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4)

카이사르는 시간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원은 다시 전화를 걸어 몇 시에 차를 보낼 것인지를 물어보는 불필요한 수고는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같이 철저한 사내가 ‘잊고 말하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일부러 잊은 ‘척’을 할 수는 있겠지.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차가 나타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원은 그런 불필요한 일로 시간을 낭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니콜라이와 함께 새벽까지 병원을 지키다 돌아온 이원은 조각잠을 잔 뒤 평소와 같은 시간에 계단을 내려갔다. 할머니와 함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니콜라이의 재판 준비에 몰두했다. 

카이사르가 줄 물건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그걸 제외한 다른 준비는 완벽하게 갖춰둬야 했다. 바쁘게 판례와 자료를 찾고 이전 공판의 결과들을 되새기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 정오가 되었다.

“저, 이보게.”

망설이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할머니가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 이원은 놀라 숨을 삼킬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돌아본 이원에게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손님이 왔어.”

“아, 네.”

그제야 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보던 곳을 체크했다. 코트를 입고 아래로 내려가자 낯익은 카이사르의 부하가 서있었다.

“점심 안 먹고 나가나?”

할머니의 물음에 이원이 그녀를 돌아보자 부하가 먼저 말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초조함이 역력히 드러나는 음성이었다. 혹시나 이원이 카이사르를 기다리게 만들까봐 조바심이 나는 게 분명했다. 이원은 할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의뢰인을 만나야 해서, 죄송합니다. 저녁은 와서 먹을게요.”

가볍게 키스를 한 이원이 돌아서자 부하는 안도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서둘러 까페를 나섰다. 이원은 별다른 질문 없이 기다리던 차에 탔다. 전차와 승용차가 바쁘게 오가는 복잡한 거리를, 세단은 능숙하게 달려갔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승용차가 속도를 늦추는 감각에 이원은 잠에서 깼다. 멍한 얼굴로 창밖을 보자 처음 보는 장소였다. 이런 공원이 있었던가? 

잘 닦인 도로의 양쪽으로 솟은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던 이원은 곧 그곳이 사유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전사가 차를 세우자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중히 인사를 하는 그에게 마주 인사를 한 뒤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저택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원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이 통째로 몇 채나 들어갈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저택은 마치 상대를 내려다보며 방문객을 비웃는 듯 했다.

“이쪽입니다.”

이원이 고개를 돌리자 집사는 먼저 앞장서서 그를 안내했다. 말없이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이원의 양쪽으로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흘끔거리며 그를 훔쳐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집안 곳곳을 감싸고 있었다. 문득 이원은 묘한 것을 느꼈다. 

민족이나 인종에 대해 다툼이 치열한 러시아에서 7년이 넘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본능이었다. 그들이 이원에게 향하고 있는 것은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현관을 지나던 이원이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원은 그대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똑바로 이원을 노려보며 입가를 비뚤어뜨렸다.

Bang.

입모양으로 총성을 흉내 내며 그는 동시에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이원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쳤을 뿐이었다.

응접실은 온실과 흡사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온통 유리로 만들어진 벽과 천장을 통해 귀한 북구의 햇살이 가득히 들어왔다. 안락하지만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카우치와 테이블, 시계 등이 가구의 전부였다. 

대신 벽과 바닥은 모두 흙과 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이원은 네 개의 다리 대신 천장에 줄을 고정시켜 공중에 뜬 채 마치 고치를 연상시키는 의자를 발견했다. 계란을 세로로 자른 것 같은 타원형의 그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편안해 보였다. 

문득 그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다리를 보았을 때, 집사가 이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원은 그가 곧바로 의자로 다가가 작게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흔들리던 의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 위로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훤칠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어서 와, 변호사 씨.”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이원을 마주 보았다. 북구의 햇살이 은빛의 남자 위로 반짝이며 부서져 내렸다.

“오는 동안 불편한 건 없었나?”

또다른 응접실로 이원을 안내해 마주 앉은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난 집사가 이원과 카이사르의 앞에 각각 찻잔을 내려놓았다.

“별로.”

이원이 짧게 말하자 카이사르는 조용히 웃더니 홍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곧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사가 응접실을 나간 뒤에야 비로소 이원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역시 류드밀라의 홍차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해.”

