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4)

똑똑.

노크소리에 카이사르는 고개를 들었다. 류드밀라가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와 보고를 했다.

“저,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자신감 없이 사그라지는 음성에 카이사르는 문득 일전의 웃지 못 할 소동을 떠올렸다. 흘긋 그녀의 뒤를 보자 방문객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 형제.”

드미트리였다.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선뜻 걸어가며 그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었다.

“실망한 표정인데, 누구 기다렸어?”

류드밀라는 물러나며 흘끔 카이사르의 표정을 살폈지만 도무지 평소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한 그녀가 문을 닫자 카이사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내가 언젠 연락하고 왔어?”

태평하게 긴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며, 드미트리는 흘긋 카이사르를 보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카이사르 역시 응접실과 사무실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감히 그에게 이런 식으로 사무실에 불쑥 불쑥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카이사르에게 ‘특별’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언제나 사무실로 당당히 들어오곤 했다. 그것은 항상 카이사르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제재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앞으로는 약속을 잡아, 난 바쁘니까.”

“네가 없으면 류드밀라랑 놀면 돼.”

“그럼 류드밀라와 약속을 잡아.”

막 담배의 연기를 마시려던 드미트리는 멈칫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지만 카이사르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난 지금부터 일정이 있어.”

“뭐? 무슨 일정? 오늘은 비었을 텐데.”

대답 대신 문쪽을 향해 얼굴을 찌푸린 카이사르에게 드미트리는 담배를 든 손을 흔들었다.

“류드밀라가 아냐.”

카이사르는 곧 전화기로 시선을 돌렸다.

“도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용한 음성에 드미트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널 스토킹하는 게 내 삶의 즐거움인 걸.”

카이사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어섰다. 드미트리가 설치한 도청장치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도 이제 생활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없애면 또 설치할 테니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KGB들은, 하고 내심 짜증스럽게 생각했던 카이사르는 말없이 걸어둔 슈트의 재킷을 걸쳤다.

“날 버리고 가는 거야?”

190이 넘는 사내가 귀여운 척을 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묵묵히 한 손으로 드미트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후 사무실을 나갔다. 드미트리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강 쓸어넘기며 어깨를 으쓱했을 뿐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공들여 바르고 있던 류드밀라는 불쑥 사무실에서 나온 카이사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빨간 립스틱이 입가에 쭉 미끄러졌지만 카이사르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큰 보폭으로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대기하고 있는 세단의 앞에는 유리히가 서있었다.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자마자 황급히 다가와 뭔가를 보고하는 그에게,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이를 줄 때가 됐군.

간신히 공판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니콜라이의 얼굴은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친 게 역력했다. 반면 뒤늦게 나온 즈다노프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니콜라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없이 그를 격려하는 이원의 모습에, 변호사들을 끌고 나온 즈다노프는 주저 없이 비웃음을 떠올렸다. 어차피 덤벼봤자 지쳐 나가떨어지는 건 너희들이야, 라고 하듯이. 니콜라이가 맥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에, 이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제 와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재판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힘내세요, 곧 아이가 태어날 텐데.”

만삭인 아내는 집에서 애타게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떠올리며 니콜라이가 간신히 기운을 추스르는 것을 이원은 다행스럽게 지켜보았다.

“저녁은 우리집에서 먹겠나? 아내가 자네를 기다릴 텐데.”

니콜라이의 제안에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재판 때문에 알아볼 게 있어서.”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먼, 미안하네.”

이내 풀 죽은 그의 얼굴에 이원은 일부러 밝게 웃어보였다.

“당연히 변호사가 할 일인 걸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이원은 함께 법원을 나섰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 이원은 곧 예상대로의 광경을 목격했다. 대로변에 익숙한 세단이 서있었다. 이원은 곧 니콜라이에게 관심을 돌리고 말을 꺼냈다.

“아저씨, 혼자 돌아가셔도 되겠습니까? 전 지금부터 볼일이 있어서.”

거의 매번 공판이 끝나면 있었던 물음이기에 니콜라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니까요.”

쓴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허그를 나눈 이원은 니콜라이가 전차를 타기 위해 등을 돌리자 역시 걸음을 옮겨 세단으로 향했다. 굳이 운전사가 내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차의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곧바로 기사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매캐한 시가의 향이 차 안을 떠돌고 있었다. 흘긋 옆을 보자 카이사르는 타고 있는 긴 시가를 입에서 떼어내며 말문을 열었다.

“꽤 피곤해 보이는군.”

“긴 싸움이니까.”

재판이 시작된 후 푹 잠이 든 기억이 없었다. 매일 조각잠의 연속이었다. 어쩔 수 없다, 외국계의 거대 로펌을 뒤에 업은 즈다노프와는 달리 이쪽의 변호사란 달랑 이원 하나뿐이니까. 자질구레한 일들은 니콜라이도 열심히 돕고 있었지만 결국 대부분의 일은 이원의 차지였다. 지치는 게 당연했다. 자신의 침대보다 안락한 세단의 가죽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의뢰를 할 게 있는데.”

