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4)

================= 장미와 샴페인

그는 설원의 늑대다. 군집생활을 하는 무리의 고독한 우두머리. 무수한 추종자를 거느렸지만 지독히도 혼자인 남자.

카이사르 알렉세예비치 세르게예프.

이원은 생각했다.

내가 손을 놓으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

이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온몸에서 발산하며 난폭하게 걸어갔다. 손에 든 봉투 안에는 목적으로 했던 법률관계의 서적과 함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요리책이 다소곳이 담겨 있었다.

내가 왜 보지도 않을 책 따위에 480루블이나 써야 하는 거야?!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혀내며 열심히 걷고 있을 때였다. 뒤를 따라오던 카이사르가 말을 걸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공부하면 너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원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카이사르는 환한 미소를 되돌렸다.

“자신의 음식을 먹고 사고사하는 건 비참하잖아.”

요리책 모서리로 맞아죽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해줄까.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요리책을 흘긋 내려다보며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골목 안쪽에서 웬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더러운 얼굴과 낡은 옷가지들을 보고 이원은 곧 그들이 거리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외국인과 부자는 이들에게 좋은 표적이 된다.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어 눈을 털어주고 구두를 닦으려 몸을 숙여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원이 그들을 제지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달려온 아이를 가차 없이 쳐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에 찌든 아이의 가냘픈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뜻밖의 상황에 이원은 놀라 굳어졌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 칠 틈도 없었다. 곧바로 품에서 리볼버를 꺼낸 카이사르가 자신의 코트를 움켜쥔 또 다른 아이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사색이 된 이원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 순간 이원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주저 없이 아이의 머리에 총구를 박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그에게서 느꼈던 소름이 이원의 전신을 질주해 달려갔다. 저런 어린아이에게 가차 없이 총을 겨누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남자.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웃음도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얼굴.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사르는 아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끼릭, 하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이원은 눈치 챘다. 이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거라고.

“그만 둬!”

뒤늦게 이원은 고함을 지르며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순간 카이사르가 허공으로 총구를 향하고, 섬뜩한 총성이 공기를 갈라놓았다.

“아윽.”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 쪽 귀를 틀어막았다. 지잉, 하고 고막이 울려오는 것 같았지만 카이사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짓이야? 다칠 뻔했잖아.”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아이를 쏘려고 하다니!”

이원이 한 쪽 귀를 막은 채 소리치자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날 만졌잖아.”

“그게 어때서?! 고작 아이가 한 일인데 총을 들이대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이사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로 이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왜 날 비난하는지 모르겠군.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아이에게 총을 쏘는 게?!”

이원의 거친 음성에 카이사르는 서늘하게 되물었다.

“아이가 상대면 뭐가 다르지?”

이원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로 먹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변호사인 자신이 이렇게 할 말을 잃어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원이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할 얘기가 그게 전부라면 이제 비켜."

카이사르가 다시 총구를 겨눴다. 이번에야말로 아이를 쏠 생각인 것이다. 이원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달아나라고 말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본 이원은 그의 오래된 바지가 흠뻑 젖어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아이는 울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오줌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이가 달아나는 것은 틀렸다.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정면으로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쏘고 싶으면 날 쏴."

"뭐라고?"

카이사르가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원은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날이 선 음성으로 내질렀다.

"못 알아들어? 이 아이한테 총을 쏠 거면 날 먼저 쏘라고! 난 널 때리기까지 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네 말대로라면 난 즉결 처형이겠군, 어서 쏘지 그래?"

성마른 음성에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진심이었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도 절대 피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이에게 총구를 향한 채 서있는 카이사르와,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아이와, 둘 사이를 막아선 채 카이사르를 노려보는 이원과, 그들을 지켜보는 조직원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층 묵직해진 눈덩어리가 투둑, 투둑 소리를 내며 주변에 내려앉았다. 조직원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말없이 이원을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총구를 내렸다. 

동시에 숨을 삼킨 아이가 기겁을 하며 다급하게 달려갔다. 이원은 그가 저 멀리 달아나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는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총을 다시 품안에 넣고 있었다. 

이원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분노는 그 다음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카이사르가 흘긋. 이원의 뒤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뜻밖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원은 황급히 그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혹시 달아나는 아이를 쏘려는 건가, 하는 무서운 상상이 들었지만 그것은 틀렸다. 카이사르는 허리를 숙여 눈에 반쯤 파묻힌 뭔가를 꺼내들었다. 돌아선 그의 모습에 이원은 '뭔가'의 정체를 알았다. 이원이 내던진 책봉투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동댕이 쳐버린 책들을 직접 주워 눈을 털어낸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선뜻 이원에게로 걸음을 옮기더니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 다음 그가 한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원은 이어진 그의 말과 표정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걸 잃어버리면 안 되지. 네 목숨을 구해줄 책이잖아?"