이원은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의 카이사르는 슈트를 입는 대신 편안한 니트와 바지 차림이었다. 언제나 말끔하게 빗어넘기던 백금발의 머리카락도 오늘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권력자의 편안한 모습을 보며, 이원은 입을 열었다.

“여긴, 당신 집인가?”

차분한 물음에 카이사르는 느긋한 얼굴로 말을 되돌렸다.

“마음에 들어?”

이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난방비가 많이 들겠군.”

눈을 깜박였던 카이사르가 웃음을 참는 듯 묘한 얼굴로 말했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은 아냐.”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는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며 이원은 곧 본론을 꺼냈다.

“내가 맡을 일은 뭐지?”

카이사르가 손을 뻗었다. 일순 긴장했지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휴미더였다.

“대단한 건 아냐, 그냥 소소한 재산권 싸움인데…”

말을 하며 카이사르는 시가를 골랐다. 이원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시가를 뒤적거리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베르댜예프라는 이름을 아나?”

전前 시장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차가운 시체가 되어 땅속에 파묻혀 있지만. 이원은 아무 말 없이 계속해 시가를 고르는 카이사르의 우아한 손마디를 짜증스럽게 노려볼 뿐이었다. 

이원의 찌푸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시가에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원은 그런 그의 태도가 아주 불쾌했고 그냥 참아줄 생각은 없었다.

불쑥 내뻗은 이원의 손이 카이사르의 강한 손목을 붙잡았다. 돌발적인 행동에 카이사르가 눈을 돌리고,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이원은 무서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할 때는 상대를 보는 게 예의야.”

카이사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용히 이원을 마주 볼 뿐이었다. 꽉 움켜쥔 손아래에서 남자의 강한 뼈마디가 느껴졌다. 머리칼과 같은 백금색의 속눈썹에 감싸인 회색의 눈동자가 유난히 짙게 물들었다. 카이사르의 입술이 유혹하듯 나른하게 벌어졌다.

“실례했군.”

엷은 미소를 짓는 얼굴에 이원은 그 때까지 세게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카이사르는 공들여 시가를 고르는 것을 그만 두고 휴미더에서 손을 뗐다.

“전 시장에 대해서 말인데,”

“알아.”

그제야 이원은 대답했다.

“시장의 사인은 의문사던데.”

무심히 말한 이원이 흘긋 시선을 향하자 카이사르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죽게 되어 있지.”

맞는 말이었지만 ‘어떻게’가 문제였다. 미간을 모으고 의심스럽게 노려보는 이원의 시선에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마피아라고 해서 매번 불법적인 일만 한다고 생각하면 편견이야.”

맞는 말이었지만 여전히 이원은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편안하게 소파의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시장은 여자가 많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 자식이고 가족이고 아무도 없었어.”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은 건 막대한 부동산과 현금뿐이지.”

이원은 곧 의뢰의 내용을 눈치챘다.

“그래서, 당신이 갖겠다고?”

“안 될 이유가 있나?”

카이사르는 반문했다.

“어차피 내가 갖지 않으면 다른 조직에서 가질 텐데.”

내키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시장이 부를 축적한 배경에는 힘을 가진 거대한 마피아가 있다는 소문은 무성했었다. 이원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내가 맡은 재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

카이사르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비리는 혼자 저지르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무심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던 카이사르는 휴미더로 시선을 향했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고 덧붙였다.

“파리는 언제나 떼로 몰려다니지.”

문득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졌다. 이원은 미간을 모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장이 즈다노프 의원과 함께 비리를 저질렀다고…?”

카이사르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이제 왜 네가 이 일을 맡아야 하는지 알겠지?”

소리 없이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에, 이원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말이 된다. 이쪽에서 분쟁을 벌여 즈다노프의 비리가 드러나면 그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매스컴을 잘 활용하면 의원직 박탈은 물론이고 감옥에 넣을 수도 있어. 그러면 니콜라이의 재판도 이길 수 있다. 이원은 확신이 생겼다. 비리는 반드시 자신의 약점이 된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연합해 만들어낸 합작품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원의 반응을 지켜보던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는 눈이군.”

