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G] 장미와 샴페인 (11)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세상은 새하얗게 뒤덮였다. 아침부터 눈을 치우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왔지만 아직도 눈은 계속 오고 있었다. 이원은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카이사르는 먼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그는 이원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또 눈이 오더군.”
카이사르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원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냅킨을 펴고 빵을 집어 드는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출근을 하기가 어렵게 됐어. 당분간 집에서 일을 해야겠? 걸.”
여전히 말이 없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소금을 뿌리면 눈이 안 쌓인다던데 저 정도 눈이라면 얼마만큼의 소금을…”
“이봐.”
갑자기 이원이 카이사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그를 보자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너하고 얘기할 기분 아냐.”
그걸로 끝이었다. 서늘한 경고의 말을 한 이원은 조용히 집사가 가져다준 식사를 입에 넣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이원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할 건가?”
예상했던 대로 카이사르는 이원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원은 대답 대신 묵묵히 음식만 입에 넣었다.
“온실의 장미를 따서…”
카이사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원은 냅킨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집사에게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나가버리는 이원의 모습을,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 접시를 치우던 집사가 눈치를 보다 물었다.
“왜 저러시는 겁니까?”
“글쎄.”
카이사르는 말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는 구나, 저 남자.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화를 낸 건지 전혀 납득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런 시시한 농담 따위나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이원은 도무지 카이사르라는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서슴없이 총을 겨누는 남자가 어째서 자신에게는 그렇게 웃으며 농담을 하고 떠들어댈 수 있는 건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분명한데 또 자신의 앞에서는 아닌 척 미소를 짓는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남자였다. 이원은 카이사르의 碩옜? 짜증이 났다.
어서 끝내고 돌아가는 게 최선이야.
다시금 결심을 되새기면서, 이원은 걸음을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며칠 째 이원은 서재에 틀어박혀 서류와 씨름했다. 스스로도 감탄할 정도로 일에 매달린 것은 어서 이 저택에서 나가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가능한 서재에서 했고 잠도 최소한으로 잤다.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일만 한 셈이다. 의도한 바였지만 카이사르와 마주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기껏해야 식사를 할 때나 복도를 걸어갈 때 맞닥뜨리는 것이 전부였다. 며칠 째 내린 눈으로 카이사르가 집에 머물러있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나마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전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얼굴이 마주치면 시시한 소리를 하고, 이원의 속을 건드렸다. 처음에는 짜증을 내던 이원도 곧 그를 무시하는 쪽으로 행동을 바꿨다. 가능하면 줄곧 그렇게 모른 척 지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불행히도 카이사르는 의뢰인이었던 것이다.
……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개발 중인 땅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어떻게 옮겨갔던 건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아무리 서류를 뒤져봐도 최종 소유자가 묘연했다. 전 시장의 소유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하는 쪽이 정확했다. 꽤 많은 세금을 체납한 상태인 시장은 가급적 재산을 줄여서 신고했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해놓은 걸까?
고민하던 이원은 곧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이사르를 만나러 갈 시간인 것이다.
서재를 나와 걸음을 옮기던 이원은 문득 자신이 카이사르를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항상 그는 부르기 전에 먼저 이원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공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걷고 있던 이원은 마침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집사와 마주쳤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집사에게 이원은 대답했다.
“네, 혹시 카이사르… 차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집사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원은 재빨리 다른 이들처럼 그를 차르라고 고쳐 부른 뒤 덧붙여 물었다. 집사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여느 때처럼 무심히 대답했다.