카이사르는 농담처럼 말하며 이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돌연한 변화에 이원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그는 여느 때의 카이사르로 돌아가 있었다. 이원을 향해 농담을 하고, 속을 긁어대고, 소리내어 웃던 그의 얼굴로.

지독한 괴리감에 이원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화약냄새가 아니라면 자신이 눈을 뜬 채로 꿈을 꾼 건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는 돌변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방금 전에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어떻게 갑자기 달라질 수 있지? 이원은 현기증마저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너는, 당신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이원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거냐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아무리 마피아라고 해도 그렇지, 그런 아이를, 애한테 총을 겨누고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소리치던 이원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여전히 카이사르는 이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화를 내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거리의 아이들에게 섣불리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건 이원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한 짓은 단순한 제재가 아니었다. 그에게 사람의 목숨이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설령 아이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마침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울려왔다. 다급하게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직원 중 한 명이 다가와 보고를 했다.

"저, 차르. 차가 근방에 대기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낯익은 세단과 승합차들이 줄을 지어 깜박이를 켠 채 서있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이원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만 돌아갈까? 볼일은 끝난 거지?"

선뜻 손을 내민 카이사르에게 그때까지 말이 없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난 됐어. 혼자 가."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원은 갈라져 나오는 음성으로 거칠게 내뱉었다.

"사람 말 안 들려? 혼자 가라고 했잖아."

이원은 카이사르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난폭하게 낚아채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에, 카이사르는 굳이 이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이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저 남자는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문득 바람이 불어와 이원은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천연모가 느껴졌다. 자신의 머리에 샤쁘카를 씌워주던 카이사르의 모습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 때도 그 이전에도, 이원은 카이사르의 그런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틀렸어.

지금까지 몰랐던 그의 숨겨진 모습에, 이원은 극심한 괴리감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굵어진 눈발이 어깨 위로 묵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이원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서점에서 집까지는 물론이고 대문에서 저택까지 이어지는 넓은 정원길을 그는 걸어서 온 것이다. 

카이사르는 몇 시간 만에 겨우 집에 도착한 그의 모습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이원의 뒤를 쫓게 한 조직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걷기만 하고..."

짧은 보고에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은 곧 머리를 숙인 뒤 방에서 나갔다. 카이사르는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폐속에 들이마셨지만 복잡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거치적거리는 자는 제거한다. 왜 아이라고 해서 달라야하지? 어째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카이사르는 미간을 모은 채 다시 연기를 들이마셨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세상은 새하얗게 뒤덮였다. 아침부터 눈을 치우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왔지만 아직도 눈은 계속 오고 있었다. 이원은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카이사르는 먼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는 이원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또 눈이 오더군."

카이사르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원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냅킨을 펴고 빵을 집어 드는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출근을 하기가 어렵게 됐어. 당분간 집에서 일을 해야겠는 걸."

여전히 말이 없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소금을 뿌리면 눈이 안 쌓인다던데 저 정도 눈이라면 얼마만큼의 소금을..."

"이봐."

갑자기 이원이 카이사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그를 보자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너하고 얘기할 기분 아냐."

그걸로 끝이었다. 서늘한 경고의 말을 한 이원은 조용히 집사가 가져다준 식사를 입에 넣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이원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할 건가?"

예상했던 대로 카이사르는 이원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원은 대답 대신 묵묵히 음식만 입에 넣었다.

"온실의 장미를 따서..."

카이사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원은 냅킨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집사에게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나가버리는 이원의 모습을,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 접시를 치우던 집사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왜 저러시는 겁니까?"

"글쎄."

카이사르는 말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는구나. 저 남자.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화를 낸 건지 전혀 납득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런 시시한 농담 따위나 지껄이고 있는거겠지.

그는 도무지 카이사르라는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남자가 어째서 자신에게는 그렇게 웃으며 농담을 하고 떠들어댈 수 있는건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분명한데 또 자신의 앞에서는 아닌 척 미소를 짓는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남자였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어서 끝내고 돌아가는 게 최선이야.

다시금 결심을 되새기면서, 그는 걸음을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며칠 째 이원은 서재에 틀어박혀 서류와 씨름했다. 스스로도 감탄할 정도로 일에 매달린 것은 어서 이 저택에서 나가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가능한 서재에서 했고 잠도 최소한으로 잤다.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일만 한 셈이다. 의도한 바였지만 카이사르와 마주치는 일도 줄어드렀다. 