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지만 카이사르는 별 말 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방으로 안내하지.”

“방?”

뜻밖의 말에 의아해하자 카이사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이고르가 네 방에 급한 서류들을 갖다 뒀을 거야. 나머지는 전부 서재에 있어. 옆방은 서재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언제든 찾아봐.”

“잠깐 기다려.”

이원은 재빨리 그의 말을 제지했다.

“당신 집에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어. 살펴보고 연락 줄 테니까 자료를 내 집으로 보내.”

카이사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원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농담이겠지? 네 좁아터진 집에 그걸 다 들여놓으면 넌 복도에서 자야 할 걸.”

이원의 집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문득 생각했던 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설마, 아니겠지. 꺼림칙한 의혹을 지그시 내리누른 이원에게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그런 집에서 7년이나 살았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거지?”

물론 비슷한 가격에 더 넓은 하숙집을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원에게는 그곳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가구마다 욕실이 따로 있으니까.”

이원의 대답에 카이사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당연하잖아, 그건.”

대부분의 공동주택은 욕실과 화장실이 공용이었다. 처음 러시아에 온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은 것은 할머니와의 우정도 귀중했지만 개인 욕실 또한 너무나 큰 메리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은 카이사르에게 시시콜콜 그것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 않아.”

긴 설명 대신 짧게 끝난 한 마디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그는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놀란 듯 했다. 온갖 잡학상식을 늘어놓던 카이사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이원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아마 저 남자는 평생 모르고 살겠지. 씁쓸해졌던 이원은 문득 몇 년 전 건물 내 욕실이 전부 얼어붙어 공동주택에 살고 있던 모두가 패닉이 되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덕분에 그 뒤 할머니는 각 집마다 돈을 걷어 공용 욕실과 화장실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관리되는 공용 욕실은 어떠한 추위에도 얼어붙지 않았지만 반대로 혹독한 추위가 오면 건물의 모두가 달려내려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1년에 한 번은 꼭 사고가 나고 마는 욕실을 떠올리며 아직은 얼지 않아 다행이야, 하고 이원은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당신 집으로 출퇴근을 할 테니까 자료는 그냥 둬.”

“출퇴근을 하겠다고?”

카이사르는 또다시 이원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9시부터 5시까지 근무하는 걸로 하겠어. 점심은 제공해 줄 것.”

간단히 조건을 내건 이원이 덧붙였다.

“내일 다시 오지, 그럼 이만.”

간단히 인사를 건네자 카이사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매일 널 데리러 갈 수는 없어.”

가늘게 뜬 눈으로 말한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 전차를 탈 거니까.”

순간 카이사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는 동안 깜빡 조는 바람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었지만 카이사르의 반응으로 보아 정원은 어마어마한 규모인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는 소리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감이군, 내 집 현관까지 오는 전차는 없어. 원한다면 역을 만들어줄 수는 있는데.”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원이 말하자 카이사르는 가볍게 한 쪽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든지 좋을 대로 하라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던 이원은 곧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집사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붙는 것이 닫히는 문 사이로 언뜻 비쳤다.

알아서, 라.

카이사르는 반 쯤 남은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며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기대가 되는군.

다음 날, 9시가 조금 못되어 저택에서 나온 카이사르는 곧 이원의 말뜻을 알게 됐다. 막 차에 오르려는 그의 귓가에 낡은 기계의 엔진 소리가 불쾌하게 들려왔다. 차에 오르려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시야 저쪽에 탈탈거리며 달려오는 스쿠터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일시에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밀집한 사내들의 시선이 고정 된 가운데 망가지기 직전의 스쿠터는 괴로운 소리를 내며 열심히 달려 정확하게 9시에 저택의 현관에 도착했다. 숨죽인 침묵 속에서 싸구려 슈트를 입은 사내가 헬멧을 벗었다. 

문득 한쪽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스쿠터에서 내리는 이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그 고물은 뭐냐는 듯이. 이원은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카이사르를 향해 말했다.

“9시 정각이야.”

그리고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카이사르를 스쳐 발걸음을 옮겼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이원은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방인을 향한 루스키(순수 러시아 민족)들의 노골적인 적대감 속에서도 그는 기가 죽는 모습은커녕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다. 

