을 하러 온 거야, 일을 하러 온 거야?

    눈에 띄지 말라고 했건만, 하고 여관문을 여는데, 뒤따라 들어오는 다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원과 비슷한 키에 보통 체격을 가진 다정한 인상의 남자는 두 손과 팔에 가득히 어마어마한 짐을 들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흘긋 그를 내려다보는데, 이원이 문을 열고 비켜섰다. 중절모를 쓴 남자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걸음을 옮긴 이원의 시야에 아담하지만 깨끗한 여관의 로비가 들어왔다. 섬을 찾는 낚시꾼들이 주고객인 여관은 그에 걸맞게 대어를 낚은 손님의 사진과 낚시와 관련된 벽장식들이 가득히 걸려있었다.

    바닥의 얇은 양탄자는 낡았지만 먼지가 거의 없었고, 벽난로에는 타오르는 장작이 수북해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것 같았다. 

    게다가 로비의 한 쪽에는 낚시도구를 팔거나 빌려주는 작은 코너까지 있었다. 작은 공간을 적극 활용해 만든 세심한 내부에, 이원이 내심 감탄했을 때였다.

    "방 하나 주시겠습니까."

    생긴 것만큼이나 편안한 음성으로 남자가 말했다. 입구에서 만난 남자는 프런트에 서서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이원이 걸음을 옮겨 프런트로 항하자 마침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얇은 눈매가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주 미소를 지은 이원은 얼굴을 찌푸리는 카이사르를 뒤로 하고 바로 옆의 빈 프런트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 다른 직원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주인남자가 앞서 온 손님에게 두툼한 숙박장부를 꺼내며 물었다.

    "혼자 묵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놀란 듯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짐들을 훑어보았다.

    "무지 많은 짐이네요. 도대체 뭐가 든 겁니까?"

    한 사람의 짐으로는 믿을 수 없는 가방의 양에 주인이 신기해하며 흘끔거리자 남자가 숙박부를 적으며 대답했다.

    "낚시가 취미라서 도구가 많습니다. 누군 낚시가 그냥 시간이나 때우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낚시에 푹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니까요. 오죽하면 오늘 나오는데 마누라가 낚시하고 자기하고 누굴 택할 거냐고 나한테 화를 내지 뭐겠습니까."

    주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낚시에 빠지면 바로 끝입니다. 이혼을 당해도 어쩔 수 없어요."

    "게다가 장비는 어찌나 비싼지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사도 계속 사고 싶단 말이죠."

    "그래서 또 바가지를 긁히는 겁니다."

    "악순환이죠."

    둘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안에서 안주인이 나오고 직원을 기다리던 이원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너무나 친절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기다리게 해드렸네요. 어서 오세요."

    뒤늦은 인사를 덧붙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수줍어 보이는 미소에 이원은 부드럽게 마주 웃어보였다. 그러자 부인의 미소가 더더욱 커졌다. 부인이 다시 입을 여는데, 마침 옆에서 주인남자가 말했다.

    "아, 네. 래오니드 씨, 됐습니다. 여보, 여기 숙박부."

    기다리던 물건을 옆으로 건네주는 남자의 행동에 부인은 슬쩍 야속한 시선을 던졌다. 곧 빈 공간을 편 그녀가 이원에게 펜을 건네주며 물었다.

    "방은 하나면 될까요?"

    "아뇨, 싱글룸 두 개 부탁합니다."

    이원은 말하며 뒤쪽으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무심코 시선을 향했던 부인은 금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이사르가 로비의 한 복판에 우뚝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어머, 그렇군요. 저 분과 일행이신가요?"

    "...네... 뭐."

    이원이 어색하게 얼버무리자 부인은 어렵게 카이사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번엔 이원을 향해 황홀한 시선을 던졌다.

    "어떡하죠. 지금 방은 하나뿐인데."

    "네?"

