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34)

[ZIG] 장미와 샴페인 

늦었어.

이원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바쁘게 거리를 내달렸다. 평소 전차 한 구간쯤이야 우습게 걸어 다녔지만 오늘은 고민이 됐다. 역시 전차를 타는 게 좋을까. 달리면서도 머릿속은 빠르게 돈을 계산했다. 하루하루가 빠듯한 생활이다.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급히 낡은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원은 좀 더 속력을 내어 뛰는 쪽으로 결정했다. 북구의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하고 절로 욕설이 나올 정도였다. 빠르게 스쳐가는 건물의 풍경 속에서, 문득 그는 맞은편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했다.

아차.

벌써 늦었다. 달리던 발은 가속도를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질주해버렸다. 질끈 눈을 감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 언뜻 보였다.

“이런.”

콰당, 하고 난폭하게 부딪쳐 사정없이 나가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0.1초 사이에 빠르게 스쳐간 순간, 남자가 짧은 탄성과 함께 이원의 허리를 붙잡았다. 짧은 시간 이원은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 몸을 피한 남자의 순발력은 감탄할 만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한 이원의 허리를 안아 붙잡아준 것은 좋았으나 덕분에 갑자기 배에 심한 압박을 느끼고 만 이원은 반사적으로 구토가 올라오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간신히 말을 더듬지 않고 고개를 든 이원은 뜻밖에도 자신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내심 놀랐다. 제법 장신에 속하는 이원으로서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정도의 상대는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정확히 이원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큰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시리도록 빛이 나는 백금발이었다.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플라티나 블론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원이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고 시선을 내리자 그 아래로 자신을 응시하는 은회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설원의 늑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선명한 은회색의 눈동자에 무심코 숨을 죽인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아, 괜찮습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이원이 급히 그에게서 몸을 뗐다. 선뜻 이원을 놓아준 남자가 짧게 미소를 지었다. 이성을 되찾고 마주 섰지만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훤칠한 근육질의 장신의 남자는 북구의 엷은 햇살을 받아 전신에서 빛이 나는 듯 했다. 검은 슈트 위로 짐승을 너덧 마리는 족히 잡았을 것 같은 풍성하고 긴 모피코트를 걸친 남자는 싸구려 양복을 입고 미친 듯이 거리를 질주하던 이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이런 남자가 어째서 이런 허름한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 걸까. 문득 생각했을 때, 남자의 색정적인 입술 사이로 유독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이원은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천만에.”

흐르듯이 유려한 말투로 짧게 응답한 남자가 이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이원은 무심코 불편함을 느꼈다.

“그럼 전, 이만.”

대강 인사를 마무리하고 가려는데, 불쑥 남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자, 여전히 이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남자가 말했다.

“당신, 선글라스라도 쓰고 다니는 게 어때?”

뜻밖의 말에 이원은 눈을 깜박였다. 눈雪에 반사된 햇살은 여름보다 더 자외선이 강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러시아에서는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자신도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주제에 처음 보는 상대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게다가 검은 눈동자에 비해 훨씬 취약한 은회색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저 지나가는 충고인가? 

낯선 사람에게도 서슴지 않고 잔소리를 해대기 일쑤인 러시아 사람들의 기질을 떠올리며 이원은 곧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인 이원은 곧 현실로 돌아와 방금 전의 일은 까맣게 지워버렸다. 이런, 완전히 늦어버렸어. 다시 달리기 시작한 그를,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

휴대전화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그제야 전화를 들고 입을 열었다.

“아아, 드미트리. 잠깐 사고가 있어서. …아니, 별 일은 아냐.”

어느새 사라진 이원의 자취를 쫓아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는 짧게 웃었다.

“걸어 다니는 포르노그라프를 봤어.”

