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34)

희미하게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몸이 흔들리는 진동 또한 전해졌다. 문득 어릴 때 배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엷은 미소를 짓는데, 누군가 머리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니…?

이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부연 시야에 누군가 비쳐들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군지를 깨닫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깼어?”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원은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흔들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뭐지…?

상황을 깨달은 것은 얼마간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멍하니 시선을 옮겼던 이원은 모포에 감겨 있는 자신의 몸을 먼저 발견했다. 뒤이어 뺨에 닿는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졸린 눈을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이원은 바로 눈앞에 있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확인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모포에 휩싸인 몸은 잠시 꿈틀한 것이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이원을 안고 걸어가던 카이사르가 멈칫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당신이… 왜,”

이원은 급하게 물었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온통 발음이 새고 입이 무거웠다. 말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었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몸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느라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이원은 신음을 뱉었다. 단편적으로 끊기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는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는 이원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괜찮아, 더 자도 돼.”

이원은 억지로 정신을 일깨우며 입을 열었다.

“내릴, 거야…”

“그래, 그래.”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듯 선선히 말하는 카이사르의 대답에 이원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더 기분이 상하는 것은 꼼짝도 하기 힘든 자신의 몸이었다.

“어디… 가는, 거야…”

모포에 감긴 채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대답했다.

“내 방에.”

이원은 반쯤 뜬 눈을 깜박이며 속삭였다.

“몸이, 이상해…”

가늘게 속삭이는 음성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쉬어, 며칠은 그럴 거야.”

당연한 듯한 대답에 이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마지막에 마셨던 홍차가 떠올랐다. 그 안에 뭔가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지독하게 쓴 맛이 나더라니. 이원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며 안간힘을 써 카이사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집사가…”

이원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차를 줬는데…”

“그래, 다 알고 있어.”

카이사르는 자신의 팔을 움켜쥔 이원의 손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고 자, 처리했으니까. 서류도 무사해.”

문득 이원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뭘까, 이 불쾌감은.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이원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런.

“당신… 이미 알고 있었어…?”

힘겹게 꺼낸 말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웃었을 뿐이다. 순간 이원은 깨달았다. 모두 이 남자가 꾸민 짓이라는 것을.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원은 미끼로서 이 남자에게 이용 되어진 것이다. 배신자를 끌어내고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 도구로서. 그것을 깨닫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이런 남자 때문에 고민한 자신이었다. 아이의 머리에 당당하게 총을 꽂을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태연히 도구로 쓰는 남자. 거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이용당했을 뿐이다.

웃으면서 사람을 바보취급하다니.

이원은 화가 치밀어 카이사르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순간 방심한 카이사르가 이원을 놓치고, 놀란 이원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봐!”

카이사르가 외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이원은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원은 탄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나동그라졌는데도 어떤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순진하게 속아 약을 먹고 이런 꼴이 되다니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숨을 삼키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급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짓이야, 갑자기.”

카이사르가 그를 다시 안아들으려 했지만 이원은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순간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핑 돌았다.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는 이원을 카이사르는 급히 붙잡았다. 날카롭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크게 꺾인 이원의 머리를 카이사르의 손이 감싸 안았다. 귓가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원은 뺨에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에 간신히 눈을 떴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바쁘게 뛰는 맥박이 전해졌다. 마치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맙소사, 뇌진탕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았어.”

카이사르가 말했다. 하지만 이원은 계속 그에게 안겨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그를 밀어냈다.

“놔.”

“자꾸 어딜 간다는 거야, 말 좀 들어.”

카이사르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현기증으로 뇌가 온통 뒤흔들리면서도 이원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지.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당연하고 모두가 옳고. 이원은 온힘을 다해 카이사르의 어깨를 밀어내고 간신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얼떨결에 밀려난 카이사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이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이원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한사코 버텨 이원은 일어섰다.