이원이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자 카이사르가 가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수임료는 높게 쳐주지.”

“마피아 일은 안 해.”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각 나온 대답에 카이사르는 놀란 척 눈을 깜박였다.

“생각도 안 해보고 바로 거절인가?”

이원은 무심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안 해.”

카이사르가 시가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빨아들인 시가에서 빨갛게 불꽃이 올라온다. 희뿌연 연기를 천천히 뱉어내며 카이사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재판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차 안에 매캐한 연기가 떠돌았다. 거기에 한 차례 더 연기를 더하며 카이사르가 말했다.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증거, 원하지 않나?”

조용한 카이사르의 물음에 이원이 고개를 돌렸다. 가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은회색의 눈동자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흥정을 요구하는 눈. 이원은 의심스럽게 미간을 모았다. 카이사르가 시선을 옮겨 이원을 마주 보았다.

“지금까지는 소총이었지만 이번 건 바주카포거든…”

일부러 뜸을 들이며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 의뢰를 수락하면 너 역시 그걸 얻을 수 있을 텐데.”

이원은 이번에는 선뜻 말을 하지 않았다. 의혹을 드러낸 찌푸린 얼굴로 카이사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고양이 앞에 거대한 참치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원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허세를 부릴 생각은 없다. 어쨌든 카이사르가 건네준 증거들 덕분에 간신히 재판을 이어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카이사르가 말하고 있는 ‘바주카포’란 지금까지의 그만그만한 증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단번엔 재판의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원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카이사르가 여유롭게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사자의 밥이 될 건지 생매장을 당할 건지를 고르는 것보다는 쉬운 선택이 아닌가.”

자욱한 시가의 연기 너머로 둘은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느새 차는 이원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까지 와버렸다. 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곧 멈춰 섰다.

“생각해 봐.”

카이사르는 품에서 작은 메모를 꺼내 이원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곧이어 달칵, 하고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잠깐 멈칫했던 이원은 곧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렸다.

“잠깐.”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이원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적당히 태운 시가를 입에 물고 빙긋 웃었다.

“오늘은 굿바이 키스 해주지 않는 건가?”

기대하고 있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려보이는 그에게, 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했다.

“기어오르지 마.”

서늘한 음성으로 일갈한 이원은 곧바로 몸을 돌려 차에서 내려버렸다. 문득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원은 곧바로 돌아서서 보란 듯이 메모를 꺼내 던져주려 했지만 벌써 차는 달려가버린 뒤였다. 

이원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아직 구겨진 메모가 남겨진 채였다.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리면 됐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원은 왠지 머뭇거렸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던 이원은 결국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기분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게.”

마침 테이블을 닦고 있던 할머니가 창을 통해 그를 발견하고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이원은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양뺨에 키스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저녁은 아직이지? 씻고 내려오게, 오늘 저녁은 아주 푸짐해.”

빠듯한 살림을 훤히 알고 있는 이원이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니콜라이의 처가 자네에게 고맙다면서 돼지고기를 보내왔어.”

이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할머니는 바쁘게 빵을 만들며 말을 이었다.

“재판에서 지면 거리로 나앉을 판이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더군. 걱정이 많은 모양이라 내 말해줬네. 자네는 러시아, 아니, 세계 최고의 변호사니까 반드시 이길 거라고. 안 그런가?”

할머니가 흘긋 고개를 돌려 이원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표정 속에 여실히 드러난 신뢰의 빛에, 이원은 어색하게 웃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여느 때와는 달리 천천히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원은 코트를 벗는 대신 털썩 침대에 앉아버렸다. 망설이던 이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메모를 꺼냈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번호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

아침부터 유난히 집중이 되지 않는 뒤숭숭한 기분에, 머리를 식히려 차를 끓이던 이원은 전화벨소리에 주방에서 나왔다. 니콜라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인데 무슨 일일까. 이원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저씨. 무슨…”

“크, 큰일났어, 어서 여기로 와줘!”

니콜라이의 음성은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급박했다. 놀란 이원이 미처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는 소리쳤다.

“공장이 폐쇄됐네!”

순간 이원은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공장이 폐쇄되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급히 이성을 찾은 이원은 서둘러 코트를 꺼내며 말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끊기는 전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별 일 아니어야 하는데. 계단을 두세 개 씩 건너뛰어 내려가며 빌었지만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이원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좋지 못한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행복보다 불행에 민감한 인간의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원은 비명과 아우성으로 난장판이 된 공장 앞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공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붉은 페인트로 크게 써진 ‘폐쇄’라는 두 글자가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넋을 놓고 서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방에 깔린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니콜라이와 직원들을 사정없이 밀어내며 폭행했다. 사무를 보던 니콜라이의 아내조차 만삭의 몸으로 끌려나와 그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아저씨!”

