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내리던 눈이 간신히 그쳤다. 오전 내내 눈을 치우는 작업하고 나서야 차는 정원을 달릴 수 있게 됐다. 늦게까지 일에 몰두하다 잠이 든 이원은 눈을 치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보자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덩어리들을 바라보던 그는 아침식사를 하며 볼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덜컥.
별 생각없이 문을 열었던 이원은 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카이사르와 하마터면 정면으로 맞부딪칠 뻔했다. 줄곧 집에만 있던 탓에 차림새도 러프했던 카이사르지만 오늘은 달랐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잿빛 슈트를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는 그의 뒤로 코트를 두 팔에 걸친 집사의 모습이 비쳤다. 놀란 눈을 뜨고 황급히 멈춰선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려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전날의 일이 되살아나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원은 빙글거리며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던져 주었다.
반사적으로 서류를 받아든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쏘듯이 내뱉었다.
"오늘 안으로 그거 다 검토해서 얘기해."
그리고 이원은 보란 듯이 뒤돌아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카이사르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남을 가지고 노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거야? 하여간 마피아들이란. 이원은 난폭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오후가 다 가도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원은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다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되짚어 읽어야 했다.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수긍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이 일을 맡은 건 니콜라이의 재판을 끝내기 위해서였는데 증거를 찾기는커녕 끝도 없는 서류에 치여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거지. 몇 시간동안 의미없는 반복을 계속하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머리를 좀 식히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산책이나 할까.
쏟아지는 눈으로 줄곧 집안에만 갇혀있다시피 했던 지난 며칠을 떠올리며 이원은 선뜻 몸을 일으켰다. 하던 일은 젖혀두고 서재와 연결 된 문을 통해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그는 코트를 꺼내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 순간 뒤에서 조용한 음성이 불쑥 들려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흠칫 놀란 이원이 돌아보자 예상했던 대로 집사가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항상 그를 주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번 불쑥불쑥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집사의 모습에 이원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집사의 얇은 눈이 흘긋 코트를 향하는 것을 보고 이원이 말했다.
"잠깐 산책을 다녀오려는 것뿐입니다."
순간 집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멈칫한 이원에게 집사는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손에는 모자를 들고 있었다.
"혹시 외출을 하게 되면 착용하시라고 차르께서 전하고 가셨습니다."
이원은 부드러운 털이 수북이 느껴지는 샤쁘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필요없다고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샤쁘카 없이 눈덮인 정원을 걷는다고 생각하자 벌써 추위가 밀려오는 듯 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그는 짧게 감사의 말을 한 뒤 샤쁘카를 머리에 썼다.
"멀리 가실 겁니까?"
집사의 물음에 이원은 말을 흐렸다.
"네... 아마도.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이원이 덧붙이자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식사는 원하실 때 차려드릴 테니 편하게 다녀오십시오."
이원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남긴 뒤 그는 저택을 나섰다. 깨끗하게 눈이 치워진 정원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집사는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발밑에서 덜 치워진 눈이 뽀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원은 하얗게 새어나오는 입김을 조금씩 나눠 뱉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은 끝도 없이 넓었다.
행여나 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하지만 하얗게 눈이 덮인 정원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해서, 이 광경을 본다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정원을 걷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 덮인 침엽수들이 줄을 지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경이로우면서도 환상적인 풍경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원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어지러운 생각은 장소를 옮겨도 여전히 계속되어서, 그는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무심코 기울어진 샤쁘카를 밀어 올리던 이원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긴 손가락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원은 미간을 모은 채 계속해서 걸었다. 머릿속은 니콜라이의 재판과 베르다예프의 부정에 관한 연결고리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어느새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무시해버리려 했지만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자신을 바라보던 은회색의 눈동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 자신을 향해 뻗었던 긴 손가락.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귀를 감쌌던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이원은 고민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짜증나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고 놀리는 게 분명한 남자 때문에 화를 내는 것조차 싫어졌다.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던 이원의 시야에 때마침 두터운 침엽수 한 그루가 들어왔다. 이원은 홧김에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래 된 나무의 기둥이 무겁게 흔들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르릉, 하는 불길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왔다. 그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그는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덩어리를 보았다.
억.
무심코 벌어진 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눈뭉치는 이원을 덮쳐버렸다.
퍽.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버린 이원은 뒤늦은 신음을 토해내려 했으나 이 역시 불가능했다. 입안 가득 들어온 눈을 황급히 뱉어낸 이원은 자신의 위에 쌓인 눈덩어리를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헤쳐 나왔다.