힘이 풀린 다리가 자꾸만 꺾이려 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견디며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비틀거린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급히 손은 뻗었다. 하지만 이원은 그것을 날카롭게 쳐냈다. 놀란 카이사르의 눈에,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원의 얼굴이 비쳤다.

“혼자… 갈 수, 있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하지 마.”

이원은 카이사르가 내민 손을 다시 뿌리쳤다. 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충혈 된 눈과는 달리 평상시와 다름없는 서늘한 음성으로, 이원은 입을 열었다.

“정도껏, 해.”

악 문 잇새로 이원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필요한 만큼, 썼잖아. 또… 이용할 데가, 남았어?”

카이사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원은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본 뒤 다시 고개를 돌린 것이 전부였다. 비틀거리며 천천히 발을 끌고 가는 이원의 모습에, 멍하니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네가 가장 적절했을 뿐이야.”

이원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그래, 어차피… 너에게, 나란 존재는… 체스의, 말일, 뿐일 테니까.”

카이사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원은 시선을 거둬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화가 치미는 것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이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카이사르 때문에 고민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거친 숨을 내쉬며 간신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불쑥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에 이어 긴 팔이 그의 앞으로 뻗어왔다. 곧바로 난폭하게 허리를 붙잡히고, 미처 놀라 숨을 삼킬 여유도 없이 카이사르가 이원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

카이사르의 음성은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목덜미에 카이사르의 거친 숨결이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그의 어깨에 이를 세웠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어.”

마치 탄식처럼 떨리는 음성이 귓가에 울려왔다. 이원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놓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폐한 은회색의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띠고 이원을 응시했다. 이원은 자꾸만 멀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

간신히 내뱉은 뒤, 카이사르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몸 깊은 곳에서 기어이 토해내듯 힘겹게 말한 카이사르가 입술을 깨물고 이원을 응시하는 것을, 이원은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이용당한 것은 이원인데 오히려 카이사르 쪽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원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이원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후회할 짓은 애초에 하지 말란 말이야.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다리에서 별안간 힘이 빠졌다. 놀란 카이사르가 소리치는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원은 곧바로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고요한 방안에 조용한 숨소리가 쌔근쌔근 이어졌다. 약에 취해 아이처럼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만지고 싶어져서, 가만히 손을 들어 이 마 위에 흩어져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때마침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지지 말라고 짜증을 내는 것 같아서, 카이사르는 무심코 웃음을 지었다. 그 때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자 문밖에서 남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차르, 보고 할 게 있습니다.”

사무적인 남자의 음성에 카이사르는 가만히 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차르, 들어가도 됩니까?”

다소 긴장한 음성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카이사르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원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기다려.”

짧게 응답한 카이사르는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을 채근하지 않도록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카이사르의 얼굴에서는 가면처럼 미소가 사라졌다. 철저히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부하가 서둘러 허리를 숙이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보고라니, 뭐지?”

부하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명령하신 대로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물음에 카이사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라서 튜체프와 다른 녀석들에게 선물로 보내, 카드를 넣어서.”

“메시지는 뭐라고 적을까요?”

남자가 다시 묻자 카이사르의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순간 흠칫한 조직원에게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놓고 간 물건을 돌려준다고.”

조직원은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조직원이 이내 모습을 감추자 카이사르는 돌아서서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푹 잠들어있는 이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얼굴 가득히 미소가 떠올랐다.

가볍게 들린 노크소리에 이원은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눈을 깜박이며 누워있는데,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남자가 머리를 숙였다.

“일어나셨습니까, 곧 아침 식사시간입니다. 욕실은 오른쪽이고 갈아입으실 옷은 안에 준비해 뒀습니다. 아래로 내려오십시오.”

그럼, 하고 다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이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이나 낯선 침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자신이 기절한 뒤 카이사르가 이원을 여기에 데려다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지내던 객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넓은 방에는 온갖 미술품과 앤티크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몇 백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오래 된 가구와 골동품들은 물론이고 침대 위에는 넓고 우아한 천개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사치스러운 저택이었다. 주인의 취향인 거지, 하고 생각하며 이원은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갔었다니.