    일순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에게로 향한 부인의 따스한 눈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딱 두 개 남아있었는데 저 분이 방금 하나를 차지하셔서... 하지만 다행이네요, 남은 방은 2인용이거든요."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짓는 그녀였지만 이원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방이 하나뿐이라고요? 정말입니까?"

    성급하게 묻는 이원의 말에 부인은 웃는 얼굴로 난처한 듯 눈을 깜박였다.

    "네에... 무척 죄송하지만..."

    이원은 무심코 신음을 뱉어낼 뻔했다. 저 남자하고 같은 방을 쓰라고?!

    "침대는 두 개니까..."

    "죄송하지만 근처에 다른 여관은 없습니까?"

    성급하게 부인의 말을 가로지른 이원에게, 그녀는 금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네, 여관은 저희 집 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이원은 신음을 뱉어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교차해 날아다녔다. 저 남자와 단 둘이? 같은 방? 골몰하는 이원의 뒤에서 카이사르가 말했다

    "난 같은 방이라도 상관없는데."

    이원이 휙 돌아보자 카이사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아니면, 내가 무서운 모양이지?"

    이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그는 다시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방 주십시오."

    "어머, 잘 생각하셨어요."

    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안에서 열쇠를 꺼냈다. 마침 체크인을 마친 남편이 카운터를 돌아 나오며 말했다.

    "래오니드 씨,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짐을 들어드리죠."

    "고맙습니다, 그럼 이걸..."

    많은 가방 중 하나를 건네받은 주인이 먼저 앞장섰다. 뒤따라 남은 가방을 들고 래오니드는 걸음을 옮겼다.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남자를 보고 있었다.

    얇은 카펫이 그의 발소리를 완전히 삼켜버리고, 래오니드는 조용히 카이사르를 스쳐 걸어갔다. 때마침 숙박부를 적던 이원이 말했다.

    "이곳은 가구가 몇 안 되는 것 같던데, 그럼 대부분은 알고 지내시겠네요."

    몇 걸음 가지 않아 엘리베이터 앞에 선 래오니드를 카이사르가 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알죠. 우리 마을은 전부 다 서로 알고 지내요."

    대체 왜 그러느냐는 듯이 부인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 찼다. 이원은 주의 깊게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누굴 찾아왔는데... 혹시 바실리 쉬스킨이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이 주소에 살고 있다고 하던데."

    이원이 건넨 쪽지를 본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글쎄요, 이 집에 사는 분은 이름이 다른데... 혹시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닐까요?"

    그는 조바심내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 사시는 분은 여기 토박이십니까? 혹시 외부에서 오신 분은 아닙니까?"

    부인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3, 4년 전에 이사 왔어요. 사실 마을 사람들하고는 왕래가 거의 없어서 잘 모르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그 분은 항상 혼자 지내거든요."

    순간 이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래오니드가 올라섰다. 주인이 닫힘 버튼을 누르자 그가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래오니드는 그 때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카이사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문이 닫히고, 카이사르는 보았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순간 카이사르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뒤이어 문이 닫히고, 한동안 레오니드가 타고 가버린 엘리베이터를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럼 이 주소는 어디입니까?"

    이원의 물음에 부인은 당황해하는 것 같더니 곧 방향을 알려주었다.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네 번째 빨간 지붕집이에요."

    그녀의 손을 따라 이원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차갑게 굳어진 카이사르의 얼굴이 불현듯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 말없이 딱딱하게 서있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의아해하며 시선을 내렸다.

    카이사르의 발치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손가락을 우물거리며 다른 손으로 긴 모피의 털을 움켜쥐고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이원은 그대로 굳어졌다.

    카이사르가 천천히 손을 쥐고, 곧 단단한 손가락의 뼈가 일어섰다. 그 순간 이원은 보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아이를 노려보는 카이사르의 냉혈한 시선을, 불현듯 지난 일이 되살아나며, 이원은 반사적으로 아이를 떼어내려 했다. 그때 부인이 까르르 웃으며 말을 했다.

    "어머나, 카탸. 뭐하는 거니, 그만 하렴."

