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처음부터 그렇게 주면 좀 좋아?
이겸은 교수님께 받은 프린트물을 책상에 탁탁 쳐 끝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투덜거렸다.
기존 래터 지역에서 잡는 크리처보다 수수료를 더 많이 떼이긴 하지만 그쯤이야 이해한다.
어제로 2구 더 잡아 총 5구 채웠다. 앞으로 5구 더.
래터에 분배되는 수수료를 받기 시작한 건 3구를 잡고 나서부터지만 그래도 수입이 짭짤하긴 했다.
“기분 좋아 보인다?”
“…내가?”
“응. 웃고 있던데.”
“그랬나.”
강태하의 질문에 이겸은 순순히 긍정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리를 끝낸 프린트물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오늘은 내가 저녁 사 줄게.”
“저번처럼 또 바람맞히는 건 아니고?”
“…그때는 급한 약속이라 그랬어. 미안.”
“퍽이나 급했나 보네.”
강태하가 드물게 비아냥거렸다. 제 딴에는 그날의 일이 몹시도 서운하고 화가 났던 듯싶었다. 그럴 만도.
이겸은 어찌 됐든 자신이 잘못한 게 맞으니 사과를 건네며 오늘은 정말 시간이 있다며 재차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분노한 강태하’를 떠올리며 서도현과 크리처 가죽에 낙서를 할 때처럼 강태하의 얼굴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했다.
“또 웃네. 뭐가 그리 재밌을까, 겸이는.”
“아, 미안. 웃겼던 일이 생각나서.”
“…혹시 그 개새끼분?”
상스러운 단어인 ‘개새끼’와 높여서 이르는 호칭인 ‘분’을 합친 것이 별것도 아닌데 웃겼다.
이겸은 웃음을 삼킨 채 그 말을 따라 했다.
“어. 그 개새끼분.”
“…하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째 그것이 강태하의 심기를 긁은 듯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을 때 눈치 없이 장난친 업보였다. 이겸은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거듭 사과를 했다.
“진짜 미안. 내가 심했다.”
“…아냐. 내가 요즘 예민해서 그래. 나야말로 미안.”
“무슨 일 있었어?”
강태하는 웬만해선 힘든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큰일이 있었다는 걸 텐데…. 이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좀.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언제? 무슨 일인데? 저번에 연락 두절됐을 때 그런 거야?”
꼬치꼬치 캐묻자 강태하는 힘없이 웃었다.
“네가 이렇게 묻는 건 처음인 것 같네.”
“그야 넌 내색하지 않잖아. 매번 어디 갔다 온 건지 알려 주지도 않고.”
“그렇네. 나중에 때가 되면 다 말해 줄게.”
그 ‘때’라는 건 언제 오는 건데? 이겸은 차마 묻지 못했다. 자신도 그에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까.
“육개장?”
강태하의 안내로 도착한 식당은 어느 육개장 가게였다. 서도현과 갔던 곳과는 다른 식당.
“응. 너 저번에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아, 그거….”
“혹시 먹었어? 그럼 다른 곳 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말고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니까.”
“그럼 여기.”
강태하는 활짝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친 후, 수저를 세팅하던 이겸이 불시에 말했다.
“나 요즘 복싱 배우러 다녀.”
“복싱?”
“응. 다닌다고 해 봤자 이틀 전에 첫 수업 들은 게 전부지만.”
인터넷으로 산 글러브가 도착하고, 체육관에 가서 배운 첫 수업은 기본기 위주였다. 아주 기초라 힘든 것도 없었고, 어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관장님이 복싱에 재능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그야 그럴 것이다. 헌터는 일반인에 비해 체력이나 신체 능력이 월등히 좋았다.
“갑자기 왜?”
“…가끔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잖아. 기분 전환 되고.”
“그건 그렇지만. 복싱이라니 의외네.”
“그 정도야?”
강태하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래터는 다들 놀라 자빠지지 않을까. 이겸은 복싱을 배우러 다닌다는 사실을 더욱 철저히 숨기기로 거듭 다짐했다.
“차라리 나랑 같이 운동하지. 내가 알려 줄 수 있는데.”
“싫어. 너랑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하잖아.”
오후 복싱 수업도 겨우 나가는 건데, 매일 이른 새벽 운동을 가는 강태하를 따라나서는 건 더욱 싫었다.
그때는 잘 시간이라고.
저와는 다른 시간대를 사는 강태하에게 이겸이 작게 꿍얼거렸다.
“새벽 운동하면 개운하고 좋아.”
“…….”
“싫으니까 대답 안 하네.”
“이 집 김치 맛있네.”
“겸아, 나랑 며칠만 해 보자니까?”
이겸은 김치를 우물거리며 고민했다. 확실히 주 2-3회 나가는 체육관보다 새벽이든 언제든 매일같이 운동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수도 있다.
