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들린 노크소리에 이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눈을 깜박이며 누워있는데,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가 머리를 숙였다.
"일어나셨습니까, 곧 아침 식사시간입니다. 욕실은 오른쪽이고 갈아입으실 옷은 안에 준비해 뒀습니다. 아래로 내려오십시오."
그럼, 하고 다시 나가는 남자의 두시모습에 이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이나 낯선 침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자신이 기절한 뒤 카이사르가 이원을 여기에 데려다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지내던 객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넓은 방에는 온갖 미술품과 앤티크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몇 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오래된 가구와 골동품들은 물론이고 침대 위에는 넓고 우아한 천개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사치스러운 저택이었다. 주인의 취향인 거지, 하고 생각하며 그는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갔었다니.
자신이 남이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고 그런 꼴이 되어버린 것에 화가 치밀었다. 왜 그 남자를 의심하지 않았지? 생각해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다섯 살짜리에게나 통할 수법에 넘어가다니, 멍청한 자식.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원은 이를 악물었다. 마피아 소굴에 들어와서 그 정도로 경계심이 없다는 건 본인의 실수다.
게다가 약에 취해 그런 추태까지 보였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안고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의 앞에서 넘어지고, 말을 더듬고, 그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자 이원은 참지 못하고 침대를 세게 내리쳤다.
그래봤자 푹, 하는 허무한 소리가 들린게 전부였지만. 왠지 그게 더 짜증이 나서, 이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넓은 욕실에는 이원의 옷이 세탁이 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득 이원은 그것이 예전 집사가 하던 업무였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새로 온 집사인 걸까? 그럼 예전의 그는 어떻게 됐을까.
샤워를 하는 동안 생각은 점차 복잡하게 변해갔다. 카이사르는 언제부터 집사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카이사르가 자신을 미끼로 삼았던 데 대한 불쾌감이 되살아났다.
재빨리 욕실에서 나온 그는 젖은 머리칼을 홧김에 난폭하게 털어대며 옷을 입었다.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일들 투성이였다. 그 중 자신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원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왔다.
식당에 드렁서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었다. 발소리를 들은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와, 잘 잤나?"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인사를 건넸다. 엷게 미소짓는 얼굴도, 말투도 평소와 똑같았지만 이원은 그가 침묵했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무시한 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아직 화가 나있으니 나에게 말걸지 마, 라는 얼굴로. 카이사르 역시 그것을 눈치 챈 듯 평소와 다르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잠자코 앉아있는 새 이원의 잠을 깨워주었던 새로운 집사가 다가와 이원의 앞에 접시를 놓아주었다. 이원은 다시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이전 집사의 모습은 없었다.
"왜 그러지?"
카이사르가 물었다. 때마침 집사가 빈 바스켓을 가져가고 새로운 빵을 가져왔다. 이원은 썩 내키지 않는 시선을 그에게 향하고 입을 열었다.
"예전의 집사는, 어떻게 됐어?"
"해고 했어."
이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대답했다.
"해고?"
설마, 그걸로 끝났을까? 고작 해고를 하려고 사람을 그런 함정에 밀어넣었단 말이야? 반신반의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숨소리가 거슬려서."
이원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전날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 알아서 할 테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어떻게 됐어? 내겐 알 권리가 충분하다고 보는데."
이원이 날이 선 음성으로 말하자 카이사르는 의아해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이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뭘 찾고 있었던 거야? 재판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난 변호사야, 뭐든 알아야 해. 혹시 즈다노프 의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순간 스친 생각에 이원이 덧붙여 물었다. 카이사르는 이원의 성급한 질문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관련은 있지만,"
카이사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넌 알 필요 없어."
"그럼 재판에서 이기는 건 꿈도 꾸지 마."
이원은 차갑게 말했다.
"의뢰인이 숨기는 게 있으면 재판에는 이길 수 없어. 게다가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난 너보다 먼저 니콜라이 아저씨의 변호를 맡았어.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그쪽에 있다고, 혹시 니콜라이 아저씨의 재판에 불리한 상황이 하나라도 발생한다면 난 당장 이 일에서 손을 떼겠어."
마지막 선언이 떨어지자 식당 안에는 삽시간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식당을 둘러싼 사내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원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간신히 찾은 증인도 쓸모가 없게 되겠군."
"뭐라고?"
뜻밖의 말에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억하나? 즈다노프와 베르다예프의 합작품인 토지에 관한 건."
무수한 말들이 이원의 머리를 스쳐갔다. 심각하게 미간을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명의를 빌려준 자를 찾아냈어."
