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이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한 장을 덮었다. 눈이 뻑뻑해 미칠 것 같았지만 용케 해냈다. 하이라이트를 친 부분만 해도 상당한 분량이지만 어쨌든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문제는 각종 비리의 결과로 손에 넣은 재산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빼돌리느냐 하는 건데.
훑어본 바로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공동순위에 있는 두 명이 손을 털면 된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이원은 최후의 카드로 그것을 제시하기로 하고 일단 다른 방법 또한 강구해보기로 했다.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후, 하고 고개를 든 순간 이원은 창밖으로 보인 풍경에 눈을 깜박였다. 분명 나른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을 때 시작했는데 지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놀라 황급히 시간을 확인한 이원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서재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샹들리에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은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전차.
이원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용케 서류들을 건너뛴 이원은 서재의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그만 난폭하게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이런.”
그대로 나가떨어지려는 이원을 낚아채듯 끌어안은 남자가 말했다.
“넌 항상 내게 온몸을 던져오는군.”
웃음이 서린 음성에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엷은 미소를 띤 카이사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딪친 충격으로 이원은 즉각 반응을 하지 못했다. 뜻밖의 상황에 아직 어리둥절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원은 멍한 얼굴로 카이사르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카이사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심코 벌어진 입술에 카이사르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물끄러미 이원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평소의 예리한 빛을 잃고 어느새 한없이 누그러져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그저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문득 카이사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부드럽게 이원을 끌어당기고, 슬며시 감겨진 은색의 긴 속눈썹이 유난히 이원의 시야에 맺혀들었다. 살며시 벌린 젖은 입술 사이로 카이사르의 숨결이 스친 순간, 갑자기 이원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밀어낸 이원의 손에, 방심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선뜻 그를 놓아주고 말았다. 둘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이원은 뜻밖에도 허전함이 느껴지는 허리에 당혹해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조금, 서두르다가.”
무심코 말을 더듬었던 이원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른 때는 집사가 항상 돌아갈 시간을 알려주곤 했다. 내가 너무 열중해서 듣지 못했던 걸까? 낭패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카이사르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이원에게 밀쳐진 뒤 어정쩡하게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가 손을 내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꽤 바빠 보이는군, 무슨 일일까.”
엷은 미소를 짓는 카이사르의 얼굴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덕분에 이성을 찾은 이원은 잠시 생각에 잠겨 상황을 정리했다. 이미 전차는 끊겼을 게 분명했다. 낡은 스쿠터로 집까지 갈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했다.
지금도 몇 번이나 정원에서 멈추는 것을 간신히 움직여 타고 있는데. 무심코 새어나오는 한숨을 참았지만 그의 고민은 어처구니없이 해결되었다.
바삐 걸음을 옮겨 저택을 나왔던 이원은 자신이 세워둔 스쿠터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이전에는 ‘고물 스쿠터’였던 것이 지금은 ‘스쿠터였던 고물’로 돌변해 초라하게 세워져 있었다.
아예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주저앉은 바퀴 위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스쿠터의 장렬한 전사戰死에 이원은 할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저런,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군.”
느릿하게 뒤를 따라온 카이사르가 말했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 이원의 의혹에 찬 시선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아마 고양이라도 올라탔었던 모양이지. 이걸 어쩌나.”
마치 연극의 대사처럼 장렬하게 읊조렸던 카이사르가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새로운 스쿠터를 조달할 때까지는 여기 있을 수밖에 없게 됐군.”
이원은 묵묵히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뻔뻔한 마피아가…!
없는 돈을 털어 마련한 자신의 유일한 이동수단이 맞이한 비참한 결말에 이원은 머릿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이성이 가로막았다.
정원을 나간다고 해도 전차가 없었다. 이원은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숫자를 세던 이원은 3245까지 센 뒤에야 비로소 주먹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카이사르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이원은 다시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입을 열었다.
“초과 근무 수당은 계좌로 보내. 굳이 알려줘야 하나?”