복싱하는 목적은 실전 전투에서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고, 강태하가 새벽마다 무슨 운동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스멀스멀 같이 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해 보고 너랑 안 맞다 싶으면 관두면 되지.”
관두면 되지, 안 하면 되지, 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무엇이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겸도 이내 ‘그래, 며칠 해 보고 적성에 안 맞으면 그만두자.’라는 심정으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 보지, 뭐. 언제부터 할 건데?”
“내일부터.”
“내일?”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는 일에 극심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이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말 나온 김에 시작해야지. 그렇게 계속 늦장 부리면 될 것도 안 돼.”
“…그건 맞지. 근데 내일은 안 돼. 내일 모레부터 하자.”
“왜?”
“약속. 아마 새벽 늦게야 집에 들어갈 것 같아서.”
협회에서 CA 지역을 보내온 참이었다. 아마 크리처를 사냥하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 것 같은데 새벽에 일어나는 건 무리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강태하는 무슨 약속이냐 물어보지 않고 얌전히 수긍했다. 아마 서도현과 만나는 걸 은연중에 짐작했겠지.
이겸 또한 그가 무슨 약속이냐 물었다면 대답하기 곤란했기에 다행이라 여기며 말을 삼갔다.
곧 주문했던 육개장이 나왔다. 한 그릇 뚝딱 비우긴 했는데 전에 서도현과 갔던 곳이 더 맛있었다.
***
“저희가 하면 되는데…. 들어가서 주무셔도 돼요.”
“아니야! 나 때문에 너희가 고생하는데 그럴 순 없지. 뭐라도 도울게!”
늦은 밤, 이겸과 도현, 산하가 CA 지역에 도착했다. 도아와 재우는 다음 날 등교를 위해 아마 각자의 집에서 곤히 잠을 청하고 있을 테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 줘!”
과하게 의욕적인 남궁산하와 함께 곧 스폰될 크리처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눴다.
서도현이 버렸다는 크리처 도감들은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는 노정규에게 부탁해 얻은 뒤, 정독한 지 오래됐다.
익숙함이란 게 참 무섭다. 이전에는 크리처가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지금은 블러드 헌터가 무서우면 무서웠지 크리처는 아무런 감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익숙함에 해이해진 대가를 톡톡히 치러 봤던 이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크리처가 나타나면 해야 할 일을 차분히 되새겼다.
이번 나타날 크리처는 ‘상’ 등급.
협회에서는 자신들이 처리하기 까다로운 등급들만 래터에게 맡기고 있었다.
‘망할.’
‘하’ 등급이면 좀 좋아. 이겸은 굳은 몸을 스트레칭했다.
“이거 처치하고 우리 수…술이나 마시러 갈래?”
“…네?”
갑자기 웬 술?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기도 하고….”
“형 때문 아니라니까요.”
“그, 그래도. 그리고 우리 맨날 식사만 하러 다녔지 술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잖아?”
그의 말대로 서도현과 이겸 단둘이서 마신 적은 있어도 다 같이 마시러 간 적은 없었다.
그야 그럴 게 도아와 재우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애들을 데리고 술집에 드나들 순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게! 여기 근처에 맛있는 곳 알아.”
이겸은 자연스레 서도현을 쳐다봤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상관없어.”
술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이라면 괜찮고, 강태하와의 운동도 내일 모레부터니….
“그럼 저도 괜찮아요.”
“그래? 알았어! 얼른 사냥 끝내고 마시러 가자!”
남궁산하가 눈을 반짝이며 활기차게 답했다.
그간 군대에서 술을 못 마셨던 건가? 그러고 보면 지난번 휴가 나왔을 때도 마신 적 없긴 했다. 그보다 남궁산하는 술을 좋아하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와중 그들의 앞에 크리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겸은 천천히 자세를 잡고 그것을 노려봤다.
“우와…. 도현이는 알고 있었지만 겸이 너도….”
“아니에요. 이거 다 서도현 능력 덕분이에요.”
이겸은 처치한 크리처를 뒤로하고 단검을 집어넣었다. 지금 자신이 크리처를 잡을 수 있는 건 전부 서도현이 있어서다.
‘나 혼자서는 처치 못 했어.’
그리고 이제는, 그 힘을 길러야 했다. 언제까지고 서도현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다.
배상우.
서도현도 할 수 없는 게 있고, 살릴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때도 그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때는 내가…. 내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실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난 아무것도 못 했어!”
산하의 칭찬에 힘없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운반 트럭….”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운반 트럭이 오면 술이나 마시러 가자, 하려던 이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겸은 소리 나는 쪽을 잽싸게 쳐다봤다.
웬 낯선 이가 발라당 뒤로 주저앉은 채 땅에 손을 짚고 엉금엉금 물러서고 있었다.
“괴, 괴물…. 괴물!!!”
“…….”
이겸은 넋이 나간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 반응은 분명, 예비 각성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