“개인 응접실에 계십니다. 1층 복도 끝으로 가보면 아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원은 짤막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대강 머릿속으로 건물의 내부를 떠올렸던 그는 곧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기억해냈다. 바로 이원이 카이사르의 의뢰를 받아 저택에 들어왔을 때, 처음 안내를 받아 향한 곳이었다. 고요한 저택 안은 자신의 발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벽 전체가 귀가 되어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묘한 섬뜩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기던 이원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유리로 된 벽은 여과 없이 실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원과 저택의 경계선을 묘하게 절충시킨 듯한 개인 응접실은 그래서 저택의 일부 같기도 하고, 또한 정원의 일부 같기도 했다. 만약 햇살이 좀 더 강한 지역이었다면 충분히 일광욕을 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무심코 바닥을 본 이원은 한 켤레의 슬리퍼가 아무렇게나 벗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묻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원은 슬리퍼를 벗고 벽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만들어진 슬라이드도어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감은 여전했으나 왜인지 이곳은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택 내부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의 한 귀퉁이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나무와 수풀 덕분인지도 모른다. 발밑의 부드러운 풀이 이원의 발소리를 조용히 삼켜버렸다. 늘어진 가지 너머로 천장에 매달린 듯한 고치가 보였다. 애벌레가 알에서 몸을 웅크리듯 편안해 보이는 의자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반쯤 이원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이원은 그것이 고치 모양의 안락의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장신의 긴 몸을 편안히 누인 카이사르는 가슴 위에 책을 올려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맨발의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다른 다리는 의자에 걸친 채, 반쯤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에 가까운 전율이 새삼 되살아났다. 전신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반짝이던 남자.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금은 그보다 더 화사하게 빛을 내는 듯 했다. 만약에 정말로 천사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남자를 말하는 것일 게 분명했다. 이원은 그 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카이사르를 내려다보았다. 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림자가 진 얼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원은 처음으로 카이사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기울어져 있는 쪽의 속눈썹이 그늘이 져 금색으로 반짝이는 한 편 빛을 받는 쪽은 은색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금색으로, 혹은 은색으로 천천히 일렁였다. 평소 빈정거리는 말이나 이원의 속을 긁는 말을 해대기 일쑤인 입술도 지금은 다물어져 단정한 입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원은 무심코 손을 내밀어 카이사르에게 가져갔다. 문득 그의 머리칼이 만지고 싶어졌다. 우아한 금빛의 파도가 눈앞에서 화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 갑자기 카이사르가 번쩍 눈을 떴다.
철컥―
동시에 묵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상황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불시에 리볼버를 꺼낸 카이사르가 서늘한 눈으로 이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각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이원은 전신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그제야 이원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순간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지없이 냉혹한 얼굴로 이원을 응시하던 카이사르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빙긋 웃는 얼굴로 총을 거둔 카이사르가 리볼버를 의자의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름을 불러서 깨우라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대수롭지 않게 주의를 준 카이사르가 선뜻 의자에서 일어섰다. 허공에 매달린 의자가 그네처럼 천천히 앞뒤로 흔들렸다.
“놀랐는 걸, 나와 평생 말도 안 할 줄 알았는데.”
가볍게 비꼬는 말은 이원이 익히 알던 그와 똑같았다. 이원은 그제야 이성을 찾고 입을 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왔어. 지금 얘기할 수 있나?”
“또 일이야?”
카이사르는 실망한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곧 어깨를 으쓱했다.
“차를 마시면서 얘기하지. 따라 와.”
먼저 돌아서는 카이사르의 뒤를 따라 이원은 걸음을 옮겼다. 슬라이드문이 열리고 복도로 나온 순간, 불시에 싸늘한 침묵이 그를 감싸 안았다. 왠지 따뜻한 침대에서 갑자기 혹독한 거리로 내쫓긴 기분이 들었다. 묘한 괴리감에, 이원은 혼자 앞서서 걸어가는 카이사르의 등을 보며 천천히 뒤따라갔다.
수많은 방 중 카이사르가 직접 안내한 곳은 작은 티룸이었다. 작다고 해봐야 이원의 하숙방보다는 훨씬 컸지만 저택의 규모에 비해서 본다면 제법 소박하다고 할 만 했다.
“그래서, 할 얘기란?”
집사가 차를 놓고 나가기를 기다려 카이사르가 물었다.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마치 이원에게 총을 겨눴던 일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한 태도였다. 자신을 향한 총구에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했던 기억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소름이 이원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새삼 이원은 깨달았다. 역시 마피아는 마피아라는 것을. 이원은 생각하며 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즈다노프 의원과 전 시장이 함께 손 댄 토지 말인데, 명의자가 달라.”
이원은 선뜻 자신이 유추한 사실을 꺼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명의를 빌려준 사람을 찾자는 건가?”
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조사해 봐야겠지만 그 사람이 실마리야. 가능하면 증언을 해달라고 설득을 해야지. 생각대로 된다면 재판에 큰 힘이 될 거야.”
잘만 풀린다면 조만간 이 일도 끝이다. 해결책을 내놓은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이원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걸까, 하고 생각한 이원은 차와 함께 놓인 비스킷을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수법은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을 거야. 일단 이 토지에 대한 걸 알아내서 명의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면 그 사람 주변을 알아보는 거야. 비슷한 예가 없는지 물어봐서 계속 추적해 나가면 다른 토지도…”
“내가 무서운가.”
와삭거리며 씹던 비스킷의 소리가 뚝 멈췄다. 이원은 똑바로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어딘지 황폐한 시선의 카이사르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킷을 씹어 넘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차분한 음성에 카이사르는 조용히 대답했다.
“날 경계하고 있잖아.”
