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사, 살려…. 살려…주….”
이겸은 재빨리 서도현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막아 두려는 심산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해.”
“…아. 응.”
그의 대답에 머쓱해져 손을 풀었다.
“저기요. 일단 진정하시고….”
“으아악!!”
산하가 다독이려 했지만 예비 각성자는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곧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어…어떡하지?”
산하가 곤란을 표했다. 서도현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결국 나설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형, 제가 할게요.”
이겸이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지금 그쪽….”
“으아아아악!”
“아니, 지금 당신은….”
“오, 오지 마! 오지 마!”
“…….”
음, 글렀군.
이겸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겁에 질려 제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쇠귀에 경 읽는 헛짓거리는 하기 싫고, 귀찮기도 했다.
어차피 곧 운반 트럭이 올 테고, 그 사람은 협회 쪽에서 일하니까 거기에 맡기면 되겠지.
때마침 트럭이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운전기사는 내리자마자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래터를 노려보며 인사했다.
이겸은 살짝 억울했다. 자신들은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히 크리처 사체를 넘겨줄 뿐인데.
물론 얼마 전 협회의 횡포에 직원에게 조금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 이후로 문제 일으키지도 않고 사체 손상도 최대한 적게 나도록 조심했다.
“안녕하세요.”
“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시죠? 저분은 누구….”
“예비 각성자인 것 같아요. 우연히 발견했는데 많이 놀란 건지 지금 대화가 잘 안 통하네요.”
이겸의 설명에 직원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너희가 뭘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놀라? 딱 그 눈빛이었다.
원래 예비 각성자는 때아닌 현실을 마주치면 기겁하곤 한다. 남궁산하만 해도 처음에 크리처를 보고 기절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간 래터가 저지른 행적으로 미루어 직원은 예비 각성자가 놀란 이유도 래터라고 일차원적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이겸으로선 정말이지 억울했다. 하지만 그 오해를 풀려 해 봤자 들은 체도 안 할 것 같아서 얼른 예비 각성자를 맡기고 자리를 뜨자 싶었다.
“아무튼, 네. 지금 대화가 안 통하는 상태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저흰 할 일을 마쳤으니 이만 가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크리처 사체 체크 후 각성 예비자를 챙겼다.
남자의 신변도 협회 직원에게 맡겼고, 크리처도 잡아 제출했고, 남궁산하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할 일 끝냈으니 술이나 마시러 가자!”
***
“겸이는 소주? 맥주?”
“둘 다 상관없어요.”
“응응. 알았어.”
식당에 들어서 안주와 술을 주문하고, 잠시 후 술이 먼저 나왔다.
남궁산하는 현란한 손길로 소주와 맥주의 비율을 맞춰 술을 섞었다.
“자, 마셔 봐! 도현이 너도.”
이겸은 그가 준 술을 홀짝이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술계라 손재주가 좋나? 지금까지 마셔 본 소맥 중에 제일 맛있었다. 술은 써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타 주는 술이라면 술술 들어갈 것도 같았다.
“형, 술 잘 타시네요.”
“그래? 또 만들어 줄게!”
순수하게 칭찬하자 으쓱해진 산하가 신이 나 여러 기술들을 뽐냈다.
따지 않은 소주병으로 회오리를 만들거나 숟가락으로 유리잔 밑바닥을 쿵 친다든가, 맥주잔 위에 소주잔을 줄 세워 놓고 술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빠트린다든가.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군대에선 어떻게 버틴 거람.
직원이 주고 간 안주를 집어 먹으며 그가 타 주는 술을 마시자 슬슬 정신이 몽롱해지고 나른한 게 기분이 좋았다.
“겸아, 한 잔 더 말아 줄까?”
“아, 저 그만 마실게요.”
“그래!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먹어!”
남궁산하와 서도현도 자신과 같은 페이스로 마셨는데 그들은 주량이 더 센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아주 멀쩡해 보였다.
“마시고 싶으면 더 마셔.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아니….”
그리 거절하면서도 입이 심심했는지 슬그머니 손이 술 쪽으로 움직였다.
인사불성이 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술에도 별로 흥미 없는데 오늘따라 목 넘김이 좋았다.
보다 못한 남궁산하가 한 잔 더 타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냐, 내가 고맙지. 다들 나 때문에 힘써 줘서 고마워. 늦은 밤까지 크리처 잡느라 고생이 많지?”
“아뇨…. 괜찮다니까.”
“도아랑 재우 빼놓고 와서 미안하네.”
산하가 볼을 긁적이며 지금쯤 각자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걔네는 아직 미성년자니까요.”
“그건 그렇지. 나중에 내가 따로 밥이라도 사 줘야겠네! 아, 맞다. 겸아.”
“네.”
이겸이 몽롱하게 답했다.
“예전에 내가 너 무기 만들어 주기로 했잖아.”
“아….”
휴가 나왔을 때 그런 말을 하기도 했지.