순간 이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카이사르는 짧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도시에 지친 사람들이 집을 떠나 안식을 위해 찾을 듯한 교외의 아담한 별장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삼엄한 경비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별장을 사들인 사람이 이사 온 직후부터 주변을 돌아다니는 낯선 양복 사내들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렸으나 정작 다가가 정체를 알아낼 용기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피아일 거야.
그들은 숙덕거렸다. 굳이 감추지 않아도 그들의 정체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다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최대한 별장그너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별장 앞의 도로를 통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면서도 굳이 먼 거리를 돌아갔다. 덕분에 별장의 주변은 낯선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미하일 로모노소프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는 언제나 주변을 지키는 조직원들만이 얼씬거릴 뿐 강아지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요양을 위해 도시를 떠난 지 두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봄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미하일의 건강이 되돌아올 날은 요원했다.
오래 살았지.
미하일은 생각했다. 반대파인 세르게예프의 수장인 사샤와 미하일은 같은 나이였지만 최근 그는 사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병의 유무가 아닌 아마도 의지할 자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일 것이다. 문득 그는 흐려진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워 지는군...
아련한 기억 속에 묻어둔 추억을 되새겼을 때, 문득 멀리서 달려오는 검은 세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은 꼼짝 없이 앉은 채 가까워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측근인 레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로모노소프 씨,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깊이 허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의 마른 얼굴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심 레프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20대에 조직을 물려받은 미하일은 자식이 없다. 몇 번이나 결혼을 권했던 부하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독신이었다. 항간에는 그에게 숨겨둔 아내가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지만 그를 찾아온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하일이 건강할 때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레프는 고작 두 달 새에 10년은 늙어 보이는 미하일을 마주 보며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많이 마르셨습니다.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 겁니까?"
측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걱정해줘서 고맙네."
차분한 음성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레프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 남자가 사라지면 조직은 와해될 거다. 어떻게든 미하일 로모노소프는 존재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사자로서, 속마음이 얼굴에 나와 버렸을까, 미하일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아직 건강하네,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보지 말게나."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죄한 레프에게 미하일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래, 오늘 찾아온 이유는 뭐지? 블라디미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겐가?"
미하일 대신 이시로 조직을 맡고 있는 2인자의 이름에, 레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아주 잘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모노소프 씨, 저희는 모두 로모노소프 씨가 어서 쾌차해 다시 저희를 이끌어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하일은 다 안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프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간의 보고 차 왔습니다. 세르게예프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레프는 본론을 꺼냈다.
"베르다예프 시장을 없앤 것도 모자라 시장의 남은 재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꽤 일이 진척이 된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만약의 경우엔 손을 쓰겠습니다."
그 때까지 평온하게 기울어져 있던 미하일의 두 눈이 순식간에 매섭게 불타올랐다. 레프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내심 미하일의 권위에 감탄했다.
"누군가, 감히 로모노소프의 영역을 넘보는 자가, 혹시 그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차르입니다."
레프는 재빨리 대답했다.
"일단은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바로 위협을 가하겠습니다."
"그 아들놈이..."
미하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이사르 세르게예프.
미하일은 전신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같던 사샤의 아들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뼛속까지 완전한 마피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내다니.
미하일은 곧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하긴, 우린 모두가 괴물이 아닌가.
"계속하게."
미하일의 지시에 따라 레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음지에서 도발해 온다면 얼마든지 대응을 할 텐데, 법적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베르다예프의 모든 것은 우리 조직의 것임을 알면서, 이것은 명백한 도발입니다."
레프의 음성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점차 빨라졌다. 미하일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모았다. 이미 베르다예프의 처리했을 때부터 그는 로모노소프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 정면으로 나에게 반항해 오다니.
팔걸이에 놓여있던 미하일의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레프는 그가 원념으로 의지를 되찾는 것을 가슴을 두근거리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입니다. 얼마 되진 않습니다만..."
부하가 서둘러 내민 파일을 받아들며 미하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것뿐이지?"
얇은 두께의 파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빈약했다. 레프는 당혹해하며 대답했다.
"그것이, 그 저주받을 세르게예프가 조직의 고문이 아닌 외부에서 변호사를 사왔습니다. 게다가 모든 조사와 준비를 그의 저택 안에서 하는 모양이라, 정보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변호사를 잡아오면 될 게 아닌가."
미하일의 날카로운 음성에 레프는 쩔쩔 매며 말했다.
"그게, 차르의 집에서 머물며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직접 쳐들어가지 않는 한 변호사를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미하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레프는 조마조마해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하일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험악한 얼굴로 파일을 폈다. 몇 장의 서류가 팔락거리며 빠르게 넘어갔다.
아무렇게나 내용을 훑는 것 같던 그의 시선이 갑자기 멈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기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한명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사샤의 아들 카이사르다.
