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4)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을 맞으며 승용차는 저택을 나와 도로에 들어섰다. 뚫어져라 창밖을 보고 있던 이원은 세단이 도로를 지나가는 차의 무리로 향하려 하자 곧 입을 열었다.

“난 여기서 내려줘.”

본격적으로 도로의 정체에 끼어들기 전에 이원은 말했다. 남자가 멈칫하고 룸미러를 통해 뒤를 보자 카이사르가 물었다.

“어딜 가는데? 바래다주지.”

“서점에 간다고 했잖아. 됐어, 여기서 전차를 타면 되니까. 잠깐 세워주시겠습니까? 전 여기서 내립니다.”

운전을 하는 남자에게 직접 건넨 요구에 카이사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우자 이원은 코트의 깃을 여미며 선뜻 도로로 내려섰다. 멈춰 선 세단의 뒤를 따라 줄줄이 선 승합차가 보였다. 

무심히 시선을 돌려 전차의 정류장으로 향하려는데, 문득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았던 이원은 그대로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린 카이사르가 똑바로 허리를 펴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멈춰선 승합차의 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앞을 다투어 마구 뛰어나왔다. 점차 굵어지는 눈발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원은 당황해 눈을 깜박이며 카이사르를 올려다보았다. 근처에 볼일이 있나? 의아해하며 바라보는데, 카이사르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샤쁘카였다.

“모자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니다니, 위험하잖아.”

카이사르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며 이원의 머리에 샤쁘카를 씌워주었다. 물론 이원 역시 샤쁘카와 털코트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북구의 혹독한 추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쿠터를 타느라 헬멧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샤쁘카를 쓸 수 없었다. 

물론 그 스쿠터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샤쁘카를 이원에게 씌워준 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원은 폭신하면서도 감탄할 만큼 따뜻한 천연모의 위력을 실감했다. 

자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럽고 가벼운 샤쁘카가 그 새 눈발에 젖은 머리카락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모자를 썼을 뿐인데 추위는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이원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 집에 가면 돌려줄게.”

어차피 카이사르는 자신의 차를 타고 갈 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원이 감사의 말을 하자, 카이사르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원은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던 눈발이 제법 두터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피코트를 입고 있다고 해도 북구의 칼바람은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기꺼이 이원에게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샤쁘카를 양보한 남자가 하얗게 눈을 맞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이원은 왠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마주 보았다. 

카이사르가 손을 들었다. 마디가 긴 손가락이 이원의 눈썹을 가만히 스쳤다. 날리는 눈발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카이사르의 손가락으로 스며들어갔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원은 곧 인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내가 가면 카이사르도 차에 타겠지. 이원이 막 입을 여는데, 카이사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역은 어디지?”

조용한 음성에 이원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바로 저기야. 그럼 난 이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이원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문득 이원의 뒤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별 생각 없이 계속해서 정류장을 향해갔다.

이상하다고 생각이 든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군대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내들의 구둣발소리가 그의 뒤로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안 좋은 예감을 느끼면서도 이원은 뒤를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단지 착각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등뒤로 들려오는 발소리는 너무나 명확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원은 망설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보았다. 자신을 따라 오는 카이사르와 그 뒤를 쫓아오는 십 수 명의 검은 코트의 남자들을.

“왜 따라오는 거야?”

때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이원이 휙 돌아서며 물었다. 이원이 걸음을 멈추자 카이사르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 뒤를 줄줄이 쫓아오던 남자들도 우르르 멈춰 섰다.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이원의 시선과는 달리 카이사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이 가고 싶어서.”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길거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들어줄 상대라면 애초에 이렇게 멋대로 남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샤쁘카 따위에 감동한 내가 바보지.

이원은 성난 얼굴로 돌아서서 마침 도착한 전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뒤를 카이사르가, 또 그 뒤를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우르르 쫓아왔다. 러시아워를 지나 한적한 전차 안은 이내 덩치 큰 사내들로 꽉 차버렸다. 

이원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을 애써 삼켜냈다.

하지만 그것은 고뇌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원이 자리를 잡고 서자 카이사르가 그 옆에 서고, 남자들이 즉시 그들 주위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둘러쌌다. 동시에 조직원들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때까지 여기저기서 편안한 얼굴로 전화를 하거나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 조용히 침묵에 잠기기 시작했다. 묘한 분위기에 시끄럽게 볼륨을 올리고 음악을 듣던 청년도 머뭇거리며 기계를 껐다. 금세 전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들리는 거라곤 전차의 덜컹거리는 소음뿐이었다. 이원이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자리가 비었습니다, 차르.”