“그래서 그런데 어떤 게 좋아? 보니까 단검 자주 쓰던데 그걸로 만들어 줄까?”
“네…. 아무거나 만들어 주세여.”
“그립감은?”
“아무거나….”
꼬치꼬치 캐묻는 산하에게 대꾸하는 이겸의 말투가 점차 느릿느릿 어눌해졌다.
“형.”
도현이 나지막이 산하를 부르며 눈치를 줬다.
“겸아 그럼 날은 단면으로…. 아. 응, 다음에 물어야겠다.”
그제야 산하도 이겸이 취했단 걸 알아채고 질문을 멈췄다.
…훌쩍.
그러다 불쑥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겸아?”
안절부절못하는 산하에 비해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이겸에게 티슈를 건넸다.
늘 그랬듯 눈물 자국이 그대로 찍혀 나왔다.
“이, 이겸아. 괜찮아? 안주. 안주 더 시켜 줄까? 뭐 먹을래?”
“…괜차나요.”
“그, 그래. 술 줄까? 맛있게 해 줄게.”
“…아니요.”
산하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조용히 티슈갑을 이겸에게 밀어 주었다. 서러운 일이 있을 땐 그냥 가만히 울게 놔두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몇 분 동안 훌쩍이는 소리만 나더니 울음을 그친 이겸이 젖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쪽팔려.”
“응.”
도현이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자연스레 시간을 돌렸다.
…훌쩍.
산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겸아?”
“그냥 콧물이요. 저 휴지 좀요.”
“응. 요즘 날이 풀린 것 같은데 밤에는 아직 쌀쌀하네.”
산하도 몸을 으슬으슬 떨며 의심 없이 중얼거렸다.
둘만이 간직하는 비밀이었다.
***
“…오빠?”
늦은 새벽,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음들에 잠에서 깬 도아가 방문을 열었다.
“안 잤어?”
“자다 깼어. 근데 옆엔 뭐야?”
“윤이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겸이 오빠가 왜 여기 있어?”
“취해서 데리고 왔어.”
대리를 불러 집에 도착한 서도현은 소파 위로 이겸을 조심스레 눕혔다. 그 후로도 몇 잔 더 마시고 이겸은 잔뜩 취해 축 늘어졌다.
자취방 비밀번호를 물어봤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새근새근 잠들어 버린 터라 그냥 자신의 집으로 방향을 틀어 데려왔다.
“나 겸이 오빠 취한 거 처음 봐.”
도아가 이겸의 얼굴 위로 손을 휘저으며 소곤거렸다.
“오빠, 자요?”
“…….”
“진짜 자나 보네. 얼마나 마셨길래?”
도현이 겉옷을 벗으며 답했다.
“산하 형이랑 마셨어.”
“헥? 그럼 엄청 마셨겠네?”
도아는 술을 마신 적은 없지만 남궁산하가 술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와 대작했다니 진창 취한 게 이해됐다.
그때 곤히 잠들어 있던 이겸이 눈을 번쩍 떴다.
“물.”
“어? 일어났어요? 물? 물 줄까요? 꿀물 타 줄까요?”
“물.”
“아. 그냥 물?”
도현이 뜯지 않은 생수병을 이겸의 볼에 갖다 댔다.
“여기.”
이겸은 부스스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생수병을 건네받았다. 취한 손으로 뚜껑을 열려 애썼지만 자꾸만 삐끗해서 열리지 않으니 또 왈칵 서러움이 차올랐다.
“…안 열려.”
이내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며 훌쩍였다.
“헉, 우는 거예요? 제가! 제가 열어 줄게요!”
도아가 얼른 뚜껑을 열어 줬다.
이겸은 꿀꺽꿀꺽 물을 마신 후,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서도현.”
“응.”
그러자 또 시간이 되돌아갔다.
이겸이 열리지 않는 생수병을 서도현에게 내밀자, 그는 마저 뚜껑을 따서 건넸다.
“자.”
다시금 물을 머금고는 물병을 탁자에 턱 하니 올려 두고 소파에 다시 몸을 눕혔다.
“…이제 잘래.”
“그래요. 얼른 자요. 오빠, 집에 남는 이불 있어?”
이겸의 얌전한 술주정을 구경하던 도아가 서도현에게 물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넌 들어가서 자.”
“으음, 알았어.”
도아는 내일 아침 일찍 등교도 해야 했기 때문에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보다야 같은 남자인 도현이 이겸을 더 잘 챙겨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도아가 들어간 후에 도현은 곤히 잠든 이겸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 그를 안아 들고 일어서 제 방 침대에 눕혔다. 소파보다는 여기가 더 편하겠지.
이불까지 손수 덮어 주고, 이내 또 한참을 구경했다.
많이 운 것치곤 얼굴은 멀쩡했다. 시간을 돌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서도현은 이겸의 콧잔등을 툭 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