“망할, 못 알아들어? 오늘부터 이 가게는 우리 것이라고 했잖아!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고함소리와 함께 마구잡이로 테이블과 의자를 내던지는 거친 남자들의 욕설에 고생에 찌든 얼굴의 중년여성은 구석에 웅크려 울먹일 뿐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눈치를 살피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남자들은 더욱 기세등등해 집기들을 집어던지며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죽기 싫으면 당장 비우고 떠나라고 했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인데, 알아들을 때까지 맞고 싶어? 맞다 죽어볼래?”

급기야 여자를 향해 휘두르는 주먹에 구경하던 이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남자의 팔이 허공에서 가로막히고, 뜻밖의 제지에 놀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일순 차가운 공기를 내리지르고 찔러온 역광에 검은 그림자가 내비쳤다. 무심코 눈을 찌푸리고 만 남자는 빠르게 눈을 깜박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를 가로막은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꽤 키가 큰 남자는 다소 말랐지만 슈트가 잘 어울리는 근사한 체격이었다. 마디가 긴 뼈대에 우아하게 달라붙은 근육은 가는 얼굴선에 걸맞게 넘치지도 빈약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정도다. 슬라브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혼혈이나 이국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한 얼핏 푸른빛마저 감도는 새까만 머리칼의 그는 또한 유독 진한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평균보다 좀 더 큰 키의 그가 빙하를 연상시키는 푸르고도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보다 작은 남자를 내려다보자 시선을 마주한 남자는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나마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남자라는 게 분명한 외모인데도 이렇게 매혹적일 수 있는 건가? ‘외설스럽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는 단지 서늘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허리를 한 번에 녹여버렸다. 잠깐의 본능적인 충격은 그에게서 투지를 꺾어버렸다. 멍하니 넋을 잃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그러나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행패는 불법입니다. 합법적으로 절차를 밟아 다시 오십시오.”

“뭐, 뭐야?”

“이바노프, 뭘하고 있는 거야! 당장 해치워버려!”

팔을 잡힌 남자와 마찬가지로 눈만 깜박이고 있던 사내들이 뒤늦게 아우성을 치며 동료를 타박했다. 남자에게 정신이 나갔었던 자신에게 창피함을 느꼈는지 이바노프는 황급히 잡힌 팔 대신 다른 쪽 주먹을 휘둘렀으나 남자를 때리기는커녕 스윙조차 제대로 날리지 못했다. 그대로 붙잡은 팔을 뒤로 꺾어버린 남자가 이바노프의 등뒤에서 팔을 비틀어 버렸다.

“아, 아아, 아악!”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이바노프의 모습에 당황한 사내들이 뒤늦게 고함을 지르며 한꺼번에 덤벼든다. 남자는 이바노프를 밀쳐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몸을 날려 달려오는 사내들을 향해 주저 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어댔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어쩔 줄을 몰라하며 숨을 죽였지만 네 명을 상대로 한 남자의 싸움은 어이없게도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버렸다. 마지막으로 날아든 남자의 다리를 선뜻 피한 그는 곧바로 발을 뻗어 크게 비어버린 다리 사이를 세게 걷어찼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만신창이가 된 남자들은 애처로울 정도로 울먹이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마지막 한 녀석의 그림자까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남자는 슈트를 가볍게 털고 고개를 돌렸다. 그 때까지 구석에 숨어 어쩔 줄 몰라하던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되어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익숙한 손짓으로 슈트를 다듬었던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다정한 미소를 떠올렸다.

“괜찮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한 블록을 뛰었거든요.”

뒤늦게 그녀는 남자의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을 마주 잡는 것을 주저하며 여자는 불신과 두려움이 찬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요?”

“대강 눈치는 챘지만 자세한 건 상담을 들어봐야 알겠죠.”

싱긋 웃는 얼굴에 그녀는 마주 웃기는커녕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었다는 말이에요? 주먹질까지 해대면서,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나 황망한 여자의 물음에도 여전히 그는 느긋하기만 했다.

“뺨을 맞으면 팔을 부러뜨려야 한다는 신조라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폭력에는 폭력이죠.”

