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원은 생각했다. 단지 간과했을 뿐이다, 음식이란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 입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깨달았다, 이렇게 배가 고파도 맛없는 음식은 맛이 없다는 것을.
광활한 집안을 걷고 걸어 다시 서재로 돌아온 이원은 이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샌드위치를 먹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뱃속에서 우렁찬 아우성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밥은 언제 들어오는 거냐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비싼 고기라도 이렇게 먹기 싫을 수 있는 거구나. 이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천천히 샌드위치를 씹기 시작했다. 최대한 입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목표였지만 쉽지 않았다. 뱃속에서는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치고 입안에서는 이런 건 먹기 싫다고 아우성을 치는 기분이었다.
이원은 서류를 보는 척 하며 오만상으로 찌푸려진 얼굴을 떨어뜨렸다.
카이사르는 그런 이원의 고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강한 턱이 천천히 움직이며 야채가 아삭거리며 씹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원은 가득 차오르는 군침을 애써 소리를 죽여 간신히 삼켜냈다.
차라리 음식이 없을 때가 나았다. 달콤한 샌드위치의 냄새를 맡자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고뇌를 참는 이원에게, 그 때까지 보고만 있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먹지 그래? 양은 충분하니까.”
가벼운 권유에 이원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됐어, 나도 있으니까.”
더 이상 입에 대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한 말에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원은 고집스럽게 그를 외면한 채 서류를 펼쳤다. 카이사르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혼자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이원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싶었지만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심은 온통 시야 끝에 비친 카이사르의 샌드위치에 쏠려 있었다. 눈치 채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군침을 삼키는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이 토지의 세금은 얼마나 밀려있지?”
불쑥 묻는 말에 이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하나를 전부 먹어치웠는지 카이사르의 손은 비어있었다. 다행이군, 하는 생각과 함께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이원은 모른 척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은 이원은 평소보다 성급하게 자료를 찾아 내밀었다. 숫자를 보던 카이사르가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잡았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빵을 베어무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무심코 군침을 삼켰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속이 쓰려와 미간을 모으는데, 불현듯 카이사르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피곤하군, 남은 건 내일 보지.”
선뜻 일어난 그는 소파에 걸쳐둔 재킷을 들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갔다. 서재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류를 보는 척 했다.
한동안 이원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서재 안은 고요했고, 들리는 소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카이사르가 나가버린 뒤 남은 것은 이원과 샌드위치들뿐이었다. 슬쩍 귀를 기울여 봤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원은 슬쩍 일어나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고요한 저택 안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의 깊게 주변을 살펴본 뒤 다시 문을 닫은 이원은 돌아서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뱃속에서 격렬한 울부짖음이 새어나오고, 이원은 급히 배를 눌렀다.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은 그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두 종류의 샌드위치가 남아있었다. 접시 중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가 만든 것이었다.
…어차피 남는 거니까.
이유는 충분했다. 이원은 망설이던 손을 내밀어 접시 중 한 쪽으로 가져갔다. 유감스럽게도 선택된 쪽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원의 입술이 주저하며 벌어지고, 그 안으로 카이사르의 샌드위치가 들어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흑빵의 시큼한 향기였다. 러시아인들이 즐겨먹는 흑빵에서 흔히 느껴지는 발효향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식욕을 자극했다. 질끈, 하고 깨무는 순간 입안에 그윽한 음식의 향이 가득히 퍼졌다.
동시에 채소의 아삭한 질감이 혀를 자극하고, 신선한 날햄의 부드러운 속살이 입안에서 맞물렸다. 이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안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왜 맛있지?! 이원은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빵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별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만든 것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물끄러미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속이 훤히 드러난 샌드위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곧 빵을 덮고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아삭거리는 양상추가 입안에서 단맛을 냈다. 아직 샌드위치는 많이 남아있었다. 하나나 둘 쯤 없어진다고 해도 눈에 띌 것 같지 않았다. 이원은 서류를 펼쳐 활자를 훑으며 샌드위치를 씹어 넘겼다. 이원은 몇 시간 만에 비로소 머리가 쌩쌩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반갑게 자료에 몰두하며 바쁘게 하이라이트를 쳤다. 어느새 큼직한 샌드위치는 하나씩 입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더듬더듬.