기껏해야 식사를 할 때나 복도를 걸어갈 때 맞닥뜨리는 것이 전부였다. 며칠 째 내린 눈으로 카이사르가 집에 머물러있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나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얼굴이 마주치면 시시한 소리를 하고, 이원의 속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짜증을 내던 이원도 곧 그를 무시하는 쪽으로 행동을 바꿨다. 가능하면 줄곧 그렇게 모른 척 지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불행히도 카이사르는 의뢰인이었던 것이다.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개발 중인 땅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어떻게 옮겨갔던 건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아무리 서류를 뒤져봐도 최종 소유자가 묘연했다.

전 사장의 소유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하는 쪽이 정확했다. 꽤 많은 세금을 체납한 상태인 시장은 가급적 재산을 줄여서 신고했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해놓은 걸까?

고민하던 그는 곧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이사르를 만나러 갈 시간인 것이다.

서재를 나와 걸음을 옮기던 이원은 문득 자신이 카이사르를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항상 그는 부르기 전에 먼저 이원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공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걷고 있던 이원은 마침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집사와 마주쳤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집사에게 그는 대답했다.

"네, 혹시 카이사르... 차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집사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원은 재빨리 다른 이들처럼 그를 차르라고 고쳐 부른 뒤 덧붙여 물었다. 집사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여느 때처럼 무심히 대답했다.

"개인 응접실에 계십니다. 1층 복도 끝으로 가보면 아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짤막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대강 머릿속으로 건물의 내부를 떠올렸던 그는 곧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기억해냈다. 바로 이원이 카이사르의 의뢰를 받아 저택에 들어왔을 때, 처음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이었다.

고요한 저택 안은 자신의 발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벽 전체가 귀가 되어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묘한 섬뜩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기던 이원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유리로 된 벽은 여과없이 실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원과 저택의 경계선을 모햐게 절충시킨 듯한 개인 응접실은 그래서 저택의 일부 같기도 하고, 또한 정원의 일부 같기도 했다.

만약 햇살이 좀 더 강한 지역이었다면 충분히 일광욕을 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무심코 바닥을 본 그는 한 켤레의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벗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묻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원은 슬리퍼를 벗고 벽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만들어진 슬라이드도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감은 여전했으나 왜인지 이곳은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택 내부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의 한 귀퉁이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나무와 수풀 덕분인지도 모른다. 발밑의 부드러운 풀이 이원의 발소리를 조용히 삼켜버렸다. 

늘어진 가지 너머로 천장에 매달린 듯한 고치가 보였다. 애벌레가 알에서 몸을 웅크리듯 편안해 보이는 의자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반쯤 이원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이원은 그것이 고치 모양의 안락의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장신의 긴 몸을 편안히 누인 카이사르는 가슴 위에 책을 올려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맨발의 긴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다른 다리는 의자에 걸친 채, 반쯤 누워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에 가까운 전율이 새삼 되살아났다.

전신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반짝이던 남자.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금은 그보다 더 화사하게 빛을 내는 듯했다. 만약에 정말로 천사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남자를 말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이원은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카이사르를 내려다보았다. 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림자가 진 얼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원은 처음으로 카이사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기울어져 있는 쪽의 속눈썹이 그늘이 져 금색으로 반짝이는 한 편 빛을 받는 쪽은 은색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금색으로, 혹은 은색으로 천천히 일렁였다. 평소 빈정거리는 말이나 이원의 속을 긁는 말을 해대기 일쑤인 입술도 지금은 다물어져 단정한 입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카이사르에게 가져갔다.

문득 그의 머리칼이 만지고 싶어졌다. 우아한 금빛의 파도가 눈앞에서 화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 갑자기 카이사르가 번쩍 눈을 떴다

철컥ㅡ

동시에 묵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상황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불시에 글록을 꺼낸 카이사르가 서늘한 눈으로 이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각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이원은 전신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그제야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순간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지없이 냉혹한 얼굴로 이원을 응시하던 카이사르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빙긋 웃는 얼굴로 총을 거둔 카이사르가 글록을 의자의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름을 불러서 깨우라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대수롭지 않게 주의를 준 카이사르가 선뜻 의자에서 일어섰다. 허공에 매달린 의자가 그네처럼 천천히 앞뒤로 흔들렸다.

"놀랐는 걸, 나와 평생 말도 안 할 줄 알았는데."

가볍게 비꼬는 말은 이원이 익히 알던 그와 똑같았다. 이원은 그제야 이성을 찾고 입을 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왔어. 지금 얘기할 수 있나?"

"또 일이야?"

카이사르는 실망한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곧 어깨를 으쓱했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지. 따라 와."