    부인은 카운터를 돌아 나와 아이를 타일렀다.

    "자, 카탸. 손님한테 이러면 안 돼. 죄송해요, 얘가 뭘 몰라서."

    부인은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지만 카이사르는 웃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은 부인은 서둘러 아이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작은 몸을 답삭 들어올리자 아이는 갑자기 두 손을 뻗어 코트를 꽉 붙잡더니 그대로 끌려올라갔다. 

    부인은 순간 당황해 아이를 흔들었다.

    "얘가 왜 이래. 카냐, 어서 손 놔라. 착하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아이를 재촉하는 부인이었지만 아이는 모피를 두 손에 꼭 움켜쥔 채 달랑거리며 기어이 버텼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직 뭘 잘 몰라서... 이해해주세요."

    부인이 당황해하며 웃었지만 이원이 보고 있는 것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멀거니 카이사르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순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아이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저 내려다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자면서도 총을 뽇아드는 남자다. 저렇게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주먹을 힘껏 쥔 채 그저 아이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이유가 뭘까?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에, 이원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코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아이가 헤, 웃으며 카이사르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아이를 마주 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전혀웃고 있지 않았다. 순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냉혹한 얼굴에, 아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에~"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주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그 모습을 본 이원이 다급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맙습니다. 일단 선불입니다. 방 안내는 다녀와서 받겠습니다."

    급히 현금을 꺼내 방값을 지불한 그는 곧바로 돌아섰다. 억지로 아이를 떼어내려던 부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원은 벌써 카이사르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코트를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이 똑 떨어지고, 그 뒤로 아이는 계속해서 울어댔다.

    여관을 나오자마자 혹독한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순간 얼어붙은 이원의 뒤에서 카이사르가 말했다.

    "꽤나 적극적인데, 그렇게 단 둘이 있고 싶어?"

    즉시 이원은 잡고 있던 카이사르의 팔을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카이사르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빙긋 웃었을 뿐이었다. 벌써 밖은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곧 완전히 해가 질 것이다. 침침한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았던 카이사르가 이내 불평을 했다.

    "늦었는데 방에서 쉬는 게 낫지 않아?"

    "누구 때문에 나왔는데?!"

    방은 구경도 못하고 뛰쳐 나와버린 이원은 곧바로 톡 쏘아주었다. 하는 수 없지, 어차피 일정도 짧으니까.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모은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바로 뒤를 따라붙은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 남자라고 확신하나?"

    "숨어지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사람은 없어."

    이원은 단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성을 뭘로 바꿨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가짜일 거야. 지금 바로 확인을 해야겠어."

    카이사르는 확신을 가지고 잰걸음을 옮기는 이원의 뒤를 말없이 따라걸었다. 부인이 가르쳐준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른쪽 네 번째 집의 빨간 지붕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울타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찾던 집은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오래 된 흔적이 열력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금이 간 담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자 아담한 불이 켜져 있는 현관이 나왔다.

    이원이 벨을 누르자 잠시 뒤 집안에서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네... 뉘슈?"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온 남자가 이원과 카이사르를 번가아 보았다. 이원은 주의깊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바실리 쉬스킨 씨 맞으십니까?"

    순간 남자가 멈칫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이원은 놓치지 않았다.

    "잘못 찾아왔소, 그런 사람 없소이다."

    쏘듯이 내뱉는 말과 함께 곧바로 닫히는 문을 이원이 재빨리 붙잡았다. 움직이지 않는 문을 덜컥거리며 인상을 쓰는 남자에게, 이원이 입을 열었다.

    "베르다예프 씨가 죽었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이원이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안에서 하는 게 어떨까요?"

    이원의 부드러운 제안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사색이 되어 문을 닫으려 했다. 이원이 곽 잡고 놓지 않는 문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는 남자의 모습에, 갑자기 뒤에서 카이사르가 팔을 뻗었다.

    미처 쉬스킨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곧바로 그의 목을 붙잡은 카이사르가 쉬스킨을 내려다보았다.

