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4)
  • 최근 신흥 부자들에게 꽤 알려진 비밀 클럽은 명성과 달리 꽤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도시의 외곽에 하나 둘 씩 고급 승용차가 서면 클럽의 앞을 지키고 있던 큰 덩치의 사내들이 다가와 신분을 확인한 후 따로 마련 된 문을 통해 그들을 클럽 안으로 안내했다. 

    클럽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이 클럽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클럽을 찾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요구가 그 안에서 이루어졌다. 불가능은 없었다. 돈과 권력만 있다면.

    “어서 와, 형제.”

    개인실에서 넓은 테이블에 몇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앉아 실컷 즐기고 있던 드미트리는 문을 열고 들어온 카이사르의 모습을 발견하자 곧바로 한 손을 들어 환영했다. 정중히 카이사르를 테이블로 안내한 지배인이 옆으로 비키고, 카이사르는 별다른 표정 없이 드미트리가 잡은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힘찬 악수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듯, 드미트리는 카이사르를 억세게 끌어당겨 그의 뺨에 열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카이사르는 참아줬지만 입술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짧게 말하며 옮겨오는 키스를 제지한 카이사르가 맞은편에 털썩 앉자 이내 드미트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는 하게 해줬잖아.”

    “어렸으니까.”

    카이사르는 시큰둥하게 말한 뒤 자신의 앞에 놓인 글라스를 단번에 비웠다. 곧바로 옆에 앉은 여자가 글라스 가득 보드카를 채웠다. 카이사르가 클럽에 들어온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의 주변에는 십여 명에 달하는 여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면서도 선뜻 그에게 아양을 떨며 몸을 비비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할 일은 그저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 남자가 원할 때 몸을 내주는 것이 전부라는 것 또한. 

    그러나 잔뜩 긴장한 채 이제나 저제나 눈치만 보는 카이사르 쪽의 여자들과는 달리 드미트리 주변의 여자들은 까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거나 키스를 해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은빛의 늑대를 연상시키는 카이사르와는 달리 짙은 갈색 머리칼에 짙은 그린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드미트리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극과 극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거대한 테이블을 경계로 뚜렷이 드러나는 분위기까지도. 한쪽은 북극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데 반대쪽은 열대의 우림이었다.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다를까. 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여자들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카이사르와는 달리 양 팔에 여자를 하나씩 끼고 앉은 것도 모자라 다리 사이에 한 명을 앉히고 양 어깨에 두 명을 걸친 드미트리는 그들 모두와 한 번씩 번갈아 키스를 하는 것조차 바빠 보였다. 

    당장 드미트리의 팔에 걸쳐져 있는 여자를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신경전을 벌이는 여자들까지 합하면 드미트리의 주변에는 열 명이 넘는 여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드미트리는 단 한 명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드미트리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데 실패한 미녀가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자 그는 소리내어 웃으며 그녀의 드러난 가슴에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그래서 카이사르.”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드미트리가 여자의 풀어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었다.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카이사르는 짧게 대답했다.

    “순조롭게.”

    보드카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모습에, 드미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신호로 지켜보던 지배인이 재빨리 손짓을 했다. 그와 함께 벌떼처럼 모여있던 여자들이 일시에 일어나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방금 전까지 여자들로 북적이던 테이블은 삽시간에 단 둘만이 남아버렸다. 지배인조차 사라진 뒤, 드미트리는 빈틈없이 닫힌 개인실의 문에서 시선을 떼고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즈다노프에 대한 서류는 봤겠지?”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역시 짧게 답했다.

    “물론.”

    “그런데 계속 할 생각이야?”

    드미트리의 질문에 카이사르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촌이자 죽마고우인 드미트리는 전직 KGB로, 현재는 이 비밀클럽의 주인이다. 전직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KGB로 통했다. 그가 손에 넣지 못할 정보란 없다. 그런 드미트리가 전해준 정보이니 확실한 셈이다. 드미트리는 아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만약에 수사팀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찾아내면 바로 끝날 거야. 그만 접어, 카이사르. 즈다노프가 귀찮게 굴면 내가 처리해 줄 테니까…”

    카이사르의 입가가 냉혹하게 비틀렸다.

    “내가, 즈다노프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아?”

    조용하고 느린 반문에 드미트리는 즉각 물러났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카이사르가 빈 잔에 가득 보드카를 따랐다. 흘긋 그것을 내려다본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차피 이득 될 게 없으니 손을 떼는 게 좋지 않겠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묻는 말에 카이사르는 뜻밖에도 짧게 웃었다.

    “호랑이를 길들이려면 먹이를 줘야지.”

    “호랑이?”

    드미트리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카이사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보드카를 비웠다. 선뜻 일어서는 그의 모습에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미하일이 쓰러졌다고 하더군.”