다른 때라면 빙글거리며 말을 돌리거나 빈정거렸을 카이사르가 뜻밖에도 직선적으로 물어오자, 이원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특별히 그런 건 아냐.”
이원은 잠잠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저 마피아는 마피아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카이사르는 물끄러미 이원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렇게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다시 물었다.
“내가 아이에게 총을 겨눴다고 아직도 화가 난 건가?”
“어차피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잖아.”
이원은 덧붙였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사르였다.
“네가 날 멀리하는 건 내키지 않아.”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카이사르는 말없이 이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뜻밖의 말에 이원은 멈칫했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이원은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서류를 미끼로 키스를 요구하고, 의뢰랍시고 사람을 집까지 끌어들이고, 스쿠터를 망가뜨리더니 급기야 감금까지 한 주제에.
“그게 관심이었다고?”
생각해보니 짜증이 난 이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발적으로 치켜뜨는 시선에, 카이사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엷은 웃음을 짓지도, 실없는 소리를 하며 이원의 속을 긁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이원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원은 그의 뜻밖의 반응에 의아해 무심코 눈썹을 모으고 말았다. 한동안 조용히 이원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디서나 시선을 사로잡아.”
“키가 크니까.”
이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카이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끄러미 이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이원은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그러나 가만히 손가락 끝으로 머리칼을 건드린 것이 전부였다. 뜻밖의 행동에 이원이 선뜻 반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카이사르는 천천히 손가락을 굴려 이원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의외의 행동에 이원은 당황했다. 카이사르의 시선이 가만히 이원의 얼굴에 고정되고,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원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그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가 다가온다. 꼼짝 않고 있는 이원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카이사르가 귓가에 속삭였다.
“널 동경하는 남자들이 불쌍하군.”
귓가에 느껴지는 낮은 속삭임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원은 생각지 못한 자극에 놀라 그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따스한 숨결이 귓속을 질러오고,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무섭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원은 그 순간 벌떡 일어나 선언했다.
“난 일하러 가야겠어.”
다짜고짜 자신의 말만 뱉어낸 이원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자신의 등을 응시하는 카이사르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저 자식.
이원은 일부러 쾅쾅 발소리를 내며 빈 복도를 걸어갔다.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질 않나, 머릴 만지지 않나.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원의 머리칼 안으로 들어오던 손가락의 감촉과, 자신을 바라보던 은회색의 눈동자와, 귓가에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까지도.
순간 숨결이 느껴져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몸에서 열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원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등 뒤로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욱 화가 치미는 것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머리칼에 닿던 손가락과 낮은 음성이 계속 되살아났다. 귓속을 질러오던 부드러운 숨결까지도.
며칠 째 내리던 눈이 간신히 그쳤다. 오전 내내 눈을 치우는 작업하고 나서야 차는 정원을 달릴 수 있게 됐다. 늦게까지 일에 몰두하다 잠이 든 이원은 눈을 치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밖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보자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눈덩어리들을 바라보던 이원은 아침식사를 하며 볼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덜컥.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던 이원은 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카이사르와 하마터면 정면으로 맞부딪칠 뻔했다. 줄곧 집에만 있던 탓에 차림새도 러프했던 카이사르지만 오늘은 달랐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잿빛 슈트를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는 그의 뒤로 코트를 두 팔에 걸친 집사의 모습이 비쳤다. 놀란 눈을 뜨고 황급히 멈춰선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려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전날의 일이 되살아나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원은 빙글거리며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던져 주었다. 반사적으로 서류를 받아든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쏘듯이 내뱉었다.
“오늘 안으로 그거 다 검토해서 얘기해.”
그리고 이원은 보란 듯이 뒤돌아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카이사르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원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남을 가지고 노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거야? 하여간 마피아들이란. 이원은 난폭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오후가 다 가도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원은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다 몇 번이나 같은 자리를 되짚어 읽어야 했다.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 수긍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이 일을 맡은 건 니콜라이의 재판을 끝내기 위해서였는데 증거를 찾기는커녕 끝도 없는 서류에 치여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계속해야 하는 거지. 몇 시간 동안 의미 없는 반복을 계속하던 이원은 결국 포기하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머리를 좀 식히는 게 좋겠다.
오랜만에 산책이나 할까.
쏟아지는 눈으로 줄곧 집안에만 갇혀있다시피 했던 지난 며칠을 떠올리며 이원은 선뜻 몸을 일으켰다. 하던 일은 젖혀두고 서재와 연결 된 문을 통해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이원은 코트를 꺼내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 순간 뒤에서 조용한 음성이 불쑥 들려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흠칫 놀란 이원이 돌아보자 예상했던 대로 집사가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항상 그를 주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번 불쑥불쑥 자신의 앞에 나타나는 집사의 모습에 이원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집사의 얇은 눈이 흘긋 코트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원이 말했다.