무심코 접시 위로 손을 내밀었던 이원은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득 차있던 접시는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이원은 한동안 말없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포만감이 느껴지는 뱃속은 그것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원은 미간을 모은 채 팔짱을 끼고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빈 접시가 다시 채워지는 일은 없다. 이원의 시선이 흘긋 옆 접시로 향했다.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원은 선뜻 손을 내밀어 빵을 열었다. 고기만 닥치는 대로 마구 넣어진 샌드위치의 재료를 조금씩 옮겨 모양을 다듬은 뒤, 그는 다시 빵을 덮고 그것을 옆 접시로 옮겼다. 이걸론 안 되려나. 누가 보아도 허술해 보이는 샌드위치를 찌푸린 얼굴로 이리저리 바라보는데,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이원은 그대로 시선을 멈춰버렸다. 장신의 남자가 서재의 문에 기대어 서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카락과 러프한 셔츠로, 이원은 그가 자러 간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고 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조건을 추가하겠는데, 초과근무 시에는 야식을 제공해야 해.”
카이사르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필요한 건?”
이원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없어.”
무심한 척 말했지만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배가 고팠으니까 할 수 없지. 이원은 생각하며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카이사르를 외면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카이사르가 걸음을 옮겨 소파로 향했다. 문득 그의 맨발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가 소파의 빈자리를 찾아 앉는 것이 느껴졌다.
한동안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일에만 몰두하는 척했다. 희미하게 바디샴푸의 산뜻한 향기가 났다. 물론 출처는 너무나 명확했다. 무심코 고개를 들고 싶은 것을 참고 이원은 자꾸만 흩어지는 주의력을 억지로 그러모았다. 열심히 활자를 들여다보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줄을 반복해 읽어서야 비로소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한 줄 씩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며 하이라이트를 치는 동안, 간신히 그는 예전의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느새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정신없이 열중한 그의 모습을, 카이사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벽녘 잠에서 깬 집사가 조심스럽게 서재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뚫어져라 서류를 훑고 있는 초췌한 변호사와,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카이사르는 이원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드물게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수상한 먹구름이 몰려들며 다시 눈을 뿌릴 준비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불안한 걸음으로 바쁘게 거리를 걸어갔다. 중심가에 위치한 건물은 오가는 사람들을 압도하며 우뚝 서있었다. 스산한 건물 주변을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꽤 볼만한 것이었다. 최상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튜체프는 영 심기가 좋지 못했다.
“차르가 외국인을 집안으로 들이다니 무슨 소린가?”
날카로운 음성에 보고를 한 이는 숨죽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변호사라고 하는데 베르댜예프의 일을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베르댜예프의 일이라니?”
“그, 토지 말입니다. 그 외 재산도.”
튜체프의 부풀어 오른 뺨에 벌겋게 피가 몰렸다.
“차르는 정말 그걸 손에 넣을 거라고 하던가? 로모노소프와 정면으로 맞붙겠다고?!”
성마른 음성에 건너편의 남자는 잔뜩 긴장해 대답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게다가 변호사가 상당히 집요합니다.”
튜체프는 머리숱이 얼마 없는 정수리를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으며 심호흡을 했다.
“도대체… 이이상 로모노소프를 자극하는 건 곤란해! 그것도 모자라 조직의 고문 변호사를 내버려두고 새파란 외국인 변호사를 써서 일을 진행시켜? 게다가 간부들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멋대로 일을 벌이다니! 도대체 자네는 뭘하는 건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뭘 한 거야, 진작에 왜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죄, 죄송합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보고를 드린다는 게…”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다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그에게 튜체프는 욕설을 뱉어냈다. 머릿속은 카이사르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그 자식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대한 러시아 민족의 순혈을 지켜야 할 조직의 후계자가 외국인 따위와 어울리다니. 역시 그 녀석은 조직을 이어받기엔 적합하지 못해. 튜체프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당장 그 녀석들이 뭘 하는지 알아내서 보고해. 베르댜예프에 대해 어디까지 일을 진행시켰는지, 그 변호사는 어느 로펌 소속의 누구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차르가 그 변호사와 뭘 꾸미고 있는 건지 죄다 알아내서 보고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서둘러 대답을 한 상대방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었다.