비꼬며 묻자 카이사르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알고 있어.”
내 몸에 난 점이 몇 개인지까지 알겠지.
이원은 내심 생각하며 곧바로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를 참지 못하고 빠르게 옮기는 발걸음 뒤로, 카이사르의 느긋한 발소리가 섞여들었다.
저택 안은 고요했다. 세상의 모두가 잠들어버린 것처럼 작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서늘한 침묵을 깨고 이원의 거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택의 길은 하나뿐이다. 이원은 다시 서재로 향하며 짜증스럽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뒤에서 들리는 또 다른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카이사르의 발소리다.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남자의 편안한 구둣발 소리에, 이원은 참다 못해 휙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왜 쫓아오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내지른 날카로운 음성에, 카이사르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됐지?”
카이사르가 묻는 말에 이원은 당황해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 불쑥 무안함이 올라와, 그는 휙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은데.”
카이사르의 요구는 의뢰인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이원은 입을 다문 채 서재? 걸어갔다.
문이 열린 후 눈앞에 벌어진 정경에 카이사르는 우뚝 멈춰 섰다. 잔뜩 널브러져 있는 서류들 사이에서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신의 뒷모습에, 이원은 선뜻 걸음을 옮겨 그를 스쳐 들어갔다. 보란 듯이 익숙하게 서류들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건너간 이원이 흘긋 시선을 던졌다. 카이사르는 찌푸린 얼굴로 그 자리에 서있다 구두 끝으로 서류를 밀어내며 이원이 선 자리까지 걸어왔다. 느린 몇 걸음의 이동 후 카이사르는 이원과 마주 섰다. 이원은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자신이 목을 빼 올려보는 상대를 썩 내키지 않는 상대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앉아, 지금부터 얘기할 테니까.”
눈앞의 소파에서 서류를 밀어내고 앉을 자리를 만들자 카이사르는 짧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살았군. 꼬박 서있어야 하는 건가, 생각했지.”
이원은 흘긋 바닥을 보며 지적했다.
“그 서류 밟으면 며칠 누워있게 만들어 주겠어.”
막 발을 디디려던 곳에 놓인 서류를, 카이사르는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이리저리 용케 서류를 피해 이원이 만들어준 자리에 와 앉은 카이사르가 보란 듯이 소리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까지 가로젓는 그의 모습을 무시한 채 이원이 준비했던 서류를 꺼내들었다.
“일단 읽고 있어.”
건네준 서류를 카이사르가 받아들자 이원은 휙 고개를 돌려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서류 중에서 단번에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이건 연관 서류. 이것도.”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원하는 서류를 척척 찾아낸 이원이 곧 카이사르에게 수북한 서류더미를 안겨주었다.
“일단 주력으로 싸울 건 거기에 있는 부동산들이야. 이걸로 소송이 제기되면 곧바로 다른 재산들까지 함께 추적을 받게 될 거야. 당신은, 전부 원하나?”
카이사르는 서류를 무릎에 얹고 이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싸움은 길고 더럽고 힘들게 이어질 거야.”
문득 카이사르의 말뜻에 다른 의미가 숨어있었던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카이사르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전부는 아니라고 하면?”
이번에도 이원은 선뜻 대답했다.
“전부를 갖는 것 보다는 덜 고생하겠지.”
카이사르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선택을 위해 고민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카이사르는 묘한 표정으로 이원을 응시하며 물었다.
“전부를 얻을 자신은 없는 모양이군.”
이원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지켜보던 카이사르에게 이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
뜻밖의 대답에 카이사르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재판 질질 끌면서 시간 낭비 할 자신 없어. 난 내가 필요한 만큼만 일할 거야.”
그제야 카이사르는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를 비뚤어뜨렸다.
“니콜라이의 재판에 필요한 만큼만 말이지?”
“그래.”
이원은 이번에도 역시 같은 대답을 한 후 발로 서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보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 봐, 난 내 일을 할 테니까.”