누군가의 부름에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남자들이 일제히 홍해처럼 갈라지며 카이사르의 눈앞에 길을 만들었다. 무심코 엉덩이를 움직였던 자리의 주인은 뜻밖의 상황에 사색이 되어 얼떨결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돼버렸다. 중년의 아저씨가 울상이 되어 바삐 일어나 남자들 뒤로 사라지자,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렸다.

“앉아.”

누가 보아도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매너의 남자였지만 이원은 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전차 안의 모두가 알 것이다. 아무리 근사하게 꾸며봤자 주변을 둘러싼 한 무리의 사내들은 그 정체가 너무나 명확했으니까. 이원은 서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됐어.”

거절했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때마침 전차가 흔들리고, 방심하다 크게 휘청거리고 만 이원을 카이사르가 붙잡았다. 동시에 이원의 얼굴이 카이사르의 어깨에 부딪치자 카이사르는 무심코 한 발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 순간 조직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여기저기서 달려왔다.

“차르!”

“차르, 괜찮으십니까!”

“이 자식, 똑바로 운전하지 못해?!”

전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조직원 중 한 명이 미친 듯이 문을 걷어차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사색이 된 운전사가 급기야 안에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문으로 달려가고, 잠시 뒤 전차가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말았다. 사색이 되어 굳어진 이원을 비롯한 카이사르의 일행만을 남겨둔 채.

“히, 히익!”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이원은 보고 말았다. 운전실을 뛰쳐나와 거리로 달려 나가려던 운전사의 모습을. 안타깝게도 조직원에게 덜미를 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모습까지도.

“그래서,”

불쑥 들려온 음성에 이원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미소 짓는 얼굴로.

“서점은 얼마나 가야 하지?”

이원은 아무 말 없이 목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을 억지로 삼켜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원은 가장 먼저 전차에서 내려왔다. 역시나 그 뒤를 카이사르가, 그 뒤를 조직원들이 우르르 쫓아왔다. 

전차는 마지막 조직원이 내려서기가 무섭게 승객을 태우지도 않고 미친 듯이 달려가 버렸다. 이원은 씁쓸한 기분으로 아무 말 없이 서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내의 유명 서점은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서적들을 갖추고 있었다.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서점은 오전인데도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마침 나오는 남자를 기다렸다가 그를 스쳐 안으로 들어간 이원은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훑기 시작했다. 

다른 때라면 신간 서적이 나왔는지 훑어본다든가 간단한 취미서적을 사서 서점 내 별도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일상의 여유를 즐길 만도 했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바로 등뒤를 쫓아오는 거대한 혹 때문이었다. 이원은 카이사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무시한 채 똑바로 걸어갔다. 자신의 목적은 너무나 명백했다. 법률 관련 서적이 꽂혀있는 자리를 찾아 재빨리 책장을 살폈던 이원은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책들을 꺼내 안을 살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골라낸 이원이 고개를 돌리자 카이사르가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던 이원은 곧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한 무리의 검은 슈트의 남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모습에, 이원은 카이사르가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그 속에서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그렇지.

심드렁하게 돌아서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호사 씨.”

조용한 서점에 가로퍼지는 그의 음성에 이원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왜, 하듯이 돌아보자 일시에 갈라선 남자들 사이로 카이사르가 걸어 나왔다.

“선물이야.”

빙긋 웃으며 내민 책을 이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요리」

이원의 이마 한 쪽에 빠직 혈관이 솟았다.

“필요 없어.”

이원은 가차 없이 내뱉은 후 곧바로 돌아섰다. 묻어두었던 창피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속이 끓어올랐다. 이대로라면 평생 놀림감이 되겠군.

평생?

무심코 떠올렸던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계산대 안쪽에서 정리를 하던 직원이 이원의 모습을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계산 부탁합니다.”

이원이 말하며 책을 내려놓자 직원은 한 권씩 금액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계산을 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원의 머리 위에서 책이 뚝 떨어졌다. 

무심코 책을 받아든 이원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그의 뒤에서 카이사르가 말했다.

“이것도 함께.”

