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4)

몸이 매트리스에 찰싹 달라붙어버린 기분이었다. 이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느리게 몸을 뒤척였다.

실수했어.

자책을 거듭했지만 두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싸구려 술로 폭음을 한 게 원인이었다. 이래서 기분이 나쁠 때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다시금 후회를 곱씹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계속해서 머리를 두드려대는 두통에 끓어오르는 신음을 뱉어내는데, 문득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있나?”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내려오던 이원이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 올라온 게 분명했다. 이원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듣기에도 거북하고 갈라진 음성이 칼칼하게 새어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할머니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원의 모습을 보고 끌끌 혀를 찼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어? 뭔 일이 있었기에.”

대답보다 먼저 신음소리를 내고 만 이원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냥 화나는 일이 좀 있어서, 이제 괜찮습니다…”

자신이 듣기에도 전혀 괜찮지 않은 음성에 무안함이 느껴져 소리가 잦아들었다. 전날 입은 채 그대로 잠들었던 셔츠와 바지가 버석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선뜻 말했다.

“오늘은 쉬는 게 좋겠구먼. 내 차를 타줄 테니 마시고 푹 자게. 술은 적당히 마셔야지, 몸 상할 정도로 마시면 쓰겠나? 에잉…”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와 함께 잔소리도 멀어졌다. 잠시 뒤 할머니가 꿀을 탄 홍차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원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와장창―

난폭한 소리가 이원의 잠을 단번에 깨워버렸다. 곤히 잠들어 있던 이원은 눈을 번쩍 뜨고 한동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심각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잠잠히 누워있는 그의 귓가에 다음 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였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 두지 못해?!”

할머니의 고함소리와 함께 또다시 난폭한 파열음이 들린 순간, 이원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져 얼굴을 박아버리고 만 이원은 입안으로 욕설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할머니, 무슨 일,”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이원은 고함을 지르다 멈칫했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온통 부서지고 깨져 엉망이 된 까페의 정경을 보는 순간 이원은 짧게나마 그대로 굳어졌다. 오래 된 의자는 바닥을 뒹굴고, 테이블은 뒤집힌 채 반동강이 난 데다 찻잔이고 그릇이고 죄다 깨져 조각이 나있었다. 이원의 고함소리에 난동을 부리던 사내들이 그를 돌아보고, 억센 남자들을 뜯어말리며 악을 쓰던 할머니가 멈칫했다.

“할머니, 이게 대체…”

다치지 않도록 서둘러 그녀를 떼어낸 이원은 다시금 남자들에게 덤비려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곧바로 남자들과 마주 섰다.

“뭐야, 당신들. 지금 감히 어디서 행패야?”

성마른 소리로 내지르자 남자들이 멈칫하더니 곧 서로에게 눈짓을 했다.

“네가 그 잘난 변호사인 모양이군.”

이번에는 이원이 멈칫했다. 하지만 길게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시키는 대로 말을 들을 것이지, 왜 사람을 성가시게 해? 당장 니콜라이한테서 손 떼라고 했을 텐데!”

곧바로 남자가 주먹을 내지르자 이원은 할머니를 밀어내고 남자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이, 이놈들, 이 무뢰배들 같으니! 그만 둬, 당장 그만 두란 말이야! 그만 두지 못해?!”

할머니의 절규와 같은 외침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괴한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이원보다 한 박자 먼저 달려 내려온 니콜라이는 이미 저쪽에 뻗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자신에게 덤벼든 남자들을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그 사이에도 남은 남자들은 집기를 부수고 있었다.

“그만 둬, 이 개자식들!”

이원은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사내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어금니가 날아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내를 타고 넘어 곧바로 행패를 부리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뒤에서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돌아보면서 그대로 주먹을 날린 이원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남자를 뒤로 하고 다시 다른 녀석에게로 향했다. 막 그가 오래 된 포트를 내던지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사색이 된 할머니가 소리쳤다.

“안 돼, 그건…!”

이원은 이를 악물고 힘껏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사내가 이원에게 달려들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자기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내를 때려눕힌 이원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포트는 산산조각이 되어버린 뒤였다. 사색이 되어 그대로 주저앉고 만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남자들이 다시 이원에게 덤벼들고, 이원은 이를 악문 채 남자들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 개새끼들…!”