그녀는 불신에 찬 얼굴로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에는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남자가 내민 손을 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날 도와준 거죠?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여전히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는 그녀에게 남자는 슈트의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금세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온몸을 경직시키는 여자에게 내민 것은 얇은 명함이었다. 예상이 빗나간 듯 당황해 눈을 깜박이는 그녀를 향해 남자는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어제 사무실로 전화를 하셨죠? 제가 바로 정이원입니다.”

남자가 건네준 명함을 본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변호사죠.”

지어진지 100년이 되어간다는 허름한 5층짜리 건물은 엘리베이터는커녕 겨울마다 불어오는 매서운 눈보라에 버티는 것이 용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창문은 노쇠한 몸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는 것 같지만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어떻게든 매년 버텨주고 있다.

“좀 더 버텨 봐, 앞으로 100살은 더 살아야지.”

평생을 걸쳐 모은 돈으로 장만한 낡은 건물에 혈육만큼 강한 애정을 가진 하숙집의 주인 할머니는 언제나 마치 아이를 대하듯 건물을 타이르곤 했다. 선뜻 불어온 강한 바람에 창문이 부르르 떨리자 언제나처럼 창틀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노쇠한 여인의 낯익은 뒷모습에 이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보다 오래 산 건물이에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할머니의 노안에 이원의 미소짓는 얼굴이 들어왔다.

“자네보다도 더 오래 살 건물이야.”

언제나처럼 가볍게 핀잔을 준 그녀에게 이원은 선뜻 다가가 백발에 키스를 했다.

“좀 늦었습니다. 오늘도 별 일 없으셨죠?”

“다를 게 있겠나. 마침 저녁이 다 되었네, 씻고 내려오게.”

이원은 별다른 말없이 수긍한 뒤 곧장 주방과 이어진 뒷문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독 다리가 긴 이원이라고 해도 100년이 넘은 건물의 가파른 계단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할머니에게는 더욱 그렇다. 

덕분에 도로를 향해 나있는 1층은 오래 된 카페의 뒤로 할머니의 쪽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원의 방은 그 위층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가벼운 덕에 높은 계단도 손쉽게 날아가듯 뛰어올라가는 이원이지만 이 낡고 오래 된 계단만큼은 매번 긴장과 스릴감을 느끼게 된다. 

그나마 가장 위층을 쓰고 있던 이원이 2층으로 옮기게 된 것은 지난겨울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진 일이 계기였다. 그 후 이원은 따로 나있는 건물의 입구가 아닌 까페를 통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곤 했다. 할머니의 상태를 살필 겸, 자신이 귀가했다는 보고를 할 겸 해서 방을 옮긴 이후 습관이 되어버린 일과의 하나지만 다행히 그 날 이후로 할머니의 건강이 특별히 나빠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겸 거주지로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이원은 곧바로 슈트를 벗고 낡은 스웨터와 오래 된 진즈로 갈아입었다. 단 두 벌인 슈트는 다음을 위해 잘 정돈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원은 익숙하고도 빠른 손놀림으로 슈트를 정리해 클로짓에 걸어둔 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도와드릴 일은 없어요?”

이원의 물음에 할머니는 시선을 흘긋 옮기며 대답했다.

“테이블에 식기를 놓아두렴. 먼저 닦는 걸 잊지 말고.”

매번 하는 잔소리지만 이원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고 그녀가 내민 젖은 수건을 들어 테이블을 닦았다. 이런 일은 이제 일상을 지나 습관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부터 줄곧 이곳에서 하숙을 해왔던 이원은 법대를 다닐 때도 언제건 틈을 내어 까페의 일을 도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차갑기 그지없던 할머니의 태도는 얼마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자 혈육처럼 따스하게 돌변해 식사는 물론이고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자잘한 잔소리 안에 숨은 그녀의 속 깊은 정을 잘 알았기에, 이원은 그녀에게 불만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 피를 나눈 혈육처럼 하루 두 번, 혹은 세 번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원과 마찬가지로 홀홀단신인 주인 할머니에게 이원은 손자나 마찬가지였다. 이원 역시 그녀를 자신의 친할머니처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말해주듯 주름지고 거친 할머니의 손이 커다란 냄비를 들어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을 본 이원이 물었다.

