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4)

[ZIG] 장미와 샴페인 (12)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에서 랜턴을 켜 방안을 뒤지던 남자는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텁게 내리쳐진 커튼 탓에 남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는 명백했다. 갑작스러운 이원의 등장에 당황한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곧바로 서재와 이어지는 문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이 자식, 어딜 도망가?!”

다짜고짜 어깨를 붙잡은 이원이 세게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이원은 곧바로 불을 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벽으로 손을 뻗기가 무섭게 나동그라진 남자가 이원의 다리를 잡아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원이 바닥에 몸을 부딪치고, 곧이어 난투극이 벌어졌다. 어두운 방안에서 싸우는 것은 상대가 여럿인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찾아 찌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원과 남자는 서로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고 이따금 헛방질을 쳐대면서 방안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어떻게든 달아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초조해하며 내지르는 주먹이 계속해서 이원의 뺨을 스치며 빗나갔다. 이원은 그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몸을 숙여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

다.

빠각, 하고 정확하게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문득 저택 밖에서 차의 엔진소리가 들린 듯 했다. 무심코 멈칫한 것이 실수였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시에 이원의 어깨를 잡고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순간 이원은 숨을 삼키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남자가 미친 듯이 방을 뒤쳐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 자식, 거기 안 서…?!”

고함을 지르며 더듬더듬 밖으로 나온 순간, 갑자기 쏟아진 실내의 환한 불빛에 이원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죠?!”

다급하게 달려온 집사가 서둘러 물었다. 이원은 음성으로 그를 확인한 뒤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누가… 누구 수상한 사람 못 봤습니까? 방금 내 방에서 나갔을 텐데.”

“네? 그런 건 못 봤습니다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더듬었다. 이원은 이마 한 쪽을 움켜쥔 채 목구멍 깊은 곳에서 굵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뒤이어 가까이 다가오는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소리가 들?便?.”

“잠깐, 피가 나고 있지 않습니까. 변호사 양반, 손 좀 떼봐요.”

“어이, 거기! 의사를 불러, 지금 당장!”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 속에서, 이원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늦게 이마를 감싼 자신의 손이 흠뻑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끈적하게 손을 적시는 액체의 정체를 확인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이원은 발치에 흠뻑 고여 있는 붉은 피를 직접 목격했다. 소란을 피우던 남자들 틈으로 다른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지금 뭐하고 거지?”

귀에 익은 서늘한 음성이 귓속을 질러왔다. 일시에 남자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일사분란하게 몸을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놀란 얼굴의 카이사르가 서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와 같은 차림으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미소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한참동안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순간 이원은 보았다.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아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총을 겨눴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이원은 카이사르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말을 꺼냈다.

“누군가 침입했었어.”

카이사르는 한 템포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침입이라고?”

카이사르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이원은 그래서 더 섬뜩함을 느꼈다. 이원은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말했다.

“일단 주변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달아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카이사르가 흘긋 시선을 향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갔다. 남은 무리들이 각기 흩어져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 카이사르는 선뜻 몸을 숙여 이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치료부터 받는 게 좋겠군, 얘기는 그 다음에 듣지.”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원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꽤 출혈이 심했는지 앉아서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고집을 부리다 고꾸라지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순순히 카이사르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그 때까지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즉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차르. 제가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서 손님에게 이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평소 이원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던 집사가 평소의 거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연거푸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을 이원은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서늘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책임추궁은 나중에 하지. 일단 너도 집안을 찾아 봐, 수상한 녀석이 보이지 않는지.”

“알겠습니다.”

집사는 곧바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일단 내 방으로 가지.”

이원을 데리고 가려던 카이사르에게 이원이 말했다.

“잠깐만, 그 전에 내 방부터 확인을 해야겠어.”

계속해서 부축해주려는 카이사르를 뿌리치고, 이원은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선 순간 이원은 자신이 실수로 서재에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곳은 침실이었다.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하나씩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얼마 안 되는 개인물품이 죄다 밖으로 나와 흩어져 있었다. 서랍에 반쯤 걸쳐져 나와있는 브리프를 흘긋 보았던 이원은 곧바로 서랍을 꺼내 뒤집었다. 쏟아지는 속옷을 무시한 채, 이원은 뒤집힌 서랍의 바닥을 확인했다. 거기엔 테이프로 고정시킨 서류봉투가 있었다.

“그건 뭐지?”

이원이 봉투를 떼어내자 카이사르는 놀란 듯 물었다.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중요한 서류는 빼두었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원이 봉투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을 기다렸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없어진 건?”

카이사르의 물음에 이원은 다시 봉투를 닫았다.

“됐어, 이게 무사하니까.”

이원은 지친 듯 숨을 내쉰 뒤 털썩 침대에 앉았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대저택에서, 하필 이원의 방에 도둑이 들다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분명 이원이 조사하고 있는 사건과 관계가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불현듯 카이사르가 물었다.