하지만 미하일의 관심은 그가 아닌 그와 함께 찍힌 다른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미하일이 시선을 고정시킨 곳을 흘긋 본 레프가 서둘러 말했다.
"아, 이 녀석입니다. 차르가 직접 물색한 변호사요. 줄곧 미행하다 며칠 전에 겨우 한 장을 찍었습니다."
카이사르와 나란히 서점의 계산대에 서있는 그의 모습을, 미하일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순수한 러시아인은 아닌 것 같은데, 혼혈인가?"
미하일은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서류를 읽는 척 고개를 숙여 핏기가 가신 얼굴을 슬쩍 가린 미하일에게, 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인과의 혼혈인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ㅈ, ㅈ...."
레프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적혀있습니다. 성은 발음을 하기가 어려워서..."
레프는 양해를 구한 뒤 직접 서류를 펼쳐 이원에 대한 기록을 미하일에게 보여주었다. 천천히 활자를 훑어가던 미하일의 시선이 멈추고, 그가 입을 열었다.
"꽤 특이한 경력이군."
"러시아에 온지는 7년이 됐다고 하던데, 제법 실력이 좋은 모양입니다. 혹시 걸림돌이 될까봐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문득 레프는 미하일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파일을 닫아버리고, 레프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인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오래 쉬었군, 이제 그만 떠나야겠네."
"네? 어디로 말씀입니까?"
갑자기 벌떡 일어난 훤칠한 남자의 모습에, 레프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근래 병을 앓아 야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쭉 뻗은 자세로 미하일은 레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순간 레프는 전율에 떨었다.
기운을 잃고 앉아있던 병약한 노인은 더 이상 없었다. 사자라 일컬어지는 미하일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물론 조직으로 돌아갈 거네."
레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당황해 서둘러 물었다.
"돌아가신다고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기쁨과 불안이 교차했다. 선뜻 걸음을 옮기려던 미하일이 비틀거렸다. 레프는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로모노소프 씨,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더 요양을 하시는 쪽이..."
하지만 미하일은 대답 대신 한 쪽을 가리켰다. 레프는 조심스레 미하일의 옆을 떠나 급히 지팡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미하일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똑바로 허리를 폈다
"세르게예프의 후계자를 마냥 날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레프는 그의 뒤에서 오랜만에 눈부신 휘광을 발견했다. 가슴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얼마나 이 날을 고대해 왔던가.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사자의 귀환이었다.
본토에서 떨어진 섬은 전신을 에이는 매서운 칼바람이 끝도 없이 불어왔다. 이원은 코트 안에서 있는 힘껏 몸을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공항을 나왔다. 어디 따뜻한 호텔에라도 가서 쉬고 싶었다.
아니, 조그만 까페라도 좋다. 아니, 그냥 모닥불만 있어도...
"생각보다 따뜻하군."
뒤에서 염장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이 휙 고개를 돌리자 온통 화려한 모피로 몸을 감싼 카이사르가 서있었다. 남의 털을 그렇게나 뒤집어 썼으니 당연히 덥겠지.
이원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밤에 너구리한테 물리는 꿈이나 꿔라. 백년 사랑도 식을 것 같은 한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이원은 급히 택시를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택시 한 대가 오도카니 서있었다. 이원은 카이사르 쪽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서둘러 택시를 탄 이원이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 볼 것도 없는 촌구석인데, 거긴 뭣하러 가쇼?"
때마침 이원의 뒤를 따라 카이사르가 올라탔다. 핀스트라이프가 들어간 검은 슈트에 얼룩말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모피코트를 걸친 그의 모습에, 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를 출발시킬 생각은커녕 뚫어져라 카이사르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이원은 황급히 말했다.
"어서 출발해 주십시오, 바빠서..."
"혹시 연예인 아뇨?"
기사가 이원의 말을 무시하고 투박한 말투로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카이사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기사는 손뼉을 치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맞구마! 내 신문에서 분명히 봤는데~ 했소! 아이고, 이런 촌구석에 살면서 내가 연예인을 다 보네~ 아이고, 출세했구나!"
앉은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순박한 장년의 남자를 보며, 이원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사진만이 아니라 신문내용도 함께 기억을 했다면 절대 저런 말을 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기사는 여전히 눈치 없이 기뻐하며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유~ 명하신 분이 이 촌구석엔 웬일이요? 혹시 촬영이라도 있소?"
들뜬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기사의 모습에, 문득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고, 당황한 이원이 황급히 그를 가로막았다.
"그냥, 휴가입니다. 죄송하지만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바빠서..."
기사는 실망한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카이사르에게 관심을 돌렸다.