“저, 그런데, 그 변호사 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열심이라서, 잠도 서재에서 자고 밥도 서재에서 먹습니다. 전엔 출퇴근이라도 했는데 이젠 아예 저택에 주저앉는 바람에 종일 일만 하니, 도무지 자료를 빼낼 수가…”
더듬거리는 그의 말에 튜체프는 이를 갈았다.
“그렇게 열심이라면 더 곤란하잖나!”
튜체프는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정보를 빼내. 변호사를 구슬려서 말을 하게 만들든가, 협박을 하든가, 아무튼 머리를 좀 쓰란 말이야.”
화를 내며 다그쳤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정 안 되겠으면,”
튜체프의 음성이 한층 낮게 가라앉고, 작은 눈이 예리하게 빛냈다.
“변호사 녀석을 없애버려.”
식당은 고요했다. 이따금 접시를 가져가고 음식을 가져오는 집사의 발소리와 간간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묵묵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이원은 열심히 고기를 잘라 입에 밀어 넣었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라니, 다른 때의 그라면 놀랐겠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이 구워진 고기가 어제 그 고기인가.
전날 자신이 먹었던 고기의 맛과는 전혀 달랐다. 이원은 알맞게 구워져 입안에서 향긋한 육즙을 내며 부서지는 최고급 스테이크를 내심 감탄하며 열심히 맛을 음미했다.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줄곧 한 마디 말도 없이 꾸역꾸역 먹기만 하던 이원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내 스쿠터는 어떻게 됐어?”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카이사르의 손이 멈칫했다. 큼직한 스테이크의 덩어리를 반으로 자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똑같은 고물 스쿠터를 찾기가 쉽지 않아.”
이원의 이마 한 쪽에 핏줄이 일어섰다. 잘라낸 고깃덩어리를 포크로 찍은 이원이 아무 말 없이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가볍게 와인을 마신 카이사르가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볼쇼이 극장의 공연 프로그램이 바뀌었는데, 오늘 저녁 어때?”
이원이 흘긋 시선을 향하자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이라더군.”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면 재판이 끝나나?”
카이사르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전혀 관계없지.”
이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이원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일어섰다. 그대로 나가려는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다시 말했다.
“집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이원은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난 일하러 왔지 놀러온 게 아냐.”
그대로 카이사르를 지나쳐가려는데, 문득 시야에 빵이 가득 담긴 바스켓이 들어왔다. 스테이크만큼이나 훌륭한 빵을 흘긋 본 이원은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빵 하나를 선뜻 손에 들고 나가버리는 이원의 뒷모습에,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희미하게 실망한 표정으로.
곧바로 서재를 향해 걸어가며 이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 자식.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키스를 하자고 하질 않나 일부러 스쿠터를 망가뜨리질 않나. 지금 태도로 봐서는 일을 끝내기 전까지 절대 스쿠터가 올 리 없었다. 게다가 루스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간부이면서 자신의 일에 나를 끌어들이고 이젠 집안에까지 붙잡아놓다니.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카이사르가 흥미를 잃고 손을 떼버리면 이제까지의 고생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아직 흥미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이쪽에서도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이미 결론은 명백한 것이었다.
집중력을 전부 발휘해 단 시간 내에 이 일을 끝내버리는 거야.
결심을 굳힌 이원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손에 든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원은 머릿속으로 일을 할당하며 대강의 계획을 잡았다. 완전히 이 일에만 몰두하면 앞으로 며칠이면 끝낼 수 있다.
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재의 문을 열었다. 계산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엔 이원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방해물이 있었다.
똑똑.
막 서류에 집중하려는 찰나 들려온 노크소리에, 이원의 노력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자 곧 서재의 문이 열리고 붉은 장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꽃을 들고 온 것은 카이사르였다.
“아침의 장미는 미인을 위해 피는 거지.”
카이사르는 이원에게 꽃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이원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 거라는 확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원의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저 남자가 미쳤나.
장미를 받기는커녕 쌀쌀맞게 고개를 돌려버린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장미는 좋아하지 않나?”
이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류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일에 집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것도 작정하고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을 앞에 두고서는.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상하군, 너와 딱 어울리는데. 가시가 있는 것까지 말이야… 아니면 혹시 아카시아를 좋아하나? 하긴 아카시아가 장미보다는 쓸모가 있지. 꿀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탁.