“많이 아픈가?”

이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조금, 별 거 아냐.”

피로 흠뻑 젖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원이 다시 관자놀이를 꽉 누르는데, 피냄새에 섞여 뭔가 다른 향기가 느껴졌다.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것은 카이사르에게서 풍기던 오드콜로뉴의 향기였다. 시선을 들자 카이사르가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슈트 재킷에 꽂혀있던 손수건이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카이사르는 직접 이원의 손을 잡아 그 안에 손수건을 밀어 넣었다. 이원의 젖은 손 위로 카이사르가 손을 겹쳐 지그시 누르는 것을, 이원은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었다.

문득 카이사르가 다른 손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손이 이원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이원은 이번에도 역시 그냥 두었다. 이원을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되돌아와 있었다. 이원은 또다시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하려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을 때, 카이사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돌리고 화제를 바꿨다.

“의사가 온 모양이군.”

그 말에 이원은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남자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사이로 급히 가까워지는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들었다.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해 난폭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 한 쪽 벽에 기대어 서있는 카이사르를 뒤로 한 채 치료를 받으며, 이원은 잠자코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겨우 피는 멈췄지만 상처는 제법 커서, 의사는 가져온 의료기구로 이원의 이마 한 쪽을 서너 바늘 꿰매야 했다.

“흉터가 남는 건 아니겠지?”

붕대를 감는 의사에게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의사는 흠칫 놀라 그만 반창고를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이원의 이마를 감싼 붕대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의사 대신 재빨리 붕

대를 잡아 고정시킨 이원이 입을 열었다.

“문신이 생긴 걸로 치면 돼.”

“그런 센스 없는 문신을 새기다니 취미도 고약하군.”

무심히 말한 카이사르가 흘긋 의사에게 시선을 향했다. 의사는 황급히 반창고를 자르며 대답했다.

“괘, 괜찮을 겁니다. 네, 큰 상처는 아니니까요, 네.”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 의사가 겨우 치료를 끝내고 왕진가방을 챙겼다. 뒤늦게 문을 연 조직원이 빠른 말투로 보고했다.

“차르, 집안과 정원을 모두 뒤졌지만 수상한 자의 그림자는 없었습니다.”

이원은 이내 찌푸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괴한이 나가자마자 바로 쫓아나갔다. 공백이 있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기다 직후에 조직원들이 달려왔는데 없다고? 이원의 표정이 이내 꺼림칙한 것으로 돌변했다. 카이사르가 부하에게 물었다.

“침입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같은 대답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어떤 자인지 보았나?”

이원이 고개를 들자 카이사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이 어두워서… 대강 체형으로 남자라고만 생각했어.”

카이사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널 때리고 달아나다니 그쪽도 상당히 실력이 좋은가 보군.”

이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언젠가 같은 상황이 되면 당신은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지.”

카이사르는 짧게 웃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이 금세 긴장해 머리를 숙였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경비를 강화해, 침입자가 있었던 것은 명백히 너희들의 과실이야.”

카이사르의 입가에 냉소가 지어졌다.

“저택에 침입자가 들어오다니.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거울을 봐야겠어, 머리가 붙어있는지 확인해야 할 테니까.”

조직원은 금세 굳어진 표정으로 서둘러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차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물러가.”

카이사르의 말에 조직원은 순식간에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카이사르가 이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서류는 무사하고 수상한 녀석도 없다는 거군.”

“놓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이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원은 심상치 않은 그의 조용한 음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이 밝았다. 엉망이 된 방 대신 다른 객실로 안내 된 이원은 밤새 뒤척이며 선잠에 빠졌다 겨우 눈을 떴다. 부석부석한 눈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남자들이 주변을 오가며 살벌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본 이원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방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따라붙은 집사가 직접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루스키들의 따끔한 시선 속에 그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걸어갔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이원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카이사르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서서 귓속말로 뭔가를 보고하고 있던 남자는 이원의 모습을 보자 즉각 허리를 펴고 입을 다물었다. 이원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른 척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원이 자리에 앉자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경비를 강화했어.”

이미 알고 있다. 복도를 오가는 서너 명의 남자들은 기본에다 식당에도 귀퉁이마다 슈트의 남자들이 서있었다. 이원은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꺼림칙한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종일 이런 남자들이 집안을 서성거릴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묵묵히 빵을 잘라 입으로 가져가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그렇게 짜증스러운 얼굴 할 거 없어, 경비를 강화한 건 저택의 외부니까. 저택 안은 예전과 똑같을 거야.”

이원이 시선을 향하자 카이사르가 덧붙였다.

“외부인의 소행일 테니까 저택의 밖과 정원에 대한 경비만 확실하게 하면 걱정할 건 없어.”