자신이 남이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고 그런 꼴이 되어버린 것에 화가 치밀었다. 왜 그 남자를 의심하지 않았지? 생각해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다섯 살짜리에게나 통할 수법에 넘어가다니, 멍청한 자식.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이원은 이를 악물었다. 마피아 소굴에 들어와서 그 정도로 경계심이 없다는 건 본인의 실수다. 게다가 약에 취해 그런 추태까지 보였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안고 옮겼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의 앞에서 넘어지고, 말을 더듬고, 그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자 이원은 참지 못하고 침대를 세게 내리쳤다. 그래봤자 푹, 하는 허무한 소리가 들린 게 전부였지만. 왠지 그게 더 짜증이 나서, 이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넓은 욕실에는 이원의 옷이 세탁이 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득 이원은 그것이 예전 집사가 하던 업무였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새로 온 집사인 걸까? 그럼 예전의 그는 어떻게 됐을까.

샤워를 하는 동안 생각은 점차 복잡하게 변해갔다. 카이사르는 언제부터 집사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카이사르가 자신을 미끼로 삼았던 데 대한 불쾌감이 되살아났다. 재빨리 욕실에서 나온 이원은 젖은 머리칼을 홧김에 난폭하게 털어대며 옷을 입었다.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일들 투성이였다. 그 중 자신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원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왔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었다. 발소리를 들은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어서 와, 잘 잤나?”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인사를 건넸다. 엷게 미소 짓는 얼굴도, 말투도 평소와 똑같았지만 이원은 그가 침묵했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무시한 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아직 화가 나있으니 나에게 말 걸지 마, 라는 얼굴로. 카이사르 역시 그것을 눈치 챈 듯 평소와 다르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잠자코 앉아있는 새 이원의 잠을 깨워주었던 새로운 집사가 다가와 이원의 앞에 접시를 놓아주었다. 이원은 다시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이전 집사의 모습은 없었다.

“왜 그러지?”

카이사르가 물었다. 때마침 집사가 빈 바스켓을 가져가고 새로운 빵을 가져왔다. 이원은 썩 내키지 않는 시선을 그에게 향하고 입을 열었다.

“예전의 집사는, 어떻게 됐어?”

“해고 했어.”

이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대답했다.

“해고?”

설마, 그걸로 끝났을까? 고작 해고를 하려고 사람을 그런 함정에 밀어 넣었단 말이야? 반신반의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숨소리가 거슬려서.”

이원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전날 카이사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알아서 할 테니까.

“숨기지 말고 말해, 어떻게 됐어? 내겐 알 권리가 충분하다고 보는데.”

이원이 날이 선 음성으로 말하자 카이사르는 의아해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이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뭘 찾고 있었던 거야? 재판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난 변호사야, 뭐든 알아야 해. 혹시 즈다노프 의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순간 스친 생각에 이원이 덧붙여 물었다. 카이사르는 이원의 성급한 질문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관련은 있지만,”

카이사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넌 알 필요 없어.”

“그럼 재판에서 이기는 건 꿈도 꾸지 마.”

이원은 차갑게 말했다.

“의뢰인이 숨기는 게 있으면 재판에는 이길 수 없어. 게다가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난 너보다 먼저 니콜라이 아저씨의 변호를 맡았어. 모든 일의 우선순위는 그쪽에 있다고, 혹시 니콜라이 아저씨의 재판에 불리한 상황이 하나라도 발생하면 난 당장 이 일에서 손을 떼겠어.”

마지막 선언이 떨어지자 식당 안에는 삽시간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식당을 둘러싼 사내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원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간신히 찾은 증인도 쓸모가 없게 되겠군.”

“뭐라고?”

뜻밖의 말에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억하나? 즈다노프와 베르댜예프의 합작품인 토지에 관한 건.”