    "안에서 얘기하자고."

    "컥, 커컥, 컥."

    "뭐하는 짓이야!"

    이원이 사색이 되어 말렸지만 카이사르는 그의 목을 붙잡은 채 그대로 집안에 밀고 들어갔다. 목을 잡혀 버둥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쉬스킨의 퍼렇게 질린 얼굴에, 당황한 그는 황급히 뒤를 쫓아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집안은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따뜻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위에는 아기자기한 초가 놓여있고, 벽에는 직접 찍은 듯한 마을의 풍경사진이 보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테이블을 지나친 이원이 황급히 물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뒤늦개 사과하는 이원에게 쉬스킨은 사색이 되어 연신 콜록거리며 눈치를 봤다. 두려움에 찬 눈으로 카이사르를 훔쳐보는 그의 시선에, 이원은 짜증스럽게 카이사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알게 뭐냐는 듯이 선뜻 코트를 벗어 팔에 걸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집안에 장신의 남자가 둘이나 들어서자 그곳은 터질듯이 좁아보였다. 카이사르가 찌푸린 얼굴로 쉬스킨을 내려다보았다.

    "의자도 없나?"

    쉬스킨은 황급히 조그만 의자를 내놓았다. 이원이 양해를 구한 뒤 의자에 앉자 카이사르 역시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다리길이가 맞지 않는 낡은 의자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고, 이내 카이사르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원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말을 꺼냈다.

    "좀 진정이 되십니까? 얘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거친 숨을 들썩이는 쉬스킨의 모습에 이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베르다예프 전 시장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저는 전 시장의 비리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쉬스킨 씨가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만."

    쉬스킨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창백한 얼굴로 연신 눈동자를 굴리는 그의 모습에, 갑자기 카이사르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무심히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예리한 재크나이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즉시 이원이 무서운 눈으로 카이사르를 노려보고, 카이사르는 모른 척 다시 나이프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을 본 쉬스킨은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쉬스킨 씨."

    급히 일어나 달아나려는 쉬스킨을 붙잡아 앉힌 이원은 이내 상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변호사이니 안심하시고,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이원의 설명을 쉬스킨은 벌벌 떨며 듣고 있었다. 그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카디건의 닫추를 두 손으로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꽤 자주 그런 버릇이 있는지 유독 귀퉁이가 닳아있는 단추를 흘긋 보았던 이원은 다시 쉬스킨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제대로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그를 , 이원은 참을성 있게 설득했다.

    "재판에서는 당신의 증언이 꼭 필요합니다. 증인이 되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얘기를 마무리하고 미소를 짓는 이원에게 쉬스킨은 온몸을 웅크린 채 떨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쉬스킨 씨."

    "바실리 쉬스킨."

    막 이원이 입을 여는 순간, 카이사르가 살기 어린 서늘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베르다예프와 재회하고 싶은가."

    입. 다.물.고. 있.지. 못.해?!

    이원의 온몸에서 불길처럼 무서운 아우라가 솟아나왔다, 그제야 카이사르가 입을 다물고, 이원은 거품을 물며 숨을 헐떡이는 쉬스킨을 열심히 달랬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카이사르는 또다시 재크나이프를 펼쳤다 접기를 반복했다.

    쉬스킨의 얼굴이 굳어지고, 그는 연신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봤다.

    "잠깐, 물 한 잔만..."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 쉬스킨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원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카이사르는 달랐다. 

    그는 쉬스킨이 가버린 방향만을 바라볼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에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불안한 발소리를 내며 쉬스킨이 주방에서 나왔다. 뒤이어 두 손으로 뭔가를 쥔 쉬스킨의 모습이 들어왔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원이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쉬스킨이 그에게 총을 들이댔다.

    "움직이지 마...!"

    이원은 그대로 굳어지고, 카이사르 역시 꼼짝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과는 달리 지각은 둔해졌다. 이원은 긴장한 얼굴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쉬스킨 씨, 진정하십시오. 전 단지 얘기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총 내려놓으시고..."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다가오지 마!"