밉살스러운 요리책을 멋대로 던져준 카이사르가 해맑게 웃었다. 남의 속을 뒤집어놓은 주제에 그렇게 웃지 마! 이원은 내심 생각하며 그를 향해 험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멋대로 무슨 짓이야, 난 필요 없어.”

카이사르의 반응은 뜻밖에 진지했다.

“설마, 절대로 필요해. 넌 그대로라면 언젠가 식중독으로 죽을 거야.”

후, 하고 고개까지 젓는 그의 모습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됐다니까, 지금껏 잘 살았어. 앞으로도 이런 건 안 봐.”

“목숨은 자존심보다 소중한 거야. 심각하게 재고해 봐.”

“재고고 뭐고 시끄러워, 다시 갖다놓기나 해.”

“훑어봤는데 꽤 괜찮아. 너 같은 초보의 황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요리들이야.”

“갖다 놓고 오라니까…!”

“손님.”

불쑥 끼어든 음성에 막 화를 내려던 이원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1324루블입니다.”

이원은 직원이 건네준 봉투를 한 쪽에 밀어놓고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응? 천 삼백? 일단 돈을 건네준 이원은 자신이 했던 계산과 다른 숫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직원이 거스름돈과 함께 건네준 계산서를 받아든 이원은 순간 고개를 돌려 봉투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 안에서 당당하게 빛을 내고 있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요리」책을.

이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온몸에서 발산하며 인적이 드문 허름한 골목길을 난폭하게 걸어갔다. 손에 든 봉투 안에는 목적으로 했던 법률관계의 서적과 함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요리책이 다소곳이 담겨 있었다.

내가 왜 보지도 않을 책 따위에 480루블이나 써야 하는 거야?!

게다가 이 쓸모없는 책은 페이지도 적은 주제에 가격은 눈 튀어나오게 비쌌다. 두께는 손가락 굵기만큼도 안 되면서 감히 법전과 가격이 같다니.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삭혀내며 열심히 걷고 있을 때였다. 뒤를 따라오던 카이사르가 말을 걸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공부하면 너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원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카이사르는 환한 미소를 되돌렸다.

“자신의 음식을 먹고 사고사하는 건 비참하잖아.”

요리책 모서리로 맞아죽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해줄까.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요리책을 흘긋 내려다보며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골목 안쪽에서 웬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더러운 얼굴과 낡은 옷가지들을 보고 이원은 곧 그들이 거리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외국인과 부자는 이들에게 좋은 표적이 된다.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어 눈을 털어주고 구두를 닦으려 몸을 숙여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원이 그들을 제지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달려온 아이를 가차 없이 쳐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약에 찌든 아이의 가냘픈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뜻밖의 상황에 이원은 놀라 굳어졌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 칠 틈도 없었다. 

곧바로 품에서 글록을 꺼낸 카이사르가 자신의 코트를 움켜쥔 또 다른 아이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사색이 된 이원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 순간 이원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주저 없이 아이의 머리에 총구를 박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그에게서 느꼈던 소름이 이원의 전신을 질주해 달려갔다. 

저런 어린아이에게 가차 없이 총을 겨누면서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남자.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웃음도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얼굴.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사르는 아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끼릭, 하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이원은 눈치 챘다. 이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거라고.

“그만 둬!”

뒤늦게 이원은 고함을 지르며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순간 카이사르가 허공으로 총구를 향하고, 섬뜩한 총성이 공기를 갈라놓았다.

“아윽.”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 쪽 귀를 틀어막았다. 지잉, 하고 고막이 울려오는 것 같았지만 카이사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짓이야? 다칠 뻔했잖아.”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아이를 쏘려고 하다니!”

이원이 한 쪽 귀를 막은 채 소리치자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날 만졌잖아.”

“그게 어때서?! 고작 아이가 한 일인데 총을 들이대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이사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로 이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왜 날 비난하는지 모르겠군.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아이에게 총을 쏘는 게?!”

이원의 거친 음성에 카이사르는 서늘하게 되물었다.

“아이가 상대면 뭐가 다르지?”

이원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로 먹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변호사인 자신이 이렇게 할 말을 잃어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원이 생각을 정리 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할 얘기가 그게 전부라면 이제 비켜.”

카이사르가 다시 총구를 겨눴다. 이번에야말로 아이를 쏠 생각인 것이다. 이원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달아나라고 말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본 이원은 그의 오래 된 바지가 흠뻑 젖어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아이는 울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오줌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이가 달아나는 것은 틀렸다.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정면으로 카이사르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쏘고 싶으면 날 쏴.”