무수한 말들이 이원의 머리를 스쳐갔다. 심각하게 미간을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명의를 빌려준 자를 찾아냈어.”

순간 이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카이사르는 짧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도시에 지친 사람들이 집을 떠나 안식을 위해 찾을 듯한 교외의 아담한 별장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삼엄한 경비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별장을 사들인 사람이 이사 온 직후부터 주변을 돌아다니는 낯선 양복 사내들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렸으나 정작 다가가 정체를 알아낼 용기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피아일 거야.

그들은 숙덕거렸다. 굳이 감추지 않아도 그들의 정체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다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최대한 별장 근처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별장 앞의 도로를 통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면서도 굳이 먼 거리를 돌아갔다. 덕분에 별장의 주변은 낯선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미하일 로모노소프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는 언제나 주변을 지키는 조직원들만이 얼씬거릴 뿐 강아지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요양을 위해 도시를 떠난 지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봄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미하일의 건강이 되돌아올 날은 요원했다.

오래 살았지.

미하일은 생각했다. 반대파인 세르게예프의 수장인 사샤와 미하일은 같은 나이였지만 최근 그는 사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병의 유무가 아닌 아마도 의지할 자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일 것이다. 문득 그는 흐려진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워 지는군…

아련한 기억 속에 묻어둔 추억을 되새겼을 때, 문득 멀리서 달려오는 검은 세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은 꼼짝 없이 앉은 채 가까워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측근인 레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로모노소프 씨,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깊이 허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의 마른 얼굴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심 레프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20대에 조직을 물려받은 미하일은 자식이 없다. 몇 번이나 결혼을 권했던 부하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독신이었다. 항간에는 그에게 숨겨둔 아내가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지만 그를 찾아온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하일이 건강할 때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레프는 고작 두 달 새에 10년은 늙어 보이는 미하일을 마주 보며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많이 마르셨습니다.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 겁니까?”

측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걱정해줘서 고맙네.”

차분한 음성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레프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 남자가 사라지면 조직은 와해될 거다. 어떻게든 미하일 로모노소프는 존재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사자로서. 속마음이 얼굴에 나와 버렸을까, 미하일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아직 건강하네.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보지 말게나.”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죄한 레프에게 미하일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래, 오늘 찾아온 이유는 뭐지? 블라디미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겐가?”

미하일 대신 임시로 조직을 맡고 있는 2인자의 이름에, 레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아주 잘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모노소프 씨, 저희는 모두 로모노소프 씨가 어서 쾌차해 다시 저희를 이끌어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하일은 다 안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프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간의 보고 차 왔습니다. 세르게예프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레프는 본론을 꺼냈다.

“베르댜예프 시장을 없앤 것도 모자라 시장의 남은 재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꽤 일이 진척이 된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만약의 경우엔 손을 쓰겠습니다.”

그 때까지 평온하게 기울어져 있던 미하일의 두 눈이 순식간에 매섭게 불타올랐다. 레프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내심 미하일의 권위에 감탄했다.

“누군가, 감히 로모노소프의 영역을 넘보는 자가. 혹시 그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차르입니다.”

레프는 재빨리 대답했다.

“일단은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바로 위협을 가하겠습니다.”

“그 아들놈이…”

미하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이사르 세르게예프.

미하일은 전신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 같던 사샤의 아들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뼛속까지 완전한 마피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내다니.

미하일은 곧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하긴, 우린 모두가 괴물이 아닌가.

“계속하게.”

미하일의 지시에 따라 레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음지에서 도발해 온다면 얼마든지 대응을 할 텐데, 법적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베르댜예프의 모든 것은 우리 조직의 것임을 알면서, 이것은 명백한 도발입니다.”

레프의 음성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점차 빨라졌다. 미하일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모았다. 이미 베르댜예프를 처리했을 때부터 그는 로모노소프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 정면으로 나에게 반항해 오다니.