    카이사르가 똑바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러시아에서 미하일이란 흔해빠진 이름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하일은 단 한 명이었다.

    “조심해야 할 나이가 됐지.”

    차분한 카이사르의 말에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미하일의 조직 내에선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암암리에 퍼져있는 소문이야. 로모노소프 쪽은 후계자가 없으니 미하일이 이대로 끝난다면…”

    드미트리는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둘은 결론을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러시아는 내 손에 들어오겠지.”

    “차르에게 건배를.”

    드미트리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높이 들었던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카이사르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개인실을 나가려 했다. 그가 막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드미트리가 불쑥 말했다.

    “복도 끝의 오른쪽 방이야.”

    카이사르가 흘긋 돌아보자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살살해 줘, 최상급인 애들이니까 말이야.”

    카이사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개인실을 나갔다.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여자들이 앞을 다투어 우르르 방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드미트리의 옆을 차지하려 실랑이를 벌이는 여자들 뒤로 지배인이 재빨리 들어와 말했다.

    “일단 명령하신 대로 열 명 준비했습니다.”

    “좋아, 술은 넉넉하게 채워뒀겠지?”

    지배인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세 배나 많은 양을 비축해 뒀습니다. 혹시 몰라서 술을 공급하는 회사에도 오늘은 밤새 연락을 기다리라고 언질을 줬습니다.”

    “저 녀석을 취하게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양이 필요하니까 수시로 술을 들여보내. 절대 술은 도중에 떨어지면 안 돼.”

    다시금 강조한 드미트리는 승리를 쟁취하고 옆자리를 차지한 금발의 미녀에게 다정하게 웃어보였다. 반대쪽에 앉은 여자는 그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재빨리 드미트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드미트리, 정말 저 분이 하룻밤에 열 명을 다 상대하는 거예요? 혼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드미트리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믿어지지 않지? 사실이야. 겉으로는 금욕적으로 보이지만 저 녀석의 본성은 짐승이거든.”

    드미트리는 웃음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기억을 더듬듯 아련한 표정을 떠올렸다.

    “단 한 번 같이 섹스를 했던 적이 있지.”

    드미트리의 빈 잔에 보드카가 채워지고, 가득 찬 잔을 들어올리며 드미트리가 말을 이었다.

    “여자 다섯을 사서 굴렀어. 그런데 말야, 다음 날 어떻게 됐는지 알아?”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드미트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중에 세 명이 입원했어. 저 녀석 하나를 감당 못해서.”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반신반의하며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반응에, 드미트리는 보드카를 한 번에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 뒤부터 저 녀석은 섹스를 할 때 끝없이 술을 마시지. 왜일 것 같아?”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드미트리는 기다리지 않고 답을 내주었다.

    “밤새도록 퍼마시다 그게 서지 않을 만큼 취하면 그제야 멈추거든.”

    개인실은 어느새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숨을 죽인 채 할 말을 잊은 그녀들을 향해 드미트리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은 말이야, 절대 지치지 않아.”

    여전히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드미트리만이 즐거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드카를 들어보였다.

    "이번엔 얼마만에 끝나는지 볼까."

    한참 맹위를 떨치던 추위가 한 풀 꺾였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뜬 이원은 다른 때보다 따뜻한 날씨에 모처럼 가벼운 기분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개인적인 일을 해결 할 예정이었다. 일정은 간단하다. 전차를 타고 종점까지 가 주소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유일한 단서.

    이원은 손에 쥔 메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크게 기대를 품지 않으려 했지만 가슴 한 구석이 가벼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까지 배웅을 해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 후 이원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날이 풀렸다고는 해도 여전히 혹한의 날씨인 러시아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무심코 ‘오늘은 따뜻하군’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꽤나 러시아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을 것 같았는데.

    벌써 7년인가…

    문득 이원은 그 날을 떠올리고 눈가가 아련해졌다.

    ― 이원아, 해줄 수 있겠니?

    힘없이 뺨을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랐다. 이원은 가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힘을 내자. 꼭 찾을 수 있어. 가볍게 주먹을 쥐었던 이원은 한층 더 힘찬 발걸음으로 바쁘게 걸어갔다.

    넓은 국토만큼 먼 거리를 전차를 타고 흔들거리며 향했던 이원은 한참만에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 사람들이 직접 농사를 짓기 위해 작은 텃밭을 사거나 별장을 구입하곤 하는 외곽의 도시는 평일에는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산했다. 

    조용한 시골거리를 걸어가는 외국인의 모습은 역시나 눈에 띈다. 특히 이원은 어째서인지 어딜 가나 당연한 듯이 시선을 모으곤 했다. 이원은 이번에도 역시 밭농사를 짓다 말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골아낙의 얼굴에 짧은 미소를 지어 인사를 대신했다. 