흘긋 옆을 보자 카이사르는 무심한 얼굴로 재킷을 벗고 있었다. 슈트의 베스트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건성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
왠지 용건도 없으면서 괜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짜증이 밀려들자 속이 쓰렸다. 별 생각 없이 위를 문질렀던 이원은 뒤늦게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됐지?
지금쯤 자신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편한 자신의 침대에서 혼자 편안한 잠에 빠져있어야 했다. 그런데 종일 눈 빠지게 서류를 들여다보던 것도 모자라 스쿠터는 망가지고 집안에 갇힌 꼴이 되다니. 게다가 배는 어찌나 고픈지 기절할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를 때가 나았다. 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미친 듯이 허기가 밀려왔다. 초콜릿이라도 가지고 다닐 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정작 배가 고프니 뭘 먹게 해달라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자존심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눈에 힘을 주고 자료를 펼쳤을 때.
꾸르르르르르르륵―
순간 이원은 그 상태로 굳어졌다. 카이사르가 서류를 넘기던 소리도 동시에 멈췄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아무 일 없는 척 시치미를 떼고 지그시 배를 눌렀다. 조용히 숨을 가라앉히고 힘껏 힘을 줬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꾸르륵, 꾸르륵, 꾸르르르르륵…
연달아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이원은 이성이란 본능의 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무참하게 일그러진 이원의 얼굴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
뜻밖에도 그는 평소처럼 빈정거리는 말없이 화제를 이었다.
“기다려, 셰프에게 뭔가 만들게 하지.”
선뜻 일어서는 카이사르의 모습에 이원은 황급히 뒤따라 일어섰다.
“자는 사람을 뭐하러 깨워?”
카이사르는 되레 이상하다는 듯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고 내가 원할 때 음식을 만드는 게 그가 할 일이야.”
이원은 신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하지만 뱃속의 소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되었다. 이원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쓸어올리며 말했다.
“됐으니까 내버려 둬, 내가 간단히 만들어 올 테니까.”
“네가?”
카이사르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이원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주방은 어디지?”
카이사르는 따라오라는 듯 흘긋 시선을 던졌다. 이원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마어마한 대저택답게 냉장고까지의 거리는 멀고 멀었다. 주방까지 가는 동안 굶어죽을 것 같았다. 이원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무식할 정도로 넓은 저택을 저주했다.
한참을 걸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겸 사무실을 통째로 넣고도 남을 정도의 주방에 간신히 도착하자, 이원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주방에 선 카이사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든 마음껏 사용해.”
두 팔을 벌려보이며 느긋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테이블에 기대어 선 채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상상 속에서도 보기 힘든 화려한 주방이 거기에 있었다. 모든 주방기구는 프랑스 제품이거나 독일 제품이었고 나이프나 포크는 모두 은제품에 식기는 앤티크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냉장고였다. 넓고 넓은 주방 한 벽을 몽땅 차지한 몇 대의 냉장고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로울 정도였다. 이원은 걸음을 떼어 냉장고로 향했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문득 한국에서 간단히 5분이면 먹을 수 있던 인스턴트 라면을 떠올렸을 때, 이원의 눈앞에 천국의 문이 열렸다.
냉장실 가득히 들어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와 햄이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양과 송아지에 칠면조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원을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고기의 가격이었다.
수퍼에 갈 때마다 동경의 눈초리로 바라볼 뿐 차마 구입할 수 없었던 고가의 고기들이 거기엔 산처럼 쌓여있었다. 빠듯한 살림에 그저 싼 고기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떠돌던 기억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이원은 순간 자신이 저택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넋을 잃고 쌓인 고기를 바라볼 뿐 냉장고의 문을 활짝 연 채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게 없나?”
말만 하면 눈앞에서 소도 잡아줄 것 같았다. 이원은 천국에서 어렵게 시선을 떼어 카이사르를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이원이 두 눈을 별처럼 빛내며 카이사르를 응시했다.