“저녁은 쉬삑입니까? 맛있겠군요.”

할머니의 장기인 쉬삑은 돼지비계에 마늘을 넣고 양념을 한 러시아 전통요리로, 주 1회는 꼭 나오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불평을 해본 적이 없는 이원은 언제나 그녀의 어떤 요리라도 맛있게 먹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할머니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천성의 다정함 때문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별다른 말없이 빵이 가득 든 바스켓을 내려놓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원은 그녀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말없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하느님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렇듯 그녀도 정교회 신자다. 이원은 무신론자에 가까웠지만 식사 전 기도 정도로 굳이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뒤 직접 스튜를 떠서 이원의 앞에 놓아준 할머니가 물었다.

“오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큰일은 없었고?”

이원이 맡는 사건들은 대개가 그렇게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일이다. 이겨도 큰 대가를 기대할 수 없고 지면 씁쓸함이 남는. 이번도 역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네, 간단히 손봐줬습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가게는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됐구먼.”

“이번에도 수임료는 그다지 벌 수 없겠지만요.”

이원의 말에 할머니는 정색을 하고 눈을 흘겼다.

“당연한 거 아닌가, 법을 다루는 사람이 돈을 기대하면 안 되지.”

다른 사람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처음 법대생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말은 항상 같았다. 굳이 덧붙이는 말을 듣지 않아도 이원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말없이 미소를 지은 뒤 빈 접시에 다시 음식을 담았다. 마른 빵을 찢는 그의 앞에 감자샐러드를 밀어준 할머니가 물었다.

“니콜라이가 다녀갔네.”

3층에 살고 있는 남자의 얘기다. 중년이 넘은 그는 열심히 일을 해 장만한 공장이 최근 어이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어 이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식사가 끝나고 올라가 보겠습니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맺는 이원의 반응에 할머니는 으깬 감자 샐러드를 접시에 덜어 몇 차례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쉽지 않겠지?”

침묵을 깨고 묻는 말에 이원은 깊은 얘기로 할머니가 걱정을 하게 만드는 대신 잠자코 쉬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80이 넘은 여자의 눈치란 동물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일 즈다노프 씨의 사무실로 찾아가 직접 말을 나눠볼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을 맺자 할머니는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감자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원이 빨랐다.

“찻물을 미리 올려놓을까 하는데, 아니면 보드카를 꺼낼까요?”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그의 물음에 할머니는 묵묵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카가 좋겠구먼.”

“알겠습니다.”

이원은 다 먹은 식기를 직접 주방에 갖다놓고 찬장에서 반쯤 남은 보드카를 꺼냈다.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인 할머니에게 보드카를 따라준 이원은 그녀의 백발에 키스를 하고 덧붙였다.

“그럼 니콜라이 씨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치우는 걸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괜찮네, 너무 무리하지 말어.”

“네.”

일상적인 인사를 덧붙인 후 이원은 주방의 뒤쪽으로 나있는 비상계단의 문을 열었다.

“이보게.”

다시금 부르는 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담배 피우지 말게.”

이원이 순간적으로 멈칫하자 그녀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원은 어색하게 웃더니 주머니의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놓고 대신 스토브 위에 얹혀있는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물었다. 

이 사이로 성냥을 질겅거리며 돌아서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할머니는 쓴웃음을 짓더니 곧 바쁘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헉헉, 허억, 헉.

거친 숨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골목 사이를 질주하는 난잡한 발소리가 앞을 다투어 귓가를 두드렸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붉은 벽돌의 낡은 건물들은 거미줄처럼 곳곳을 잇는 골목길을 촘촘히 파고들어 음산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탈출구는 없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능은 끝없이 그에게 도주를 강요했다. 남자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거리며 꺾어지는 무릎을 안간힘을 써 일으켜 세웠다. 순간 있을 수 없는 감각이 뇌수를 가르고 들어왔다. 어쩌면 그것은 위기를 느낀 본능의 단말마의 비명.