    어색한 인사를 마주 한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훔쳐보는 것을 뒤로 하고 이원은 메모에 적힌 주소를 향해 바쁘게 걸어갔다. 고요한 시골길을 얼마간 홀로 걸어간 뒤, 마침내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잠시 뒤 대답이 흘러나왔다.

    “누구요?”

    가늘게 흔들리는 노인의 음성에 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으로 나오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이원의 심장은 조심스럽게 설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내내 허탕만 쳐왔다. 간신히 7년 만에 찾은 실마리. 혹시 이번엔.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허름한 문지방 너머로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이원을 마주 했다. 이원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제 습관처럼 밴 대사를 입에 담았다.

    “안녕하십니까, 전 변호사인 정이원이라고 합니다.”

    변호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꺼림칙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명함을 꺼내 건네준 이원이 덧붙였다.

    “시베르니크 씨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는 그에게 이원은 살며시 긴장하며 대답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혹시… 대략 30년 쯤 전에, 이 집에서 하숙을 했던 한국인 여성을 알고 계십니까? 이름은 정수연, 아니 수연 정이라고 합니다만.”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노인이 몇 초의 공백 뒤에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이원의 심장은 거세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후우.

    이원은 밤이 늦어서야 비로소 터덜터덜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간신히 찾은 단서였는데.

    노인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국에서 온 참하고 훌륭한 숙녀. 어느 날 불쑥 그곳을 떠났다는 얘기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기란 어려웠다. 

    눈에 띄게 실망한 이원에게 그는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당시 이원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마을 처녀에 대해 알아봐주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그녀도 마을을 떠난 지 오래 되어 종적을 찾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는 꼭 알아내겠다고 다짐을 하며 이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여기까지인가.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노인의 집을 알아내는 것도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고 겨우 단서를 찾고 나면 행방이 묘연하기 일쑤였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노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또 원점이군.

    이원은 허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까페는 불이 꺼져 있었다. 주인 할머니가 일찍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이원은 그녀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뒷문을 통해 들어가 먼지투성이의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어서 씻고 자자. 이원은 생각하며 삐걱거리는 계단을 최대한 숨죽여 올라갔다. 여전히 말썽을 부리는 자물쇠를 달래 문을 연 뒤 비로소 막혔던 숨을 내쉰 이원은 선뜻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바닥에 뭔가가 남겨져 있었다. 

    문틈으로 누군가 밀어놓고 간 게 분명한 편지봉투는 그다지 수상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봉투를 찢으며 곧바로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털썩 주저앉은 이원은 무심코 주머니를 뒤적이다 곧 그만 두었다. 담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했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것은 한 개비도 없었다. 이미 돌아오는 동안 한 갑의 담배를 전부 피워버린 것이다. 

    씁쓸한 한숨과 함께 얇은 봉투 안을 확인한 이원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장의 표가 전부였다. 볼쇼이 극장의 발레공연표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원은 찌푸린 얼굴로 봉투 안을 다시 살폈다. 아무리 봐도 티켓은 한 장이었다. 그것도 바로 다음 날 저녁 시간의 공연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뒤이어 봉투 안쪽에서 얇은 명함을 발견한 이원은 곧 상황을 납득했다.

    ― 카이사르.

    이전에 자신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명함을 확인한 이원은 내일이 그에게 선언했던 날짜의 기한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답은 거기서 주겠다는 건가. 여기까지 와서 표만 달랑 놓고 가다니 무슨 생각인 거지. 다시금 심상찮은 얼굴로 티켓을 내려다보았던 이원은 그것을 다시 봉투에 넣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공연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남자를 만나는 데 피할 이유도 없었다. 카이사르가 승낙을 하든 그렇지 않든 이쪽은 양 쪽 다 대비책을 만들어 놨다.

    서로 시간 낭비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원은 생각하며 짧게 샤워를 마치고 곧 잠자리에 들었다. 힘들었던 일과를 접어놓은 채.

    밤이 지나고 나자 다시 추운 날씨가 시작되면서 하늘은 수시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이원은 코트의 깃을 여미며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뚫고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시로 고장이 나는 전차는 이번에도 역시 두 정거장이나 먼 곳에서 멈춰버렸다. 다음 전차를 기다리며 서있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원은 이를 악물고 두 정거장을 미친 듯이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간신히 도착했을 때 이원은 숨이 턱까지 차 새빨개진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입구에서 코트를 맡긴 이원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추위로 굳어져있던 뇌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오래 된 역사만큼이나 웅장한 극장 안은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공연을 위해 격식을 차린 옷차림으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과연 그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한 차례 짧게 홀을 훑어본 것만으로 이원은 단번에 그 남자를 찾아냈다. 한 쪽에 놓인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팸플릿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뜻밖에도 너무나 눈에 띄었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 전부인 남자의 움직임은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한숨이 흘러나올 만큼 근사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재단이 완벽한 짙은 갈색의 슈트는 심플하면서도 고상한 선택이었으나 단정한 넥타이를 물고 있는 반전과도 같은 다이아몬드의 넥타이핀은 그것만으로도 남자의 전부를 말해주는 듯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정신없이 그를 훔쳐보는 모습을 이원은 너무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마피아라는 걸 알면 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변할까. 내심 궁금해졌지만 답을 알 수는 없었다. 이원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똑바로 그의 앞에 멈춰 서자 느리게 책장을 넘기던 남자의 손도 멈췄다. 이원은 실내등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의 머리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이사르 씨.”