한참 난투극을 벌이던 남자들이 절뚝거리며 돌아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달아나는 상대를 뒤쫓아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 일은 이원에게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앞을 다투어 차를 타고 달아나는 그들을 이원은 백 미터 가까이 전력질주를 해 쫓아갔다. 결국 눈앞에서 사라지는 차의 꽁무니만 노려보며 숨을 몰아쉬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까페로 되돌아갔다.

사내들이 돌아간 뒤 남겨진 현장은 더욱 처참했다. 고요 속에서 온통 깨지고 부서져 멀쩡한 집기라고는 전혀 없는 까페 안에서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뜩 주름이 진 손으로 하나씩 모으고 있는 것은 포트의 깨진 조각이었다. 

남편과 결혼할 때 마련했다던 포트는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서린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평소 당당하고 어떤 경우에도 꼿꼿이 세운 허리를 굽히지 않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아무 말 없이 조각을 줍는 그녀의 떨리는 손으로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이원은 이를 악물고 말았다. 

이런 일을 할 상대는 하나뿐이다. 전날 선언했던 거절의 뜻을 이제 행동으로 보이겠다는 건가? 증거로 엉망이 된 니콜라이를 안고 울먹이는 그의 아내를 본 이원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낚아채듯 코트를 꺼내들고 곧바로 달려 나갔다.

용서할 수 없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 치졸한 일을 지시한 장본인, 카이사르에게였다.

사무실 안에 그윽한 홍차의 향기가 퍼졌다. 다른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그렇듯 카이사르 역시 차를 좋아했다. 특히 아침에 마시는 한 잔의 차는 그의 하루의 기분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다.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슈트를 갖춰입은 카이사르가 재킷을 벗어 건네자 재빨리 그것을 받아 건 유리히가 슬쩍 물었다.

“저, 어떠십니까?”

카이사르가 차를 마시기를 기다렸던 유리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향을 음미한 후 한 모금을 머금었던 카이사르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유리히는 곧 대답을 눈치 챘다. 카이사르는 간단히 말했다.

“류드밀라의 솜씨는 언제나 좋지.”

반대로 말해 그녀의 일솜씨는 형편없었다. 수시로 메모를 빼놓기 일쑤에다 작성한 서류는 오타투성이에 간단한 스케줄 정리에도 애를 먹었다. 단지 그녀는 카이사르의 마음에 드는 차를 끓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역시 만족스러워하는 카이사르의 반응을 보고 내심 유리히는 문 건너편에 있는 류드밀라에게 감탄했다. 

류드밀라가 제대로 해내는 것이라고는 차를 끓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덕분에 사무실의 모두는 아침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오늘 차르의 기분은 왠지 평소보다 좋아보였다. 어제의 공연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유리히는 틈을 봐서 변호사와의 일을 물어보려 했다. 물론 곧 알 수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달칵.

노크도 없이 열린 문소리에 카이사르와 유리히는 동시에 시선을 들었다. 들어온 것은 류드밀라였다.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아무리 실수투성이의 류드밀라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그것이 그저 우연에 의한 실수가 아님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소, 손님이, 손님이 오셔서,”

류드밀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헐떡이며 겨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지 못한 그의 모습에 당황한 유리히는 뒤늦게 그녀가 그토록 떨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원이 그녀의 등에 뭔가를 꽂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 이 놈…!”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치려는데, 갑자기 이원이 그녀의 등에서 손을 뗐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류드밀라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두터운 만년필이었다. 자신을 위협한 것이 권총이 아닌 단순한 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더더욱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은 곧바로 카이사르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착각을 해 약속에도 없는 손님을 들여보내고 말았다는 사실에 공포로 질린 그녀의 뒤로 이원이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를 하며 머리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류드밀라는 또 한 번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고개를 든 이원이 흘긋 카이사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꼭 만나야 해서.”

유리히가 뒤늦게 나서려 했지만 카이사르가 더 빨랐다.

“웬일이지? 이런 아침부터.”

평소처럼 느긋한 음성에 이원은 똑바로 그를 마주 보고 대답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누가, 멋대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해야겠군.”

급히 나서려는 유리히를 가로막은 카이사르가 흘긋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무언의 압박에 못이겨 유리히는 주춤거리며 흐느끼는 류드밀라의 어깨를 안고 사무실을 나가야 했다.