    사색이 된 쉬스킨이 갑자기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이원의 뺨을 스치고, 따끔한 감각을 남겼다. 뒤이어 오래 된 벽에 총탄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예리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사르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아니, 시야에 비쳤을 뿐이다. 쉬스킨이 총을 쏜 반동으로 움칠하는 순간, 곧바로 카이사르가 손을 뻗어 남자의 총을 붙잡았다.

    뒤이어 쉬스킨은 총을 쥔 채 냅다 끌려가 카이사르에게 팔을 잡혔다.

    "으악!"

    곧바로 쥐고 있던 총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쉬스킨의 팔이 뒤로 비틀렸다. 우둑, 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쉬스킨의 비명이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무슨 짓이야, 그만 둬!"

    뒤늦게 이원은 소리쳤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멈추지 않았다. 빙하처럼 서늘한 얼굴로 쉬스킨을 내려다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또다시 뿌드득, 소리가 불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대로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이원은 날카롭게 내질렀다.

    "중요한 증인이야, 그만 두지 못해?!"

    카이사르가 멈칫했다. 그에 따라 뼈가 뒤틀리는 소리도 멈췄다. 카이사르가 손을 놓자 남자는 신음과 함께 울먹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원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진정하시고 말을 들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정중하게 그를 위로하는 사이 카이사르는 쉬스킨이 떨어뜨린 총을 걷어 찼다. 총은 바닥을 빠르게 회전하며 굴러가 육중한 장식장 아래에 처박혀 버렸다. 이원은 흐느끼는 쉬스킨을 겨우 달래 의자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다음에도 쉬스킨은 여전히 겁에 질린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연신 두려움에 찬 눈으로 카이사르를 훔쳐보는 그의 시선에, 이원은 그것 보라는 듯 카이사르에게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떤 말을 해도 쉬스킨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연거푸 헛소리를 할 뿐이었다. 결국 이원은 거품을 물고 기절 직전의 쉬스킨을 보고 더 이상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중에라도 할 말이 생각나시면 전화해 주십시오. 전 이 여관에 묵고 있습니다."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겁에 질려있는 쉬스킨에게 한번 더 당부했다.

    "절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원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뒤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전히 주저앉아있는 쉬스킨에게 그는 그럼, 하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는 거기까지였다. 카이사르가 뒤따라 나오고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이원은 곧바로 도끼눈을 뜨고 돌아섰다.

    "마피아처럼 보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쉬스킨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으르렁거리며 덤벼드는 이원에게, 하지만 카이사르는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로 무심히 대답했다.

    "난 대답을 듣기 위해 교섭을 했을 뿐이야."

    "협박이겠지!"

    이원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따져 물었다.

    "대체 그 칼은 뭐야? 그건 왜 가져온 거냐고!"

    "칼이 안 된다고는 안 했잖아."

    "총이 안 되면 당연히 칼도 안 되지! 둘이 뭐가 달라!"

    이원은 카이사르가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빠르게 내뱉었다.

    "재판을 망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도와주려는 거야?! 하마터면 팔을 부러뜨릴 뻔했잖아!"

    이원의 다그침에 카이사르는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게 안 했으면 넌 죽었을 걸."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이원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러나 깨끗이 승복했다.

    "그건 고마워."

    카이사르는 이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고작 그 정도로 너무 간단히 승복하는 거 아닌가?"

    이원은 다시 울컥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어쨌든 난 분명히 경고했어. 또다시 그런 짓을 하면 그 나이프를 빼앗아 당신 가랑이 사이에 꽂아주겠어, 알겠어?!"

    대답은?! 하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카이사르가 피식 웃었다.

    "너야말로 지금 협박을 하고 있군."

    "아니, 경고야."

    이원은 한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카이사르를 째려봐준 뒤 뒤돌아섰다. 홧김에 퍽퍽 걸어가는 이원의 뒷모습을 향해, 카이사르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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