이원은 소리내어 서류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카이사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뭐하는 거야? 여기서. 지금이 몇 신데 이러는 거야? 당신, 일 안 해? 안 나가?”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던 카이사르를 꼬집어 다그치자 카이사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이야 집에서도 할 수 있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소파를 돌아보더니 빈자리를 찾아 선뜻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이원은 기가 막혀 눈을 깜박였다. 이 훼방꾼이 이젠 아예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버린 것이다.
스트레스가 급증하는 것을 느끼며 이원은 짜증스럽게 서류를 펄럭거렸다. 가뜩이나 추적을 막으려 소유주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람에 그 중 누가 정당한 소유자인가를 밝혀내는 것도 머리가 아픈데 작정하고 들어온 방해꾼까지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원은 무시하고 일에만 전념하려 했지만 역시나 카이사르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제 보던 서류 말인데, 어디 있지?”
이원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어 한 뭉치의 서류를 들어보였다. 카이사르가 그것으로 또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이원은 먼저 그의 무릎에 그것을 내려놔버렸다. 입을 다문 채 하이라이트를 친 부분을 다시 찾아보는데, 카이사르가 말했다.
“일도 좋지만 가끔은 쉬어주는 게 좋을 텐데.”
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 너의 고귀한 행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말라. 보상은 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
카이사르는 짧게 웃은 뒤 덧붙였다.
“푸시킨은 언제나 좋지.”
“시를 읊고 싶다면 나가서 읊어.”
짜증을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에 카이사르가 말했다.
“같이 갈래?”
“싫다니까.”
카이사르는 웃었다.
“재밌을 텐데.”
이번에는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해버리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원은 다시금 침묵을 다짐하며 서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사건에 쓸 만한 판례가 어디에 있더라.
다른 때는 단번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건만 이번에는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눈앞에 있는 저 남자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이제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이원이 준 서류를 아무렇게나 펄럭거리고 있었다. 저러다 한 장이라도 사라지기라도 해봐라.
이원은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단단히 별렀다. 당장 쫓아내버리겠어. 틈틈이 카이사르를 신경 쓰며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서류를 내려놓고 이원을 바라보았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이원은 완벽한 무관심 속에 서류만 휘적거렸다.
한동안 그렇게 이원을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가져온 장미다발을 들었다. 봉오리가 예쁘게 핀 붉은 장미를 고르던 그가 한 송이를 골라 꺼내 들었다. 문득 이원의 시야에 카이사르가 자신에게로 몸을 기울이는 것이 비쳤다.
톡.
장미의 봉오리가 이원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고, 동시에 이원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쌓였던 짜증이 폭발해 이원은 곧바로 그것을 뿌리쳐버렸다. 하지만 다음의 일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철썩’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원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통으로 뺨을 맞아버린 카이사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멀거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서로 당황해 굳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뺨이 천천히 빨갛게 물들며 이원의 손자국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원이었다.
“미안, 그럴 생각은 없었어.”
실수라고는 하지만 따귀를 때려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카이사르는 아직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이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희미하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싸 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저렇게 얼빠진 카이사르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의 황망한 모습을 본 이원은 결심했다.
“한 대 때려.”
눈에는 눈, 뺨에는 뺨이다. 이원은 카이사르에게 얼굴을 내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흘긋 보았던 카이사르의 손은 무시했다. 뼈마디가 긴 우아한 손이지만 동시에 힘이 느껴지는 단단한 모양새도, 전날 샌드위치를 만들며 능숙하게 칼을 다루던 그의 모습도 잠시 잊기로 했다.
하지만 주먹을 불끈 쥐며 어금니를 꽉 다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얼굴을 맞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이왕 내주기로 한 거,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이원은 재촉하듯 턱을 치켜 올렸다. 곧 자신의 뺨을 후려칠 커다란 손을 예감했지만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선뜻 그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빨리 해버리면 좋겠는데. 이원은 긴장감에 눈을 감은 채로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가늘게 떨리는 검고 긴 속눈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이사르가 고개를 숙였다.
불현듯 낮은 숨결과 함께 다정한 뭔가가 이원의 입술에 맞닿았다. 생각지 못한 감각에 이원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길지 못했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이 이원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인 순간, 이원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곧바로 내지르고 말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카이사르가 이번엔 반대쪽 뺨을 감싸 쥐고 물러났다. 이원이 고함을 지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지금 무슨 짓이야!? 때리라고 했지 누가 키스하래?”