팔걸이에 놓여있던 미하일의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레프는 그가 원념怨念으로 의지를 되찾는 것을 가슴을 두근거리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입니다. 얼마 되진 않습니다만…”

부하가 서둘러 내민 파일을 받아들며 미하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것뿐이지?”

얇은 두께의 파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빈약했다. 레프는 당혹해하며 대답했다.

“그것이, 그 저주받을 세르게예프가 조직의 고문이 아닌 외부에서 변호사를 사왔습니다. 게다가 모든 조사와 준비를 그의 저택 안에서 하는 모양이라, 정보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변호사를 잡아오면 될 게 아닌가.”

미하일의 날카로운 음성에 레프는 쩔쩔 매며 말했다.

“그게, 차르의 집에서 머물며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직접 쳐들어가지 않는 한 변호사를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미하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레프는 조마조마해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하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험악한 얼굴로 파일을 폈다. 몇 장의 서류가 팔락거리며 빠르게 넘어갔다. 아무렇게나 내용을 훑는 것 같던 그의 시선이 갑자기 멈춘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기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한 명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사샤의 아들 카이사르다. 하지만 미하일의 관심은 그가 아닌 그와 함께 찍힌 다른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미하일이 시선을 고정시킨 곳을 흘긋 본 레프가 서둘러 말했다.

“아, 이 녀석입니다. 차르가 직접 물색한 변호사요. 줄곧 미행하다 며칠 전에 겨우 한 장을 찍었습니다.”

카이사르와 나란히 서점의 계산대에 서있는 그의 모습을, 미하일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순수한 러시아인은 아닌 것 같은데, 혼혈인가?”

미하일은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서류를 읽는 척 고개를 숙여 핏기가 가신 얼굴을 슬쩍 가린 미하일에게, 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인과의 혼혈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ㅈ, ㅈ,…”

레프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적혀있습니다. 성은 발음을 하기가 어려워서…”

레프는 양해를 구한 뒤 직접 서류를 펼쳐 이원에 대한 기록을 미하일에게 보여주었다. 천천히 활자를 훑어가던 미하일의 시선이 멈추고, 그가 입을 열었다.

“꽤 특이한 경력이군.”

“러시아에 온지는 7년이 됐다고 하던데, 제법 실력이 좋은 모양입니다. 혹시 걸림돌이 될까봐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문득 레프는 미하일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파일을 닫아버리고, 레프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인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오래 쉬었군, 이제 그만 떠나야겠네.”

“네? 어디로 말씀입니까?”

갑자기 벌떡 일어난 훤칠한 남자의 모습에, 레프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근래 병을 앓아 야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쭉 뻗은 자세로 미하일은 레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순간 레프는 전율에 떨었다. 기운을 잃고 앉아있던 병약한 노인은 더 이상 없었다. 사자라 일컬어지는 미하일의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물론 조직으로 돌아갈 거네.”

레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당황해 서둘러 물었다.

“돌아가신다고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기쁨과 불안이 교차했다. 선뜻 걸음을 옮기려던 미하일이 비틀거렸다. 레프는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로모노소프 씨, 괜찮으시겠습니까? 좀 더 요양을 하시는 쪽이…”

하지만 미하일은 대답 대신 한 쪽을 가리켰다. 레프는 조심스레 미하일의 옆을 떠나 급히 지팡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미하일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똑바로 허리를 폈다.

“세르게예프의 후계자를 마냥 날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레프는 그의 뒤에서 오랜만에 눈부신 휘광을 발견했다. 가슴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얼마나 이 날을 고대해 왔던가.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사자의 귀환이었다.

-------- End or To be continued

** 연재분 마지막회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 추천해주신 분들, 긴 감상 짧은 감상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예약해주신 분들 열심히 준비해서 뵙겠습니다^ㅁ^ 웹에서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 드립니다. 아래는 2차 광고에 올리는 발췌분입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사랑의 행방은?! 아슬아슬한 둘의 줄다리기!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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