탁.

조용한 문소리와 함께 그들은 단 둘이 남겨졌다. 와이셔츠 위로 산뜻한 베스트를 걸친 차림으로 카이사르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운이 좋군. 류드밀라는 차를 끓이는 솜씨가 훌륭하거든.”

1인용의 소파에 앉아있던 그가 앉으라는 듯 옆의 긴 소파를 가리켰다.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원은 말 없이 그를 따라 긴 소파에 앉았다. 류드밀라가 차를 가지고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진정된 모습으로 차를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에 이원은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류드밀라는 빨갛게 부은 눈을 흘긋거리며 그에게 향하더니 아무 말 없이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아침의 홍차는 잠을 깨기에 아주 좋지.”

그 말대로 홍차를 들어 향을 음미한 카이사르는 한 모금을 머금더니 곧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도 마셔보라는 듯 카이사르가 이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딱딱한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마주 볼 뿐이었다. 단지 두 눈을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비서를 협박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부터 오늘의 그는 뭔가 이상했다. 비록 값나가는 슈트는 아니더라도 항상 말끔한 행색을 갖추고 있던 그는 오늘은 평소와 아주 달랐다. 

구겨진 셔츠는 엉망이 된 바지 위로 빠져나와 있고 코트는 아무렇게나 걸쳐 단추도 채우지 않은 데다 외출 할 때는 필수라고 할 만한 샤쁘카(털모자)도 쓰지 않았다. 거기다 거울을 보지도 않았는지 뒷머리는 사납게 뻗쳐 마치 자다 깨서 바로 뛰쳐나온 몰골이었다. 지진이라도 났던가, 하고 카이사르는 문득 그의 얼굴 한 쪽에 크게 자리잡은 멍과 피가 맺혀있는 주먹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 사이에 패싸움이라도 했던 건가. 내심 생각하며 카이사르는 무심히 화제를 꺼냈다.

“이 홍차는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온도와 농도를 정확히 맞추면 기가 막힐 정도로 향기롭지. 이 홍차의 향을 이렇게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뽑아내는 비서는 류드밀라가 처음이었어. 이후로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

카이사르는 짧게 웃었다.

“한 가지 재능이 지나칠 정도로 뛰어나면 그 외에 다른 모든 걸 망쳐버려도 용납할 수 밖에 없다니까.”

이원은 내심 기가 막힌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짓을 저지른 주제에 어쩌면 저렇게 천연덕스러울 수 있을까. 저런 철면피는 처음이었다.

할 수 없지, 하고 혼잣말을 덧붙인 카이사르에게 이원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이랑 홍차 따위 얘기하려고 온 거 아냐.”

카이사르는 찻잔 너머로 흘긋 이원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원은 사무실에 들어온 이후 줄곧 그를 죽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조금씩 식어가는 홍차의 맛을 한 번 더 음미한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침에 차 한 잔 할 여유도 없나?”

손도 대지 않은 이원의 찻잔에서 시선을 뗀 카이사르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용건이 뭐지?”

그런 몰골로, 라는 듯이 흘긋 전신을 훑어보는 시선에 이원은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카이사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태연했다. 그런 일로 화가 나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을 이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람 하나 쯤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이원은 힘껏 깨물었던 입술을 놓으며 냉정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후원하는 의원을 돕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마피아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며 그는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아무 관계없는 할머니한테까지 폭행을 휘두른 건 심했어. 덕분에 결의를 더욱 다지게 됐어, 우린 결코 당신들에게 지지 않을 거야.”

이원은 증오를 담고 그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가보자고, 과연 누가 이기나.”

카이사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이원을 마주 볼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폭행?”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흘러나온 한 마디에 이원은 턱을 치켜들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몰라서 물어?”

카이사르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도통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면서 되레 자신에게 왜 모르냐고 따져 묻다니. 마피아인 주제에 이원보다 더 고상한 태도로 그를 응시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이원이 말을 멈춘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꿈이라도 꾼 건가?”

“뭐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이원은 멈칫했다.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만 이원을 바라보며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밤에 이상한 꿈이라도 꾸고 여기 와서 난동을 부리는 건가 해서. 다짜고짜 난입해서 앞 뒤 맥락도 없는 말을 늘어놓다니 당혹스럽군. 과연, 마피아와는 다르지. 고귀한 변호사님께서 할 만한 행동이야.”