타앙―

어두운 골목길에 울려 퍼진 굉음은 낡은 맨션 사이 곳곳을 빠르게 치고 나가 좁은 골목길사이를 달아나듯 맹렬히 뛰쳐나간다. 성급하게 숨을 헐떡이며 질주해간 첫 발發 음을 뒤쫓아 연이어 몇 번의 굉음이 달려간다. 

미처 길의 끝에 닿지 못한 마지막 희미한 떨림이 힘을 잃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련한 에코 너머로 불길한 기운의 검은 승용차가 주차해 있었다. 

차의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익숙한 가죽 냄새를 맡으며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천천히 시가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절반 정도 타들어간 시가의 끝이 희미하게 달아오른다. 두텁게 층을 진 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려는 찰나 남자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떨이에 가볍게 시가의 몸을 털었다. 

안도하듯 재를 늘어뜨린 시가가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리를 잡았을 때, 누군가 짙게 선탠이 된 차창을 두 차례 간결히 두드렸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으레 있는 일인 듯 잠깐의 사이를 두었다가 스스로 차의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해결했습니다.”

짧게 보고를 마친 후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는 유리히의 모습을 남자는 가는 눈으로 응시할 뿐이다. 진한 은회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뜩한 광채를 냈다. 유리히는 계속해서 보고를 이었다.

“나머지는 이반이 처리할 겁니다.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유리히에게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에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게 된 것이 짜증스럽기라도 한 걸까. 유리히는 말을 멈추고 잔뜩 긴장한 채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카이사르 알렉산드로비치 세르게예프.

그는 러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마피아 중 하나인 세르게예프 집안의 차기 보스다. 선대의 유일한 아들로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자리를 계승한 그는 예전부터 지독히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정식 이름은 카이사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음인 차르로 불리는 그는 그야말로 암흑가의 황제였다. 그의 아버지인 사샤는 아직 은퇴하지 않았지만 이미 실권은 그에게 넘어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의 변하지 않는 표정과 말투로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남자. 그는 최측근이라고 자부하는 유리히조차도 생각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역시 즐기는 시가를 깊이 빨아들이고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는 카이사르의 옆얼굴을 보며 유리히는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바심이 났으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수가 없었다. 

과연 제대로 한 게 맞을까? 배신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즉결 처분이 당연하다. 혹시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금지 명령을 내렸겠지.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초조해하는 유리히의 속마음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저 시가의 연기만을 마시던 그가 입을 연 것은 남은 시가를 모두 다 피우고 난 다음이었다.

“말이 많으면 일찍 죽는 법이지.”

마치 유리히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것 같은 한 마디였으나 그것은 밀고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에 동의하듯 짧게 머리를 숙이자 다 피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끈 남자가 가볍게 차창을 두드렸다. 

예민하게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운전사가 곧 차를 출발시키고, 곧이어 운전석과 좌석 사이로 두터운 칸막이가 가로막혔다. 거의 완벽한 밀실이 되어버린 차안에서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즈다노프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면서 지독히도 낮은 음성에 유리히는 즉시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순조롭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저항은 있습니다만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생각보다는 길군.”

카이사르의 짧은 한 마디에 유리히는 이내 긴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생겨 예정보다는 길어지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기대하셨던 대로 결과가 나올 겁니다. 니콜라이가 그 녀석을 믿고 버티는 모양이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그 녀석이라니.”

어느새 변명처럼 이어지는 말을 가르고 서늘한 음성이 한 단어를 짚어낸다. 유리히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변호사입니다.”

문득 스치는 가로등의 불빛에 카이사르의 플라티나 블론드가 현란하게 반짝였다. 동시에 그의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며 일그러진 미간을 뚜렷이 드러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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