이미 몰골은 엉망이었다. 샤쁘카는 눈에 깔려 납작 눌려버렸고, 코트는 젖어서 벌써부터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입안에는 아직 남은 눈의 잔여물이 부서진 나뭇잎과 함께 부석거리고 있었다.
"젠장!"
이원은 다시 나무를 걷어차려다 멈칫하고 대신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짜증이 나서 폭발할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고민하고 신경쓰이는 것도 화가 나는데 눈에 깔린 데다 흠뻑 젖어버렸다.
이원은 산책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한껏 어깨를 움츠린 채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악 문 잇새로 끊임없이 욕설을 뱉어냈다.
간신히 저택에 돌아오자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책을 한 시간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고팠다. 이원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종종걸음으로 방을 향해 걸어갔다.
간단히 먹을 것을 준비해달라고 할까. 일단 뜨거운 물에 몸부터 담그자. 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섬뜩한 예감을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뭔가 불쾌한 위화감이 전해졌다. 이원은 미간을 모은 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스산한 한기가 공기 중으로 밀려왔다.
그는 소리를 죽여 조용히 문을 열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익숙한 방의 정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원은 미친듯이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는 낯선 남자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순간 그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질렀다.
"당신 누구야?!"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에서 랜턴을 켜 방안을 뒤지던 남자는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텁게 내리쳐진 커튼 탓에 남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는 명백했다.
갑작스러운 이원의 등장에 당황한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곧바로 서재와 이어지는 문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 자식, 어딜 도망가?!"
다짜고짜 어깨를 붙잡은 이원이 세게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이원은 곧바로 불을 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벽으로 손을 뻗기가 무섭게 나동그라진 남자가 이원의 다리를 잡아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원이 바닥에 몸을 부딪치고, 곧이어 난투극이 벌어졌다. 어두운 방안에서 싸우는 것은 상대가 여럿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찾아 찌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원과 남자는 서로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고 이따금 헛방질을 쳐대면서 방안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어떻게든 달아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초조해하며 내지르는 주먹이 계속해서 이원의 뺨을 스치며 빗나갔다. 이원은 그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몸을 숙여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하고 정확하게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문득 저택 밖에서 차의 엔진소리가 들린 듯 했다.
무심코 멈칫한 것이 실수였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시에 이원의 어깨를 잡고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순간 이원은 숨을 삼키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남자가 미친듯이 방을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 자식, 거기 안 서...?!"
고함을 지르며 더듬더듬 밖으로 나온 순간, 갑자기 쏟아진 실내의환한 불빛에 이원은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왜 거러십니까? 무슨 일이죠?!"
다급하게 달려온 집사가 서둘러 물었다. 이원은 음성으로 그를 확인한 뒤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 수상한 사람 못 봤습니까? 방금 내 방에서 나갔을 텐데."
"네? 그런 건 못 봤습니다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더듬었다. 이원은 이마 한쪽을 움켜쥔 채 목구멍 깊은 곳에서 굵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뒤이어 가까이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던데."
"잠깐, 피가 나고 있지 않습니까, 변호사 양반, 손 좀 떼봐요."
"어이, 거기! 의사를 불러, 지금 당장!"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 속에서, 이원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늦게 이마를 감싼 자신의 손이 흠뻑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끈적하게 손을 적시는 액체의 정체를 확인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이원은 발치에 흠뻑 고여 있는 붉은 피를 직접 목격했다. 소란을 피우던 남자들 틈으로 다른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귀에 익은 서늘한 음성이 귓속을 질러왔다. 일시에 남자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일사분란하게 몸을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놀란 얼굴의 카이사르가 서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와 같은 차림으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미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한참동안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순간 이원은 보았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아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총을 겨눴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이원은 카이사르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말을 꺼냈다.
"누군가 침입했었어."
카이사르는 한 템포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침입이라고?"
카이사르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이원은 그래서 더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말했다.
"일단 주변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달아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카이사르가 흘긋 시선을 향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갔다. 남은 무리들이 각기 흩어져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 카이사르는 선뜻 몸을 숙여 이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치료부터 받는 게 좋겠군, 얘기는 그 다음에 듣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원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꽤 출혈이 심했는지 앉아서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고집을 부리다 고꾸라지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순순히 카이사르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그 때까지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즉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차르. 제가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서 손님에게 이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평소 이원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던 집사가 평소의 거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연거푸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을 이원은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서늘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책임추궁은 나중에 하지. 일단 너도 집안을 찾아 봐. 수상한 녀석이 보이지 않는지."
"알겠습니다."
집사는 곧바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일단 내 방으로 가지."
