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이겸과 도현은 다 잡은 크리처를 앞에 두고 운반 트럭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제 와.”
이겸은 초조하게 시간을 살피며 투덜거렸다.
현재 래터는 남궁산하를 위해 협회에서 선정해 준 CA 지역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오늘은 두 건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애매한 탓에 이겸과 도현은 이곳에서 크리처를 사냥하고 남은 인원들은 다른 곳의 크리처를 사냥하기 위해 팀을 나눴다.
자신들 쪽이 더 일찍 스폰되었기에 아직 그쪽 팀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얼른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사체 운반 트럭이 오지를 않는다.
이겸은 일부러 크리처 사체에 흠집을 찍 내며 상품 가치를 훼손했다.
하지만 굳이 자신이 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이미 서도현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아작 냈기 때문이다.
“겸아. 이것 봐.”
“뭐.”
서도현이 날카로운 칼을 빼 들고 단단한 크리처 가죽에 슥슥 낙서를 했다.
삼백안과 세모 입.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물었다.
“누굴 것 같아?”
이겸은 그 그림의 주제가 자신이란 걸 깨달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네가 그림을 똥같이 그려서 못 알아보겠는데.”
“이상하다. 닮았다 생각했는데.”
“나와 봐.”
이겸은 제 칼끝을 세운 뒤 마치 붓처럼 크리처 가죽에 흔적을 남겼다.
눈매는 날카롭게 늘어트리고, 입꼬리는 ‘v’ 모양으로, 귀에는 피어싱.
“누구게?”
“도아네.”
“서도아는 피어싱 없는데.”
“글쎄. 그럼 잘 모르겠는데.”
이겸은 다 알면서도 못 알아보는 척 잡아떼는 서도현을 위해 친히 이름도 새겨 넣어 주었다.
‘서도현’
“이제 누군지 알겠지?”
‘윤이겸’
서도현도 그에 맞추어 제가 그린 그림 밑에 글자를 새겼다.
이겸은 못 본 척하며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은 둥글고 반짝이게, 입모양은 ‘3’자를 가로로 눕혀서.
“재우네.”
서도현이 정답을 맞혔다. 그리고 다음 문제. 눈썹은 축 늘어트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마 옆에 물방울 표시를 그렸다. 우락부락한 근육들은 덤이었다.
“산하 형.”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잘 묘사해 오히려 틀리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크리처 가죽을 캔버스처럼 사용하며 그림을 그리고 놀고 있을 무렵, 기다렸던 운반 트럭이 도착했다.
“좀 늦었습….”
트럭에서 내린 협회 직원은 눈앞의 광경에 펄쩍 뛰며 달려갔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림 그리는데요.”
보면 모르냐는 식으로 이겸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왜 이 귀한 부품에 낙서를….”
가까이서 본 크리처 사체는 낙서를 한다고 뭐라 일갈할 상태가 아니었다. 격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흠집이 안 난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면 사체를 해부해 부품들을 이련에 보내기는커녕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일절 없고 폐기 처분하는 데만 비용이 잔뜩 들게 생겼다.
“이이… 이, 이건….”
직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와중에도 서도현은 낙서를 멈추지 않으며 이겸을 툭툭 불렀다.
“겸아.”
“왜?”
“닮았지.”
“…….”
“졸고 있는 윤이겸.”
화내는 윤이겸, 졸고 있는 윤이겸, 억울한 윤이겸, 쫄보 윤이겸 등 그 짧은 사이에 다양하게도 그렸다.
“하나도 안 닮았거든.”
이겸은 그가 그린 그림 위로 칼로 죽죽 덧칠을 하며 없앴다.
“그만! 그만하세요! 더 이상 흠집 내면…!”
직원이 기겁을 하며 죽은 크리처 앞에 구부려 앉은 이겸을 끌어냈다. 크리처 사체에서 보다 멀리 떨어지게.
“낙서는 쟤가 더 많이 했는데.”
왜 끌려가는 건 나인 거지. 조용히 꿍얼거리며 낙서를 한다고 빼 들었던 검날을 집어넣었다.
“그럼 운반 잘 부탁해요. 서도현, 우리도 이만 가자.”
도현이 몸을 일으키며 연락을 확인했다. 도아와 재우, 남궁산하 쪽도 사냥 성공했다는 메시지였다.
이어 자리를 뜨려는 둘을 직원이 허망한 표정으로 붙잡았다.
“…아니. 이렇게 해 놓고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전투 중에 생긴 흠집들도 아닌 것 같은데 일부러 훼손한 거잖아요. 다음에도 이러시면….”
“아니에요. 얘 잡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애초에 저희가 일부러 훼손했다는 증거 있으세요?”
당당한 이겸의 말에 직원이 보란 듯이 그들이 낙서한 자국들을 가리켰다.
“아, 저거요?”
이겸이 서도현에게 눈짓을 주자 그가 성큼성큼 움직여 자신들이 낙서한 부분을 잘라 흔적도 알아볼 수 없게 도륙 냈다.
이후 이겸이 다시 물었다.
“증거 있어요?”
“증거…. 증거가.”
말릴 새도 없이 증거가 사라진 걸 목격한 직원이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어, 없네요. 아니…. 없어졌네요.”
“그쵸. 없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협회 명령 수행하려면 한시가 급해서요.”
이겸은 ‘수고하세요.’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직원을 내버려둔 채 서도현과 함께 자리를 떴다.
***
“어! 형들 왔어요?”
그들을 발견한 재우가 밝게 인사했다. 그의 뒤에도 잔뜩 훼손된 크리처 사체가 있었다.