현관 앞에 선 그가 걸음을 멈추자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사내들이 오히려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린 이원은 태연한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당황한 집사는 카이사르와 이원을 번갈아보았다. 주인이 출근하는 모습을 배웅하지 않아도 좋을지 걱정하는 것처럼. 카이사르는 그제야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안내해.”

“네, 차르.”

집사는 서둘러 이원에게 달려가 문을 열고 그를 안내했다. 그 때까지 카이사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집사를 따라 선뜻 안으로 들어가는 이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카이사르의 얼굴에 불현듯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숨을 죽이고 있던 모두는 놀라 완전히 숨을 멈춰버렸다.

차르가 웃다니.

매서운 눈가를 누그러뜨리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모두가 경악을 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카이사르는 곧 고개를 돌려 차에 올랐다. 그 중 먼저 정신을 차린 남자가 황급히 머리를 숙이자 뒤이어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남자들을 뒤로 한 채 세단은 부드러운 엔진소리를 내며 정원을 빠져나갔다. 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은 카이사르는 여느 때와는 달리 휴미더를 뒤적이지 않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스쿠터라.

“짜증나는군.”

조용한 혼잣말에, 운전을 하던 남자는 흠칫 놀라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며칠 째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정확히 출근을 한 이원에게 집사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출근 한 날 이원은 카이사르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자료는 방대해서, 이원의 집에 그것을 들여놨다면 복도가 아니라 길에 나와서 자야했을 것이다. 

조사하는 동안 확실히 알게 된 것이지만 죽은 남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의 양만큼이나 비리도 많았다. 어떤 것은 그야말로 지독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어서, 불현듯 이원은 죽을 만 했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물론 곧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채 일에 몰두했지만.

카이사르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 이원이 퇴근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내심 걱정했던 일은 아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원이 그를 만나는 것은 아침에, 그것도 현관에서 옆을 스치는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이원은 마음을 놓고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을 이원은 집사의 안내에 발을 맞춰 따라갔다. 얇은 눈의 집사는 여느 러시아인들과 달리 쉽게 속을 터놓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뿐, 이라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도 루스키일까.

이원은 문득 생각했다. 러시아에는 테러도 분쟁도 많지만 인종문제도 심각했다. 루스키와 루시스키(러시아를 포함 모든 공화국 사람들을 통칭)가 서로를 헐뜯으며 반목하고 있다. 모든 인류가 사이좋게, 라는 것은 이상론에 불과하다. 

이원은 첫날 저택에 들어섰을 때 자신을 향해있던 적대감을 피부 깊숙이까지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철저히 이방인을 배척하는 루스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것을. 그런 집단의 간부이면서 자신을 집까지 불러 일을 시키다니,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다행히 어떤 위협을 느꼈던 적은 없지만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집단을 드나드는 것은 그지없이 불편했다. 이원의 시중을 드는 집사마저도 싫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임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걸음만 옮기는 그를 따라가면서, 이원은 어서 일을 끝내고 다시는 이 집 근처에도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이원을 서재로 안내한 집사가 정중히 말한 뒤 물러났다. 이원은 선뜻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서재 안은 전날 자신이 흐트러뜨리고 간 자료들로 어지럽혀져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용케 서류의 빈 곳을 징검다리 삼아 옮겨갔던 이원은 겨우 재킷을 벗어 가방과 함께 내려놓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 오늘은.

어지러이 흩어져있는 서류의 산에서 용케 전날 미처 끝내지 못한 서류를 단번에 집어든 이원은 곧바로 활자에 신경을 집중했다. 남자의 재산형성과정을 추적한 서류다. 얼마나 양이 많은지 벌써 사흘 째 이것만 붙잡고 있었다.

기필코 오늘 끝내겠어.

이원은 마음을 다잡고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닫힌 서재의 문을 흘긋 돌아본 집사는 다시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걸어갔다. 아침에 받은 주인의 명령을 실행할 때였다.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는 문을 열고 저택을 나왔다. 현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초라한 스쿠터가 오도카니 남겨져 있었다. 

집사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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