“잠깐 산책을 다녀오려는 것뿐입니다.”
순간 집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멈칫한 이원에게 집사는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손에는 모자를 들고 있었다.
“혹시 외출을 하게 되면 착용하시라고 차르께서 전하고 가셨습니다.”
이원은 부드러운 털이 수북이 느껴지는 샤쁘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필요없다고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샤쁘카 없이 눈덮인 정원을 걷는다고 생각하자 벌써 추위가 밀려오는 듯 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이원은 짧게 감사의 말을 한 뒤 샤쁘카를 머리에 썼다.
“멀리 가실 겁니까?”
집사의 물음에 이원은 말을 흐렸다.
“네… 아마도.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이원이 덧붙이자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식사는 원하실 때 차려드릴 테니 편하게 다녀오십시오.”
이원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남긴 뒤 이원은 저택을 나섰다. 깨끗하게 눈이 치워진 정원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집사는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발밑에서 덜 치워진 눈이 뽀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원은 하얗게 새어나오는 입김을 조금씩 나눠 뱉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은 끝도 없이 넓었다. 행여나 이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하얗게 눈이 덮인 정원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해서, 이 광경을 본다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정원을 걷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 덮인 침엽수들이 줄을 지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경이로우면서도 환상적인 풍경을 눈으로 보면서도 이원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어지러운 생각은 장소를 옮겨도 여전히 계속되어서, 그는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무심코 기울어진 샤쁘카를 밀어 올리던 이원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긴 손가락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원은 미간을 모은 채 계속해서 걸었다. 머릿속은 니콜라이의 재판과 베르댜예프의 부정에 관한 연결고리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어느새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었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무시해버리려 했지만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자신을 바라보던 은회색의 눈동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 자신을 향해 뻗었던 긴 손가락.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귀를 감쌌던 이원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이원은 고민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짜증나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고 놀리는 게 분명한 남자 때문에 화를 내는 것조차 싫어졌다.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던 이원의 시야에 때마침 두터운 침엽수 한 그루가 들어왔다. 이원은 홧김에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래 된 나무의 기둥이 무겁게 흔들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르릉, 하는 불길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왔다. 그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이원은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덩어리를 보았다.
억.
무심코 벌어진 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눈뭉치는 이원을 덮쳐버렸다.
퍽.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버린 이원은 뒤늦은 신음을 토해내려 했으나 이 역시 불가능했다. 입안 가득 들어온 눈을 황급히 뱉어낸 이원은 자신의 위에 쌓인 눈덩어리를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헤쳐 나왔다.
이미 몰골은 엉망이었다. 샤쁘카는 눈에 깔려 납작 눌려버렸고, 코트는 젖어서 벌써부터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입안에는 아직 남은 눈의 잔여물이 부서진 나뭇잎과 함께 부석거리고 있었다.
“젠장!”
이원은 다시 나무를 걷어차려다 멈칫하고 대신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짜증이 나서 폭발할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고민하고 신경쓰이는 것도 화가 나는데 눈에 깔린 데다 흠뻑 젖어버렸다. 이원은 산책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한껏 어깨를 움츠린 채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악 문 잇새로 끊임없이 욕설을 뱉어냈다.
간신히 저택에 돌아오자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책을 한 시간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고팠다. 이원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종종걸음으로 방을 향해 걸어갔다. 간단히 먹을 것을 준비해달라고 할까. 일단 뜨거운 물에 몸부터 담그자. 이원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섬뜩한 예감을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뭔가 불쾌한 위화감이 전해졌다. 이원은 미간을 모은 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스산한 한기가 공기 중으로 밀려왔다. 이원은 소리를 죽여 조용히 문을 열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익숙한 방의 정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원은 미친 듯이 서랍을 열어 안을 뒤지는 낯선 남자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순간 이원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질렀다.
“당신 누구야?!”
-------- 계속
** 긴 감상, 짧은 감상 주시는 꿀벌님들 감사합니다;ㅁ; 행사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답글을 못 드리고 있어요. 하지만 항상 감사히 잘 받아먹고 있습니다. 곧 연재분이 끝나네요. 마지막까지 재밌게 읽어주세요^_^
** 코멘트 주신 꿀벌님께서 빼먹은 부분을 지적해주셨네요;ㅁ; 전편에서 카이사르와 Street children의 부딪침이 있던 장소는 말씀하신 대로 골목길이 맞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는 허름한 뒷골목이었는데 미처 그 부분을 쓰질 못했네요. 묘사가 부족해 죄송합니다. 책으로 낼 때는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