    그윽한 음성에 맞춰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끝없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의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짙은 은회색의 눈동자가 이원을 마주 보았다. 남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팸플릿을 덮고 짧게 웃었을 뿐이었다.

    “왔군.”

    뜻밖의 미소에 이원은 순간 방심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예상 밖으로 너무나 순수해서, 그가 거대 마피아 조직의 간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남자가 저렇게 천진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이원은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마법은 금방 깨어졌다. 카이사르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일순 이원의 위로 드리워지고, 그것은 이원으로 하여금 급격하게 현실을 자각시켰다. 이원은 이성이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답변을 해주시죠.”

    때마침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이원이 다시 카이사르를 돌아보자 그는 공연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곧 시작하겠어, 어서 들어가지.”

    “뭐라고요?”

    예상치 못했던 말에 이원은 그만 새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한 손에는 말아 쥔 팸플릿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원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팔을 붙잡힌 이원이 멈칫했지만 카이사르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원은 얼떨결에 그에게 끌려가면서 서둘러 내뱉었다.

    “잠깐, 전 대답을 들으러 왔을 뿐입니다. 공연을 볼 생각은―”

    “공연을 보면 대답을 해주지.”

    카이사르의 말에 이원은 멈칫했다. 당황해하며 그를 올려다보는 이원에게 카이사르는 무심히 물었다.

    “대답은 오늘까지였어.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정도의 인내심도 없나?”

    말투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원은 문득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조해하며 히스테리를 부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원은 도전적으로 그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은 겁니다.”

    “지젤이 시간 낭비라니, 너무하는군.”

    그다지 실망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말투로 심드렁하게 말한 카이사르가 이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원은 고집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카이사르의 눈가가 희미하게 기울어졌다. 그가 진심으로 웃고 있다는 사실을 이원은 본능적으로 눈치 챘다.

    “지젤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지.”

    다시 한 번 벨소리가 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둘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러시아의 자랑인 발레단의 공연은 그야말로 혼을 빼앗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공연을 보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바람둥이 귀족에게 농락당한 시골처녀 지젤은 죽음을 택한다. 발레단의 실력은 탁월했지만 이원은 그것을 미처 즐길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과연 어떤 대답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조바심이 나 무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난 뒤 이원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남자는 공연이 끝난 뒤에 얘기를 할 셈인 거야. 자신이 초조해하며 전전긍긍해 할수록 이 남자를 기쁘게 만들 게 분명했다. 절대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걸. 이원은 작심하고 본격적으로 공연에 집중했다.

    유쾌하고 밝은 1부와는 달리 2부는 우울하고 정적이었다. 부서질 것처럼 가는 발레리나의 몸은 혼령이 되어 덧없이 공기 속을 유영한다. 배신당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남자를 살리기 위해 계속되는 지젤의 안쓰러운 몸놀림이 계속되고, 안타까움에 관객들은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느새 푹 빠져버린 이원이 시큰해져오는 콧날에 숨을 가라앉히는데, 불현듯 속삭이듯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제안에 대한 답을 하지.”

    카이사르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순간 무대에 쏠려있던 신경이 단번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의 말에 귀를 곤두세우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일부러 뜸을 들이듯 사이를 두었던 카이사르가 속삭였다.

    “내게 교섭이나 화해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이원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때마침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공연이 끝난 것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감동에 차 환호하며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이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머릿속이 회전하며 현재의 상황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결국 거절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억지로 이 남자와 나란히 앉아 공연을 봤다는 건가.

    때마침 카이사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던 이원이 그를 올려다보자 카이사르 역시 그를 내려다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

    저절로 기가 막힌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곧바로 표정이 돌변한 이원이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당신하고 태평하게 저녁을 먹을 거라고 생각해?”

    더 이상 예의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난폭한 말투로 내지르자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글쎄, 아닌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이원은 아예 무시하고 돌아서버렸다.

    개자식, 그 때 만년필을 심장에 박았어야 했는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저절로 발걸음이 난폭해졌다. 이원은 이를 악문 채 거친 발걸음으로 쏜살같이 공연장을 나가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카이사르는 묘한 미소를 지을 뿐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은밀한 곳에서 지켜보던 한 남자가 급히 몸을 숨기며 휴대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네, 즈다노프 의원님. 접니다.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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