“뭐라고?”

카이사르가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원은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날이 선 음성으로 내질렀다.

“못 알아들어? 이 아이한테 총을 쏠 거면 날 먼저 쏘라고! 난 널 때리기까지 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네 말대로라면 난 즉결 처형이겠군, 어서 쏘지 그래?”

성마른 음성에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진심이었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도 절대 피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아이에게 총구를 향한 채 서있는 카이사르와,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아이와, 둘 사이를 막아선 채 카이사르를 노려보는 이원과, 그들을 지켜보는 조직원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층 묵직해진 눈덩어리가 투둑, 투둑 소리를 내며 주변에 내려앉았다. 조직원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말없이 이원을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총구를 내렸다. 동시에 숨을 삼킨 아이가 기겁을 하며 다급하게 달려갔다. 이원은 그가 저 멀리 달아나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르는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총을 다시 품안에 넣고 있었다. 이원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분노는 그 다음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카이사르가 흘긋 이원의 뒤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뜻밖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이원은 황급히 그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혹시 달아나는 아이를 쏘려는 건가, 하는 무서운 상상이 들었지만 그것은 틀렸다. 카이사르는 허리를 숙여 눈에 반쯤 파묻힌 뭔가를 꺼내들었다. 돌아선 그의 모습에 이원은 ‘뭔가’의 정체를 알았다. 이원이 내던진 책봉투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동댕이 쳐버린 책들을 직접 주워 눈을 털어낸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선뜻 이원에게로 걸음을 옮기더니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 다음 그가 한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원은 이어진 그의 말과 표정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걸 잃어버리면 안 되지. 네 목숨을 구해줄 책이잖아?”

카이사르는 농담처럼 말하며 이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돌연한 변화에 이원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그는 여느 때의 카이사르로 돌아가 있었다. 이원을 향해 농담을 하고, 속을 긁어대고, 소리내어 웃던 그의 얼굴로.

지독한 괴리감에 이원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화약냄새가 아니라면 자신이 눈을 뜬 채로 꿈을 꾼 건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는 돌변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방금 전에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 있지? 이원은 현기증마저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너는, 당신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원의 물음에 카이사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이원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거냐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아무리 마피아라고 해도 그렇지, 그런 아이를, 애한테 총을 겨누고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소리치던 이원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여전히 카이사르는 이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화를 내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이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거리의 아이들에게 섣불리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건 이원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한 짓은 단순한 제재가 아니었다. 그에게 사람의 목숨이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설령 아이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마침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울려왔다. 다급하게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직원 중 한 명이 다가와 보고를 했다.

“저, 차르. 차가 근방에 대기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낯익은 세단과 승합차들이 줄을 지어 깜박이를 켠 채 서있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이원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만 돌아갈까? 볼일은 끝난 거지?”

선뜻 손을 내민 카이사르에게 그 때까지 말이 없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난 됐어, 혼자 가.”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원은 갈라져 나오는 음성으로 거칠게 내뱉었다.

“사람 말 안 들려? 혼자 간다고 했잖아.”

이원은 카이사르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난폭하게 낚아채고 몸을 돌렸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에, 카이사르는 굳이 이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이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저 남자는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문득 바람이 불어와 이원은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천연모가 느껴졌다. 자신의 머리에 샤쁘카를 씌워주던 카이사르의 모습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 때도 그 이전에도, 이원은 카이사르의 그런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틀렸어.

지금까지 몰랐던 그의 숨겨진 모습에, 이원은 극심한 괴리감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굵어진 눈발이 어깨 위로 묵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이원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서점에서 집까지는 물론이고 대문에서 저택까지 이어지는 넓은 정원길을 그는 걸어서 온 것이다. 카이사르는 몇 시간 만에 겨우 집에 도착한 그의 모습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았다. 잠시 뒤 이원의 뒤를 쫓게 한 조직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걷기만 하고…”

짧은 보고에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은 곧 머리를 숙인 뒤 방에서 나갔다. 카이사르는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폐 속에 들이마셨지만 복잡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거치적거리는 자는 제거한다. 왜 아이라고 해서 달라야 하지? 어째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카이사르는 미간을 모은 채 다시 연기를 들이마셨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 계속

** 이제 슬슬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오네요! 다음 편도 듬뿍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