이제 됐냐는 듯이 카이사르가 미소를 지었다. 이원은 따라 웃지 않았지만 부동의 자세로 서있던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흠칫 놀라는 것은 여과 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주변의 동요에는 아랑곳없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잇는 카이사르의 얼굴에, 이원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가 출근을 위해 떠나고 나자 과연 그의 말대로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남자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대신 저택의 밖과 정원을 감시하는 인원은 더 늘어난 것 같았지만 이원은 일단 눈앞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 데에 만족했다. 어차피 자신은 서재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테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서재에서 나갈 때마다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상상하면 차라리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 안에 갇혀 있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편한 상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젓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사이를 둔 뒤 문이 열리고, 집사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슬며시 얼굴을 내밀었던 그는 이원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듯 했다. 이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집사가 입을 열었다.

“잠시 쉬었다 하시죠.”

그는 이원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와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여느 때처럼 차를 놓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그는 달랐다. 집사는 이원이 앉아있는 바닥에 트레이를 내려놓더니 똑바로 허리를 펴고 그와 마주 앉았다. 뜻밖의 행동에 이원이 놀란 눈을 뜨자 그는 이원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었다. 이원은 또 한 번 놀랐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언제나 흰 눈으로 이원을 곱지 않게 흘겨보던 그가 갑자기 내비친 태도의 변화에 이원은 선뜻 적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멀거니 보고만 있는 이원의 반응에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정말 놀라셨죠?”

쪼르륵, 찻잔에 홍차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사는 잘 우려낸 홍차를 적당히 따른 뒤 이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상처까지 입으시다니,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를 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집사님께서 잘못한 일은 없죠. 다행히 없어진 물건도 없으니까…”

집사는 처음으로 이원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집사가 밀어준 홍차를 들고 이원이 말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집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권유를 대신했다. 이원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이 싸움을 그렇게 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볍게 건넨 칭찬의 말에 이원은 호의를 받아들이고 마주 웃어보였다.

“그냥 몸을 지키는 정도죠. 운이 좋았습니다.”

이원의 대답에 집사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없어진 물건은 없었습니까?”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한 서류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행이죠.”

집사는 가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렇습니까…”

이원은 다시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문득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홍차를 너무 우렸나. 집사가 끓이는 홍차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카이사르를 떠올렸을 때,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이원이 미간을 모은 채 눈을 깜박였다. 섬뜩한 침묵이 흐르고, 집사가 미소를 지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문득 현기증이 느껴졌다. 눈앞의 집사가 둘로 보였다. 순간 이원은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갈색의 홍차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일어서려던 이원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아차,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찻잔을 떨어뜨린 다음이었다. 뜨거운 홍차가 흥건히 쏟아지며 서류 위로 길게 퍼져나갔다. 아, 이래서 일하면서 먹는 건 안하려고 했는데. 문득 이원은 흐릿한 의식 너머로 생각했다. 곧이어 눈이 감기고, 그는 그대로 서류 위에 쓰러졌다.

정원의 한쪽에 주차한 검은 세단은 시동을 끈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은 차 안에도 가득했다.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이는 남자의 뒤로 매캐한 시가의 연기가 퍼져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흠칫 놀랐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상황을 들은 그가 룸미러를 통해 뒤를 보았다.

“차르, 쥐가 치즈를 물었습니다.”

후, 하고 길게 연기를 뱉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룸미러에 비친 백금발의 남자가 희미한 냉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좌석에 깊숙이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쥐를 잡으러 가볼까.”

어디야, 어디 있지, 분명히 이 안에 있을 텐데.

집사인 이고르는 서둘러 서류를 뒤적였다. 닥치는 대로 서류를 집어 헤치고 서랍을 뒤적였다. 분명 어딘가에 숨겨놨을 텐데. 황급히 몸을 돌리던 이고르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그만 주

저앉고 말았다. 정강이를 움켜쥐고 웅크린 그의 시선은 원망스레 이원에게로 향했다.

이원은 아직 의식을 잃은 채였다. 독한 약을 썼으니 쉽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고르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모두 이 남자 때문이다. 처음부터, 죄다 이 남자 때문인 것이다.

어서 이 저택을 떠나야 한다. 이고르는 미친 듯이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를 뒤졌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튜체프는 진노할 것이고, 자신의 생명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문득 이고르는 소파 밑에 봉투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고르는 힘껏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종이의 두터운 감각이 느껴졌다. 간신히 봉투를 꺼내 황급히 안을 열어본 이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다.

이고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을 때였다.

철컥.

머리 위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고르는 순간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크게 열린 시야에 삽시간에 주위를 에워싸는 남자들의 긴 다리가 비쳐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십여 개의 총구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얼어버린 이고르의 귀에 조용한 구둣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고르.”

재빨리 옆으로 비켜난 남자들 사이로 카이사르가 걸어 들어왔다. 은빛의 차르가 그를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꼬리가 잡히는군.”

이고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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