먼저 돌아서는 카이사르의 뒤를 따라 이원은 걸음을 옮겼다. 슬라이드문이 열리고 복도로 나온 순간, 불시에 싸늘한 침묵이 그를 감싸 안았다.

왠지 따뜻한 침대에서 갑자기 혹독한 거리로 내쫓긴 기분이 들었다. 묘한 괴리감에, 이원은 혼자 앞서서 걸어가는 카이사르의 등을 보며 천천히 뒤따라갔다.

수많은 방 중 카이사르가 직접 안내한 곳은 작은 티룸이었다. 작다고 해봐야 이원의 하숙방보다는 훨씬 컸지만 저택의 규모에 비해서 본다면 제법 소박하다고 할 만 했다.

"그래서, 할 얘기란?"

집사가 차를 놓고 나가기를 기다려 카이사르가 물었다.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마치 이원에게 총을 겨눴던 일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태도였다. 자신을 향한 총구에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했던 기억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소름이 이원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새삼 그는 깨달았다. 역시 마피아는 마피아라는 것을. 이원은 생각하며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즈다노프 의원과 전 시장이 함께 손 댄 토지 말인데, 명의자가 달라."

이원은 선뜻 자신이 유추한 사실을 꺼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명의를 빌려준 사람을 찾자는 건가?"

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조사해 봐야겠지만 그 사람이 실마리야. 가능하면 증언을 해달라고 설득을 해야지. 생각대로 된다면 재판에 큰 힘이 될 거야."

잘만 풀린다면 조만간 이 일도 끝이다. 해결책을 내놓은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이원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걸까, 하고 생각한 이원은 차와 함께 놓인 비스킷을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수법은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을 거야. 일단 이 토지에 대한 걸 알아내서 명의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면 그 사람 주변을 알아보는 거야. 비슷한 예가 없는지 물어봐서 계속 추적해 나가면 다른 토지도..."

"내가 무서운가."

와삭거리며 씹던 비스킷의 소리가 뚝 멈췄다. 이원은 똑바로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어딘지 황폐한 시선의 카이사르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킷을 씹어 넘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차분한 음성에 카이사르는 조용히 대답했다.

"날 경계하고 있잖아."

다른 때라면 빙글거리며 말을 돌리거나 빈정거렸을 카이사르가 뜻밖에도 직선적으로 물어오자, 이원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특별히 그런 건 아냐."

이원은 잠잠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저 마피아는 마피아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이원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렇게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다시 물었다.

"내가 아이에게 총을 겨눴다고 아직도 화가 난 건가?"

"어차피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잖아."

이원은 덧붙였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사르였다.

"네가 날 멀리하는 건 내키지 않아."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카이사르는 말없이 이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뜻밖의 말에 이원은 멈칫했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그는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서류를 미끼로 키스를 요구하고, 의뢰랍시고 사람을 집까지 끌어들이고, 스쿠터를 망가뜨리더니 급기야 감금까지 한 주제에.

"그게 관심이었다고?"

생각해보니 짜증이 난 이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발적으로 치켜뜨는 시선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엷은 웃음을 짓지도, 실없는 소리를 하며 이원의 속을 긁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이원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원은 그의 뜻밖의 반응에 의아해 무심코 눈썹을 모으고 말았다. 한동안 조용히 이원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디서나 시선을 사로잡아."

"키가 크니까."

이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카이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끄러미 이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는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그러나 가만히 손가락 끝으로 머리칼을 건드린 것이 전부였다.

뜻밖의 행동에 이원이 선뜻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카이사르는 천천히 손가락을 굴려 이원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의외의 행동에 이원은 당황했다. 

카이사르의 시선이 가만히 이원의 얼굴에 고정되고,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원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그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가 다가온다.

꼼짝 않고 있는 이원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카이사르가 귓가에 속삭였다.

"널 동경하는 남자들이 불쌍하군."

귓가에 느껴지는 낮은 속삭임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원은 생각지 못한 자극에 놀라 그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따스한 숨결이 귓속을 질러오고,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무섭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원은 그순간 벌떡 일어나 선언했다.

"난 일하러 가야겠어."

다짜과ㅉ 자신의 말만 뱉어낸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자신의 등을 응시하는 카이사르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저 자식.

이원은 일부러 쾅쾅 발소리를 내며 빈 복도를 걸어갔다.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질 않나, 머릴 만지지 않나.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원의 머리칼 안으로 들어오던 손가락의 감촉과, 자신을 바라보던 은회색의 눈동자와, 귓가에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까지도.

순간 숨결이 느껴져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몸에서 열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원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등 뒤로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욱 화가 치미는 것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머리칼에 닿던 손가락과 낮은 음성이 계속 되살아났다. 귓속을 질러오던 부드러운 숨결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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