“응. 근데 넌 괜찮아?”
“괜찮아요. 참는 거 하난 자신 있거든요.”
크리처를 죽이는데 신경 쓰이지 않냐고 이겸이 걱정스레 물어 왔지만 재우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 인내력을 요구하는 일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걱정되었지만 그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재우는 이전에 이겸이 감마나 츄페스 등 크리처를 잡았다는 소식에도 별 반응이 없긴 했다.
“산하 오빠. 거기는 값어치가 꽤 나가는 부위예요.”
“아… 응! 당연히 알고 있지. 여기까지 하는 건 좀 심한가? 자제할까?”
“무슨 소리예요? 더 열심히 흠집 내란 뜻인데!”
“응! 알았어.”
한편에선 도아와 산하가 크리처의 가치를 열심히 떨어트리는 중이었다.
산하는 보기보다 의욕적이었다. 아마 자신의 탈영 사건 때문에 동료들이 고생해 준다 생각해 더욱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도아야! 눈알도 파괴해야 하나?”
“오, 하면 좋죠. 생각 못 한 부분이었는데 나이스.”
잔혹하기까지 했다. 이겸도 도아와 마찬가지로 차마 크리처의 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산하는 사체의 감겨 있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힘껏 흠집을 내기도 했다.
아닐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더하다니까.
이겸은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오는 운반 트럭을 확인했다.
아까의 그 사람이다.
이겸과 도현이 처리한 크리처 사체를 트럭에 싣고,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트럭에서 사람이 내리고 이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네. 또 뵙게… 될 줄이야. 래터는 제게 원한이라도 있나요?”
“원한이요?”
직원이 한탄했다.
“아까에 이어 지금도 뭡니까? 좀 예쁘게 못 주는 건가요? 사체는 다 훼손시켜 놓고…. 평소엔 훼손 없이 잘만 주셨잖아요!”
늘 훼손율 0%에 수렴했던 래터가 이런 짓을 벌이니 더욱 기가 찼다.
이겸은 눈알을 데굴 굴리며 난감한 어조로 답했다.
“그게 요즘 따라 쉽지가 않네요.”
“대체 왜요! 이대로는 폐기 처분비만 더 나가게 생겼다고요.”
포효하는 듯 성을 내면서도 울먹임에 가까운 직원의 물음에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의욕이 없어요. 콩고물이라도 떨어져야 일할 맛이 나죠.”
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래터는 언제나 사건 사고를 달고 다녔으니까 이번 사건에 대한 소문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래터가 이련에서 겪었던 일이라든지, 래터 멤버 중 한 명이 탈영을 했다든지. 그 연유로 무상으로 크리처 열 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도.
“물론 저희 형이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탈영해 협회에 일을 만든 건 맞지만, 하다 못해 개나 고양이도 간식 주면서 훈련시키는데 인간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건.”
직원이 머뭇거리는 기미를 보이자 재우가 재빨리 이겸의 의견을 거들었다.
“옳소! 지금까지 3구 잘 잡아 드렸잖아요. 남은 7구도 저희에게 맡기세요! 비록 무상 이지만 열심히, 뒤에 보시는 대로 저렇게! 사냥해 드릴게요. 공짜니까 저렇게!”
말에 가시가 숨어 있다.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만 아니면 우리도 어찌어찌 힘을 내 사체 훼손율을 줄이겠다는 의미가 한가득이다.
그 와중에도 도아와 산하는 사체를 트럭에 싣기 전, 마지막 버저비터로 열심히 훼손 중이었다. 그 장면을 서도현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고.
‘이런….’
이런 미친놈들.
직원은 끝내 말을 삼켰다.
“네? 기사님. 저희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물론 돈 얘기가 나오면 더 열심히 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는데 직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퇴사하고 싶다.’
매일 퇴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오늘은 더욱 격렬하게 퇴사하고 싶었다.
직원은 저도 모르게 치솟아 오르는 생각들을 눌러 참고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말했다.
“제가…. 상부에,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겸은 그 말을 기다렸단 듯 고개를 주억이며 직원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 그것까지 바랐던 건 아닌데. 그래도 말씀드려 보신다니 감사합니다. 저희도 선생님께서 수고하시는 걸 잘 알죠. 중간에서 늘 고생이 많으십니다.”
“…네에.”
‘그 고생을 시키는 게 너희다.’
직원이 영혼 없이 웃으며 이겸의 손을 맞붙잡았다. 그사이 재우는 준비했던 보약을 직원에게 건넸다.
“이건 홍삼인데 먹고 힘내시라는 뇌물이에요. 모쪼록 상부에 말씀 잘 부탁드려요.”
“아니지, 재우야. 뇌물이라고 하면 안 되지. 그러다 선생님 징계 받을 수도 있어.”
“아 그래요? 징계 받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주지 말아야 하나?”
재우는 건넸던 홍삼을 뒤로 뺐다.
줬다 뺏는 게 어딨냐? 소리치려던 직원은 차마 뇌물을 먼저 받겠다고 할 수 없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이겸은 재우에게서 홍삼을 챙겨 들어 직원에게 다시금 건넸다.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늘 저희 때문에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저도 감사합니다. 이건…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이겸의 지휘 아래 성공적으로 뇌물이 오갔다.
그리고 다음 날, 협회는 래터에게 선정된 CA 지역을 알려 주며 한 가지 통보를 했다.
앞으로 잡아 올 크리처 7구는 수수료를 떼어 나눠 주겠다는 아주 바람직한 소식이었다.