“여기 있는 거 다 써도 돼?”
카이사르는 깜짝 놀랐다. 이원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본 것이다.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미소와 함께 반달처럼 휘어지는 긴 눈매가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순간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원이 입을 벌리며 환한 얼굴로 가득히 웃음을 지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카이사르를 뒤로 한 채, 갑자기 이원이 몸을 돌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고기를 집어내기 시작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카이사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조리대 가득히 고기가 쌓인 다음이었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햄까지 꺼낸 이원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냉장고의 문을 닫았다. 두 손으로 햄을 든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카이사르가 보는 앞에서 커다란 식칼을 꺼냈다.
은빛으로 빛나는 예리한 칼날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던 이원은 빈 공간에 햄을 내려놓고 곧바로 칼을 가져갔다.
퍽.
기운 좋게 내리친 칼날이 햄의 중간에 턱 걸리더니 그대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이원은 얼굴을 찌푸리고 손에 힘을 줘 더 세게 햄을 썰어댔다. 하지만 칼날은 두터운 살덩어리에 꽂힌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왜 이러지? 이원이 짜증을 내며 두 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붙잡는데, 불현듯 등뒤에서 긴 팔이 뻗어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카이사르가 묘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칼을 붙잡은 이원의 손을 떼어놓고 햄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대한 햄을 가져가 아무 말 없이 기계 안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스으응, 스응, 스으응.
기계가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얇게 잘린 슬라이스 햄이 겹겹이 눈앞에 쌓여갔다. 햄이 수북이 쌓이고 나자 카이사르는 그제야 다시 버튼을 눌러 기계를 정지시켰다. 다시 찬장을 열어 접시를 꺼낸 그는 쌓인 햄을 담아 이원에게 내밀었다.
“자.”
자신이 한 짓에 무안해져 어색하게 접시를 받아들었던 이원은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난 내 것만 만들 거야.”
카이사르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좋을 대로.”
이원이 흘긋 보자 그는 걸음을 옮겨 냉장고를 꺼내 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이원은 곧 돌아서서 찬장과 서랍을 여기저기 열어 원하는 도구를 찾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에, 카이사르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설마, 실수였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흑빵을 자르는데, 마침 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이원이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덥석 자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는 고기를 손질하기는커녕 덩어리 그대로 프라이팬에 올려버렸다. 카이사르가 눈을 깜박이자, 이원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이번엔 다른 고기를 덩어리째 퍽 잘랐다. 그리고 그 고기도 역시 그 모습 그대로 프라이팬에 던져졌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온갖 고기를 종류 별로 그냥 퍽퍽 잘라 프라이팬에 던져넣는데, 카이사르가 뭔가를 내밀었다. 직접 잘라 건네준 흑빵을 받은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했다.
“채소를 넣어야지.”
“됐어.”
이원은 간단하게 거절했다. 카이사르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토마토를 나누어주며 다시 말했다.
“이거라도 넣어.”
“됐다니까.”
이번에도 역시 거절하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후회할 텐데.”
“안 해.”
이원은 선뜻 말한 뒤 보란 듯이 또 다른 고기를 퉁, 잘라 프라이팬에 던져 넣었다. 카이사르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자신의 샌드위치로 관심을 돌렸다.
대충 익은 고기를 집게로 하나씩 집어낸 이원은 뒤를 돌려본 뒤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안 익었잖아. 이원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다시 고기를 올려놓은 후 프라이팬에 불을 켰다.
문득 그는 카이사르가 궁금해졌다. 그는 한 번도 불을 쓰지 않았다. 버너는 넉넉했지만 왠지 신경이 쓰여서, 이원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익숙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양상추를 직접 손으로 조각낸 그가 그것을 내려놓았다.