여유있는 말투로 비꼰 카이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면, 이길 수 없을 게 뻔하니까 이런 식으로 발악이라도 해보는 건가?”

“뭐라고…!”

카이사르의 도발은 유효했다. 적절하게 들이부은 기름으로 이원의 분노는 일시에 불타올랐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이원은 그 때까지 손도 대지 않던 찻잔을 들어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끼얹어버렸다. 느긋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조롱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정확하게 남자를 향해 끼얹은 홍차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카이사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아차.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문득 이원은 데자뷰를 느꼈다. 그를 향해 흩뿌려지는 홍차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이전과 너무나 흡사한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카이사르는 의자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몸을 피하며 이원의 허리가 아닌 팔을 잡아 낚아챘다.

“아윽!”

그대로 소파 위에 처박히고 만 이원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등뒤에서 팔을 꺾어 내리누른 카이사르가 한 팔을 소파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꽤 성미가 급하군.”

“놔, 망할 자식… 비겁해!”

발버둥을 치는 이원의 위에서 카이사르가 짧게 혀를 찼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욕을 배운 거지? 누군지 알아내서 혼을 내줘야겠군.”

“얼마든지 해보시지, 폭력과 협박이 생활일 테니.”

카이사르에게 납작 눌린 주제에 기세 좋게 고함을 지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불현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대로 달려왔군.”

뜻밖의 말에 이원이 멈칫했다. 카이사르는 소파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한 쪽에 삐죽이 솟아나온 이원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옷도 어제 입었던 그대로고 몸에선 술냄새가 나. 어지간히 마셨던 모양이지.”

“무슨 상관이야…!”

다시금 몸을 뒤흔들며 내지르는 이원의 고함소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사르가 말을 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말이지, 사람의 체취는 가장 진해져.”

보란 듯이 이원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카이사르가 속삭였다.

“이게 네 냄새군.”

마치 기억해두려는 듯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에 이원은 흠칫 굳어졌다. 고요한 사무실 안에 카이사르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메아리쳐 들러왔다. 등뒤로 느껴지는 남자의 몸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원은 그의 전신을 너무나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싸구려 코트를 걷어냈다. 성급한 손길에 밀려난 코트 아래로 남자의 몸이 맞닿았다. 이원은 자신의 바지가 그렇게 얇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엉덩이에 맞닿는 감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냄새를 확인하던 카이사르가 귓가로 입술을 옮겼다. 가만히 물었던 귓바퀴를 놓아주며 그는 속삭였다.

“다리 벌려.”

이원을 밀어붙인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에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야수가 자신을 향해 이를 세우는 것을 이원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너무나 또렷이 실감하고 있었다. 

크게 맥박치는 고동소리만큼이나 뜨겁게 일어선 남자의 맥박이 맞닿은 살덩어리로 여실히 느껴졌다. 몸 위로 느껴지는 그것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장 안을 찢고 들어올 것 같은 흉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렵게 시선을 향한 곳에는 차가운 은회색의 눈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만족과 실망이 동시에 카이사르의 얼굴을 스쳐갔다. 카이사르를 응시하는 이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스럽다는 듯 미려한 눈썹을 일그러뜨린 이원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항상 이런 식으로 힘을 과시하나?”

혐오감으로 일그러진 우아한 미형의 남자에게 그를 내려다보던 수컷은 욕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위험한 냉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린치였지. 하지만 넌 그러기엔 너무 미인이야.”

이원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빈정거렸다.

“편리하군. 얼굴이 마음에 들면 자나?”

카이사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긴 손가락을 들어 이원의 턱을 쥐더니 엄지손가락 끝으로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피로 물든 넌 아름답겠지.”

단단한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고 입술 안쪽의 붉은 속살을 지그시 누른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하는 이원의 시선에, 카이사르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탄성이 흘러나왔다. 낮은 속삭임과 함께 희미한 숨결이 발갛게 젖은 속살에 스며들었다.

“내 정액으로 물든 넌 어떨까.”

카이사르의 물음에 이원의 대답은 하나였다.

“네 장례식이나 상상해 보시지.”