"알았소. 내 총알처럼 달리리다. 저, 그런데 내리면서 사인 한장 해줄 수 있소? 내 평생 연예인 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지. 평생 가보로 간직하리다. 대신 택시비는 안 받겠소. 그럼 그렇게 하는 거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흥정을 끝낸 기사는 신이 나 차를 출발시켰다. 이원은 따뜻한 차안에서 한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몸이 얼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창밖에는 수북이 쌓인 눈이 길 한 쪽에 위태롭게 모여 있었다.
갑작스럽게 여행이 결정된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아침식탁에서 '기다리던 소식'을 들은 이원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증인인지 집사인지 선택하라는 듯 이렇게 되면 집사가 어떤게 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증인이라니,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미끼였다.
이 건을 제대로 해결한다면 니콜라이 아저씨의 재판도...! 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찬스가 지금 온 것이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카이사르에게 향하는 그의 시선에는 씻을 수 없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그 집사의 일은 재판과 관련 없는 거겠지?"
설령 있다고 해도 없다고 말해줬으며, 하고 이원은 생각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대답했다.
"전혀."
"그럼 됐어."
이원은 마음이 변하기 전에 황급히 미끼를 물었다.
"그 명의자는 어떻게 찾았지? 어떤 관계야? 전 시장이랑, 혹시 즈디노프의원과 관계가 있나?"
곧바로 화제를 바꿔 빠르게 질문을 퍼붓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조직원을 바닥까지 풀어놓으면 못 찾는 건 없어."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원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카이샤르가 말을 이었다.
"베르다예프 전 시장에게 빛이 있었더군."
"그래서...."
이원은 어렴풋이 머릿속의 퍼즐이 짜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선택을 하고 나자 이후의 결정은 빨랐다. 당장 그를 만나서 정보를 얻고 증거를 찾아야한다. 필요하다면 증인으로 출석해달라고 설득을 하자. 일정은 사흘 정도면 충분하겠지. 다녀와서 니콜라이 아저씨의 재판을 다시 검토하고...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하루를 초 단위로 쪼개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됐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스케줄을 짠 이원이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정보는 확실하겠지?"
"물론."
간단히 대답한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직접 갈 건가?"
이원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당장 가겠어."
대답을 마친 후 이원은 카이사르가 정보를 건네주기를 기다렸다. 대륙을 넘어서라도 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이원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불러 끌고 올 수 있는데."
카이사르의 느릿한 말투에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합법적으로 하고 싶다면서? 협박을 해서 증언을 받아봤자 결국엔 무효가 돼.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내 재판에는 중요한 사람이야. 기껏 찾은 증인을 허사로 만드는 건 절대 안 돼."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카이사르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흔치않게 그의 단정한 이마 사이에 주름이 새겨지는 것을 본 이원은 무심코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할 수 없지."
마침내 흘러나온 카이사르의 말에 이원이 그럼, 하고 입을 여는데, 카이사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같이 가야겠군."
그순간 이원은 턱이 쑥 빠지고 말았다.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바쁘지만 이틀 정도는 낼 수 있어. 내일 당장 갈 건가?"
"네가 뭐하러 같이 간다는 거야?"
카이사르의 말을 가로막고 이원이 따지듯 물었다. 카이사르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정보제공자는 나야,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따라 쫓아오는 카이사르와 그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검은 슈트의 군단이 떠오름과 동시에 이원은 즉각 잘라 말했다.
"확실히 말해서 넌 방해만 돼."
카이사르가 얼굴을 찌푸리자 이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혼자 다녀올 테니까 주소를 줘, 신상에 대해서도 조사했겠지? 가지고 있는 자료 전부."
얼른, 하고 한 손을 내밀어 흔드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말했다.
"싫어."
"뭐라고?"
어린애처럼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이원이 미간을 모으자 카이사르는 말을 이었다.
"내가 못가면 너도 못가, 네게 정보를 넘길 생각은 없어. 그 남자를 만나러 갈 생각이라면 나와 함께 가야 할 거야."
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저런 막무가내식 발상은 어떻게 나오는 건지 알고 싶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인 남자, 문득 전날 그가 자신을 이용해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동시에 이마 한 쪽에 핏줄이 솟고, 이원의 안에서 화가 폭발했다.
"난 너랑 네 부하들이랑 개떼처럼 몰려다니는 거 하기 싫다고!"
냅다 내지른 이원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아차, 이원은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카이사르의 조직원들이 무수히 깔려있는 고요한 식당 곳곳에는 이원의 성난 포효가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련히 에코가 사라질 즈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원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카이사르는 말했다.
"나 혼자 가면 되는 건가?"
"뭐라고?"
이원의 되묻는 음성과 함께 조직원들이 일제히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향했다. 굳어진 조직원들과 이원의 얼굴을 앞에 두고,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빙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원은 세 번째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