어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그의 모습에 이원은 황급히 다가갔다. 정면으로 얼굴을 맞은 니콜라이는 코피를 쏟으며 주저앉아 미처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원은 즉각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니콜라이를 때린 남자는 흘긋 이원을 보더니 설명은커녕 그에게도 역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당장 나가려는 주먹을 겨우 참고 이원은 몸만 피했다. 아무리 봐도 사내들은 마피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민간인을 때리면 뒤가 귀찮아진다. 일단 상황 파악이 중요했다.

“이 새끼, 넌 뭐야?”

난폭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이원을 밀어내려는 남자에게 이원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질렀다.

“니콜라이 씨 변호사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들 대체 누구길래,”

변호사라는 말에 그는 멈칫했다. 하지만 당혹해하는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귀찮게 되었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는 말했다.

“시의원님의 명령이야. 공장을 폐쇄하라고.”

뒤늦게 이원은 그들이 시의원의 직원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즈다노프 의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을 텐데요, 아직 재판 중인 상태에서 멋대로 공장을 폐쇄하다니 명백한 불법 아닙니까?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건 모르겠고, 이게 명령서야. 자, 이제 됐지? 어서 꺼져버려!”

남자는 구겨진 서류를 이원에게 떠넘기다시피 밀어주며 고함을 질렀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서류를 살핀 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됐나? 왜 그래, 뭐라고 써있는데? 그 서류, 진짠가?”

두서없이 묻는 니콜라이의 성급한 물음에, 이원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목소리가 성대에 걸린 듯 까칠하게 흘러나왔다.

“진짜입니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공장에 들어가려는 공장의 직원들과 사내들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것이었다. 이원은 서류를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절차 상의 하자는 없었다. 이원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아무 것도 없었다.

“아악!”

거친 남자들 틈에서 새된 여자의 비명소리가 질러왔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배를 안고 비틀거리는 니콜라이의 아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색이 된 니콜라이가 피가 흐르는 코를 움켜쥐고 달려갔다.

“여보, 안나!”

“부인, 괜찮으십니까?!”

이원 역시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가자, 엉거주춤 주저앉았던 그녀가 크게 뜬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여보, 아이가…”

동시에 니콜라이와 이원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그녀의 임부복이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예정일보다 일찍 세상에 나온 아이의 울음소리는 가냘팠다. 자신의 한 팔 안에 겨우 차오르는 작은 몸을 니콜라이는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수고했어, 당신.”

아내의 초췌한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니콜라이가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을 이원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축하의 말을 한 뒤 병실에서 나왔을 때 니콜라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지쳐보였다.

“아저씨.”

이원은 그의 용기를 북돋워주려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자세히 알아보고 항의를 하겠습니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데 그런 명령이 내려오다니, 의원의 직권남용입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아마 배심원들에게도 공감을 얻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니콜라이의 음성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이원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아네. 그동안 자네가 열심히 해준 것도 알고. 그래, 힘내야지. 이제 아이까지 세상에 나왔는데 내가 이렇게 주저앉으면 안 되지. 버텨야 하는데, 이겨야 하는데.”

니콜라이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려나왔다.

“힘드는구먼.”

니콜라이가 눈을 감았다. 젖어든 눈가에 남자의 거칠고 딱딱한 손이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이원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침묵 할 뿐이었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서걱거리며 울려 퍼진다. 

이원은 그 자리에 서서 니콜라이의 절망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방안은 죽음 같은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원은 몇 시간 째 꼼짝없이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후, 하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이원은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은 휴지통으로 향했지만 기분은 바닥이었다. 

어쩔 수 없이 휴지통을 들고 안을 뒤적였던 이원은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뒤늦게 이원은 자신이 아침에 휴지통을 비워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이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망할!”

이원은 휴지통을 걷어차 버렸다. 어떡하지. 목구멍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천장을 향해 끓어오르는 한숨을 뱉어냈던 이원은 결심하고 이번엔 다른 것을 찾았다. 쌓여있는 서류철 안에서 겨우 명함을 찾아낸 이원은 잠시 번호를 노려보다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문득 이 번호가 결번이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네,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서실입니다.”

이원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 뵈었던 변호사입니다. 카이사르 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만.”

류드밀라는 순간 숨을 삼키는 것 같더니 안내인사도 잊고 허겁지겁 버튼을 눌렀다. 단조로운 벨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기다리던 음성이 이어졌다.

“알려준 번호는 어떻게 했지? 사무실로 전화하다니 의외군.”

전혀 놀랍지 않은 음성으로 카이사르는 비꼬았다. 이원이 메모를 버렸을 거라는건 이미 짐작했던 것 같은 말투였다. 이원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의뢰, 받아들이겠어. 단, 사람을 죽이거나 죽게 만드는 일은 안 돼.”

카이사르가 소리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 길게 끌지 않고 그는 말했다.

“내일 집으로 차를 보내지.”

그걸로 끝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카이사르가 덧붙였다.

“위법한 일은 아냐.”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전화는 끊어졌다. 이원은 물끄러미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뒤늦게 떨리는 한숨을 뱉어냈다. 선택은 끝났다. 이제 행동만이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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