버럭 화를 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기에 키스하라는 줄 알았지.”
어이가 없어진 이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카이사르는 새롭게 생긴 손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두 번째 키스도 허락하는 건가?”
선뜻 고개를 기울여오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곧바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련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이번에는 맞지 않았다.
선뜻 몸을 피한 카이사르가 그만 스윙을 날려버린 이원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이원이 얼떨결에 끌려가자 카이사르가 뜻밖에도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든 이원과 달리 카이사르는 시선을 옮겼다.
손 안에 잡힌 이원의 꽉 쥔 그의 주먹을 향한 시선을 따라 카이사르의 입술이 내려왔다. 가볍게 닿은 키스에 이원이 깜짝 놀라자 카이사르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대가는 받은 셈 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이원의 손을 놓아주었다. 무심코 물러난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곧 돌아서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조용히 닫힌 서재의 문을 이원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당했다는 자각이 떠올랐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뭐야, 저 자식!”
이원은 홧김에 욕설을 뱉어내며 바닥의 서류를 걷어차 버렸다. 하지만 곧 후회는 되돌아왔다. 남들이 보기에는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던 서류들이 일시에 뒤엉키며 흩어졌다.
이원은 일그러진 얼굴로 목구멍 깊숙이에서 끓어오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둘러 서류를 다시 모으면서도 속은 계속해서 끓고 있었다. 어쨌든 한 번씩 주고받은 셈 치자. 먼저 때린 건 나니까.
이성적으로 납득하려 애썼지만 일그러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이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상황은 정리가 끝났는데 왜 이렇게 자꾸 속이 들썩거리는지. 무심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던 이원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입술을 스쳤던 온기가 손등에 남은 온기와 맞닿았다. 뒤늦은 분노로 들썩이는 심장에, 묘하게 다른 진동이 전해지는 듯 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한 소리들이 이어졌다. 문득 발소리에 눈을 뜬 이원은 시야에 들어온 생소한 풍경에 당황했다가 곧 납득했다. 이곳은 오래 된 공동주택의 하숙집이 아니었다. 웅장한 저택에 걸맞는 넓고 화려한 객실에 이원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으로 일어나 앉았다.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로 가득한 방안은 고풍스러운 한 편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이곳저곳에 놓여있는 도자기는 몇 세기 전의 것으로 보였고 벽에 걸린 유화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화가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원이었지만 침대는 달랐다. 매트리스고 시트고 두툼한 이불까지,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편안해 마치 구름 위에 누운 것 같았다.
이래서 부자들이 침대에서 밥을 먹는군.
이원은 내심 납득한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 돌아갈 텐데 이런 침대에 익숙해지면 곤란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원은 아쉬운 듯 흘긋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옮겨 창밖을 내려다보자 눈에 익은 세단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이사르가 출근하려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내려다보던 이원은 아, 하고 뭔가를 생각해냈다.
간간이 내리는 눈에 검은 세단은 듬성듬성 부옇게 안개가 서렸다. 온통 찌푸린 하늘이 조만간 큰 눈을 퍼부을 것 같았다. 카이사르는 흘긋 하늘을 본 뒤 서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두 줄로 나뉘어 서있는 검은 슈트의 사내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카이사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어깨에서부터 발치까지 하얀 빛에서 검은 빛으로 서서히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두텁고 풍성한 모피코트 위로 눈발이 하나 둘 씩 날아들었다. 흔들림 없는 자세로 서있던 남자가 차의 뒷문을 열고, 카이사르가 허리를 숙였다. 카이사르가 차에 오른 뒤 운전석으로 돌아온 남자가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휙 올라탄 이원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가는 도중에 떨어뜨려 줘.”
무심히 말하며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듯이. 의심스러운 시선에 이원이 입을 열었다.
“일을 끝낼 때까지는 안 가. 책을 사러 나가는 거야.”
아무 말이 없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서둘러 재촉하며 말했다.
“뭐해? 어서 가.”
카이사르가 고개를 돌리고 룸미러를 통해 눈짓을 했다. 긴장한 얼굴로 보고 있던 조직원이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달려가는 승용차 뒤로, 조직의 남자들이 탄 승합차가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