이를 갈며 내뱉은 말에 뜻밖에도 카이사르는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의외의 반응에 미간을 찌푸리자, 카이사르는 불현듯 몸을 떼고 그를 놓아주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크게 물러난 이원이 이내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카이사르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여상한 태도로 테이블 위의 휴미더를 열어 시가를 꺼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 까페가 엉망이 됐다고?”

커터로 끝을 자른 시가에 공들여 불을 붙이는 모습을 이원은 짜증스러운 기분과 당혹스러운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지켜보았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내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카이사르가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이원은 곧바로 그를 향해 무섭게 눈을 치켜떴다.

“당연하잖아, 즈다노프 의원의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말을 하던 이원은 순간 멈칫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아닌가?

“얼굴은 그래서 다친 건가?”

이원보다 먼저 물은 말에 이원은 입을 다물었다. 싸움의 훈장이 아닌 혼자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멍이 든 것이라고는 죽어도 말하지 않겠다.

“당신이 한 게 아니라고?”

대답 대신 의심스럽게 물은 말에 카이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어떨까.”

그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묘하게 말을 돌렸다.

“이런 시간에 다짜고짜 찾아와 난동을 부릴 정도라면 당연히 근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물론 근거는 있었다. 지금 와서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한 거야?”

카이사르가 깊숙이 들이마셨던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시가의 매캐한 향내에 무심코 이원이 미간을 찌푸리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그게 나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당연히 고소하겠어.”

즉각 대답한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물었다.

“증거는?”

이원이 멈칫하자 카이사르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섣불리 사람을 의심하면 무고죄에 해당한다는 걸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심증만으로는 곤란해, 내가 모든 걸 지시했다는 증거와 사건에 대한 정확한 경위를 나열해 봐.”

신문을 하는 쪽이 뒤바뀌고 말았다. 당황한 이원이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카이사르는 소리없이 웃으며 시가를 입으로 가져갔다.

“변호사면서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난입해 들어오다니, 재판이었으면 당연히 패소했을 걸.”

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났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끗한 패배였다.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흔치 않게 분노에 휩쓸려 이성을 잃은 것이 문제였다. 마구 구겨진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 나뒹굴었지만 이원은 냉정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실례했군요.”

겨우 평소의 그로 되돌아간 이원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더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증거를 갖춰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하고 짧은 인사까지 덧붙인 뒤 이원은 돌아섰다.

“변호사 씨.”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려는 이원을 카이사르가 불러 세웠다.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자 책상에 걸터앉은 카이사르가 물었다.

“아까의 얘기 말인데.”

설마 그 얘기는 아니겠지, 하고 이원은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그것이었다.

“린치를 당하면 고막이 터지고 각막이 떨어지는 건 시작에 불과해. 그대로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카이사르는 말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선택해. 너라면 장님이 될 건가, 다리를 벌릴 텐가.”

이원은 질문을 그대로 되돌렸다.

“당신이라면 굶주린 사자에게 잡아먹히겠어, 아니면 꽁꽁 묶인 채로 생매장을 당하겠어?”

카이사르가 멈칫하더니 뜻밖에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원이 눈을 깜박이자 카이사르는 여전히 웃음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

“곤란하군, 목숨이 하나라서 시험해 볼 수가 없겠어.”

이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덧붙였다.

“당신이 선택하면 나도 대답해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원은 곧바로 몸을 돌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을 닫느라 어쩔 수 없이 시선을 향했을 때, 그 때까지 그를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가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잘 가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최후까지 이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린 뒤, 카이사르는 닫힌 문 너머로 사라졌다.

“차, 차르.”

이원이 가는 것을 확인한 뒤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온 유리히는 다급하게 그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별 일은 없으셨던 겁니까? 전 걱정이 돼서 도무지…”

“유리히.”

수다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유리히를 카이사르의 음성이 가로막았다. 유리히가 황급히 입을 다물자 카이사르는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즈다노프의 뒤를 캐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네? 즈다노프 의원이요?”

깜짝 놀란 유리히를 무시한 채 카이사르는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내게 일을 의뢰해놓고 뒤에서 다른 짓을 벌이다니.

부옇게 흐린 담배연기 너머로 가늘게 뜬 그의 회색눈동자가 음산하게 빛을 냈다.

전부 다 부숴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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