조각은 전부 같은 크기로 나뉜 양상추의 크기에 이원은 무심코 뚫어져라 그것을 보고 말았다. 그 사이 카이사르는 원형의 햄을 잘라 그 위에 놓았다. 둥근 토마토를 옆으로 놓고 얇게 슬라이스 해 자르는 모습에, 이원은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생각지 못한 모습이었다. 과연 세상의 누가 주방에 서서 요리하는 저 남자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저렇게나 능란하게.
처음으로 이원은 카이사르의 외모가 아닌 다른 것에서 그가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심코 멍하니 바라보는 이원의 시선을 눈치 챈 카이사르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을 사용하는 건 능숙하거든.”
그는 보란 듯이 토마토를 잘라냈다. 종이처럼 얇은 토마토를 들어보인 카이사르가 붉은 토마토 너머로 빙긋 웃어보였다.
“사람도 이렇게 썰 수 있지.”
이원은 곧 심드렁한 얼굴로 수긍했다.
“과연.”
납득했다는 듯이 돌아선 이원은 곧 다시 자신의 요리에 전념했다. 마구잡이로 올려놓은 최상급 고기들이 꺼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형태의 샌드위치를 앞에 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샌드위치는 누가 보아도 먹음직스러웠다. 적당히 채소가 들어가고 적당히 고기가 들어간, 비율이 알맞은 건강 요리에서 시선을 뗀 카이사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리를 잘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한 기대는 깨어졌다. 햄은 실수가 아니었다. 이원의 앞에 놓인 정체불명의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물었다.
“뭘 만든 거지?”
“샌드위치.”
이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빵 사이에 음식 재료를 넣은 것이 샌드위치라고 한다면 맞다. 그것도 샌드위치라고 할 만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샌드위치는 ‘빵 사이에 적당한 재료가 들어가 있는 요리’였다. 이원이 만든 것과 같은 ‘빵 사이에 아무거나 적당히 쑤셔 넣은 미확인 물체’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거나’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빵 사이에 고기를 쑤셔 넣은 미확인 물체였다. 채소는 없었다. 오로지 고기뿐이었다. 검은 빵 위에 소고기, 그 위에 돼지고기, 그 위에 햄, 그 위에 칠면조, 다시 햄, 다시 소고기, 다시 돼지고기, 다시 햄, 그렇게 한 번을 더 반복한 뒤 마지막에 비로소 다시 검은 빵이 나왔다. 오직 고기, 고기, 고기뿐인 샌드위치였다.
“이런 것도 사람이 먹는 음식이야?”
위태롭게 쌓여있는 고깃덩어리를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묻는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가면 똑같아.”
이원이 입을 벌렸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다. 일단 한 입 물고 나머지는 가면서 먹어야지. 기대에 차 들어올린 샌드위치의 빵 사이로 일순 뻘건 속살이 보였다.
“덜 익었잖아.”
카이사르의 제지에, 이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고기는 레어야.”
“그건,”
‘돼지고기야’라고 말할 틈은 없었다. 이원은 보란 듯이 크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래, 이거야. 입안 가득히 번지는 육즙, 부드러운 질감, 고소한 끝맛, 콧속으로 번져오는 고기의…
노린내.
이원이 씹던 것을 멈추고 샌드위치를 내려다보았다. 입안 가득히 느껴지는 고기의 맛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반은 타고 반은 안 익은 살덩어리가 입안에서 미끈거리며 굴러다녔다.
이리저리 뭉친 갖가지 고기들은 덩어리가 되어 끈적하게 달라붙고 잘못 잘라낸 뼛조각이 이 사이에서 따닥거리며 부서지더니 급기야 온갖 고기의 노린내가 뒤섞여 콧속은 마비되고 말았다.
…우웩.
순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으나 막 손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 이원은 보았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원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그걸 먹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이원은 절대 그의 앞에서 먹던 것을 뱉어낼 수 없었다. 지끈, 하고 입안에서 덩어리가 씹혔다.
이원은 천천히 고기를 곱씹으며 접시를 들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의 샌드위치를 들고 주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카이사르는 말없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