이원을 데리고 가려던 카이사르에게 이원이 말했다.
"잠깐만, 그 전에 내 방부터 확인을 해야겠어."
계속해서 부축해주려는 카이사르를 뿌리치고, 이원은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자신이 실수로 서재에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의 얼마 안되는 개인물품이 죄다 밖으로 나와 흩어져 있었다. 서랍에 반쯤 걸쳐져 나와있는 브리프를 흘긋 보았던 그는 곧바로 서랍을 꺼내 뒤집었다.
쏟아지는 속옷을 무시한 채, 이원은 뒤집힌 서랍의 바닥을 확인했다. 거기엔 테이프로 고정시킨 서류봉투가 있었다.
"그건 뭐지?"
이원이 봉투를 떼어내자 카이사르는 놀란 듯 물었다.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중요한 서류는 빼두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원이 봉투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기다렸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없어진 건?"
카이사르의 물음에 그는 다시 봉투를 닫았다.
"됐어, 이게 무사하니까."
이원은 지친 듯 숨을 내쉰 뒤 털썩 침대에 앉았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대저택에서, 하필 이원의 방에 도둑이 들다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분명 이원이 조사하고 있는 사건과 관계가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불현듯 카이사르가 물었다.
"많이 아픈가?"
이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조금. 별 거 아냐."
피로 흠뻑 젖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원이 다시 관자놀이를 꽉 누르는데, 피냄새에 섞여 뭔가 다른 향기가 느껴졌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것은 카이사르에게서 풍기던 오드콜로뉴의 향기였다.
시선을 들자 카이사르가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슈트 재킷에 꽂혀있던 손수건이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카이사르가 직접 이원의 손을 잡아 그 안에 손수건을 밀어 넣었다.
이원의 젖은 손 위로 카이사르가 손을 겹쳐 지그시 누르는 것을, 그는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었다. 문득 카이사르가 다른 손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손이 이원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이원은 이번에도 역시 그냥 두었다. 이원을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되돌아와 있었다. 이원은 또다시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하려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을 때, 카이사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돌리고 화제를 바꿨다.
"의사가 온 모양이군."
그 말에 이원은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남자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사이로 급히 가까워지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들었다.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해 난폭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한 쪽 벽에 기대어 서있는 카이사르를 뒤로 한 채 치료를 받으며, 이원은 잠자코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겨우 피는 멈췄지만 상처는 제법 커서, 의사는 가져온 의료기구로 이원의 이마 한 쪽을 서너 바늘 꿰매야 했다.
"흉터가 남는 건 아니겠지?"
붕대를 감는 의사에게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의사는 흠칫 놀라 그만 반창고를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이원의 이마를 감싼 붕대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의사 대신 재빨리 붕대를 잡아 고정시킨 이원이 입을 열었다.
"문신이 생긴 걸로 치면 돼."
"그런 센스 없는 문신을 새기다니 취미도 고약하군."
무심히 말한 카이사르가 흘긋 의사에게 시선을 향했다. 의사는 황급히 반창고를 자르며 대답했다.
"괘, 괜찮을 겁니다. 네, 큰 상처는 아니니까요. 네."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 의사가 겨우 치료를 끝내고 왕진가방을 챙겼다.
뒤늦게 문을 연 조직원이 빠른 말투로 보고했다.
"차르, 집안과 정원을 모두 뒤졌지만 수상한 자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이원은 이내 찌푸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괴한이 나가자마자 바로 쫓아나갔다. 공백이 있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기다 직후에 조직원들이 달려왔는데 없다고? 이원의 표정이 이내 꺼림칙한 것으로 돌변했다. 카이사르가 부하에게 물었다.
"침입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같은 대답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어떤 자인지 보았나?"
이원이 고개를 들자 카이사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이 어두워서... 대강 체형으로 남자라고만 생각했어."
카이사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널 때리고 달아나다니 그쪽도 상당히 실력이 좋은가 보군."
이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언젠가 같은 상황이 되면 당신은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지."
카이사르는 짧게 웃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이 금세 긴장해 머리를 숙였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경비를 강화해, 침입자가 있었던 것은 명백히 너희들의 과실이야."
카이사르의 입가에 냉소가 지어졌다.
"저택에 침입자가 들어오다니.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거울을 봐야겠어, 머리가 붙어있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까."
조직원은 금세 굳어진 표정으로 서둘러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차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물러가."
카이사르의 말에 조직원은 순식간에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카이사르가 이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서류는 무사하고 수상한 녀석도 없다는 거군."
"놓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이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원은 심상치 않은 그의 조용한 음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